“요즘 한가한가?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게.”
로베일라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인다. 라실은 유노아 부인이 찻쟁반을 들고 들어올 때부터 감추지 못했던 절망적인 표정을 겨우 수습하고 찻잔을 들어올렸다. 일단 향은 괜찮다.
“불쑥이라뇨. 조만간 들리겠다고 아샤가 전하지 않던가요?”
“아시엘린은
그렇게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않을 텐데.”
“그래서 들리지
않을 때만 부릅니다. 제 소박한 행복이죠.”
“뻔뻔스럽긴. 그러니까
아시엘린에게 미움 받는 거야.”
“아직 안
받았습니다.”
또 받게 되더라도 그런 사소한 문제 때문은 아닐 겁니다. 씁쓸한 말이 맺힌 혀가 더욱 씁쓸한 갈색 액체를 조심스럽게 맛보았다. 가사
전반에 놀랄 만큼 우수한 유노아 부인에게도 못하는 게 있다는 좋은 증거가 바로 그 홍차일 수도 있었던 액체였다.
“그리고 또
뭐가 조만간이야. 2주일이나 지났다고.”
“그건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좀 많이 바빴거든요. 혹시 저 보고 싶으셨습니까?”
“내가 미친
거 같나?”
“하하,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
저도 설탕 좀 주시겠습니까?”
각설탕 두 개를 자기 찻잔에 넣은 로베일라는 말없이 다시
설탕 종지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한 움큼 집은 설탕을 상대방의 찻잔에 집어넣었다. 홍차의 바다에 융기하는 각설탕 무인도를 멍하니 내려다본 라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이지
그 성격은 하나도 안 변하셨군요, 찰레트 대령님.”
“오, 그러니까 시비를 걸러 왔군?”
“천만에요. 제가 무슨 배짱으로...농담이었습니다, 농담. 그만 고정하시죠, 원장님.”
라실은 흐르지도 않는 진땀을 닦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로베일라가 살짝 들어올렸던 손을 움켜쥐었다 펼치자, 그 손가락들을
날카로운 메스처럼 보이게 하던 회색 에우리빛이 사라졌다. 정말로 성격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2주 전에
있었던 일은 들으셨습니까?”
어조를 바꾸어 말하면서,
라실이 찻잔 위에서 손끝을 뱅글뱅글 돌린다. 옅은 보라색 에우리빛이 손끝에 맺혀, 홍차에 잠겨 녹기 시작하는 각설탕을 깔끔하게 하나씩 골라낸다. 모두
일곱 개의 각설탕을 설탕 종지에 되돌린 라실이 두 개를 집어 자기 찻잔에 넣고, 잠깐 고민한 다음 한
개를 더 집어넣고 숟갈로 휘젓는 동안 대화는 계속된다.
“총령궁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예정에 없는 비로 불을 꺼야 했던 소동 말이지. 그것도 제대로 안 꺼져서 두 번이나
비를 내렸다면서?”
“아, 그게 말이죠. 이번에 온 친구들은 제법 머리가 좋더라고요. 어찌나 정확하게 손님 계신 곳을 알고 있던지, 기상관리국 야간당직
서던 양반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했지 뭡니까?”
“그래서 그
불쌍한 양반이 다 뒤집어썼나?”
“순직했죠. 베스티아의 아니무들은 자비심이 없더라고요.”
“짐승에게
바랄 걸 바라야지. 경비국이랑 정보2과가 뒤집어졌겠군. 자네 목은 괜찮나?”
“보시다시피. 그 일에 제 탓인 구석이 어디 있어야죠. 게다가 그 머리 좋은 친구들도
손님을 만나지는 못했거든요.”
“그 친구들은
어떻게 됐나?”
“모릅니다. 지금쯤 경비국과 정보국이 열심히 쫓고 있지 않을까요?”
“자네는?”
“제가 이제
와서 평범한 아니무를 연구해서 뭐 하겠습니까? 손님 대접하는 것만으로도 바쁩니다. 그러니까...”
빈 찻잔을 내려놓은 라실이 꼰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았다. 이제야 본론이냐. 로베일라는 마뜩잖은 시선으로
옛 부하를 노려보았다.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 소식을 전하게 했어도 그 놈을 죽이지는 않았을 텐데.”
“원장님 취향에
맞는 여자를 보냈을 수도 있는데요...아, 죄송합니다. 지금 농담은 질이 좀 나빴군요.”
로베일라가 [보이지
않는 손]을 들어올렸다. 이번에야말로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라실의 목덜미를 움켜쥐었지만, 한때 어떤 메스보다도 날카롭던
[보이지 않는 손]은 퇴역군인의 감은 눈 위를 덮은 다음 조용히 사그라졌다.
“...자넨
정말 저질이야.”
“죄송합니다.”
웃음기도 장난기도 사라진 청년의 해사한 얼굴에 핏방울
같은 슬픔이 맺힌다. 하지만 로베일라가 눈을 뜨자, 그 유약한
감정은 설탕이 홍차에 녹듯 사라졌다.
“요즘은 쓸만한
사람 찾기가 어려워서요. 이런 일에 부릴 사람도 없고, 그런
사람 잃기도 아쉬워서 그냥 제가 직접 왔습니다.”
“핑계 대지
않아도 괜찮아. 아시엘린이 그리워서 왔다고 해도 난 이해하니까.”
“뭐...무슨 말씀이십니까!”
라실이 소파에서, 문자
그대로, 펄쩍 뛰어올랐다. 로베일라의 가느다란 입술 끝에
그믐달처럼 음침한 미소가 걸렸다.
“자네가 올해
몇 살이지? 스물일곱? 아시엘린이 열셋이니 14년 차이인가.”
“그,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도무지...”
“어설프긴. 동전을 쥐고 있다고 양면을 모두 가진 건 아니야. 물러터졌군, 피올린 대위.”
“지금은 대령인데요...”
라실이 이번에야말로 흐르는 진땀을 닦으며 간신히 항의한다. 로베일라는 코웃음을 치며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왔으면 노크하고
들어와야지 뭘 기다리니?”
“앗, 네...”
문이 열고 아샤가 조심스럽게 들어선다. 속없게도 그 와중에도 아샤를 보았다고 흐뭇하게 웃던 라실의 얼굴이, 그
뒤에 따라오는 검은 짐승을 보는 순간 차갑게 굳는다.
“원장님, 이건...”
“아시엘린, 직접 설명해라.”
“네...저, 피올린 선생님.”
아샤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자그마한 아샤와 훤칠한 라실은 서고 앉았는데도 눈높이가 비슷하다. 햇빛
아래에서 그렇게 눈부시게 반짝이던 호박색 눈동자가, 애원과 호소를 담고 라실의 시선을 옭아맨다.
“저번에 비가
내리던 날 카이를 주웠어요. 목걸이가 없길래...”
“카이?”
라실이 멍청한 목소리로 아샤의 말을 잘랐다. 아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카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네가, 카이, 라고...”
라실의 시선이 아샤를 피해 하릴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로베일라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고, 아샤의 발치에 얌전히 앉은 것은
개처럼 보였다. 어떤 견종과도 닮지 않은, 그보다 훨씬 더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생물에 더욱 흡사한, 크고 검고 얌전한 척 하고 있는 유현한 밤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생물.
라실은 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도, 그 눈동자가 금색으로 빛날 때를 알고 있었다.
“주인 없는
개 같았거든요. 그리고 다쳤길래 치료해줬어요. 원장님이 허락해
주셔서 지금 제가 기르고 있어요. 저기, 피올린 선생님.”
아샤가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한 걸음 다가갔다. 라실은 그녀에게 손을 뻗을 수도, 시선을 돌릴 수도, 비명을 지를 수도 없다. 반칙이다.
하지만 원래 세상은 그런 거지, 라실 피올린.
“카이는 제
강아지예요. 꼭 생일 선물처럼 제가 발견했어요. 영리해서
말썽을 피우지도 않고요, 제가 정말 잘 돌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계속 기르면 안되나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 심정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런다고 상황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진심으로 소망하는 소녀와
그 소망을 이루어주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생물, 그리고 그들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망할 전前 상관.
라실 피올린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권리를 잘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공화국 내에서도 몇 없는 특수분야의 전문가라고 해도
고작 스물일곱 살에 대령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피올린 선생님?”
하지만 라실은 아샤가 카이라고 부르는 생물을 그녀에게서
빼앗을 수가 없다. 자신이 스스로의 의지로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빼앗는다면, 그것은 5년 전 그녀에게서 뜯어낸 부모의 온기가 마지막일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 맹세가 돌고 돌아, 지금
그의 눈앞에서 검은 악몽 덩어리가 되어 노려보고 있다.
“저기...피올린 선생님...”
“...그래.”
“선생님?!”
“잘 돌보고
있다니까, 음, 그래.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너무 친해지지 않도록, 아니, 또 잃어버리지 않게 잘 관리하고...아, 아샤?!”
“감사합니다!!!”
맙소사. 너무나
기쁜 나머지 아샤가 라실의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았다. 당황한 라실의 손이 닿을 곳을 정하기도 전에, 먼저 정신을 차린 아샤가 새빨개진 얼굴로 멋쩍게 웃으며 통통 튀듯이 뒤로 물러난다.
“감사합니다, 피올린 선생님! 카이, 너도
감사합니다, 인사해야지!”
“응? 아니, 그럴 것까지는...”
여전히 미심쩍은 듯 라실을 노려보고 있던 카이가 문득
고개를 낮추더니 멍과 으르릉 사이의 소리를 짧게 뱉았다. 아샤가 꺄르르 웃으며 카이의 목을 끌어안았다. 정말 영리하지 않냐는 듯 자랑스러운 얼굴로 라실을 바라보는데, 그녀의
홍소를 너무나 오랜만에 들은 라실은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다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만 데리고
나가거라, 아시엘린. 손님 계실 때 너무 떠드는 거 아니다.”
“네, 원장님. 죄송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피올린 선생님.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 그래...”
햇살처럼 환하게 빛나는 아샤가 겅중대며 카이와 함께 원장실을
나갔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본 라실이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원장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목소리 낮춰. 들리겠다.”
“설명을 해주십시오. ‘저것’이 대체 왜 지금 여기에 있는 겁니까.”
그러면서 혹시라도 아샤가 들을까 목소리를 낮춘다. 청춘이구만. 로베일라가 코웃음을 치며 식은 홍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아시엘린이
설명하는 거 못 들었나? 비 오는 날 다친 개를 주웠다잖아.”
“그런 문제가
아닌 거 다 아시면서...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모르십니까?”
“알 게 뭐야. 한 달도 안 남았는데.”
“...”
라실이 입을 다물었다.
마치 2주 전, 생일 선물로 개를 달라고 떼를
쓰는 아샤를 보던 로베일라의 표정 같았다. 하지만 로베일라와 달리, 라실이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마지막 정기검진은
생략하겠습니다. 저것...저 개 때문에 곤란해질지도 모르니까요.”
“알았네. 그 말 하려고 왔던 거지? 잘 가게.”
“정말 가차가
없으시군요.”
“자네가 내
속을 썩였던 시절을 생각하고 다시 말해 보시지?”
이건 다른 의미로 당해낼 수가 없다. 라실은 맥없이 웃으며 일어났다. 그가 막 원장실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을 때,
“아, 피올린 선생.”
“또 뭐가
남았습니까?”
“나라면 개
키우는 걸 허락해주는 대신, 오빠라고 부르게 했을 거야.”
“...제발...저 좀 살려주십시오...”
“꺼져.”
허리에 힘이 빠진 듯 문고리에 매달리는 라실을 본 로베일라가
드물게 유쾌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무력한 병정들처럼 서류더미가 둘러싼 책상에 앉은 그녀의
옆얼굴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라실은 말없이 원장실을 나왔다.
텅 빈 복도는 짧고, 현관은
좁고, 빈 마당은 어두운 건물에서 나온 눈에 지나치게 환했다. 여전히
널려 있는 빨래들만 바람에 휘날리며 깔깔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하지만 라실은 갈 수 없고 가서는 안 되는 곳에서 아샤와 아이들과 카이가 떠들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아샤가 한 걸음, 또 한 걸음 멀어질 때마다 라실
피올린의 마음이 조금씩 부서진다.
내가 너를 포기하기까지 얼마나 괴로웠는데, 아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니. 남자는 뻔뻔스럽게 중얼거리고, 그런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럴 시간조차,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