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카이.”
그날 밤. 아샤와 카이는 여느 때처럼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겨우 2주 남짓 지속된 일상조차 지난 5년을 대신할 정도로, 그는 아샤의 카이였다.
“원장님이 자주 말씀하셨어. 사람이 볼 수 있는 건 동전의 한쪽 면뿐이다. 그러니까 동전을 쥐고 있다고 양면을 모두 가진 건 아니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이다, 라고.”
짐승의 검고 뾰족한 귀가 쫑긋 흔들렸다. 그것이 처음부터 순순히 아샤의 침대에 올라온 것은 아니다. 물론, 아무렴, 그래야지. 단지 자신을 곰인형처럼 안고 자겠다며 끌어올리는 계집아이에게서 달아나 보았자 그저 술래잡기일 뿐, 기어코 고집을 부려 바닥의 제 집에 들어가면 담요를 두르고 옆에 누워버리는 저보다 더한 고집에 저버린 것이다. 등에 닿은 품이 부드럽고 따스한 것이 못내 불편한 듯 꾸물거리면서도, 카이는 아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이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그...크릉...!!
갑자기 목을 덥석 끌어안겨, 카이는 비명 대신 낮게 목을 울렸다. 아샤가 쿡쿡 웃으며 희미하게 모래 냄새가 나는 검은 털에 코를 묻었다.
“너한테서는 아빠 냄새가 나.”
실례다. 그렇게 나이가 들지는 않았다.
“아빠는 키가 엄청 커서, 목말을 타면 하늘에 올라 있는 거 같았어. 그럴 때 아빠 머리는 까맣고, 너처럼 빳빳하지 않고 보들보들했지만, 좋은 냄새가 났어. 카이는...카이 같아.”
이제는 카이도 안다. 이 부모를 잃은 아이가 제게 붙여준 이름이, 죽은 아빠를 죽은 엄마만 부르던 애칭이라는 것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아샤는 스스로 깨닫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밤을 악몽에 설쳤고, 누군가 어리고 분별없는 아이가 그 사실을 알려주기 전에 홀로 잘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다. 세상은, 아샤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따스하고 조금 더 냉혹하다.
“이제는 나한테도 카이가 있어. 나한테도 동전이 있었어. 다른 쪽 면이...이제는 보여...”
한 번 빼앗긴 뒤로 원하는 것조차 포기했지만, 선물처럼 다가왔고 스스로 손을 내밀어 잡은 온기와 상냥함을 품에 안고, 아샤는 잠이 들었다. 고른 숨소리가 이어질 즈음,
똑똑.
햇빛을 받은 금화처럼 반짝이는 카이의 눈동자가 유달리 높은 천정 위쪽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유리창에 내려앉은 것은 한 쌍의 발이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가늘고 새까만 갈까마귀의 발 사이로 집게처럼 뾰족한 부리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아샤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하지만 카이에게는 분명히 들리도록 명징하게, 똑똑, 똑, 똑똑똑, 똑, 똑.
카이가 낮게 기침했다. 한숨 같기도 하고 비명 같기도 한 그 소리에 만족한 듯, 밤의 색깔을 띈 새는 포르륵 날아가버렸다. 남은 것은 깊이 잠든 아이와, 그 아이의 품에 어느덧 익숙해진 검은 짐승뿐이었다. 카이는 눈을 감고 조심스럽게 자세를 고쳐 누웠지만, 아마도 잠들 수는 없으리라. 아샤가 천진난만하게 던진 화두는 그에게 자신의 숨통을 조이던 것이 무수한 동전 더미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검은 새는 그 더미에 또 한 닢의 동전을 더했다. 그러므로 검은 짐승은 밤이 깊어 새벽이 올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리라. 그 앞발 가득 욱여넣어진 동전에 대해, 지금껏 보고 있던 면에 대해, 아직 본 적이 없는 면에 대해,
“...카이...”
뒤척이는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이불깃을, 큼직한 손이 끌어올렸다. 배시시 웃으며 잠드는 뺨에 조금 살이 오른 것 같다. 기울었던 달이 차오르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 흐린 어둠에 잠긴 아샤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의 뒷면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을 것인가. 카이는 생각해야 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 이 거대한 도시의 저편에서 라실 피올린이 바로 그 동전의 뒷면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그는 선택했기 때문에.
2화 '카이' 끝.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