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커뮤니티'에 해당되는 글 14건
- 2015.08.17 [DX2/안나마리] 캐릭터 이미지
- 2014.04.07 [Zian/미션2] 곰, 쇼콜라 맨션을 나오다.
- 2014.04.07 [Zian/미션1] 곰, 예삐와 이러고 놀았다.
- 2013.05.27 [Zian/미션1] 곰, 예삐를 '처리'하다.
- 2013.05.20 [Zian/메리디아나] 곰, 지안에 오다.
- 2013.05.17 [Zian/미션1] 곰, 식후운동을 계속하다.
- 2013.05.15 [Zian/미션1] 곰, 집을 나서다.(수정)
- 2013.05.10 [Zian/등장] 곰, 동굴을 떠나다. (수정)
- 2013.05.10 [Zian/설정]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 (수정)
- 2012.11.21 [DX2/RP] 제0화. 천둥의 카덴차 (2010/09/19)
- 2012.11.21 [DX2/안나마리] 옛날 이야기, 마지막.
- 2012.11.20 [DX2/안나마리] 옛날 이야기, 둘.
- 2012.11.20 [DX2/안나마리] 옛날 이야기, 하나.
- 2012.11.20 [DX2/안나마리] 캐릭터 설정 (2011/02/14)
그날 아침, 지안 공설 여행자 전용 기숙사 제4동 - 통칭 쇼콜라 맨션의 사감인 마리 셰르파는 매우 기분이 나빴다. 세계 전체가 하나의 수도원처럼 거대한 미덕을 방패로 더욱 거대한 악덕과 끝나지 않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래리어트 출신인 만큼, 그녀가 지닌 풍부한 미덕에는 애교점처럼 사소한 악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꼭두새벽부터 날 깨웠단 말이군요."
사위는 환하고 아침이 빠른 가정에서는 벌써 아침 식탁을 치울 무렵이니 딱히 꼭두새벽이랄 것은 없었지만, 셰르파 사감이 지닌 가장 강력한 악덕은 다름 아닌 '아침잠'이었다. 아침에 약할 뿐 아니라, 그녀가 판단하기에 '매우' '확실하게' '긴급하고도' '타당한' 이유 없이 깨우는 자에게는 응당 받아 마땅한 천벌을 내릴 정도로 아침에 깨어나기 전의 시간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 셰르파의 2m가 넘는 건장한 체구가 낮잠을 자기 전에는 꺼지지 않을 분노의 불길에 휩싸여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그래요. 어떻게 좀 해주십쇼. 가능한 빨리."
다행스럽게도 - 혹은 불행하게도, 그 분노에 불을 지폈고 또한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알레르망이었다. 셰르파 사감과 나란히 서도 뒤지지 않은 건장한 근육질 체구를 지닌 쇼콜라 맨션의 주방장은 잘도 그 자세가 가능하구나 감탄할 정도로 굵직한 팔을 두툼한 가슴 앞에 나란히 얹으며 - 그의 고향 행성에서는 그것이 '팔짱'이라 불리는 자세였다 -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 놈들 때문에 오늘도 아침식사 준비가 한 시간이나 늦어졌어요. 매번 이런 식이면 저 일 못합니다."
"그리고 매번 내 아침잠을 깨우러 올 거고 말이죠."
"이 기숙사의 평화를 책임지는 사람은 사감님이잖습니까."
"그렇단 말이죠..."
셰르파의 말꼬리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에 지글지글 일그러졌다. 알레르망의 청보라색 얼굴은 얼음처럼 차갑게 분노하고 있었다.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의 약속이나 한 듯 홱- 같은 방향을 향해 돌아갔다.
갸우우...
꾸웅?
불행하게도 - 혹은 다행스럽게도, 보통 사람이라면 오금이 저려 덜덜 떨었을 그 무시무시한 두 쌍의 시선을 받아친 것은 두 마리 강아지였다. 어딘가의 차원에서 여신의 사자로 성스럽게 여겨지는 환수, 이미 성견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지만 굵직한 앞발로 미루어 아직 한참은 더 클 것 같은 검은색의 카푸슈나가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자, 그보다 더 크고 더 활발하고 더 먹성 좋은 금색 카푸슈나는 더 안 먹고 뭐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금 물어뜯은 냉동 라크 다리를 꿀꺽 삼키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검은색 카푸슈나가 머뭇거리며 앞발 사이에 끼고 있던 빵덩어리를 우물우물 뜯어먹었다. 힘들게 구한 히켕 열매를 다져 넣은 비장의 야식이 순식간에 '쳐묵' 당하는 것을 본 알레르망이 굵은 목을 울리며 팔뚝 만큼이나 굵직한 꼬리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하지만 몸집과 행동력, 파괴력과 먹성이야 어떻든 쿠바카와 야무키는 아직 어린애였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아 먹는다는 실로 본능에 충실한 아이들의 저지레에 직접적으로 화낼 정도로 어설픈 어른이 아니었다, 셰르파와 알레르망은.
잡도리를 하려면 이 금수들의 보호자에게 해야지. 아주 철저하게.
"...모하임."
-예, 마담 셰르파.
재깍 돌아온 대답이 바짝 얼어 있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쇼콜라 맨션의 유일한 '전뇌종족' 직원은 그만큼의 상황판단과 감정표현이 가능한 슈퍼 컴퓨터였으니까.
"어디 있죠?"
-3102호입니다.
같은 이유로, 모하임은 '누구 말입니까?' 따위 불똥이 튈지도 모르는 멍청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아, 그렇지. 3102호. 자기 방에 있겠지. 거기가 아니면 어디 있겠어. 셰르파가 상어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두 겹 어금니를 빠드득- 갈았다.
"자고 있나?"
-예, 무슈 알레르망.
뿌둑. 알레르망이 그토록 섬세한 요리를 만들어낸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굵게 마디진 손가락 관절을 소리나게 꺾었다.
"사감님, 제가 잠깐 3102호에 들어갔다 와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내가 같이 갈 거니까."
꾸웅? 꾸웅!
갸우...우...
셰르파가 기세등등하게 돌아섰을 때 쿠바카가 햇님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크고 복실복실한 머리를 번쩍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무키는 한숨을 쉬며 까마귀 날개처럼 축 늘어진 윤기나는 검은 귀를 떨었다.
-이 사람들, 지금 우리 엄마랑 놀러가는 거야? 그럼 나도 갈래!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언니...그치만 나도 갈래...
에아르스 최초의 슈퍼 컴퓨터는 두 마리 카푸슈나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들었지만, 굳이 셰르파와 알레르망에게 번역해줄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옳았다, 언제나 그렇듯.
***
"그래서?"
"어떻게 좀 해줘요."
"내가 왜?"
대답 대신, 메리디아나는 그녀의 입국신청서 사본을 흔들었다. 유려한 서체로 휘갈긴 그녀의 서명 아래, 꼭 저처럼 울퉁불퉁하니 다른 사람은 절대 흉내낼 수 없을 것 같은 기발한 필체로 카스발 이즈나블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야, 내가 너희 보증인인 건 맞지만, 그건 의례적인 거거든? 일단 기숙사 들어갔으면 거기서 자립할 생각을 해야지."
"곰으로 변하지 말라잖아, 공공장소에서."
"그런 규칙도 있었나?"
"생겼어요, 오늘 아침에."
내가 식당에서 곰으로 변하고, 셰르파 사감이 날 식당 벽에 메다꽂은 다음에. 메리디아나는 한숨을 쉬며 왼쪽 눈가를 누르고 있던 두툼한 습포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대야의 차가운 물로 습포를 적시는 동안, 예쁘게 보라색으로 물든 광대뼈를 본 카스발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거참 잘코사니다, 이 곰탱이야.
"지금 깨소금이라고 했겠다?"
"응? 그걸 어떻게...아, 아니...흠, 흠."
메리디아나의 둥글둥글한 감청색 눈매가 뾰족하게 날이 섰다가.
꾸웅? 꾸웅? 꾸웅!!
"앉아, 쿠바카. 노는 거 아냐."
갸우우...
"고마워, 우리 작은 아가씨. 엄마 이제 안 아프니까 걱정 말아요."
철딱서니 없이 신나서 머리를 들까부는 쿠바카와 조심스레 품에 파고들어 턱을 핥는 야무키의 재롱에 스르르 풀어졌다. 어이구, 제법 애엄마 같으시네. 카스발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좀 마실래?"
"뭐 있는데요?"
"노리아 화주花酒?"
"그거 주스 같아서 싫다더니, 웬일?"
"나 아직 일하는 중이거든?"
"그리고 난 민원을 넣으러 온 거주민이구요. 한 잔 줘요."
기집애가 따박따박 한 마디도 안 진다니까. 투덜거리며, 카스발은 집무실 한켠의 벽장에서 노르스름한 액체가 담긴 디캔터를 꺼내 유리잔 두 개에 똑같이 따랐다. 한 잔을 책상 건너편에 앉은 메리디아나 앞에 놓고,
"그나저나 너 고향에서 공무원이었다면서? 잘도 안 잘리고 버텼다?"
"헐. 아, 이거 맛있네. 어디서 샀어요?"
"<노란 단풍잎>. 다음부터는 네 돈 내고 사 마셔."
"쪼잔하긴. 암튼, 어떻게 안 잘리고 버텼냐고요?"
단숨에 잔을 비운 메리디아나가 눈을 깜빡였다. 아련한 눈빛이 보이지 않는 것을 헤아리는 동안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럴 때의 메리디아나는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겨우 애티를 벗은 계집애 같이 생겨먹은 주제에, 올올이 쇳내가 밴 기도氣度를 세모시 수의壽衣처럼 느긋하게 걸치고 있는 것이다.
"여자애를 하나 구했지."
"겨우?"
"뭐, 내 고향 제국의 황제가 됐지만."
풉. 카스발이 막 머금었던 한 모금을 도로 뱉았다. 지금 뭐라고 한 거냐며 노려보자, 장난을 성공한 어린애처럼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잇는다.
"선황 폐하가 엄청 근사한 미중년이셨거든요? 연배는 당신 비슷했을 거야, 그치만 비교도 안돼. 그런 남자 다시 없을 거야."
"어이구, 예예, 그러셨어요?"
"응, 그 분이 승하하실 때 내 손을 잡고..."
메리디아나는 시선을 들어올렸다. 벌써 수십 년이 지난 일이건만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율리아나를 부탁한다. 이제 믿을 사람은 너뿐이구나...마나. 처음으로 나를 그리 불러주셨지. 그래서 거부할 수가 없었어. 폐하를, 폐하의 심장을, 이 손으로...
꾸웅...
갸우우...
"야, 야!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
메리디아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 안되지, 안되지. 또 곰이 되어서 도/망/갈/ 뻔했잖아.
"잘 거면 기숙사 돌아가서 자! 나 일해야 한다고!!"
"...이제 못 돌아간다니까."
"왜."
"사람 말을 뭘로 들었어요. 곰으로 변하지 말라는 규칙이 생겼다니까. 나 이제 거기서 못 살아."
"남들은 잘만 지내는데, 왜."
"애 키워 봤어요?"
"...응?"
카스발이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어쩌면 그것은 밟으면 안되는 금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메리디아나의 축생 같은 직감은 카스발이 거기에 금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애도 안 키워본 남자가 육아 스트레스에 대해 알 리가 있나."
사과하지 않았다.
"육아 스트레스? 니가 애엄마냐?"
"쿠바카? 야무키?"
꾸웅!
...갸우.
두 마리 카푸슈나가 제 어미를 보호하듯 양쪽에 갈라앉아 부르는 대로 대답한다. 아, 그러세요. 카스발은 이마를 짚었다. 내가 어쩌다 이 곰탱이 모녀를 처음 만나서...
"그러니까 어떻게 좀 해줘요."
"그러니까 내가 왜...아, 알았다, 알았어."
하는 수 없지. 카스발은 한숨을 쉬며 서랍에서 개인 서한용 편지지를 꺼냈다. 그 다른 사람은 절대 흉내낼 수 없을 것 같은 기발한 필체로 괴발개발 휘갈긴 편지지를 두 장, 대충 접어 넣은 봉투를 내민다.
"자."
"뭐예요, 이건?"
"누스 지구 북쪽에 있는 내 집 기억 나냐?"
"우리가 처음 나타났던 거기? 당신이 필리스 꼬시다 실패한..."
"1절만 해라. 거기 집문서다. 빌려줄 테니까, 거기서 살아."
"우와, 그거 고마워요...근데 거기 완전히 폐가잖아. 침대 말고는 아무 것도 없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네 신용 보증한다는 증명서도 썼다. 샤푸리코 영감한테 가져가."
"베인 지구에서 유명한 레프리컨 고리대금업자?"
"내가 예전에 신세 봐준 게 있으니까, 아마 이자 헐하게 쳐서 빌려줄 거다."
"그 돈으로 수리해서 살라고?"
"니가 다 갚아. 떼먹고 달아나면 8128개의 차원 저편이라도 쫓아가서 목을 졸라버릴 거다."
"흐응..."
메리디아나는 카스발이 내민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은 결코 알 수 없을 감정이 그녀의 감청색 눈동자 표면에 배어나왔다가,
꾸웅! 꾸웅!!!
갸우우!
"알았어, 알았어. 해줄게."
신나게 꼬리를 흔드는 쿠바카와 어쩐 일로 목청을 높이는 야무키의 더블어택에 사그라졌다.
"뭐라냐?"
"놀이터 만들어 달라네요."
"집이다? 우리 아니다?"
"그거, 지안의 무수한 사족보행 거주민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거 알아요?"
"웃..."
"아무튼 호의는 감사히 받을게요, 카스발. 고마워요."
"..."
카스발은 공무원의 본분에 이어 스스럼없는 솔직한 인사에 연달아 얻어맞고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메리디아나는 후훗, 얄밉게 웃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
그날 저녁,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와 쿠바카, 야무키는 쇼콜라 맨션을 퇴소했다. 그 털북숭이 모녀의 퇴소를 가장 기뻐한 것이 아침잠을 소중히 여기는 세르파 사감인지, 시도 때도 없이 퍼질러 자는 엄마 대신 알아서 밥을 챙겨먹는 착한 딸래미들에게 일터의 평온과 안녕을 위협받아 온 알레르망인지, 아니면 메리디아나 본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일 화를 낸 사람이 누군지는 확실했다.
"얌마, 아무리 내가 보증을 섰다지만 이렇게 많이 빌려서 어떻게 갚을려고 그래? 너 튀면 진짜 죽여버린다?!"
"할 수 있으면 해보시든가요. 확 곰변한다?"
-Fin.
"우리, 아무래도 지금부터 쟤랑 놀아야할 것 같다."
갸우.
야무키가 한숨을 쉬었다.
***
키이이잉-
키야!
그에 대꾸하듯 소리를 낸 것은 쿠바카가 아니었다. 머리 위에서 들려온 두 겹의 목소리. 하나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구슬프고, 또 하나는 건드리기만 하면 물어주겠다는 듯 날이 서 있었다. 메리디아나와 쿠바카, 야무키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위를 올려다보았고, 그들을 내려다보는 여섯 쌍의 눈과 마주쳤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본 예삐 - 이모크티온 세티롭스는 턱이 2층 건물 지붕에 닿는 덩치와 머리가 세 개라는 점을 제외하면, 그저 평범한 개였다. 그렇다고 예삐라는 애칭이 어울리는 앙증맞은 외모는 아니었지만. 길고 튼튼한 사지와 근육질의 늘씬한 몸은 뻣뻣하고 성긴 검회색 털로 뒤덮이고, 꼬리는 없는 듯 짧으며, 굵은 원추형 머리에 바짝 선 귀와 세모꼴 눈매가 매서웠다. 메리디아나는 금새 알고 있는 몇몇 개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늑대의 피가 섞여 사납고 영리하며 쉽게 마음을 열지 않지만 한 번 친구가 되면 죽을 때까지 신뢰를 배신하지 않던...
"까짓 거, 지쳐 쓰러질 때까지 놀아주면 되겠지, 뭐. 안 그러니, 쿠얌?"
갸우.
꾸웅!
눈가가 더워지는 것을 느낀 메리디아나가 목청을 가다듬어 짐짓 발랄하게 외쳤다. 야무키는 한숨을 쉬었고, 쿠바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으며,
"놀아줘요? 지금 이 괴물과 플레이를 한단 말인가요? 무슨 그 풀리시한...꺄아아!"
시엔화룽은 어이없다는 듯 화를 내다 말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괴물'이라는 말에 화가 난 것인지 예삐의 가운데 머리가 고개를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육중한 몸을 2층 높이의 송곳니에 매달고도 찢어지지 않는 걸 보면, 그의 조끼는 보통 비단이 아니라 특별히 방직된 옷감인 것 같았다. 시엔화룽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취미가 큰 도움이 된 희귀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살려줘요, 레이디! 헬프 미! 리워드는 스몰하지 않게 지급할게요! 플리즈!"
"리워드?"
갸우우...
꿍!
메리디아나의 눈이 반짝 빛나는 걸 본 야무키가 한숨을 쉬었고, 쿠바카는 웃었다.
키잉-
꾸-웅?
키이이잉-
그 광경을 보던 예삐의 왼쪽 머리가 흐느꼈다. 그 머리는 쿠바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건넨 말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고개를 떨구고 더욱 애처로운 소리로 울었다.
"쿠바카? 저 애랑 대화가 되니?"
꾸웅!
쿠바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총채처럼 길고 풍성한 금색 꼬리가, 잔상이 해바라기처럼 보일 정도로 맹렬하게 뱅글뱅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 말이 잘 통하는 커다랗고 특이한 친구와 당장이라도 놀고 싶다는 거다.
갸우.
키야아아앗!
그 광경을 본 야무키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고, 거기에 대꾸한 것은 예삐의 오른쪽 머리였다. 안 그래도 열받아 있던 오른쪽 머리는 당장이라도 독액을 뱉을 것처럼 화를 내다가,
갸우...
키얏! 키얏!!
갸우우우...
키얏...키야...키야아...
기가 죽어 울먹울먹하는 야무키의 목울림에 녹아내리듯 쭈뼛쭈뼛 소리를 죽이고 말았다. 메리디아나가 짝짝 손뼉을 쳤다.
"와, 너네 정말 대화가 되는구나?"
"지금 무슨 태평한 소리를 하는 거에요!!!"
키야아!
갸우...
"거, 자꾸 귓가에서 바락바락 소리 지르지 말란대요. 시끄럽단다네요."
"말이 통하면 날 내려놓으라고 해요! 퀴클리!!"
키이잉...
꿍! 꾸웅!!
"그러니까 귀 아프다 그런다잖아요."
"도그 사운드 통역 그만하고오오오옷!!!"
개판이 따로 없네. 메리디아나는 피식 웃었다. 예삐의 양쪽 머리는 상냥한 힉스를 밀어젖히고 자기들을 호되게 매질한 희고 난폭한 생물 때문에 서러워졌고, 그래서 세 번째 머리가 깨어났기 때문에 화가 났다. 그리고 시끄러운 누에벌레를 덥석 깨문 가운뎃머리가 이걸 집어던질까 한 입에 삼킬까 너희도 의견 좀 내 보라며 짜증을 부리던 참에 메리디아나와 두 마리 카푸슈나가 나타난 것이다.
뭔 일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랑 신나게 놀자는 쿠바카의 풍차 같은 외침에 왼쪽 머리는 눈물을 거두며 그것도 괜찮겠다고 주억거렸고, 그 하얀 생물은 우리 동무 아닌데 왜 날러 화내냐는 야무키의 울먹거림에 오른쪽 머리는 아니, 그게, 딱히 네가 나쁘다는 건 아니라며 성질머리를 눅였다. 이렇게 해서 양쪽 머리가 너만 짜증 그만 내면 저 처음 만난 친구들과 놀 수 있다고 재우치는 형국이 되자, 가운뎃머리는 안 그래도 이빨에 낀 이물질이 번거로운 판국에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는 억하심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헬프 미! 플리즈 레스큐 미! 꺄아아! 쏘리, 예삐 디어! 암소쏘리 벗알러뷰!!"
가운뎃머리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흔들자, 시엔화룽은 16개의 다리를 요란스럽게 흔들며 째지는 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거참, 소리 지르지 말라니까. 메리디아나는 낙낙한 튜닉의 소맷자락을 걷어올리고 머리끈이 잘 묶였는지 확인한 다음 허리띠를 다시 조이고 부츠를 고쳐 신었다. '큰 개와 전력으로 놀기'에 얼마만큼의 체력과 지구력과 순발력이 필요한지 너무 너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목과 허리, 팔다리를 가볍게 돌리며 몸을 푼 메리디아나가 명랑하게 외쳤다.
"쿠바카, 가랏!"
꾸우우우우우웅!!!!!
드디어! 아까부터 초조하게 앉았다 일어났다 머리를 낮췄다 흔들었다 오두방정을 떨며 그 말만을 기다리던 쿠바카가 목청껏 기다란 환호성을 질렀다. 금색 카푸슈나는 시위를 떠난 황금화살처럼 맹렬한 기세로 포석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세 개의 머리가 어떻게 반응할지 합의를 마치기도 전에, 평소보다 훨씬 큼직하게 번지는 금색 그림자가 높은 배 아래를 스쳐 순식간에 예삐 뒤로 나갔다.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 막다른 골목 안쪽 벽에 부딪히는가 싶더니, 뒷발로 바닥을 박차고 벽에 닿은 앞발을 교묘하게 꼬아 몸의 방향을 바꾼 다음,
쿠워어엉!
갸우?
한 마리 태양사자가 된 것처럼 우렁차게 포효하며 이모크티온 세티롭스에 올라탄 것이다. 한배 언니가 신나게 짖으며 예삐의 등줄기를 따라 달려 올라간 끝에 뒤통수를 걷어차고 가까운 건물 지붕 위로 건너뛰는 것을 본 야무키가 짤뚱한 꼬리를 짤짤짤 흔들기 시작했다.
"야무키도 놀 거야? 그치? 재밌어 보이지?"
갸우...
키야아!
갸우!
메리디아나의 다독거림에도 머뭇거리는 야무키에게, 예삐의 오른쪽 머리 - "에잇, 귀찮아! 넌 이제부터 오른삐다. 쟤는 왼삐, 걔는 가운삐! 내 맘이야!" - 가 신나게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야무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짧게 외쳤더니,
"꺄아악! 이제는 너까지 왜 이러니! 라이트 헤드, 얘! 스탑! 스타아압!!"
키이이...
오른삐가 나도 쟤랑 놀게 이거 내놓으라며 누에벌레의 꼬리뿔에 씌워진 고깔을 물고 잡아당겼다. 졸지에 당기기 장난감이 된 시엔화룽이 달달달 떨면서 비명을 지르는데, 엎친 데 덮친다고 왼삐까지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미는 게 아닌가. 하지만 왼삐가 시엔화룽의 앞다리 중 하나를 물고 늘어지기 전에,
꾸웅!
키이이!
지붕을 따라 이쪽 저쪽 신나게 뛰어다니던 쿠바카가 몸을 날렸다. 쿠쿠야미르 여신의 환수는 신명나는 기분을 풍선에 바람 넣듯 잔뜩 들이마셔서 평소의 두세 배, 그러니까 일어나면 2층 창문에도 턱을 걸칠 수 있을 정도로 커진 상태였다. 그런 쿠바카가 체중을 실어 시엔화룽의 푸둥푸둥한 배에 머리를 들이받은 것이다.
"스탑! 스탑, 플리즈! 지금 대체 무슨...꺄아아아악!"
찌이익- 시엔화룽의 새된 비명 못지 않게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가운삐의 송곳니에 걸려 있던 비단 조끼가 기어이 찢어지고 말았다. 공기저항을 받아 넘기는데 이상적인 유선형 - 이라기에는 사실 좀 지나치게 통통한 - 누에벌레가 200kg을 웃도는 중력을 원심력에 실어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아차...야무키!"
갸우!
쿠바카의 신명이 번진 듯 평소의 음전하고 우울한 자태를 벗어던진 야무키가 길다란 귀를 깃발처럼 팔락이며 달리기 시작했다. 안 움직여서 그렇지 작정하고 뛰면 쿠바카도 따돌릴 정도로 발이 빠른 검은 카푸슈나는 금새 시엔화룽을 따라잡았다. 그 몸이 바닥에 부딪히기 전에 받으려고 입을 크게 벌리고 높이 점프했지만,
딱!
키이이-
키얏 키-얏!
야무키의 검은 주둥이가 허공을 베어물자 왼삐가 귀를 펄럭이고 오른삐가 낄낄거렸다. 예삐가 단걸음에 시엔화룽이 날아간 거리를 따라잡고, 가운삐가 나달나달해진 조끼 자락을 다시 한 번 낚아챈 것이다.
"살려줘!! 예삐야, 플리즈!!"
크르릉!!!
가운삐가 시엔화룽의 비명도 지워질 정도로 우렁차게 그르렁거렸다. 예리한 송곳니가 시엔화룽의 몸이 아니라 조끼를 문 것은, 이빨을 박으면 공이 터지고 놀이가 끝날 것을 본능적으로 안 탓이리라. 꼭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생물을 한 마리 (신명이 번지면 두 마리) 기르고 있는 메리디아나는 확신했다. 좋아, 그러니까 공놀이가 계속되는 동안 저 양반은 안전하단 말이지?
"쿠바카!"
꾸우우어어어!!!!
예삐의 높직한 어깨 너머에서 금빛 덩어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에샤 지구의 오밀조밀한 스카이라인을 밟으며 힘차게 달려온 쿠바카가 큼직한 앞발을 휘둘렀다. 가운삐가 기껏 차지한 장난감을 뺏기지 않으려고 고개를 흔든 덕분에, 시엔화룽은 쿠바카의 앞발질만 맞았다면 얻을 수 없었을 거센 원심력을 타고 멀리, 참으로 멀리 날아가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아아- 아임 플라잉~ 헬프 미~ 아임 플라잉!!!"
"쿠바카, 나이스샷! 야무키!!!"
메리디아나가 박수를 치며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도 먼저, 쿠바카와 마찬가지로 평소보다 두세 배는 커진 야무키가 땅거미처럼 매끄럽게 내달렸다. 평소 께느른하게 흐릿하던 눈이 이번에야말로 잡고 말겠다는 의욕으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그 뒤를 너무 신나서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쿠바카와, 서로 네가 잘못했네 내가 잘했네 투닥거리면서도 일사불란하게 지축을 울리며 달리는 예삐가 뒤따랐다.
"자, 얘들아!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잡는 놀이다! 잘할 수 있지? 달려! 쭉쭉 달려!!"
그녀 역시 달리기 시작하며 메리디아나가 명랑하게 외쳤다. 시엔화룽의 비명이 메아리를 그으며 사라지는 쪽은 에샤 지구의 북쪽 외곽, 나즈막한 스카이라인이 듬성듬성 끊어진 사이로 은빛 수평선이 아련하게 빛나는 나무우듬지쪽이었다.
"끝까지 달려! 에브리바디 짬푸!! 오랜만에 물장구도 치는 거야! 지쳐 잠들 때까지!! 아주 신날 거다!!!"
-END.
ps. 카푸슈나는 여신의 환수이기 때문에 신명이 나면 난 만큼 크기가 커져서 정신없이 논다는 매우 편리한 설정입니다ㄲㄲ
"호수에나 빠져 버려요."
"기집애가 말버릇 하고는!"
메리디아나의 손짓을 동반한 폭언에 버럭 화를 내기는 했지만, 카스발은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어차피 여기 다 적혀 있는 거 뭘 또 귀찮게 설명해'라며 의뢰서만 던져 주고 간 게 틀림없으니, 이대로 계속 추궁 당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해서 전략상 후퇴를 한 것 - 일 리가 있나. 바빠서겠지.
<노란 단풍잎>에서 아점을 먹으며 읽은 의뢰서에 따르면 '분실'된 시엔화룽 소유의 생물체는 모두 일곱 마리였다. 나샤스에 화사, 예삐 - 이모크세티온 세티롭스에 두오막스, 로토알루코, 니플라마, 게다가 번식기의 라크까지! 이쯤 되면 카스발이 시엔화룽을 타이쿤에 매달고 지안을 세 바퀴 반 돌 때 메리디아나는 두 마리 카푸슈나와 함께 <스펠라에우스 대필소>의 4층 발코니에 올라가 응원의 춤이라도 춰야할 판이다. 물론 그 전에 남은 일곱, 아니지, 방금 두오막스를 베었으니 여섯 마리를 어떻게든 '처리'해야겠지만.
의뢰서에 첨부된, 에샤의 중앙도서관에서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두오막스의 위험도는 일곱 마리 가운데 중하 정도였다. 그만큼 위험한 생물들이 '분실'된 것이다. 지안의 군사와 치안을 책임지는 제1자문위원이자 에우고의 대장이라면 바빠 마땅하지. 안 바쁘면 세금도둑이잖아. 그러니 제발 이번 사태 때문에 바쁜 것이기를 바라요, 카스발. 아니면 진짜 쿠얌구덩이에 던져버릴 거야.
꾸웅?
깨끗하게 두쪽으로 갈라진 두오막스에서 흘러나온 피웅덩이에 코끝을 대고 냄새를 맡던 쿠바카가, 축 늘어진 큼직한 귀를 쫑긋거리며 메리디아나쪽을 바라보았다.
"응? 왜? 혹시 엄마가 소리내서 생각하는 소녀스러운 버릇이라도 있..."
"오우, 노오오오!"
쿠바카의 시선 끝, 메리디아나의 어깨 너머에서 비단을 좍좍 찢는 것처럼 새된 비명이 들려왔다. 죽은 두오막스가 무서운 듯 엄마 다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던 야무키가 화들짝 놀라 갸웅... 낮게 울었다.
"이 무슨 테러블한 광경이람! 마이 아이즈! 마이 아이즈!!"
"하필 이럴 때..."
메리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그 목소리가 누구 것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굳이 돌아본 것은, 에샤의 잘 정돈된 포석鋪石이 부서지도록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탁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고 있는 거대한 누에 애벌레에게 들이받히는 불운하고도 불쾌한 사고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두오막스! 마이 베르논 카피투시안 두오막스!! 아아, 원 피스 두오막스가 투 피스 두오막스가 되다니! 죽음의 데스를 맞이하다니! 트래지디! 마이 트래지디!!"
꾸우웅?
"안돼, 쿠바카. 물러나."
맹렬한 기세로 굴러온 크고 포동포동하고 하얗고 시끄럽고 꾸물꾸물 움직이는 물체에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려던 쿠바카가, 메리디아나의 단호한 제지에 아쉬운 듯 무춤무춤 뒤로 물러났다.
"대체 누가 두오막스를 이런 테러블한 꼴로 만들었지요? 누구죠? 누구예요! 후!!"
여섯 개의 앞다리로 얼굴을 가린다, 뒷목을 잡는다, 허공에 주먹을 휘두른다, 바쁘게 움직이면서, 시엔화룽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서 이쪽을 보고 있는 - 에샤 지구의 거주자답게(?) 현명한 - 주민들과 메리디아나를 무심히 스쳐 지나간 시선이 쿠바카와 야무키에 닿은 순간 번쩍, 말 그대로 번쩍번쩍 빛났다.
"카푸슈나! 그렇다면 당신이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군요!"
"우리, 구면입니다만?"
"알 게 뭐에요! 지안에 휴먼은 많지만 카푸슈나는 온리 투! 베리베리 프레셔스라구요!"
"아, 네, 영광입니다. 아무튼 안 팔아요."
"루드한 레이디 같으니!!"
바로 지난 주에 '스마트한 비즈니스'를 제의했다가 '바이올런스한 리젝션'에 봉변을 당한 기억이라도 떠올랐는지, 시엔화룽은 얼굴을 부풀리며 화를 냈다. 아, 그러니까 한동안 만나기 싫었는데. 메리디아나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만큼 위험한 '분실물'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자기는 절대 밖에 안 나올 줄 알았더니 무슨 배짱으로 저러고 다닌담. 설마 자기를 미끼로 써서 그놈들을 불러내려는 건 아니겠지?
"그래서 두오막스를 해친 건 당신인가요?!"
"아, 댁의 두오막스가 중앙도서관의 사서를 해치려고 하더라고요."
"맙소사, 이 얼마나 새비지한 레이디인가! 당신이라면 소드를 쓰지 않고도..."
여섯 개의 불끈 쥔 주먹을 치켜들고 격렬히 항의하던 시엔화룽이 갑자기 말을 뚝 멈췄다. 왜 저래? 메리디아나는 시엔화룽이 바라보는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거리 저편의 골목에서, 만물상이 항상 데리고 다니는 햄스터 총각이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껑충껑충 뛰고 있었다. 힉스랬지? 저 녀석도 오늘 쳇바퀴 돌리듯 바쁘군.
"흐, 흥! 지금은 바쁘니까 비즈니스 토킹은 다음에 하도록 하죠!"
"비즈니스고 뭐고...흠."
메리디아나가 뭐라고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시엔화룽은 달려왔을 때만큼이나 다급하게 힉스가 부르는 쪽으로 달려갔다. 심지어, 방금까지 격렬하게 항의하던 두오막스의 시체조차 수습하지 않았다. 수상하다. 더할 나위 없이 수상하다. 아무래도 시엔화룽이 에우고에 알리지 않은 정보가 더 있는 게 아닌지 닥달해야겠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메리디아나는 시엔화룽이 사라진 골목을 향해 달려갔다. 두 마리 카푸슈나가 겅중겅중 따라왔다.
꾸웅?
"아니야, 쿰. 놀러 가는 거 아니야."
갸우우...
"미안미안. 그치만 한 번 더 이야기해야 해.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는 안 보게 해줄께, 얌."
두 마리 카푸슈나를 어르고 달래는 찰나에 이미 골목에 다다랐다. 막 골목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베리 사납잖니! 힉스!!"
"그, 예삐는 제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일단 좀 물러나시고..."
"무슨 풀리쉬한 소리를 하니! 이렇게 당장! 이미디어틀리! 잡으란 말야!"
"대인님!"
"꺄악! 이 녀석이 나를 물었어!!"
"안돼요, 대인님!!"
"못된 것! 이 못된...꺄아아아아아악!"
예삐? 지금 예삐라고 했어? 메리디아나는 깜짝 놀라 뛰어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쿠바카가 그녀의 옷자락을 덥석 물고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얘가 왜 이래- 하면서도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고,
"으아아!!!"
"힉스?!"
안 그랬으면 부딪혔을 방향에서 커다란 햄스터가 뛰어, 아니, 굴러 나왔다. 구르다 못해 가까운 가로등에 부딪혀 멈춘 힉스가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아, 그러면 안된다니까, 예삐야!"
"꺄아아아아-"
갸우웅-!
어디선가 들려온 새된 비명소리에, 드물게 쿠바카보다 야무키가 먼저 반응했다. 검은 카푸슈나가 달을 향해 짖는 늑대처럼 높고 새된 하울링을 올리자, 금색 카푸슈나가 메리디아나를 끌어당기느라 땅에 붙였던 엉덩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쿠우웅!!! 그것은 쿠바카가 지금까지 장난으로 짖던 것과 다른 묵직하고 사나운 울음이었다.
"헬프 미! 레스큐 미!! 세이브 미!!! 살려줘요!!!!!"
그에 대답하듯 요란한 외침이 꼬리를 끌며 불쑥 솟아올랐다. 메리디아나는 재빨리 왼쪽 허리에 찬 장검에 오른손을 댔다. 머릿속에서 아까 읽었던 예삐 - 이모크세티온 세티롭스의 정보가 빠르게 흘러갔다.
이모크세티온 세티롭스.
포유류 개과. 잡식성.
모크세티온 차원에서만 발견됨.
해당 차원을 비롯, 다른 많은 차원에서 발견되는 포유류 개과 대형견종과 외형 및 생태가 유사하다.
머리가 셋이며, 세 개의 머리가 서로 다른 인식체계를 지닌 개별 개체이다.
이모크세티온 세티롭스의 머리 중 중앙에 있는 것은 평생 잠을 자며, 나머지 두 개가 생물로써 공생하며 존재한다.
중앙의 세 번째 머리는 매우 난폭하며, 깨어났을 때 아직 연구되지 않은 작용에 의해 신체가 비약적으로 거대화되며, 필연적으로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활동을 한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모크세티온 세티롭스에 대한 깊은 연구는 진행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의 세 번째 머리가 깨는 것은 물리적인 타격으로 인한 고통, 중증의 질병, 중증의 스트레스 등이 원인이라고 한다.
세 번째 머리가 깨어났을 때의...
"예삐야...어떡해...우리 예삐...대인님...히이잉...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한댔는데..."
등 뒤에서 햄스터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 털뭉치가 우는 거에 약한데. 내심 힉스가 마음에 들었던 메리디아나는 혀를 찼다. 중앙도서관 앞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나즈막하고 올록볼록 앙증맞은 스카이라인 위로 크고 시꺼먼 개 머리가 불쑥 솟아올라 있었다. 울먹이는 왼쪽 머리, 화가 난 듯 시선을 돌린 오른쪽 머리, 그리고 흉폭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흔드는 가운데 머리의 입에는,
"하지 말라니까, 예삐야! 그냥 한 대 살짝 때린 거잖니! 우리 말로 하자, 응? 말로 하자구!!"
송곳니에 걸린 비단 조끼가 찢어질까봐 바둥거리지도 못하고 덜덜 떨면서 외치는 시안화룽이 있었다. 살짝 좋아하네. 타이쿤에 매달고 지안을 세 바퀴 반 도는 걸로 되겠어? 그때 쓸 로프를 줄로 쓸어놓을 테다.
쿠우우...
"그래, 쿰."
엄마를 보호하듯 한 발 앞에서 머리를 낮추고 목을 울리는 금색 카푸슈나를 도닥이며, 메리디아나는 보고서의 마지막 단락을 떠올렸다.
세 번째 머리가 깨어났을 때의 대비책은 다음과 같다.
1. 살해한다. (주:거대화한 이모크세티온 세티롭스는 매우 흉폭하며 또한 강력하다)
2.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린다. (주:얼마나 걸리는지 실험한 결과는 보고된 바 없다)
3. 물에 빠뜨린다. (주:이모크세티온 세티롭스는 물놀이를 매우 좋아한다)
"우리, 아무래도 지금부터 쟤랑 놀아야할 것 같다."
갸우.
야무키가 한숨을 쉬었다.
***
"카스발 대장님! 긴급보고입니다!!"
"뭔데. 나 바쁜 거 지금 안 보이냐."
"이모크세티온 세티롭스가 발견되었습니다!"
"죽었냐?"
"아닙니다!"
"뭐야, 설마 그 기지...스펠라에우스 대필사가 죽었나?"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뭐야!"
"에샤 지구에 가까운 지안 호수의 수면에서 이모크세티온 세티롭스 한 마리, 카푸슈나 두 마리, 주민 두 명을 발견했습니다!"
"주민 두 명?"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 대필사와 시엔화룽 대인입니다!"
"대인 좋아하네. 걔네 거기서 뭐 하고 있는데?"
"에...저...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큰소리로 또박또박 말하지 못해? 나 지금 바빠서 신경 사납거든?"
"죄송합니다! 물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큰소리로 또박또박 제대로 말해, 임마."
"죄송합니다! 이모크세티온 세티롭스 한 마리와 금색 카푸슈나 한 마리가 얕은 물가에서 시엔화룽 한 명을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
"대장님?"
"당장 건져."
"넵! 알겠습니다!"
-END.
ps. 지안의 호수에서는 아무 것도 뜰 수 없다는 설정이지요! '물놀이'라는 단어가 그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에 마지막 단락을 수정합니다:3
아, 완전 귀찮아.
카두리칸두르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는 곰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젊은 시절 방랑자라고 자처할 정도로 많은 곳을 여행한 메리디아나였지만, 거인의 등뼈를 넘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등뼈를 지키던 서리거인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사람이 밟은 적 없는 옛길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 사실 제집이기도 했다 - 산양 등에 흔들리며 까마득한 고산준령을 넘는 것은 힘들기도 하거니와 재미있고도 보람찬 경험이었다. 산맥의 가장 높은 곳에서 본 노을, 원령에게 습격 당해 일행을 셋이나 잃었던 밤, 그리고 살아남아 본 아침해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터였다.
등뼈를 남긴 거인의 눈물로 이루어졌다고 전해지는 쿠무야무 사막을 건너, 드디어 도착한 카두리칸두르는 고생과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오아시스였다. 눈이 닿는 곳, 발이 닿는 곳마다 낯설고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 투성이였다. 매끄러운 갈색 피부의 미인들, 정교한 탑파와 조각상, 신기한 동물과 아름다운 꽃들, 향기로운 찻물이 쪼르륵 흘러넘치면 은은한 음악이 연주되고, 산들바람에 복잡하고 정교하게 수놓인 차양 끝의 방울이 딸랑딸랑 울린다. 균형과 조화의 여신 쿠쿠야미르를 섬기는 신전도시인 만큼 사람들은 경건하고 선량하며, 도시는 평화롭고 차분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와 찬양과 예배와 공양이 끊이지 않았다.
처음 예정대로 친선사절의 고문이기만 했다면, 메리디아나는 체류하는 달포 내내 카두리칸두르의 풍정에 흠뻑 젖은 나머지 자신을 동굴에서 끌어내 여기까지 던진 황제 폐하마저도 용서할 수 있을 터였다. 처음 예정대로 친선사절의 고문이었다면, 다시 말해 친선사절의 대표격인 고위 귀족을 거인의 등뼈 정상에서 둘이나 잃는 바람에 직급과 호봉(!)에 따라 메리디아나에게 친선사절의 부대표 역할이 돌아오지만 않았어도.
"뭐? 무슨 의례? 지금부터 두 시간 동안은 아무 예식도 없는 거 아니었어?"
"원래는 그런데요. 오늘 아침에 카푸슈나가 새로 태어났대요. 축하 의례가 있다고 참석하시랍니다."
"아, 무슨 강아지 태어난 걸로 의례까지 해. 거기다 외국 사절은 왜 부르고."
"서기관님, 제발 말씀 좀 골라하세요! 카푸슈나는 카두리칸두르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개라고 몇 번 말씀드려요! 게다가 일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하는 드문 일이라고, 좋은 때 오셨다고 운이 좋으시다고 일부러 초대한 거란 말입니다."
"그놈의 카푸슈나, 신성하다고 구경도 못 하게 했으면서 털도 안 난 핏덩이는 왜 또 보여주려고. 나 아프다 그러고 걍 빠지면 안되냐?"
"스펠라에우스 서기관님!"
"아, 가기 싫단 말야!"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하시는 거에요! 지금 서기관님은 개인의 신분이 아닙니다! 제국을 대표하시는 몸이란 말입니다!!"
황실수호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청년이 손을 허리에 척 얹고 눈을 부라렸다. 여행을 떠난 뒤 호구조사를 하여 보니 할아버지가 사관학교 후배라, 오는 내내 이뻐해줬던 '꼬맹이'가 이리 까탈스레 예의범절을 따지며 - 심지어 올리비에 고오글레보다 더! - 시집살이를 시킬 줄은 몰랐던 메리디아나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너 할아버지 판박이라며! 니네 할아버지가 얼마나 날라리였는데!!!
"당장 예복 갈아입으시구요, 10분 뒤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야, 나 진짜 아플 거 같은데."
"네네, 이번에도 조시면 정말 뒤에서 꼬집을 겁니다. 그럼 많이 아프실 걸요."
저놈의 말본새! 제국의 인륜이 땅에 떨어졌구나!! 메리디아나는 과장된 동작으로 가슴을 부여잡으며 침대 위로 털썩 쓰러졌다. 또 뭔 예식을 한다고? 모처럼 금쪽 같이 빈 시간에 눈 좀 붙일랬더니!
카두리칸두르가 쿠쿠야미르 여신을 섬기는 신전도시인 것,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와 찬양과 예배와 공양이 끊이지 않는 것이 바로 문제였다. 자기네끼리 하면 또 몰라, 대국에서 처음으로 온 사절이라고 존중한답시고 매번 불러내서 뭐든지 가르쳐 주고 같이 하자 그런다. 카두리칸두르의 시민들에게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숨쉬듯 자연스럽게 행하는 일상일지 몰라도, 오랜 세월 야생의 곰처럼 저 편한대로 먹고 자고 늘어져 살았던 메리디아나에게는 눈 떠 보니 서커스, 다시는 안 하겠다고 오래 전 때려친 곡예를 다시 하라고 철썩철썩 자, 당근 - 이나 다름없는 청천벽력 같은 사태였던 것이다. 하루 동참했으면 됐지 왜 담날도 또 담날도 같이 하재? 난 좀 더 자고 싶다고! 신전 바깥도 보고 싶다고! 정갈한 신전음식도 좋지만 이 도시 사람들이 평소 먹는 음식도 먹어 보고 싶고, 신관들 말고 평범한 사람들도 만나 보고 싶고, 내가 걷고 싶을 때 걷고 뛰고 싶을 때 뛰고 쉬고 싶을 때 쉬고 싶다고! 왜 졸졸 따라다니면서 이리 와라 저리 가라 이거 해라 그거 하지 말라 난린데!!!
쀽. 메리디아나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웃기는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후...그래서 내가 지금 이러고 있다. 불쌍하지? 나 진짜 불쌍하지?"
갸웅? 검정 강아지 - 생김새가 어리다는 것이지, 크기는 어지간한 사냥개 성견만했다 - 가 새까만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아, 귀여워! 견디다 못한 메리디아나가 덥석 끌어앉자, 두툼한 앞발로 그녀의 무릎을 짚으며 촉촉하고 말랑한 코끝으로 뺨을 문지른다.
"응응, 그래요. 위로해 주는 거야? 착하구나."
꾸웅! 꾸우웅!! 꾸웅!!
그때 다른 코끝이 웅크리고 앉은 메리디아나의 허리를 찔렀다. 아프다, 이놈아! 돌아본 시선 끝에 텁! 무릎에 얹히는 두툼한 크림색 앞발이 있었다. 똑같이 어려 보이기는 하지만 검정 강아지보다 좀 더 크고, 크림색 털에 호박색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녀석이었다.
꾸웅! 꾸웅!!!
"너는 임마, 사람이 신세한탄을 하는데 놀아 달라는 거 말고 할 말이 없니?"
꾸웅!!
아, 그러세요. 그럼 내놔라, 이놈아. 메리디아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자, 크림색 강아지는 물고 있던 헝겊공을 그 위에 떨어뜨렸다. 어깨를 낮추고 꼬리를 풍차처럼 휘저으며 기다리다가, 정원 저편으로 던진 공을 따라 시위를 떠난 살처럼 쌩하니 달려간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했건만 지칠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과연, 카푸슈나가 한낮 햇살처럼 밝고 활발한 견종이라더니. 네발모피짐승을 사랑해 마지않는 메리디아나의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넘쳤다.
그런데 이 녀석도 카푸슈나인가? 메리디아나는 품안으로 파고드는 검정 강아지를 꼬옥 안아주었다. 쿠쿠야미르 신전에서 카푸슈나 아닌 개를 키울 거 같지는 않은데. 까만 카푸슈나도 있나? 아까 둘이 어울려 노는 걸 보니 한배 같던데, 얘는 왜 이리 얌전하고 애잔하누. 그래그래, 내가 좋아? 나도 네가 좋다, 이 녀석아.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숙소를 나와 정처없이 걷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물어볼 사람 하나 없는, 나지막한 담장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정원에 도달해 곤란해지기 전에 돌아가야 하나 머뭇거리는데, 멀리서 지네끼리 뒹굴고 있던 강아지 두 마리가 신나게 달려와서 놀아달라 안아달라 성화를 부렸던 것이다. 메리디아나는 녹음 짙은 무화과 둥치에 기대고 주저앉아, 연신 공을 던져 크림색 강아지와 놀아주는 한편으로 검정 강아지의 고실고실한 털에 뺨을 부비며 신세한탄을 계속했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엿먹으라고 보낸 건 아닐 거야. 기집애가 그렇게 머리가 좋지는 않거든. 지네 아빠를 안 닮아서...자, 던진다!...목숨 구해줬으면 됐지, 그때 치맛자락 뒤집어진 거 바로 안 해줬다고 두고두고 원망하는 거 있지, 뒤끝 쩔어요. 생긴 건 지네 아빠 판박이인데...오냐, 오냐, 줘야 던지지...성격은 원단 지네 외할아버지야. 아오, 재수없는 브레넨 후작 핏줄...!"
"서기관님! 대체 어디 가셨어요? 서기관님!!"
"윽!"
메리디아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머리를 숙였다. 정원을 둘러싼 담장 너머로 임시 보좌관 녀석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게다가 들리는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고,
"스펠라에우스 님! 어디 계시옵니까? 스펠라에우스 님!!"
"쿠바카! 그만 나오세요! 쿠바카!!"
"야무키!!"
"아아, 다들 어디에 계신 것이어요!!"
뭐야, 너네도 도망친 거였어? 메리디아나가 어이없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갸웅?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갸웃거리는 검정색 눈동자와, 꾸웅...잘못했다는 듯 귀를 늘어뜨리지만 여전히 반짝이는 호박색 눈동자. 메리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두 마리를 덥석 - 그러기에는 좀 버거운 부피였지만 - 끌어안았다. 으아아, 세상에 어디서 이런 귀여운 생물들이!!!
"서기관님! 정말이지 못 말린다니까! 당장 나오시라구요!! 진짜 이번에는 저도 가만히 안 있을 거에요!!!"
그 좋은 분위기를 잔뜩 성난 목소리가 깨뜨렸다. 쀽. 뭐? 가만히 안 있어? 그럼 어쩔 건데? 잔소리 말고 뭐? 밥 굶길 거야? 종아리 때릴래? 반성문? 벌 세울 거야?
"오늘 참석하셔야 하는 의례가 몇 개인 줄 아세요? 친선사절이면 국격을 갖추셔야죠!!"
쀽쀽.
아, 완전 귀찮아.
꾸웅? 크림색의 쿠바카가 귀를 쫑긋했다.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처음 보는데도 마치 얼마 전에 어디론가 가버려서 다시 안 오고 있는 엄마처럼 다정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인간이 입은 옷의 솔기가 투둑투둑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갸우웅...검정색의 야무키가 짤막한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녀를 쓰다듬어 주던, 처음 보는데도 마치 얼마 전 엄마와 함께 사라져버린 아빠처럼 상냥하고 포근한 인간의 좁은 품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넓고, 푹신하고, 부슬부슬하고...
"흥이다. 그놈의 먹지도 못할 국격."
자그마한 정원이 좁아 보일 정도로 큼직한 곰이 은청생 모피에 엉겨붙은 천 쪼가리를 푸르르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크다! 우리랑 같다! 놀아주려다 보다!! 신난 쿠바카가 머리를 낮추고 꼬리를 회오리바람처럼 맹렬하게 뱅글뱅글 돌렸다. 크다...푸근해...따뜻해...야무키가 큼직하고 굵직한 앞발에 머리를 부볐다.
"하암...얘들아, 나 졸리다...어디 오래오래 잘 데 없을까? 우리 같이 코- 자자."
꾸웅?!
갸우웅...
'잔다'는 말에 쿠바카는 실망한 듯 귀를 늘어뜨리고, 야무키는 까만 눈을 반짝였다. 품을 벗어난 야무키가 어디론가 겅중겅중 뛰어가는 모습이 어설프면서도 사랑스러워, 메리디아나는 코끝을 울리며 어슬렁어슬렁 그 뒤를 따라갔다. 꼬리를 떨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쿠바카가 저만 남을 수 없다는 듯 서둘러 달렸다. 메리디아나를 제치고, '아까는 분명히 없던 문'으로 들어가는 야무키의 뒤를 따른다.
...아까는 분명히 없던 문?
곰이 멈칫 발을 멈췄다. 무성한 나무와 수풀 뒤에 가려진 담장에 문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나무나 쇠가 아닌, 진흙으로 구운 질그릇처럼 투박하고 광택없는 문짝이 빼꼼 열린 틈으로 야무키의 짤막한 까만 꼬리가 짤랑짤랑 흔들리며 사라지고, 그 뒤를 질세라 쿠바카가 덜컥 뛰어들어가며 문이 활짝 열렸다. 문을 지나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한 풀냄새와 산뜻한 숲내음을 전해주었다. 사막 한가운데의 오래된 오아시스 도시 카두리칸두르에서는 맡을 수 없는, 뼛속까지 방랑기질이 스며든 메리디아나마저도 향수를 느끼게 하는 그런 바람이었다.
꾸웅? 꾸웅!!!
갸웅...갸웅! 갸우웅!!
잠시 머뭇거리던 메리디아나를 재우치듯 문 너머에서 두 마리 카푸슈나 강아지의 부름이 들려왔다. 어서 오지 않고 뭐하나며 엄/마/를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 그래, 까짓것. 간다, 가. 메리디아나는 큼직한 입가에 넉넉한 미소를 떠올리며 문지방에 앞발을 걸쳤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듯 작은 문이었지만 앞발이 쑥 빨려들어가며, 수월하게 지나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는 그녀의 차원인 '신들의 주사위 놀이판'을 떠나 지안으로 왔다.
-오오, 이번 방문객은 사랑스러운 아가씨들이로군? 이거야 참, 이 오빠가 10년만 더 젊었다면 같이 놀아주었겠다만, 지금은 어른들의 은밀한 시간이니 어린 아가씨들과 어울릴 수가 없어 유감이구나!
-저어, 카스발...
-오오, 내 사랑, 내 눈동자보다 소중한 보석이여! 그대의 음악 같은 목소리로 부르는 내 이름은 참으로 신선하구려!
-카스발...저기, 난 이렇게 큰 동물은 좀...
-아아, 작은새처럼 가련하게 떠는 모습조차 이토록 사랑스럽다니!
-카스발!!
-아아, 내 사랑은 화내는 모습조차 에레크니아 세메렌 하타투스처럼 아름답군!
-야!!
-으하하, 알겠소, 알겠소. 그러면 내가 이 아가씨들과 놀아주고 있을 테니, 저쪽 방에 가서 입국신청서를 가져다 주겠소, 내 여인이여? 그대의 앙증맞은 발이라면 금방 다녀올 수 있을 터, 간 김에 통역기도 잊지 말구려.
-그, 그 개, 애들 나한테 들이대지 않게 잘 잡고 있어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낯선 언어였다. 경박스럽게 떠드는 남자 목소리, 두려움과 짜증에 떨리는 여자 목소리. 여기는 어딜까? 메리디아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실내였지만, 다행히도 천장이 없어 거대한 곰의 몸으로도 서 있을 수 있었다. 원통형의 벽을 따라 책장과 벽장이 늘어섰는데, 거미줄이 쳐진 낡은 책이나 뭔지 알 수 없는 도구 따위가 가득 차 있었다. 오랫동안 버려진 채 쓰이지 않았던 것 같은 공간이, 여러 개의 창문으로 비치는 희미한 날빛에 더욱 스산해 보였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어디를 갔담? 쿠바카? 야무키?
"엄마! 여기!! 이쪽!!"
"이리 와요, 엄마...여기 신기해..."
제일 신기한 것은 두 마리 카푸슈나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다는 것이었지만, 메리디아나는 더 이상 이성적으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졸렸던 것이다. 겨울잠에 빠질 시각에서 6분이나 지났다. 아, 애들만 찾아서...자야겠다...눈이 반쯤 감긴 곰은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삐걱-삐걱- 육중한 발 아래에서 낡은 마룻바닥이 비명을 질렀다.
-으헉?!
"...비켜..."
-고, 곰?!
"비키라고..."
문틀에 걸린 거적때기를 젖히고 지나가자, 그쪽은 그래도 좀 사용된 흔적이 있는 침실이었다. 방 한가운데 더블베드보다 조금 더 큰 침대가 제법 푹신한 이부자리를 갖추고 깔끔하게 차려져 있었다. 좋아, 여기면 되겠군. 메리디아나는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쿠바카와 놀아주다 말고 자신을 향해 경악의 비명을 지른 - 옷을 좀 덜 입은 - 화려한 금발의 남자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침대 위로 어기적어기적 올라갔다.
우지끈!
-이봐! 침대가 부서졌잖아!
"어, 침대 부서졌네..."
-여기는 내 사랑을 위한 보금자리다, 이 짐승! 당장 물러나지 못할까!
"미안...졸려서...아함...나중에 얘기해요..."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반쯤 잠에 빠진 메리디아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침대 틀은 무참히 부서졌지만, 워낙에 이부자리가 푹신하여 배기지 않았다. 꿈지럭꿈지럭 편안하게 웅크린 곰의 품으로 야무키가 하품을 하며 기어들어갔고, 시시하다는 듯 코를 울린 쿠바카는 남자에게 계속 놀아달라 칭얼거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시꺼러워러ㅏ..."
날카로운 하이톤의 비명은 겨울잠에 취한 곰마저 눈을 뜨게 만들었다. 풍성한 잿빛 머리칼 사이로 쫑긋 솟은 고양이귀가 사랑스러운 여성이, 동공이 세로로 갈라진 황금색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자신을 향해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 하나가 더 늘었어! 곰! 곰이야!!!"
"오오, 진정해요, 필리스, 내 심장 같은 여인이여! 내가 이 짐승들을 당장 쫓아낼 테니, 아무 걱정 말고 이 카스발 이즈나블을 믿어 주시오!"
"...메리디아나..."
"응? 지금 곰이 말을 한 건가?!"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만나서 반가워요...필리스...카스발 이즈나블..."
곰이 자기소개를 했어?! 필리스와 카스발은 경악하여 서로를 바라보았고, 곧 필리스가 손에 든 불 붙은 향초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아타페 지구의 입국공무원이 재미 삼아 만든, 향기로 공간을 물들이는 통역마법의 매개체였다.
"설마, 이 곰이 여행자? 개들이 아니고?!"
"걔네는...내 애들..."
"애들? 개가 곰의 애들?!!!"
필리스와 카스발은 더더욱 혼란에 빠졌다. 대체 생태계가 어떻게 생겨먹은 차원에서 온 거야?!
"흠흠, 이거, 실례했군."
명색이 공무원, 그것도 여왕 폐하의 제1자문위원인 카스발은 재빨리 침착을 되찾았다. 모양새야 어떠하건 지안은 모든 여행자를 공평하게 대해야 하는 것이다.
"지안에 온 걸 환영하네, 곰 친구. 내 그대가 지안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돕도록 하지...이것 참 갑작스러운 방문이기는 하지만..."
비록 힘들게 어르고 달래고 꼬셔서 여기까지 데려온 백서른마흔다섯 번째(계산이 이상하다고? 이즈나블 가문은 원래 이래!) 연인과의 공들인 하룻밤이 물거품처럼 날아갈지라도...카스발의 얼굴을 반쯤 덮은 보잉 선글라스 아래 관자놀이의 핏줄이 십자로 꿈틀거렸다.
"...지안...지안...?"
곰이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어...어?"
"꺄아, 세상에!!!"
요란한 소리나 번쩍이는 빛은 없었다. 그저 거대한 은청색 곰의 실루엣이, 마치 반투명한 유리 덮개를 씌운 것처럼 흐릿하게 흔들리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찰싹!
"실망이에요, 카스발 이즈나블! 이 바람둥이!!!"
"피, 필리스 자기? 잠깐만, 이건 내가 꿈꿨던 당신과의 황홀한 하룻밤이 아니라..."
"나만 사랑한다는 당신의 장광설을 믿은 내가 바보지!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욧!!!"
매섭게 카스발의 뺨을 후려친 고양이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하룻밤의 연인이 소리없이 사라진 자리에는 얼얼한 뺨을 움켜쥔 카스발과 벌거벗은 몸을 진보라색 머리칼과 야무키로 겨우 가린 메리디아나가 남았다. 눈앞에서 세기의 로맨스가 깨지거나 말거나, 거대한 곰이 있었던 증거로 크레이터처럼 우묵하게 꺼진 이부자리를 주섬주섬 파헤친 메리디아나는, 편안한 구덩이를 만들더니 진짜 곰처럼 그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게 아닌가. 기가 찬 카스발이 그렇게 해서 생긴 이불의 산을 발로 툭툭 찼다.
"이보셔요, 아가씨? 좀 일어나 보시지?"
"어, 죄송...제가 좀 피곤해서...한잠 자고 이따..."
"뭐? 야, 지금 이 상황에서 잠이 오냐? 확 덮쳐버린다?!"
그것은 페미니스트이자 박애주의자인 카스발이 여성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욕설이었다. 하지만 이부자리 안의 여자사람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해볼 테면...확...곰변한다..."
"이, 이 곰탱이가?!"
"시끄럽네...쿠바카...아저씨랑 놀아..."
꾸웅!!!
"으악! 저리 가! 이거 먹으면 안돼! 입국신청서라고!! 야! 메리디아나랬냐? 일어나! 일단 입국신청서부터 서명해! 일어나라고!!"
카스발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이불더미 틈으로 손이 꾸물꾸물 빠져나왔다. 펜을 쥐어주자, 손끝으로 바닥에 놓인 서류를 더듬더듬하더니, 놀랍도록 유려한 서체로 정확히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다. 어라? 검 좀 쥐어본 손일세? 카스발의 눈이 이채를 떠올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야! 일어나! 이대로 자면 안된다고!!"
꾸웅! 꾸우웅!!!
"이 멍뭉이는 어쩌란 말이냐!!!"
"...놀아...줘..."
갸우우...
그것이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와 카스발 이즈나블의, 지독하게 썩은 인연을 시작하는 첫 만남이었다. 덧붙이자면, 쿠바카가 낯선 놀이터에서 새로운 놀이상대와 신나게 뛰어노는 동안, 메리디아나는 정말로 사흘밤낮을 그대로 잤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END.
* 곰변이 풀린 메리디아나가 그래도 사흘밤낮을 잔 것은, 지안으로 이동하면서 피로가 쌓인 덕분이라고 해둡니다.
** 이 집은 카스발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뒤 여자 꼬시는 용으로 놔둔 폐가인데, 나중에 메리디아나가 은행 대출을 받아 산 다음 개조하여 대필소 겸 집으로 쓰고 있습니다. 물론 보증인은 카스발:3
*** 이런 사연으로 메리디아나는 카스발을 하찮게 보고, 카스발은 메리디아나를 여자로 안 본답니다ㄲㄲ
(※[1/리비] 흰 꺽다리, 쫓겨 달리다.에서 이어집니다)
시엔화룽이놓친'상품'이예삐한마리가아니라는거왜아까는말안했죠저런게몇마리나더있는거에요한번사라졌으면어디쳐박혀서월급값이나열심히할것이지여기는왜얼굴을디밀었어요방금리비한테뭐라고했죠내가두오막스잡는거숨어서보고있었죠변명은금물이라는거알아요몰라요내가곤란해지면멋진척나타나려고한거잖아요오늘진짜내손에죽을래요쿠얌구덩이에빠질래요난에우고소속아니라고몇번을말해야...
"어, 어...저기...저...저는 이만 가봐도 될까...요...네? 되죠오...?"
모브 리비라고 자신을 소개한, 멋지개 두오막스의 미끼가 되어 주었던 히여멀건 청년이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리며 필사적으로 끼어들었다. 두 손을 허리에 척 얹고 무표정한 얼굴로 문장부호 하나 없는 문장을 단조롭게 쏘아붙이던 메리디아나가 휙 돌아서더니,
"아, 가시게요? 이것 참, 만나서 반가웠어요, 모브 씨."
꾸웅! 꾸웅!! 갸우웅...
가, 같은 사람인가?! 자신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내미는 메리디아나를 본 리비가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메리디아나는 리비의 손을 덥석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언제 우리 대필소에 놀러 오세요. 저도 도서관 들르게 되면 인사드릴게요."
"아, 네, 네...리비라고 부르셔도 되는데요...저...스펠라에우스 씨?"
"어머나, 좋은 분이시네. 메리디아나라고 부르세요."
메리디아나가 활짝 웃었다. 그녀가 초면에 자기 이름을 멋대로 '메리'라고 줄여 부르는 사람을 엄청나게 싫아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리비는 자기가 지금 얼떨결에 좋은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하자면 졸린 곰의 귀 뒤를 긁어준 것 같은...음, 음, 나쁜 기분은 아닌데?
"그럼 다음에 만나요~"
"네, 다음에 뵈어요. 안녕히 가시고...저...음, 조심 하세요."
'예삐'가 뭔지 몰라도, 맥락으로 봐서 두오막스와 같이 도망친 시엔화룽의 수입품 중 하나겠지. 그렇다면 아무리 두오막스를 단칼에 가른 실력자라도 조심하는 게 맞다. 리비의 참으로 선량하고 예의바른 인사에, 메리디아나는 자기보다 크고 자기보다 가느다란 청년이 휘청거릴 정도로 등짝을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는 것으로 응답했다.
"괜찮은 사람이었어, 그치?"
연신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리비를 보며, 메리디아나가 두 마리 카푸슈나에게 말했다. 꾸웅!! 리비의 다리가 길쭉길쭉하여 매달려 놀기 좋아 보였던 쿠바카가 격렬하게 동의했다. 갸우웅...리비의 손이 큼직하여 쓰다듬어 주면 기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야무키가 다소곳이 동의했다. 좋았어. 다음에 '스위치'가 꺼졌을 때 쿠얌이 놀아달라고 하면 리비한테 보내야지. 매우 타인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민폐스러운 미래설계를 마친 메리디아나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리비는 괜찮은 녀석이지. 선남선녀를 서로 소개해주게 되어 나도 기쁘군."
"아직 있었어요?"
"야, 너 왜 나한테만 냉정한 건데?"
"대체 왜 시엔화룽이 놓친 '상품'이 예삐 한 마리가 아니라는 거..."
"흠흠, 나도 이만 실례하겠네."
"호수에나 빠져 버려요."
재빨리 자리를 피하는 카스발의 등짝을 향해, 메리디아나는 척 들어올린 엄지손가락을 포물선을 그리며 아래로 내리는, 참으로 지안 주민다운 폭언을 퍼부었다. 그리고 막 돌아서는데,
"꺄아아아아-"
갸우웅-!
저 멀리서 들려오는 새된 여자의 비명소리에, 드물게 쿠바카보다 야무키가 먼저 반응했다. 검은 카푸슈나가 달을 향해 짖는 늑대처럼 높고 새된 하울링을 올리자, 금색 카푸슈나가 귀를 쫑긋 세우며 질펀하게 앉아 있던 엉덩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쿠우웅!!! 그것은 쿠바카가 지금까지 장난으로 짖던 것과 다른 묵직하고 사나운 울음이었다.
"와우, 진짜 크네."
쿠우우...
"그래, 쿰. 우리 이제부터 쟤랑 놀 거야."
그러니까 밥 먹고 바로 운동하는 거 안 좋은데. 투덜거리며, 메리디아나는 언제든지 뽑을 수 있도록 장검 손잡이에 오른손을 얹은 채 정면 - 위를 응시했다. 세 개의 머리가 올록볼록 앙증맞은 지안의 스카이라인 위로 불쑥 올라와 있었고, 그 중 하나의 입에는...
-께속.
※동굴곰이 어제 라식수술을 하여 지금 반 장님입니다ㅠㅠ 일단 여기까지.
"계세요? 계시죠? 계시는 거 다 알아요! 문 열어 주세요!! 열어 달라구요!!"
멀리서 문 두드리는 소리, 열어달라 외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끄으응- 메리디아나는 벽쪽으로 돌아누워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썼다. 하지만 그 징징거림은 <스펠라에우스 대필소>가 파묻히듯이 기댄 우듬지 가지를 타고 북소리처럼 둥둥- 그녀의 침실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아, 진짜 누구야...사람 자는데...시끄럽게...
"급한 일이에요! 빨리요!! 문 열어 주세요! 어서요!!"
어지간하면 그만 열어주지...아님 포기하고 가든가...끈질기네...대체 누구야...
"좀 나와 보시라니까요! 메리디아나 씨!!"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뒤척이던 큼직한 이불더미가 움찔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꾸무럭하니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완벽하게 웅크렸다. 못 들었어...난 아무 것도 못 들었어...
"문 부술 거에요! 저도 한다면 하는 햄스터라구요! 메리디아나 씨! 문 열어 주세요! 어서요!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 대필사님!!!"
"...아놔..."
아무리 '스위치가 꺼져 있을 때'라고 해도, 메리디아나에게는 지안의 주민으로 지켜야 할 사회적 지위와 체면과 명예라는 게 있었다. 저기까지 대놓고 불러대면 귀찮고 번거로운 것 이전에 이웃에 폐가 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메리디아나의 침실은 이 집에서 가장 볕바른 3층 바깥쪽 방이었다. 모든 방이 다른 집보다 천정이 2배는 높았고, 특히 이 방은 3배 정도 넓었다. 장방형 방의 한쪽 길이가 전부 창문이었고, 그 아래 어른 남자 다섯 명은 잘 수 있을 것 같은 널찍한 잠자리가 많은 이불과 모포를 들여 푹신하게 꾸며져 있었다. 작은 산처럼 둘둘 말린 이불더미 사이로 곰의 것처럼 생겼으나 그렇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파르스름한 털로 뒤덮인 앞발이 더듬더듬 뻗어나왔다. 이부자리 귀퉁이에 한가득 쌓인 반짝이는 크림색 털뭉치를 더듬어, 둥그스름하고 단단한 것을 찾아냈다. 계속 더듬자, 쪽 곧은 콧잔등 끝에서 살짝 마른 말랑한 코를 찾을 수있었다.
"쿰..."
꾸우웅~ 아마 다른 사람에게는 그 대답이 이렇듯 조금 이상한 개 울음 정도로 들릴 것이다. 이 생물이 길다란 금색 털이 풍성하고 영리한 호박색 눈을 한 커다란 개처럼 보이는 것처럼. 하지만 쿠쿠야미르 여신의 환수 카푸슈나인 쿠바카가 하는 '말'을 정확히 알아들은 메리디아나는 발톱 끝으로 쿠바카의 코를 가볍게 톡 튀겼다.
"됐으니까...나가서 쫓아버리고 와..."
꾸웅?
"싫어...안 나가...귀찮아..."
갸웅...
이번에 '말한' 건 이부자리 발치에 엎드려 있던, 쿠바카보다 조금 작은 몸집에 새까만 털이 짧고 고불고불하게 말린 카푸슈나였다. 흡사 쿠바카와는 다른 견종의 대형견인 것 같은, 하지만 틀림없이 쿠바카의 한배 자매인 야무키가 잠기운에 흐릿한 검은 눈을 꿈뻑거렸다.
"얌, 너까지...급하면 나중에 오겠지...잠 깨니까 말 그만 시키고 빨랑...밥 안 준다..."
꾸우웅...
툴툴거리며 일어난 쿠바카가 통통 뛰듯 발랄한 걸음으로 침실 문 - 이라고 하지만 여기가 지안인 만큼, 언제라도 무심하게 지나다닐 수 있도록 상인방에서부터 내려뜨린 커튼 - 을 밀어젖히고 침실을 나갔다. 야무키는 언니를 따라갈 것처럼 느릿하게 머리를 들어올렸지만, 메리디아나의 앞발이 바닥을 툭툭 치자 이불더미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문 좀 열어 주시라니까요! 진짜 부술 거에요!! 메리디아나 씨! 메리디...아!"
아, 이제 조용해졌네...잘했어, 쿰...문 여는 법 가르쳐주길 잘 했지...이따 일어나면 맛난 밥 줄게...일어나면...
"거 좀, 적당히 일어나시지?"
갑자기 침실 문간에서 들려온 굵직한 남자 목소리에 야무키가 움찔 놀랐다. 하지만 일어나려는 둘째를 더욱 꼬옥 끌어안은 메리디아나는, 여전히 이불더미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단조로운 어조로 느릿느릿 말했다..
"꺄아아치한이다사람살려불법침입이에요공권력남용이야여왕님께이를거야."
"뭐라는 거야, 이 곰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카스발은 문간의 벽에 기대선 채 휘장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 정도의 매너는 있는 남자인 것이다.
"3분 줄 테니까 당장 털가죽 벗고 눈꼽 떼라. 긴급사태야."
"...시발데레..."
"뭐? 너 지금 나 욕했냐?"
"칭찬이거든요..."
이불더미가 투덜거렸다. 길다란 꼬리를 풍차처럼 휘두르며 카스발을 따라온 쿠바카가 어서 일어나라는 듯, 꾸웅! 꾸웅!! 앞발로 이불더미를 툭툭 쳤다.
"저리 가...이 배신자야...저 영감탱이 집에 들이지 말랬지..."
"누가 영감탱이냐, 나이 차도 얼마 안 나면서. 2분 남았다. 혹시 내가 상냥하고 다정하고 로맨틱하게 일으켜주길 바라는 거면 피차 낭비할 시간 없으니 솔직하게 말하라고."
"꺄아아치한이다사람살려..."
"메리디아나 씨!"
"어이, 힉스! 안돼!!"
펄럭. 타타닥. 쿠워엉! 히익! 데구르르. 덥석. 으아악! 텁! 이놈들, 안돼! 얘들아? 따위의 서로 다른 소리가 동시에, 혹은 연달아 들렸다.
"으아아...살려주세요..."
크고 토실토실한 쥐의 매끈매끈 털 아래로 보이는 피부가 시퍼렇게 질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바닥에 드러누운 자기 배를 큼직한 금색 앞발이 누르고, 검은 터럭으로 뒤덮인 주둥이 덕분에 더욱 새하얗게 빛나는 이빨이 목덜미에 닿을락 말락 멈춘 상태였던 것이다. 이불 사이로 비죽이 내민, 햄스터 청년의 얼굴보다 세 배는 큼직한 은청색 곰의 머리를 향해 카스발이 쿠바카와 야무키 못지 않은 순발력으로 뽑아든 총구를 겨누지 않았다면, 아마 두 마리 카푸슈나는 일단 시도한 공격을 성공시킨 다음 '그만!'을 의미하는 메리디아나의 부름에 응했을 것이다.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 내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없으면 하지 마세요. 쿠얌."
꾸웅, 꾸웅! 갸우웅...
"그래, 알았어. 엄마가 나중에 저 커다란 쥐 사다줄게. 지금은 그만. 착하지."
딱히 달래는 것도 야단치는 것도 아닌 무심한 말투였지만, 쿠바카와 야무키는 순순히 힉스를 누르던 발과 물고 있던 입을 떼냈다. 가까스로 놓여난 힉스가 덜덜 떨며 바닥을 구르다시피 카스발에게로 달아났다.
"아파, 임마! 발톱 박지 마!"
"나, 나...무서웠어요..."
"그러니까 내가 밖에서 얌전히 기다리랬잖아."
카스발은 오랜만에 뽑았던 총을 홀스터에 돌리며 발을 탈탈 털어 다리에 엉겨붙은 커다란 햄스터를 매정하게 떼어냈다. 여전히 이불더미에서 머리만 내민 채, 그녀를 지키듯 잠자리 앞쪽에 털썩 주저앉은 쿠바카와 야무키의 목덜미를 슬슬 어루만지며, 은청색 곰 - 메리디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잘 자고 있었는데..."
"팔자 늘어진 소리 하고 있네. 긴급사태라는 말 못 들었냐? 당장 일어나."
"나 에우고 아니거든요...의뢰도 안 받아...귀찮아..."
"나도 너 겨울잠 자고 있을 때 오기 싫었다. 그런데 이놈이 꼭 너한테 맡겨야 하겠다잖냐."
"..."
이제 겨우 반쯤 벌어진 눈꺼풀 사이로, 자수정처럼 짙은 보라색의 - 곰인데도! - 눈동자가 둔중하게 빛나며 카스발 뒤에 숨은 힉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호박석과 흑진주의 눈동자 두 쌍이 자신을 노려보자, 히끅! 히끅! 저러다 숨 넘어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하게 딸꾹질을 한 힉스가,
"우우...너무해요!"
갑자기 앙증맞은 두 손을 움켜쥐고 닭똥...아니 햄스터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래고래 악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손님을 이렇게 핍박하는 게 어디 있어요! 나는 정말 메리디아나 씨한테 의뢰하려고 온 건데!"
"아, 그..."
"메리디아나 씨는 어른이잖아요! 성인이잖아요! 의무에서 도피하면 안되는 거잖아요! 동물은 소중히!! 주인이 잘 돌봐야 하는 거잖아요!"
"그거 틀린 말은 아닌..."
"나도 동물이지만! 메리디아나 씨도 이제 보니 동물이네요! 우리도 동물 사이지만, 말 못하는 동물들은 잘 보호해야 하는 거잖아요! 위험한 동물들은 더더욱 잘 보호해야 하는 거잖아요! 맞죠? 맞아요? 맞다고 해요!"
"어, 맞기는 한..."
"그러면 도와주셔야 하는 거잖아요! 메리디아나 씨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단 말이에요! 이대로 두면 시엔화룽 대인님은 다른 애들이 죽든 말든, 예삐가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실 거라구요! 말도 안돼!! 아무리 값이 다른 애들보다 싸다고 해도 예삐는 그 중에 제일 예뻤다구요! 착했다구요!! 보호해야 하잖아요!!!"
"...쿰."
듣다 못한 메리디아나가 한 마디 하자, 쿠바카가 머리를 낮추고 위협적으로 목을 울리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르르... 그르르? 그르그르.... 뭔지 모르겠지만 언니가 하니까 한다는 듯 어설픈 야무키의 목울림이 불협화음을 연주했다.
"히, 히익!!!"
"발톱 박지 말라니까, 좀!"
그럼 그렇지, 니놈이 뭔 배짱으로 나대나 했다. 카스발은 투덜거리며 완전히 겁에 질린 힉스를 가볍게 걷어차 침실 바깥으로 굴려 내보냈다. 그리고 돌아본 다음, 소리없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절경이다.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폭삭 내려앉은 이불더미 사이로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으로는 모포를 대충 알몸에 휘감으며, 다른 손으로는 흐트러진 진보라색 고수머리를 손빗으로 빗어내린다. 적당히 볼륨감 있는 몸매의 젊은 여성이었으니, 같은 종족의 남성에게는 생물학적 의미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바람직한 광경이었다 - 그러니까 같은 종족에게. 흠, 저 정도면 이모크세티온 세티롭스 정도는 너끈히 해치우겠군. 오래 전부터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를 여자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암콤으로 인식하고 있던 카스발 아즈나블이 냉정하게 판단했다.
"예삐가 뭐예요?"
그리고 메리디아나는 힉스가 햄스터 옥수수 쏠듯 쏘아붙인 단어의 홍수에서 가장 핵심적인 한 단어를 건져내는 것으로 그 판단에 호응했다.
"개."
"예뻐요?"
"머리가 세 개니까 그 중 하나는 예쁠지도? 난 직접 본 적 없지만."
"흐음...크겠네."
"순해요!"
침실 바깥쪽에서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린 듯 힉스가 소리쳤다.
"에삐는요, 보다 보면 엄청 귀엽거든요! 먹을 거 주면 내 손도 먹으려고, 아니 핥으려고 했어요! 이름 부르면 고개도 갸웃하고, 그러다 머리끼리 싸우기도 하고! 진짜 얌전하고 귀여운데! 덩치 좀 크고 머리 갯수 많은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괜히 때리기 전에 찾아야 하잖아요!! 그쵸? 메리디아나 씨, 그쵸?!"
"어, 그러네. 예삐 네 개야? 잃어버렸니?"
"아뇨, 시엔화룽 대인님 상품이에요. 달아났구요. 그러니까 찾아 주세요!"
"그러지 뭐. 그런데 왜 나한테 왔어? 에우고에 의뢰하지."
"그거야 메리디아나 씨도 말도 안되게 크고 사나운 개를 두 마리나 키우니까요!"
"...카스발, 저거 쿠얌 먹이로 줘도 돼요?"
"시민권 있는 어엿한 지안 주민이야. 안돼."
"그렇댄다, 쿠얌. 가서 적당히 놀아줘라."
꾸웅!! 신나서 바닥을 박차고 달려나가는 쿠바카 뒤를, 갸웅? 갸웅! 어버어버하던 야무키가 한 박자 늦게 따라갔다.
"으악! 개들이 날 습격한다! 습겨...우푸푸...으하하, 간지러워, 하지 마...으하하하하..."
"신났네."
"말도 안되게 크고 사나운 개들한테는 항상 새로운 장난감이 필요하죠. 주세요."
"응? 뭘?"
카스발을 자기에게 내밀어진 메리디아나의 손을 멀뚱하니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희고 매끄러웠을지 몰라도, 그것은 이미 흉터와 잔 상처, 굳은살로 뒤덮인 검사의 손이었다.
"의뢰서. 옷 갈아입게."
"아아, 맞다. 의뢰서."
아무리 여자로 안 보고 있다고 해도, 옷 입는 걸 보고 있을 정도로 막역하지는 않다. 카스발은 서둘러 주머니에서 둘둘 말린 두루마리를 꺼냈다. <스펠라에우스 대필소>의 소장은 종이의 재질과 형태, 붉은 밀랍에 찍힌 도장만 보고도 에우고의 정식 의뢰서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건네 받은 두루마리를 침대 옆 테이블에 툭 던지더니,
"안녕히 가세요."
대충 모포를 두른 몸을 방 안쪽으로 휘적휘적 옮긴다. 침실 문과 마찬가지로 휘장을 내린 건너편은 작은 옷방 겸 무기창고였다.
"안 읽냐?"
"크고 머리 셋 달린 사나운 개라면서요. 이모크세티온 세티롭스잖아요."
"올, 아네?"
"네발모피짐승이니까요."
세상의 당연한 이치를 말하는 것처럼 덤덤하게 대꾸하는 목소리가 옷방 안으로 사라졌다. 흠, 역시. 맡겨도 되겠군. 카스발은 자신의 적확한 인선에 내심 뿌듯해 하면서도, 짐짓 엄격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지안 주민의 안전이 우선이다! 명심해!!"
"걔도 지안 주민 하면 되겠네요. 가세요."
'안녕히'가 사라졌으니, 한 마디만 더 했다가는 '가'만 돌아올 참이다. 카스발은 미련없이 돌아섰다. 벌써 여기서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 달아난 것으로 보고된 생물체는 이모크세티온 세티롭스...길다. 그래, 머리 하나 정도는 예쁘겠지. 예삐만이 아닌 것이다.
"시엔화룽, 다 끝나면 네놈부터 타이쿤에 매달고 지안을 세 바퀴반 돌아줄 테다!"
그러시든가요. 타이쿤이 과부하로 추락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네. 힉스를 달랑 들어올려 (아마도) 나가면서 본심을 소리내어 말해버린 카스발의 목소리에 메리디아나가 피식 웃었다. 옷방에 딸린 세면실에서 가볍게 얼굴을 씻고, 평소의 튜닉과 바지, 가죽부츠를 신었다. 오늘의 튜닉은 표백하지 않은 삼베에 붉고 검은 매가 수놓아진 것이다. 마르토나 대륙의 원주민들이 승리를 기원하는 부적이었지. 뭐, 예삐하고 싸울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방심할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도 지안에 오기 전부터, 그리고 온 뒤에도 '문 밖'을 나갈 때는 항상 무장을 풀지 않았었다. 메리디아나는 장검을 허리띠 왼쪽에, 단검을 오른쪽에 걸고 옷방을 나왔다. 믿었던 카스발에게 장난감을 빼앗긴 쿠바카와 야무키가 울먹울먹한 눈을 하고 문간에 앉아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 미안. 대신 산책 가자. 맛난 밥 배부르게 먹고, 친구야 찾아서 좀 놀고 오는 거야."
꾸웅! 꺄웅!!
산책을 좋아하는 쿠바카와 밥을 좋아하는 야무키가 동시에 반색을 하고 기뻐했다. 맛난 밥 어디로 갈까. 메리디아나는 이틀 내내 자는 바람에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위장이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면은 좀 그렇고, 밥도 안 내키고, 국이나 탕도 좀...음, 그래. 빵으로 하자. 오랜만에 <노란 단풍잎>에서 샌드위치 먹어야지. 애들한테는 해기스 주면 되겠지. 날씨 좋으면 테라스에 앉아야겠다.
메리디아나는 기분좋게 <스펠라에우스 대필소>의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왔다. 며칠만에 만나는 지안의 하늘은 여전히 부드럽게 흐릿하고 바람이 선선했다. 이렇게 좋은 날, 단지 위장이 시키는대로 고른 아점 메뉴가 새로운 만남과 소동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그때 메리디아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끗. 시안님의 라비 에피소드로 이어집니다.
* <노란 단풍잎> : 누스 지구와 에샤 지구의 경계선에 가까운 에샤 지구에 위치한 까페 겸 식당. 샌드위치나 샐러드, 오믈렛, 해기스, 블랙푸딩, 우유, 커피, 주스 등의 가벼운 영국풍 음식을 판매합니다. 이외에는 미정.
...계세요? 서기관님! 서기관님! 대체 어디 계신 거예요!
"얘, 누가 너 찾는다."
"...잘못 들으셨겠죠..."
서기관님!! 아악, 정말이지 어디 숨으신 거야! 서기관님!!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 상급 서기관니이이이이임!!!
"너 맞는데?"
"...쳇..."
그러나 여전히, 벽쪽을 향해 돌려놓은 소파 등받이 너머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햇빛이 담뿍 쏟아지는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아 레이스를 뜨고 있던 노부인이 포호호 웃었다.
"그만 가 보지 그러니? 저렇게 애타게 찾는데 불쌍하잖아."
"좀 찾다...말겠죠...하루이틀 저러나..."
"오늘은 좀 오래 찾는데? 무슨 일 생긴 거면 어떻게 하려고?"
"...그럼 여기까지...오겠네요...그때까지만 잘래요..."
"너도 참 정의로운 월급도둑이구나."
"무슨...그런 섭섭한...친애하는 올리비아..."
소파 등받이 너머에서 큼직한 은청색 털뭉치가 불쑥 솟아올랐다. 둥글넓적한 털뭉치 끝에는 흑옥을 갈아 만든 것처럼 반짝이는 발톱이 다섯 개 달려 있었다.
"제가 얼마나...목숨 걸고 뼈빠지게 일했는데...월급 넘치게..."
"그래서 한가롭게 소일거리나 하면서 월급 받으라고 환상생물연구소 같은 한직으로 보내진 거잖니."
"소일거리는 무슨...공신 예우란 건 종신연금이랑 휴양지 저택이지...애가 어릴 때부터 짠순이더니, 황제가 되고...그래도 씀씀이가 쪼잔해서...하암...지네 아부지는...배포 두둑해서 좋았는데..."
자꾸 말을 걸어서인지, 아니면 생각만 해도 짜증나는 화제가 수면 위로 떠올라서인지, 떠오른 털뭉치가 불끈 떨리며 들려오는 목소리가 잠기운을 떨치며 빨라졌다. 만약 여기에 세 사람째의 제국 신민이 있었다면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무릎을 꿇고 멀리 제도帝都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황제 폐하의 자비를 구했을 법한 발언이었지만, 올리비아 고오글레 부인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 다정한, 조금은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뜨개바늘을 멈췄다.
"있잖니, 마나."
"...또 뭐 잘못하셨는데요?"
"얘가, 어른한테 말버릇 하고는."
"올리비아가 그 이름으로 절 부르실 때는 곤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거잖아요. 뭐예요? 설마 다음 생일에 깜짝파티 해주기로 했다고 소장님한테 이야기했어요?"
"아니야, 얘. 이젠 그런 실수 안 해."
젊은 시절 '우물가의 올리비아'로 유명했던, 소문을 듣고 남의 비밀을 아는 것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때때로 말해서는 안될 것을 말해 곤란한 입장에 처했고, 그 결과 목숨을 내놓아야 했을 때 메리디아나의 도움을 받아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노부인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요? 드디어 소장님이 청혼하셨어요?"
"아니, 하지만 곧 할 거야. 아마 다음 생일 지나면?"
"미리 축하드려요. 근데 그거 말하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
"으응, 그런 건 아니고...있잖니. 지난 달에 제도로 돌아가신 마들레느 이사관님. 그 분한테 작별선물로 손수건 드리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 어쩌다 보니 네 이야기가 나왔거든."
"제, 무슨 이야기요?"
털뭉치가 지는 보름달처럼 조용히 소파 등받이 아래로 사라졌다. 올리비아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그...왜, 네가 젊을 때, 용의 별에서 온 환수를 부린 적 있잖니."
"부린 게 아니라 잠깐 밥 좀 먹여준 거죠. 그런 이야기는 뭐하러 하셨어요. 어차피 안 믿었을 텐데."
"응, 그때는 안 믿으시더라고. 그런데 그저께 편지가 와서..."
"서기관님!!!"
콰당!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문이 벌컥 열렸다. 홧김에 차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콧김을 씩씩 뿜으며, 제법 옹골차게 생긴 젊은 청년이 발소리도 요란하게 쿵쾅쿵쾅 들어왔다. 그러나 조금도 놀라거나 기죽지 않은 노부인이 침착한 어조로 그를 나무랐다.
"올리비에, 문은 조용히 열라고 했잖니."
"어머니, 서기관님 숨겨 주시지 말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어요!"
"숨겨 준 거 아니야. 자기가 멋대로 들어온 거지."
"제가 찾는 거 들리셨을 거 아니에요!"
"왜 찾았는데?"
노부인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아, 미치겠네. 외모도 성격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닮아 우직하고 성실한 성품의 청년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모친을 외면하고 소파 - 정확히는 소파 등받이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향해 외쳤다.
"서기관님, 거기 계신 거 알아요! 당장 일어나세요. 소장님이 찾으십니다."
"왜?"
"제도에서 황제 폐하의 사자가 오셨습니다."
"소장님도 서기관 자격증 가지고 계시잖아. 회의록 정도는 직접 작성하시라고 해."
여전히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반주 삼아, 황립 환상생물연구소 제2분관 소속 상급 서기관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태연히 내뱉는다. 올리비아 부인이 유쾌하게 웃고, 동 기관 소속 올리비에 고오글레 3등 사무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서기관님을 찾아오셨다고요!!!"
"날? 왜?"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하여간 빨리 일어나세요!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신단 말이에요!!"
"...올리비아."
드디어 소파 등받이 너머에서 일어난 메리디아나가, 그러나 올리비에의 바람과는 달리 조금도 서두르지 않은 채, 올리비아 부인을 향해 흐트러진 진보라색 머리를 돌렸다.
"아까 하던 이야기, 이/거/예요?"
"응, 그러니까 말이지, 내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낡은 양피지처럼 바래고 주름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생기를 잃지 않은 올리비아 고오글레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수 년 전에 비해 조금도 변하지 않은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를 향해 미안하다는 듯 수줍게 웃었다.
"그 왜, 거인의 등뼈 너머에 사막 있잖니. 거기 황제 폐하가 친선사절을 파견하시는데, 환수를 잘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셨대. 그래서 마들레느 이사관님이 네 이야기를 하셨대."
"그래서 그 애...아니, 폐하께서는 옳다구나 신나서 저를 사절로 임명하셨고요."
"아니, 딱히 신나셨다고 하지는 않더라만...뭐, 임명장을 쓰시는 동안 콧노래는 좀 부르셨대."
"망할."
"서기관님!!!"
"사람 젊을 때 개 같이 굴렸으면 말년에 좀 편하게 지내게 냅둘 것이지, 지 바쁘다고 남 노는 꼴을 못 보지? 하여간 심성 글러먹었다니까."
"악악! 안 들려요! 전 아무 것도 못 들었어요!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폐하! 제가 한 말 아닙니다!!"
올리비에는, 비록 무릎을 꿇고 멀리 제도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지는 않았지만,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악을 쓰며 황제 폐하의 자비를 구했다. 댁의 아드님 왜 이래요? 우리 그이 아들이라 그렇단다. 메리디아나와 올리비아는 시선을 주고 받았다.
"쯧, 하는 수 없지."
나른하게 팔을 뻗어 기지개를 펴는가 싶더니, 메리디아나는 어느새 훌쩍 일어나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문관이지만 체력 단련에 열심인 올리비에가 내심 감탄하는, 유연하고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올리비에는 그녀가 몇 살인지 몰랐다. 때로는 자기 또래의 젊은이처럼 활기차고 강건해 보였고, 때로는 모친 또래의 노파처럼 지치고 무력해 보였다. 누구보다도 메리디아나와 오래 알고 지낸 모친은 "보이는 대로 믿지 마라. 그녀는 인간이 아닌 것들과 너무 가깝게 지냈어."라는 말밖에 해주지 않았다. 물론, 올리비에는 그녀를 보이는 그대로 나태하고 무기력한 월급도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메리디아나는 선대 황제 폐하의 승하를 지켰던 '대大 스펠라에우스'의 딸이자 '소小 스펠라에우스'라고 불리는 현 황제 폐하의 즉위 공신인 것이다.
"가 볼게요, 올리비아. 잘 지내요."
"잘 가렴, 마나. 네 하루가 언제나 가장 포근한 꿈으로 끝나기를."
가벼운 걸음걸이로 다가간 메리디아나는, 노부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노부인 역시 주름진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고 축복의 말과 함께 양쪽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치 포옹하듯, 서로의 손을 마주잡은 채 잠시 동안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마치,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을 그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고, 훗날 올리비에 고오글레는 회상했다.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가 쿠무야무 사막의 유일한 오아시스이자 균형과 조화의 여신 쿠쿠야미르를 섬기는 태고의 신전도시 카두리칸두르에서 어린 카푸슈나 - 그녀가 오래 전 '밥 좀 먹여준' 환수와 놀랍도록 비슷하게 생긴 환수 - 두 마리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END.
지인들과 시작한 소설 커뮤니티 Zian의 자캐입니다.
예전에 TRPG에서 플레이하던 캐릭터를 베이스로 만들었어요. 무척이나 좋아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이번 메리디아나에게도 많이 기대하고 있답니다 :3
- 이름
: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 (Meridiana Spelaeus)
- 나이
: 정확한 나이를 말하지 않는다. 본인 왈 '먹을만큼 먹었다' '마음만은 영원한 소녀다'
: 첫인상은 대개 20대의 젊은 여성. 그러나 상황과 기분, 상태에 따라 20대 초반에서 40대 초반 사이의 어떤 연령대로도 보일 수 있다. 말투로 미루어 의외로 보기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
: 물론 지안의 입국 및 거주 신청서 등의 공문서에는 정확한 연령이 기록되어 있겠지만, 해당 문서는 개인정보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열람이 불가능하다.
- 성별
: 여성. 외견상 인간, 혈통상 수인(Ursuna Glacia Spelunca, 빙굴곰)
- 외형
: 165cm/58kg. 진보라색 머리/감청색 눈.
: 머리는 숱이 많고, 끄트머리로 갈수록 고불고불 말리는 버릇이 있는 직모. 가슴을 덮는 길이를 둘로 갈라 양쪽 귀 맡에서 묶은 트윈로우테일. 피부는 햇빛에 자연스럽게 그을린 엷은 차색. 둥그런 얼굴에 크고 둥근 눈동자, 작은 코와 입. 손발도 작은 편이다. 중키에 근육질이라 좀 땅딸한 실루엣. 위에 적었듯, 일반적으로 20대의 젊은 여성으로 본다.
: 평소 옷차림은 카프탄 튜닉에 낙낙한 바지,슬리퍼나 가죽부츠, 후드 달린 케이프나 망토. 천연색의 면직에 원석이나 뿔 등 자연 소재의 장신구, 원색의 자수로 포인트를 주는 (히피?) 스타일을 즐긴다. 항상 널찍한 허리띠를 둘렀는데 오른쪽에는 장검, 왼쪽에는 단검이라기에는 크고 길며 장검이라기에는 작고 짧고 어중간한 소검, 뒤쪽에는 간이 필기구를 포함한 소지품이 담긴 네모난 포셰트가 걸려 있다.
: 곰일 때는 길이 3.7m, 어깨 높이 3.1m, 무게 비밀♡ 빙굴곰치고는 작은 편이지만 그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끄트머리가 파르스름한 흰 털에 진보라색 눈으로 인간일 때와 정반대의 배색이다. 코끝과 발바닥 젤리는 검정에 가까운 감청색. 둥그스름한 두개골에 전체적으로 굵직하고 포동포동하며 둥글둥글한 실루엣. (쉽게 말해 동물원 불곰의 2배 크기. 원래 빙굴곰은 불곰의 3~4배 크기임)
- 직업 (부업)
: 본업은 대필사. <스펠라에우스 대필소>의 소장이자 하나뿐인 직원으로 대필, 서기, 공증, 서류 작성 및 고문서 복구 등 종이와 글자에 관련된 거의 모든 업무를 대행한다. 단, 책은 취급하지 않는다. 고향에서 취득한 국가공인 1급 서기 자격증, 상급 필사사 자격증, 3급 문헌관리관 자격증 등이 대필소 사무실 벽에 붙어 있지만, 물론 지안에서 공인된 자격증도 아니거니와 유효기간이 몇 백년쯤 지났다고 한다(...) 곱고 바른 글씨를 매우 빠르게 쓸 수있을 뿐 아니라, 모르는 언어의 글자라도 원본과 똑같이 베껴 쓰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 부업은 이민국 문헌관리과 객원 필사사. 정기적으로 이민국에서 사용하는 입국관련 서류, 여행자 등록증, 귀화신청서, 허가서 등의 문서(*)를 필사한다.
: 공개적인 부업은 아니지만, 제법 뛰어난 검사이기 때문인지 자기 취향에 맞는(...) 사람이나 동물의 곤란한 사정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 때문인지, 가끔 무력이 필요한 의뢰를 알음알음 받아 일종의 해결사 노릇을 할 때가 있다.
- 성격
: Lawfull Good. 선량하고 긍정적이며 낙천적이다. 타인에게 호의를 가지고 대하며, 어지간히 치명적인 폐가 아닌 다음에야 웃으며 포용할 수 있는 대인배. 그렇다고 어리숙하고 순진한 성격은 아닌 것이, 눈치와 감이 (본인 표현에 따르면 '쓸데없이') 예리하다. 좋은 집안 출신이지만 가출하여 세상을 방랑한 경험이 있다고 하는데, 그 덕분인지 잡스러운 지식과 판단력, 행동력 등이 뛰어나다.
: 편안한 것, 맛있는 것, 예쁜 것, 재미있는 것을 좋아하고 즐기려 들기 때문에 이기적이거나 즉물적, 향락적으로 보이기 쉽다. 단순히 세계 자체에 호의를 가지고 뭐든지 기뻐하고 즐기려는 성향이 강한 것뿐이지만.
: 귀여운 것, 특히 털이 복슬복슬하고 발이 넷이고 꼬리가 달린 귀여운 생물을 병적으로 좋아한다. 단, 여기서 '귀엽다'의 기준이 남과는 좀 다른 편이라 가끔 어이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 짜증-화가 나면 고저장단이 없는 단조로운 어조로 쉼표없이 말하는 버릇이 있다. 정말로 화가 나면 극단적으로 말수가 적어지고 말이 짧아지지만, 지안에 온 뒤로 한 번도 그 정도로 화를 낸 적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다.
: 어지간한 일에는 화를 내거나 정색을 하지 않지만, 이름을 '메리'라고 줄여 부르는 걸 진심으로 싫어한다. 반대로 초면에 정중하게 '스펠라에우스 씨'라고 부르면 호감도 200% 업♡ 애칭은 '마나'지만 지안에서 그렇게 부를 정도로 친한 사람은 아직 없다.
-취미
: 개들과 함께 산책하기, 책 읽기, 허브 재배, 과자 굽기.
-특기
: 검술. 고향인 제국에서 당대 최고로 일컬어지던 기사를 부친으로 두었으며, 본인 역시 천부적인 소양과 훈련, 다수의 경험을 통해 상당한 실력을 체득했다. 또한 몇 가지 기이한 경험으로 인해, 보이는 것보다 아주 약간 더 뛰어난 신체적 능력("보기보다 힘이 세군?!" "그렇게 빠를 줄은 몰랐는데!" 등등)을 가지고 있다. 오른손의 장검으로 공격하고 왼손의 단검으로 보조하는 양검술을 사용하며, 두 마리 카푸슈나(특히 쿰)도 유사시에 결정적인 어시스트가 되어준다.
: 마법. 검사 클래스이지만 전술한 기연을 통해(...) 1레벨/F랭 수준의 초급마법(각종 볼트, 힐 등)을 쓸 수 있게 되었다.
: 문서위조. 필요한 재료와 견본만 주어진다면 어떤 문서라도 똑같이 만들 수 있다.
: 곰으로 변하기. 대부분의 경우, 곰으로 변하는 것은 비자의적 변화로, 뭔가 엄청나게 귀찮을 ("죽어도 하기 싫어") 때이다. 이럴 때는 6분 안에, 거기서 잠자기에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장소로 비척비척 걸어가서 털썩 쓰러진 다음 겨울잠에 빠진다. 잠자는 기간은 대중 없지만 안 먹으면 배고파 죽을 것 같을 때는 일어나니까 대개 2~3일 정도.
: 아주 드물게 자의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하여(타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기상황 등) 곰으로 변할 때가 있다. 이때는 36분 동안 맑은 정신을 유지하며, 그 뒤 6일 동안 죽은 듯이 겨울잠에 빠진다.
: 카푸슈나와 대화할 수 있다. 카푸슈나는 네발모피동물, 특히 개과 짐승과 대화가 가능하므로 카푸슈나의 통역을 통하면 메리디아나 역시 그들과도 대화할 수 있다. 그러나 카푸슈나가 어린애 같기 때문에 그다지 자세하지는 않다.
- 기타
: 메리디아나는 '신들의 주사위 놀이판'이라고 불리는 차원 출신이다. 지안에는 그녀 외에는 동향 출신이 없는데, 그 이유는 차원의 이름 그대로, 신들이 주사위 놀이를 끝낼 때마다 놀이판을 접어 모든 것을 무로 돌리기 때문이다. 언제 다시 놀이판이 펴지는지, 어떤 형태로 펴지는지 아무도 - 심지어는 신들 자신들조차 - 알지 못하며, 다시 놀이판이 펴졌을 때, 그 차원이 여전히 '신들의 주사위 놀이판'이라고 불리는 차원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 메리디아나의 고향은 '제국'이며, 부모는 대대로 고위무관을 배출한 가문 출신이다. 형제가 있었고, 어릴 때부터 기사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았다. 사춘기에 가출하여 오랫동안 고생과 모험과 방랑을 계속했다. 본인 왈 "그때는 젊었거든, Chaotic Good의 결정체였지."
: 한때 '용의 별에서 온 환수'라고 알려진 존재와 관련되었는데, 이때 까마득한 옛날(아마도 '신들의 주사위 놀이판'이 처음 펼쳐졌을 무렵) 스펠라에우스 가문의 조상이자 토템이었던 빙굴곰의 혈통을 자각, 곰으로 변하는 능력을 얻었다. 덕분에 평범한 인간에 비해서는 수명이 조금 더 길어지고 건강과 체력, 완력 등이 조금 더 좋아졌다(그래서 외모에서 나이와 실력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 방랑을 끝낸 뒤 고국에서 황제 즉위에 관련하여 공신이 되었지만, 고위직을 고사하고 환상생물연구소인가 하는 한직으로 물러나 철밥통을 누리며 살았다. 정의로운 월급도둑을 참다 못한 황제가 외교사절로 임명하여, 쿠무야무 사막의 유일한 오아시스이자 태고의 신전도시 카두리칸두르로 보냈다. 균형과 조화의 여신 쿠쿠야미르를 섬기는 신전에 도착하여 한가롭게 산책하던 중, 놀아달라 조르는 카푸슈나 강아지 두 마리를 발견한다. 이 강아지들이 '아까는 분명히 없던 문'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들어온 결과, 지안에 오게 되었다.
: 차원이동과 빙굴곰의 혈통으로 인해, 함께 이동한 두 마리 카푸슈나와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 곰이 될 때, 가능하면 변하기 전 인간의 의복을 벗는다. 인간이 될 때, 가능하면 변하자마자 입을 수 있도록 인간의 의복을 준비해서 재빨리 입는다. 비상시를 대비하여, 카푸슈나 두 마리는 각각 다른 색깔의 담요(쿰-감청색/얌-진보라색)를 스카프처럼 목에 두르고 있다.
: 에샤 지구에 가까운 누스 지구의 볕 좋고 바람 선선한 우듬지 인근 상가 겸 주택에 두 마리 카푸슈나와 살고 있다. 가게 이름은 <스펠라에우스 대필소>. 주민들의 편지를 대필하거나, 다른 언어로 옮겨적거나, 고서를 필사한다.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면 문서 위조도 해준다는 소문도 있긴 하다.
: 그녀가 곰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그리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니며, 몇 명의 단골 고객이나 공무원 동료들만 알고 있다.
- 카푸슈나
: 체고 60~70cm, 등길이 100~120cm, 체중 30~40kg (리트리버<카푸슈나<아이리쉬 울프 하운드)
: 두개골은 둥그스름하고, 등길이와 다리가 모두 긴 장방형의 체형. 귀는 큼직한 마름로꼴로 아래로 늘어졌으며, 꼬리가 길고 꼬리털이 풍성하다. 장모종으로 속털이 없고 모질이 좋으며 털갈이를 하지 않는다. 금색/크림색/오렌지색 등의 부드럽고 깨끗한 단색의 직모. 눈은 주로 짙은 갈색이며, 드물게 호박색이나 금색 얼룩이 나타난다. 코와 발바닥은 검정~적갈색이며, 속살은 분홍색이다.
: 쿠무야무 사막 특산 견종. 쿠쿠야미르 여신의 사자로 신성하게 여겨, 오직 카두리칸두르의 사원에서만 신관들이 기를 수 있다. 수명은 20~30년. 명랑하고 활발하여 활동량이 풍부하며, 매우 영리하여 인간의 5세 어린아이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생태가 일반적인 개와 같으나 특이하게도 일부일처제. 평생에 한 번, 많아야 두 번 새끼를 낳으며 한배에 2~3마리가 태어난다.
: 쿠바카. 애칭은 쿰. 68cm/118cm/36kg. 크림색 털/호박색 눈. 영리하고 활발한 성격의, 매우 모범적인 카푸슈나. 다른 생물들에 호의적이며, 특히 자기보다 작은 생물이나 여자를 매우 좋아한다. 화가 나면 엄청나게 크게 변해 뭐든 먹어치운다는데, 아직까지 아무도 화를 내는 걸 본 적 없는 성격 좋은 아가씨.
: 야무키. 애칭은 얌. 57cm/97cm/27kg. 검은색 털/검은 눈. 쿠바카의 한배 동생. 카푸슈나로는 드물게 검고 빳빳한 짧은 털과 검은 눈으로 태어난 데다, 덩치가 작고 소극적이어서 신전에서는 불길한 징조가 아닌가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다행히 한배 언니인 쿠바카와 매우 사이가 좋아 늘 둘이 같이 다녔고, 우연히 만난 메리디아나에게 놀아달라 조르다가, 지안으로 가는 문을 발견했다. 아가씨처럼 수줍고 조용하고 차분하지만, 한 번 쿠바카와 놀기 시작하면 마치 미친개처럼 지쳐 쓰러질 때까지 쉬지 않는다고.
*이민국에서 사용하는 문서들은 은빛 호수에서 자라나 지안을 받치는 은빛 나무에서 특수한 방법으로 추출한 재료를 비전의 공정을 통해 제조한 종이와 펜, 잉크(여기에는 여왕의 피가 섞여 있다는 소문도 은밀하게 돌고 있다)으로 쓰여진다. 서명하는 것만으로 언약의 마법이 발현되기 때문에, 인쇄기를 사용하지 않고 일일이 필사해야 한다. 그래서 이민국 문헌관리과에서는 항상 믿을 수 있고 실력 있는 필사사를 구하고 있다고.
1938년 2월 14일.
어제는 그렇게 화창하더니, 오늘은 언제 폭우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궂은 날씨다. 뭐 이리 변덕스러워. 이놈의 나라는 날씨마저 거지 같다. 선장은 날씨가 영 마뜩잖은지 꼭 배를 띄워야겠냐고 물었다. 평생 바다에서 살았다는 늙숙한 뱃사람의 예감에는 무슨 사달이 날 것처럼 불길한 모양이다. 당연한 거 아냐?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아침에 호텔을 체크아웃하는데 프론트의 접수원이 장미꽃을 한 송이 주었다. 그리스식 속전속결 연애인가 했더니, 오늘이 성 발렌타인의 날이라나 뭐라나. 어쩐지 C가 벨기에 초콜릿 상자를 보냈더라니. 어휴, 정말이지 아저씨가 주책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초콜릿이라니, 하지만 헬렌 선생님께도 똑같은 걸 보냈겠지, 정말이지, 정말이지! 이번 출장에서 돌아가면 선생님이랑 초코 머핀이라도 구워야겠다. C한테 주나 봐라, 흥이다! 거지 같은 그리스, 그 질 좋은 올리브로 술도 담글 줄 모르는 나라에 출장이나 보내고 말이지, 아, 정말이지!!!
***
"저기가 트리토니스 섬이군요?"
작은 어선의 뱃머리에 서서 수평선에 고인 짙은 안개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작은 땅덩어리를 가리키며 안나마리가 물었다. 늙은 그리스인 선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바닷바람을 맞으며 질겨진 얼굴가죽에는 할 수만 있다면 섬 가까이는커녕 섬쪽으로 뱃머리도 돌리고 싶지 않았다는 내심이 송글송글 배어 나왔다.
엄마, 이 할아버지 말 못해? 아님 엄마 말 못 알아들어?
"아니야, 라임. 선장님은 상냥한 분이셔서, 엄마가 외지인을 반기지 않는 섬에 가는 걸 말리고 싶으신 거야. 걱정이 되니까, 하지만 엄마는 공무원이라서 상사가 가라면 어디든 가야 하거든."
응, 라임 알아! 공무원! 라임이 막 물어뜯고 엄마가 막 총 쏘고 몇 번 죽었다 살아나고 그러면 C 아저씨가 라임 간식 살 돈 주는 그거 말이지!
"그래요, 그거. 아유, 우리 라임 잔망스럽기도 하지."
꺄르르 웃으며 뭐라뭐라 아르르 웅얼대는 개를 얼르는 젊은 여자를 보며 선장은 결론을 내렸다. 영국 해적놈들도 프러시아 산적놈들만큼 제정신이 아니구만. 빨리 내려놓고 튀는 게 상책이겄어.
"진짜 내릴 거요?"
하지만 정작 트리토니스 섬의 항구가 보일 때까지 접근했을 때, 선장은 배의 속도를 늦추고 출항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외딴 섬이라도 백여 명의 주민이 사는, 그리고 목재가 풍부한 섬의 하나뿐인 항구라면 어른 남성의 - 때로는 남녀불문하고 어른의, 또는 노소 불문하고 남성의 - 숫자만큼 크고 작은 배가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트리토니스 섬의 작고 오래된 항구에는 한 척의 배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크고 작은 배를 구성하고 있었을 널빤지와 돛대와 돛뿐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배의 잔해들이 수면 아래에서부터 수면 위까지 허물어진 그대로, 그 배의 선원이었던 남자들의 시체를 품거나 혹은 파도에 빼앗긴 채 쌓여 있었다.
"한 발 늦었군."
안나마리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항구의 몇 안되는 건물도 모두 포격으로 부서진 상태였다. 남자와 여자, 아이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허물어진 무더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나 오랜 세월 발로 다져진 단단한 땅 위에 고여 굳어가는 핏자국으로 미루어 습격이 이루어진 것은 서너 시간 전인 듯 했다. 크르릉- 라임이 머리를 낮추고 목을 울렸다. 개의 몇 억분지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후각으로도 바람결에 떠도는 쇳내와 탄내를 맡을 수 있었다.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도 습격과 파괴와 살육이 일어났고, 어쩌면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인간의 귀에 들리는 총성이나 비명은 없었지만, 그건 라임도 마찬가지인 듯, 곧 머리를 들고 뱃전에 매달려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선장님, 배를 선착장에 대주세요."
"내릴 거요?"
"내려야 합니다."
테바이 여자처럼 나긋나긋하게 말하던 영국 여자의 유창한 그리스어에 처음으로, 칼로 베어낼 듯한 날카로움이 서렸다. 그래서 선장은 더 이상 염려의 말을 낭비하지 않고, 선착장 주변에 부비트랩처럼 산재한 배의 잔해를 피해 뱃전을 선착장에 바싹 당겨 댔다.
"라임, 선장님께 인사드리렴."
멍멍! 고개를 돌려 조타륜을 쥔 선장에게 가볍게 짖은 라임이 뱃전을 훌쩍 뛰어넘어 선착장에 내려섰다. 선장은 널을 내리지 않았고 안나마리도 그런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행가방을 호텔 프론트에 맡기고 - "사흘이 지나도 내가 찾으러 오지 않는다면 아테네의 영국 대사관에 연락해 주시겠어요?" - 소박하고 질긴 갈색 트위드 여행복 위에 크로스백을 하나 두른, 당일치기 소풍이라도 나온 듯한 가벼운 차림이었다. 안나마리는 뱃전을 짚고 선착장 위로 몸을 날렸고, 그녀의 단단한 여행용 부츠가 대지를 안정적으로 디딘 것과 동시에 등뒤에서 어선의 기척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안나마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서서, 일부러 활기차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수하세요!!"
본토에 도착하거든 섬의 피습 사실을 알리라든가, 최대한 빨리 돌아가라든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나치스의 잠수함을 조심하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작금의 그리스에서 앞으로는 바다, 뒤로는 독립전쟁과 싸우며 환갑을 넘긴 뱃사람에게는 무의미한 조언이었으니까.
엄마, 저 할아버지 엄마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어! 좋은 사람이야!
"그래, 라임. 세상에는 아직 좋은 사람이 많이 남아 있구나. 그럼 우린 그 좋은 사람들을 위해서 나쁜 사람들을 해치우러 가볼까?"
안나마리는 허리를 쭉 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배 위에서 판단한 바와 같이, 생존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사망자의 숫자는 대략 스무 명 남짓이었다. 여기서만 이 작은 섬의 거주민 중 1/5이 사망한 것이다.
트리토니스 섬은 에게해에 깨알처럼 뿌려진 수많은 섬들 중 하나로, 어떤 제도諸島에도 속하지 않는 낙도였다. 섬 주변에 복잡하게 꼬인 해류의 탓도 있지만, 본래부터 배타적인 일족이 거주하고 있어 외부와의 교류는 거의 없다. 약 백여 명 되는 거주민은 전원 팔라니아스라는, 도시국가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해묵은 가문의 일원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포세이돈의 후예라 칭하며, 팔라스 아테나의 핏줄을 신관으로 받들고 제우스를 섬기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 신앙의 중심에는 '뇌정雷霆'이라 불리는 유물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제우스가 사용하던 벼락의 정수라고 했다. 이 유물을 나치스가 원하고 있는 것이다. '뇌정'이 단순한 고대 유물이라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절대로 나치스의 손에 넘겨줘서는 안된다. 에게해는 대영제국의 피보호자인 이집트의 앞마당인 것이다. 따라서 코드네임 T는 현지에서 '뇌정'의 실체를 조사하고, 만약 그것이 나치스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판단된다면 전력을 다해 아넨에르베를 저지하라. 이상이 며칠 전 C가 안나마리에게 전달한 임무였다.
'만약' 좋아하시네. 안나마리는 크로스백에서 꺼낸 권총의 장전을 확인하며 코웃음 쳤다. 아테네에 도착한 그녀는 제일 먼저, 나치스 1개 중대 규모 병력이 트리토니스 섬으로 은밀히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달 받았다. 게다가 그 가운데 아넨에르베의 연구자 다수와 '오버드(Overed)'가 1인 이상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역십자 콧수염이나 숭배하는 망상병 환자들이 들이닥쳐 개싸움이 될 게 뻔한 난장판에 보내면서, '만약' 좋아하시네, 가서 사달 나면 잘 죽고 오라는 말이잖아. 아무튼 아저씨가, 진짜 너구리도 아니면서, 넉살만 좋아서는, 아, 정말이지!!
엄마?
"응, 라임?"
저쪽에서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있어. 많아!
"저쪽?"
아테네 지부가 제공한 트리토니스 섬의 지도는 폐쇄적인 섬 분위기와 지금껏 주목할 이유가 없었던 점으로 인해 축적을 비롯한 정밀함이 완벽하게 무시된, 참으로 신화의 나라다운 고대 벽화 수준의 손그림이었다. 납작하게 주름진 올리브 열매처럼 생긴 섬의 북부에 솟아오른 산봉우리에서 시작된 비탈은 북쪽 해안에서 절벽으로 떨어지고, 동쪽과 서쪽에서는 바닷물을 끌어안으며, 남쪽에서는 해안선을 몇 발짝 앞두고 숨이 다해 쓰러진다. 섬에 하나뿐인 항구 - 지금 안나마리와 라임이 서 있는 장소 - 는 섬의 남쪽, 산자락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좁다란 평지에 옹송그리고 있다. 항구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지도에 따르면 항구를 둘러싼 산자락 너머로 섬의 동남쪽와 동서쪽에 작은 촌락이 두 개, 항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듯 위치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라임이 바라보는 방향은 섬의 서쪽이었다.
응, 꼬리잡기 놀이 하나봐. 막 뛰어다니고 있어. 라임도 놀아달라 그럴까? 엄마, 라임이랑 놀아줄까?
"물론이지. 우리 라임처럼 귀여운 강아지가 놀아달라 그러는데 안 놀아줄 사람이 어딨겠니?"
그런 사람이 있으면 엄마가 혼내줄께. 철컥- 권총은 언제라도 쏠 수 있는 상태였다, 언제나처럼. 안나마리는 신이 나서 겅중겅중 달려가는 라임을 앞세우고 항구를 가로질렀다. '꼬리잡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
엄마, 저기! 언니야랑 아저씨들이 놀고 있어! 라임 빼놓고 놀고 있어!
"어머나, 그러네?"
안나마리는 항구를 둘러싼 낮은 언덕에 듬성듬성 자라난 숲 가장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 사이의 숲이 끊어지고 드러난 얕은 공터에 두 무리의 사람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 무리를 이루는 두 여자 중 한 사람이, 다른 무리를 이루는 1개 소대 분량의 나치스 병사를 차례로 쓰러뜨리고 있었다.
"이얍!"
힘차게 땅을 디디며 팔을 휘두를 때마다 내뱉는 기합 소리가 호쾌하다. 호리호리하면서도 단단한 몸집의 열대여섯 살 남짓한 소녀로, 고동색 길고 곧은 머리채를 자줏빛 비단띠로 단정히 묶고, 벚꽃잎 같은 분홍빛 겹저고리와 감색 통이 넓은 바지에 왜나막신을 받쳐 신고 있었다. 하카마라고 하던가? 자포니즘의 유행으로 서구에도 낯설지 않은 일본옷이다. 소녀의 윤곽이 또렷한 얼굴 역시 우키요에에서 걸어나온 것처럼 단아하고 아름다웠다.
"이, 이 괴물이!"
"괴물이라니, 요조숙녀에게 그 무슨 실례의 말씀을! 하앗!!"
아름답고 정숙한 여자를 일본에서 일러 야마토 나데시코라고 하던가? 하지만 나긋나긋한 소녀의 희고 섬세한 손에 쥐어진 것은 그녀의 키와 엇비슷할 정도로 길고 날렵한 일본도였다. 잔뜩 찌푸린 에게해의 하늘 아래에서 둔중하게 빛나는 칼날이 흩날릴 때마다, 정련된 병사들이 피와 비명과 생명을 흘리며 쓰러진다. 당황해서 발사하는 총탄마저 튕겨내고 갈라버린다. 등뒤에서 덜덜 떨며 겁에 질린 다른 소녀에게 다가오기는커녕 유탄 하나 맞추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리고 가냘픈 소녀가 저토록 능숙하고 현란하게 검을 사용하다니, 과연 동양의 신비라고 감탄할 법도 했지만,
와, 엄마, 저 언니야도 엄마랑 같아!
라임이 큼직하니 축 늘어진 귀를 쫑긋하며 소녀와 안나마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렇네, 안나마리는 중얼거렸다. 그녀가 속한 조직에서는 평범한 인간이 노력이나 학습을 통해 후천적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선천적으로 이능력을 타고난 자들을 오버드(Overed)라고 칭한다. 안나마리는 정보와 언어에 특화된 오버드였기 저 일본인 소녀가 그녀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치스, 아마도 아넨에르베에 소속되어 기현상과 이능력자에게 어느 정도 적응된 병사들마저 '괴물'이라고 경악할 정도로 비약적인 육체와 전력戰力을 지닌 전투 특화의 오버드.
엄마, 엄마, 저 언니야 나치스 아저씨들이랑 싸우고 있어! 그럼 우리편이야, 그지? 응, 엄마? 우리 편이지?
"글쎄다, 라임. 그러면 좋겠는데..."
안나마리는 말꼬리를 흐렸다. 잠깐 서서 지켜보는 동안, 이미 반토막이었던 소대의 숫자는 신속하게 줄어들어, 어느새 한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 저열한 황인종이! 괴물 같으니! 보르츠만 대령님께서 꼭 이 복수를 해주실 것이다! 두고 보자!!"
마지막 남은 병사가 진부한 대사를 읊더니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역시 어린애라서 마무리가 약하군. 안나마리가 혀를 차며 그녀에게 점점 더 가까워지는 병사를 향해 총을 겨눴다.
탕!
퍼슉!!
"으아악!!"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한 걸음에 - '한달음'이 아니다. 그녀는 정말로 한 걸음만에 병사가 필사적으로 달린 거리를 건너뛰었다 - 쓰러진 병사에게 다가가 등에 꽂힌 장검을 뽑아든 소녀가, 병사의 관자놀이에 난 총구멍과 거기서 솟구치는 선혈을 놀란 듯 바라보았다.
"거기 누구죠?"
소녀의 독일어는 모국어 수준까지는 아니라도 상당히 유창했다. 대답하기 전, 안나마리는 잠깐 망설였다. 전투에 특화된 오버드일뿐 아니라 그녀가 잠깐 오해했던 것과는 달리 생명을 건 싸움 자체에도 익숙해 보인다. 2년 전 독일과 일본이 방공협정防共協定을 맺은 이래, 아넨에르베는 양국의 돈독한 국교國交를 등에 업고 동방의 팔백만 신위神位를 게걸스럽게 탐했다. 이 독일어에 능숙한 일본인 오버드 소녀가, 과연 라임의 추측 - 이라기보다는 바람 - 대로 지금 나치스에 대적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편'이라고 볼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방금 보인 가공할 전투력을 어떻게 대응해야...
이쁜 언니야! 던지기 놀이야? 라임하고도 하자! 다시 던져봐! 이번에는 라임이 물어올게! 라임하고도 놀아줘! 놀아줘!!
"라임!"
작지 않은 크기의 개가 입을 벌려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고 전력으로 달려드는데 경계하지 않을 사람은 드물다. 카기모리 아리스[鍵守アリス]는 저도 모르게 칼을 들어올렸지만, 길다란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빙글빙글 돌리며 아몬드 같은 갈색 눈을 반짝이는 개에게서 딱히 적의가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내리긋는 것을 망설였다. 그사이 개는 그녀의 발치까지 들이닥쳤다. 몸을 한껏 낮추더니 펄쩍 뛰어올라 그녀의 가슴팍까지 앞발을 얹고 겅중겅중 뛰며 얼굴을 핥으려 든다. 금수의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놀아줄 거지? 응? 놀아줄 거지? 보채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 했다.
"라임, 앉아!"
숲그늘 아래 서 있던 여자가 단호하게 외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끼이잉- 개는 부채처럼 팔랑팔랑하던 귀를 축 늘어뜨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코를 울렸다. 어, 이거 좀 귀여운데. 아리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개가 기다렸다는 듯 머리를 들이댔다. 살짝 쓰다듬어 보니 크림색 털로 뒤덮인 이마가 따스하고 보들보들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를 돌려 대며 그녀의 손길을 느끼는 개의 표정이 어찌나 흐뭇해 보이던지, 아리스는 그만 칼을 등뒤에 맨 칼집으로 되돌리고 몸을 굽혀 두 손으로 개의 목덜미와 턱을 긁었다.
"이 녀석,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렇게 들이대는 거 아니랬지?"
아차. 아리스가 고개를 들자, 어느새 여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아까 쏘았던 권총은 홀스터에 집어넣었는지 빈손으로, 엄한 목소리였지만 애정이 담뿍 담긴 손길로 개의 두툼한 엉덩이를 가볍게 때린다. 그녀의 태도에는 방금까지 보였던 날선 경계심도, 어떤 적의나 긴장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개는 아리스의 손을 한 번 핥은 다음, 사과하듯 여자의 종아리에 머리를 부비며 애교를 떨었다. 그런 개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인 여자가, 이번에는 아리스를 향해 예의바른 미소를 건넸다.
"미안해요, 이 애가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놀랐죠?"
"아니요, 괜찮아요."
상대가 영어로 말했기 때문에, 아리스도 서툰 영어로 대답했다. 계부는 독일어만 할 수 있으면 세계 어디서든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확언했지만, 그 말은 절반의 진실이었다. 마치 계부 자신이 보여준 애정과 진심이 모두 절반의 진실이었던 것처럼. 계부를 쫓아 일본에서 미국을 가로질러 여기 에게해에 도착하기까지, 아리스는 필요에 의해 영어를 익혀야만 했다.
"음, 당신이 원한다면 독일어로 말해도 좋지만...아가씨는 어때요? 영어 할 수 있어요?"
"네? 저, 저요?!"
갑자기 자신에게 말이 돌려져 화들짝 놀란 것은 지금껏 아리스 등뒤에 숨어 있던 소녀였다. 아리스 또래의 열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그리스 소녀였다. 밤바다처럼 굵게 물결치는 검은 머리칼과 아침바다처럼 맑고 커다란 청록색 눈동자가 퍽이나 아름다운데, 흰 블라우스와 검은 치마라는 소박한 현대식 옷차림이 어쩐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어설퍼 보이는 것이 아쉬웠다.
"아, 네...조금, 할 수 있어요."
"다행이네요. 나는 메어리 앤 입스위치, 영국인 여행자예요. 당신들은?"
"저는 카기모리 아리스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왔어요."
"저는 메리나, 메리나 아말리아라고 합니다. 이 섬에 살고 있어요."
"메리나 아말리아...팔라니아스가 아니라 아말리아?"
"저를 아시나요?!"
메리나가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만들어낸 공백에, 어깨 위 칼자루에 손을 댄 아리스가 끼어들었다. 안나마리는 갑작스럽게 긴장하는 두 소녀의 반응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섬에는 팔라니아스 일족밖에 살고 있지 않다고 들어서 물어본 것뿐인데요."
"아, 네. 그럼..."
"당신이 이 섬의 비보...'뇌정'과 관련이 있다는 건 지금 알았구요."
챙!
아리스가 칼을 뽑았다. 그나마 그대로 찔러 들어가지 않은 건, 팔짱을 끼고 이쪽을 보는 안나마리의 태도에서 적의나 투지, 욕망, 지금까지 그녀들을 쫓아다니던 나치스가 보였던 그 어떤 구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신 누구예요?"
"나는 나치스의 적. 아넨에르베의 행사를 방해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입니다."
엄마, 그 대사 민망해서 하기 싫대며?
안나마리의 발치에 털푸덕 주저앉아 느긋하게 귀 뒤를 탈탈 털던 라임이 초콜릿 같은 눈으로 빤히 올려다보았다. 안나마리는 피식 웃었다. 보송보송한 크림색 정수리를 어루만져 주려다가, 괜히 아리스를 자극할까봐 그만뒀다. 요녀석아, 어른이 되면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늘어나는 법이야.
"나치스의 적?"
"다시 한 번 자기 소개를 하지요. 내 이름은 안나마리, 코드네임은 T. MI6 소속의 정보부원이예요."
"MI6?"
"영국 정보국 비밀정보부. 국왕 폐하의 공복이라오."
"?!!!!"
"꺄앗!!"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린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메리나가 비명을 지르며 아리스에게 매달렸다. 철컥- 안나마리가 재빨리 권총을 꺼내 겨누는 것만큼이나 아리스의 반응 역시 빨랐지만, 메리나가 매달리는 바람에 휘청거리느라 상대를 겨눈 것은 한 순간 지난 뒤의 일이었다.
"숙녀들을 놀래키다니 실례예요."
"오오, 이런. 무례를 사과하겠소."
차가운 총구와 번뜩이는 칼날이 미간과 목덜미를 겨누고 있는데도, 남자는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여유롭게 웃으며, 한쪽 손끝을 실크햇 챙에 대고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다. 나이는 40대 초반? 희고 빳빳한 드레스 셔츠와 녹색 체크무늬 크러뱃, 검은 모닝코트 위에 풍성한 인버네스를 두르고, 흰 가죽 장갑을 끼고 짧은 단장을 들었다. 잘 닦인 구두에는 흙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았다. 에게 해의 낙도보다는 곧 무도회가 시작될 대저택 로비에 어울릴 법한 영국 신사였고, 누구도 그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지어 라임마저도.
우와, 엄마, 굉장해! 저 아저씨, 쉭! 하더니 슝! 하고 나타났어! 굉장해!! 뭐야, 저거? 마법이야? 마법이다, 그치?!
"누구시죠?"
"아, 숙녀분들께서 조금만 경계를 늦춰주신다면 내 소개를 하고 싶소만."
"누구시죠?"
안나마리는 조금도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남자의 말을 튕겨냈다. 그 시간과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느긋함이 그녀의 신경을 거슬렀다.
"흠, 내 안주머니에 명함이 있소만, 꺼내도 좋겠소?"
"라임."
멍! 라임이 대답처럼 짧게 짖으며 벌떡 일어났다. 상당한 장신인 남자의 가슴께까지 단박에 뛰어올라, 앞발로 가슴을 가볍게 박차며 안주머니에 코를 들이냈다. 그때 남자의 인버네스가 바람도 불지 않는데 펄럭이며 라임의 머리를 슬쩍 휘감았다. 끼잉- 라임이 코를 울리며 뛰어올랐을 때처럼 훌쩍 뛰어내렸다. 두툼한 크림색 주둥이에는 아무 것도 물려 있지 않았다.
우와, 엄마, 진짜 굉장해! 저 할아버지 굉장히 많아! 굉장히 넓어! 라임 어지러워~
라임이 귀를 팔랑팔랑 흔들며 비틀거렸다. 안나마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런 라임에게서 시선을 들어올렸다. 남자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안나마리는 권총을 거두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곁눈질한 아리스 역시 남자의 목덜미를 겨누던 칼을 거두었지만, 칼집으로 되돌리지는 않았다. 안나마리는 권총을 치맛자락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진 홀스터에 집어넣고, 크로스백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초면에 무례를 저질렀군요. 라임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흠, 예의를 아는 숙녀시군. 무례를 용서하겠소."
남자는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고 온화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가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꺼낸 명함을 안나마리의 것과 교환했다. 그가 받은 명함에는 '다이스&선 국제무역회사 해외사업부 메어리 앤 입스위치'라고 적혀 있었고, 안나마리가 받은 명함에는,
"옥스퍼드 대학 역사지리학 교수...DD?"
"직함이나 존칭은 붙이지 않아도 좋소. 편하게 DD라고 부르시구려."
"알겠습니다. 그러면 DD, 이 섬에 무슨 목적으로 오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흠..."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무례함을 포장하고 단호함으로 리본을 두른 듯한 안나마리의 태도에 DD는 화가 나기보다는 웃음이 스며나왔다. 그 태도에서 그를 여기로 보낸 누군가와 런던 근교 그의 자택 연구실에서, 방금 전, 나눈 대화가 생각난 탓이었다.
"DD, 내게 자네에게 나를 도울 기회를 선사하는 자비를 베풀도록 해 주겠나?"
"제대로 된 퀸즈 잉글리쉬로 말할 생각이 아니라면 당장 내 공간에서 나가게."
"나 좀 도와주게, DD. 자네밖에 믿을 사람이 없네."
"또 무슨 사고를 친 건가, 알리스터."
"사고라니 무례하군."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공간을 찢고 멋대로 들어온 자네가 더 무례하다고 생각되네만."
"흠흠...트리토니스 섬을 알고 있나?"
"그리스의 지명 같군."
"에게 해의 작은 섬이네. 거기에 '뇌정'이라는 아티팩트가 있어. 제우스의 벼락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고대의 유물이네."
"그런 것이 지금까지 잘도 숨겨져 있었군."
"딱히 잘 숨겨두었던 것도 아니야. 덕분에 베를린의 콧수염 하사가 알아버렸지."
"그런 일인가."
"그런 일이네. 나는 마도대전을 대비하느라 도저히 몸을 뺄 수 없으니 자네가 가주겠나?"
"싫다고 해봤자 소용 없을 것 같군."
"어설픈 마법사를 보냈다간 '뇌정'에 먹혀버릴 거야. 나나 자네 수준의 천재가 아니면 곤란하네."
"대체 얼마나 위험한 일이길래 그리 치켜세우는 겐가?"
"매우 위험한 일이지. 내가 말 안했던가?" "일언반구도."
"그럼 스바스티카[卍]의 도당徒黨 중 '뇌명雷鳴의 기사騎士'라고 불리는 마술사관魔術士官이 관련되었다는 말도 안했나?"
"금시초문인데."
"저런, 그럼 설마 내가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 지금 당장 자네 발밑에 트리토니다스 섬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틈새를 열어주겠다는 말도 안했다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친애하는 알리스터 크롤리, 내가 지금 바로 그 말을 하려던 참이네."
"허허허, 이 친구 참..."
"허허허...알리스터?"
"왜 그러나, DD?"
"돌아오면 보세."
"자네가 무사히 돌아오면, 말이지?"
"DD?"
악담에도 정도가 있다네, 친구. 무사히 돌아오면, 말이지? 이를 말인가. 내 무사히 돌아가겠네. 이번에야말로 그 뻔뻔한 면상, 실례, 불굴의 마이페이스에 에인션트 드래곤을 끼얹어 줄 테니 목 씻고 기다리라고...
"DD? 듣고 계신가요?"
"...아, 실례.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그답지 않게 적나라한 예언의 말을 늘어놓던 DD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안나마리는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 보았다. 어이가 없다 못해 언짢은 기색이 역력하다.
"이 섬에 무슨 목적으로 오셨는지 물었습니다."
"흠..."
대답하기 전, DD는 시선을 안나마리에게서 돌렸다. DD가 나타난 이래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아리스는 줄곧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 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등뒤에는 팔라니아스의 딸이 숨듯이 기대 있었다. 메리나의 몸에 희미하게 감도는 번개의 아우라. DD는 바로 그 소녀가 그를 여기에 오게 한 '뇌정'에 깊이 관련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순수하게 신뢰하고 있는 아리스의 올곧은 시선을 지나, 다시금 바라본 안나마리는, 뭐, 초면에 터놓기에는 너무 구운 스톤케이크처럼 딱딱해 보이지만, 그래도 국가 공복이다. 저 C가 자랑하는 '바벨의 혀'가 아닌가. 믿을 수밖에 없겠지.
"'뇌정'을 지키기 위해서 왔소."
"아!"
메리나가 낮은 비명을 지르며 아리스의 등뒤에 완전히 몸을 숨겼다. 아리스는 깜짝 놀라 DD를 보았고, 안나마리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안나마리?!"
"그렇다면 저와 DD의 목적은 같다고 할 수 있겠군요. 동행과 협력을 요청드려도 될까요?"
"숙녀분들께서 허락해주신다면, 기꺼이."
"...라고 하시는군요, 아리스, 메리나."
"아..."
낯선 서양인들이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주고 받는 함의에 젖은 대화와 등뒤에 바싹 붙은 연약하고 따스한 소녀가 아리스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내 계부는 독일인이에요. 어머니를 속이고 가문의 비보를 훔쳐 달아났습니다. 당신들이 아넨에르베라고 부르는 조직에 속해 있다더군요. 그를 쫓는 중에 메리나를 만났어요. 나치스에게 쫓기는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빼앗긴 '뇌정'을 되찾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어요."
"'뇌정'을 빼앗겼다고?"
DD와 안나마리가 동시에 말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경악의 비명은 아니었고, 그럴 줄 알았다는 탄식에 가까웠다. 아리스와 메리나는 물론, 당사자들마저 그런 서로의 반응에 놀란 듯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어쩌면 바다와 대륙과 바다를 건너 영국에서 C와 알리스터 크롤리는 동시에 재채기를 하거나 간지러운 귀를 후비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네..."
줄곧 아리스의 등뒤에 숨어 있던 메리나가 이윽고 결심한 듯 앞으로 나섰다. 아리스의 왼손을 쥔 그녀의 오른손은 아직도 달달 떨리고 있었지만, 메리나는 아침바다처럼 선명한 청록색 눈으로 DD와 안나마리, 아리스를 차례로 돌아보며 말했다.
"저는 메리나 아말리아 팔라니아스, 아말리아의 딸은 대대로 팔라스 아테나의 환생으로 여겨지며, '뇌정'을 다스릴 수 있는 펜던트를 물려받습니다.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 펜던트는 제게 계승되었어요. 하지만 그걸 그 남자...그 무서운 나치스의 장교에게 빼앗겼습니다..."
"나치스의 장교라면, 보르츠만 대령을 말하는 것이오?"
"보르츠만!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알고 계신가요, DD?"
"흠...'뇌명의 기사'라고 불리는 곤란한 적이라고 들었소."
"그 남자가...'뇌정'을 조종하기 위해 신전으로 향했어요. 저는 섬 바깥까지 도망쳤다가, 아리스의 도움으로 겨우 되돌아 왔습니다만..."
"우린 지금 당장 신전으로 가야 해요."
메리나의 떨리는 목소리를 받쳐주듯 아리스가 힘주어 말했다. 안나마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줄곧 그녀의 발치에서 뒹굴던 라임이 무슨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방향을 향해 발랄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기다려, 라임! 네가 달리면 우리가 따라갈 수 없어!"
하지만 엄마, 빨리 안 가면 늦어. 벌써 눈 떴단 말야. 라임 놀고 싶어! 같이 놀고 싶어! 나치스 꽉 물어주고 싶어!
"서둘지 마, 이 녀석아."
"안나마리, 라임이 가는 방향은...저 애 지금 신전으로 가는 건가요?"
"그래요. 서둘자고 하네요. 벌써 '눈을 떴다'고."
"아..."
메리나가 입술을 깨물고 아리스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좌중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부탁드립니다! '뇌정'을 되찾게 저를 도와주세요! 제 힘으로는 나치스를 물리칠 수 없어요! 부디 도와주세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숙인 메리나의 머리 위로 안나마리의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지나갔다.
"시간낭비는 좋지 않소, 아가씨."
웃음을 머금은 DD의 목소리도 지나갔다.
"메리나? 시간 없다잖아요. 빨리 와요."
처음 만난 사흘 전부터 지금까지 들은 것 중 가장 발랄한 아리스의 목소리가 메리나의 손목을 잡아 채고 힘차게 끌어당겼다. 메리나는 고개를 들고, 이미 라임이 달려간 방향으로 재게 걸음을 옮기는 안나마리와 DD의 뒷모습을 보았다. 저만치 앞에서 라임이 짖는 소리가 들렸다.
"와, 라임이 뭐라고 말하는지 나도 알 것 같아."
"아리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느라 낭비할 시간 같은 거 우리한테 없다고 그러는 거, 메리나한테는 안 들려요?"
아리스가 방긋 웃었다. 그 이국의 꽃 같은 얼굴이 어찌나 아름답고 따스하던지, 메리나는 그만 왈칵 솟구치는 눈물을 황급히 손등으로 닦았다. 그래, 낭비할 시간 같은 건 없어. 머뭇거릴 시간도, 눈물을 흘릴 시간도. 빼앗긴 것을 되찾고 침략자들에게 천벌을 내리기에도 시간은 모자랄 테니까.
***
-어머나, 그것 참 감동적인 파티의 결성이구나. 그래서?
"그래서요?"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어떻게 되긴요. 열심히 산을 올라가서, 올라가면서 만난 족족 나치스 부대를 박살 내고, 산꼭대기에 난 동굴을 들어가서, 올라간 만큼 내려가서, 박살 낸 만큼 또 박살 내고, 보르츠만 대령을 만나서, '뇌명의 기사'인지 뭔지, 깨끗하게 베고 쏘고 치고 깨물고 할퀴고 해치웠죠."
-어머, 얘!
"'뇌정'이 한 번 폭주하긴 했지만 뭐 메리나가 무녀답게 잘 제어했구요, 앞으로 천년 아니면 백년 아니면 십년 정도는 조용할 거구요, C가 사람을 보냈으니 나치스도 또다시 '뇌정'을 차지하니 어쩌니 앞발을 내밀지 못할 거구요."
-안나마리.
"아리스는 도둑 맞은 가문의 비보를 찾아서 다시 여행을 떠났구요, DD는 나타났을 때처럼 쉭하고 슝하니 사라지려고 했지만 제가, 아니 라임이 잡아서, 일단 보고서 쓰는 건 도와준다고 했구요. 저는 보시다시피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이랑 말린 무화과랑 황금양털이랑 바리바리 싸들고 선생님 문병 왔구요. 다 잘 끝났으니 해피엔딩, 해피엔딩."
요양원의 양지바른 정원. 바퀴의자에 앉은 헬렌의 발치에 앉아 그녀의 무릎을 덮은 양털 무릎덮개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안나마리가 참으로 무성의한 말투로 그녀의 이번 임무를 세 줄 다섯 줄 요약하는 동안, 다른쪽 발치에 엎드려 그새 눈도장을 찍고 귀여움을 받는 간호사가 준 뼈다귀를 아작아작 씹고 있던 라임이 불쑥 끼어들었다.
엄마 부끄러워서 그래, 선생님.
"라임!"
-부끄럽다니, 뭐가?
엄마 이번에 죽었잖아. 그것도 네 번이나. 부끄러워서 그래. 또 죽었다고.
-...안나마리.
"네 번 아니야. 세 번이야. 너는 개가 되어서 셋넷도 못 세니?"
나 셋넷 셀 수 있어, 엄마! 하루에 밥은 세 번, 간식은 네 번. 엄마 이번에 나 간식 먹는 만큼 죽었잖아.
"라임, 너..."
-메어리 앤 입스위치.
"저 안 부끄러워요."
안나마리는 헬렌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자의로 움직일 수 없는 헬렌은 그녀의 얼굴을 들어 표정을 보는 것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안나마리는 거기 있었다. 그녀에게 닿은 채, 체온을 나눈 채, 나즉하게 말을 이으며.
"죽은 거, 안 부끄러워요. 이렇게 다시 살아났잖아요. 다시 살아서 선생님 만나러 왔잖아요. 그러니까 죽은 거 안 부끄러워요."
-안나마리, 얘야...
"부끄러운 건, 선생님이 걱정하시니까 그래요. 저도 이제 스물네 살인데, 언제까지나 갓 요원이 된 열여덞 살 신참처럼, 이번에 죽으면 못 돌아올 것처럼 걱정하시니까, 선생님 걱정하시게 한 제가 부끄러워요. 그러니까 별로 자랑스러운 이야기 아니에요. 자세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안나마리...
라임이 할게! 라임이 할 수 있어!
아직 한참 남은 굵은 뼈다귀를 퉤- 뱉은 라임이 벌떡 일어나더니 헬렌의 무릎 위로 벌떡 뛰어올랐다. 넓적하고 푹신한 앞발로 안나마리의 머리를 토닥토닥하더니 분홍색 혀를 내밀어 헬렌의 뺨을 핥았다.
"라임..."
라임 잘 하지! 라임 토닥토닥 할짝할짝 부비부비 다 할 수 있어! 응, 할 수 있어!
큼직한 스파니엘 잡종개는 헬렌의 품에 가득 차고 넘칠 정도로 기럭지가 쭉쭉했다. 사람보다도 따뜻하고 복실한 개의 온기가 헬렌의 품에 넘치고 안나마리에게로 전해졌다. 헬렌이 말없이 웃고, 안나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려가라, 라임."
하지만 엄마, 엄마는 겁쟁이라서 못한다며? 라임이 대신 해줄 수 있는데?
"엄마 겁쟁이 아냐. 네발짐승이 대신 안 해줘도 엄마가 할 수 있어."
라임이 투덜거리며 내려선 헬렌의 무릎 위로, 안나마리가 몸을 기울였다. 흐트러진 무릎덮개를 바로한 그녀는 다정하게 헬렌의 목을 감싸 안고 뺨을 부볐다.
"죄송해요, 아직 서툴러서, 걱정하시게 해서, 감사해요. 늘, 지켜 보고, 기다려 주셔서."
-...안나마리.
"감사해요, 선생님."
헬렌은 안나마리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틀림없이 그랬다. 안나마리는 확신했다. 라임도 안아줘, 선생님, 라임도! 옆에서 겅중겅중 뛰는 잔망스러운 네발짐승이 없었어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번에도 죽었고, 다시 살아났고, 돌아와야할 곳으로 돌아와, 기다리는 사람의 품에 안겨, 체온과 애정을 나누고, 그리고 다시금 죽을 곳을 향해 가게 되리란 사실을.
-끝.
---
그러니까 이거 한 편 쓰는데 왜 두 달이나 걸렸냐면, 0화는 리플레이 기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리플레이 북을 마스터에게서 빌렸지만, 캐릭터도 다르고 플레이 내용도 달라요! (심지어 안나마리는 신드롬조차 달랐 OTL)
덕분에 오프닝 페이즈 쓰는데 한 달 걸리고, 그 뒤로는 완전히 포기했...흑흑, 1화부터는 서기의 메리디아나 혼(...)이 부활해서 적어둔 게 많지만, 과연 그걸로 1화를 쓸 수 있을지 벌써부터 무서...워지면 안되겠죠! 그렇죠!!
뭐, 0화는 여러모로 몸풀기 스테이지였으니까, 기록에 의의를 두고! 오늘은 여기까지 :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
***
사랑하는 안나마리, 허락도 받지 않고 네 일기장에 글을 남기는 무례를 용서하렴.
이건 나만의 언어, 말하자면 나의 솔로모니쉬란다. 그러니 너는 말하거나 쓸 수는 없어도 읽을 수 있을 거야. 나에게 너의 솔로모니쉬가 그런 것처럼.
언젠가 이야기했었지? 너는 절대로 괴물이나 악마가 아니야. 세상에는 너처럼 이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존재하고, 그 중에는 너와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다고. 그게 나라는 말을 좀 더 일찍 하지 못해 미안하다. 언젠가는 말하려고 했지만,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게 되어 정말로 유감이구나.
아까 점심때 내 정체가 발각되었으니 즉각 피신하라는 지령을 받았단다. 이미 경찰이 왔다 갔니? 블라우하임 부인(주여, 그 분의 영혼을 축복하소서!)의 보석함이 사라진 걸 발견했나 모르겠구나. 손버릇이 나쁜 프랑스 여자 행세를 하려고 내가 가져간다. 어차피 내일 블라우하임 박사가 베를린에서 돌아오면 다 들통날 사소한 공작인데, 어머님의 유품을 멋대로 다루어서 미안하구나.
그래, 블라우하임 박사가 내일 돌아온다고 했어. 열흘 동안 아넨에르베 본부에서 뭘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과학자 몇 명과 SS가 동행할 예정이라고 하더구나. 이제 네 어머님도 계시지 않으니, 그 미친 과학자가 이번에는 네게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가지 않아. 그러니 안나마리, 나와 함께 떠나지 않겠니?
난 널 지키고 싶구나. 널 사랑해. 네 어머니 대신은 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모나 언니는 될 수 있지 않을까? 네 아버지라는 작자의 집, 네가 폰 블라우하임의 이름을 쓰는 이 군국주의 망상병 환자들의 나라가 아니라면, 너는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웃으면서, 소중한 것을 훨씬 더 많이, 더 솔직하게 만들 수 있을 거야.
안나마리, 나와 함께 영국으로 가자. 휴 삼촌을 만나게 해줄게. 함께 콘월의 바닷가를 거닐고, 핑크색 제라늄을 정원 가득 심고, 같이 머핀을 만들고, 네가 좋아하는 개를 여러 마리 기르면서 함께 살 수 있어. 자정까지 떡갈나무숲의 남쪽 끄트머리에서 기다릴게. 언젠가 같이 발견했던 버려진 새둥지 기억 나니? 네가 오지 않는다면 거기 어머님의 보석함을 두고 가겠어. 와 주렴, 안나마리. Ma cher petit, 너에게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 부디 와 주렴. 기다릴게, 제발. 내게 널 지킬 기회를 주렴.
- 헬렌 싱클레어, 너의 엘레느가.
***
1930년 11월 7일.
자정까지 몇 분 남지 않았다. 서둘러야겠다.
나는 아무나 치면 울리는 쇠가 아니야.
아버지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
탕!!!
총성은, 그 소리가 극적으로 울리도록 의도적으로 길게 끌린 침묵 끝에 들려와, 더욱 요란하고 날카로왔다. 안나마리는 마치 뺨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녀 앞을 굳건히 막아서고 있던 엘레느의 뒷모습이 서서히 허물어지며, 아직도 총연이 피어오르는 권총을 겨누고 있는 울베르트 폰 블라우하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선생님?!"
"안...나...마리..."
털썩. 엘레느가 아직 서리도 녹지 않은 차가운 땅바닥에 무릎을 부딪히며 쓰러졌다. 안나마리는 다급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수수한 갈색 트위드 여행복의 가슴팍에 생긴 짙은 얼룩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선생님...안돼요, 선생님...선생님!!"
"..."
엘레느가 소리없이 입술을 움직이자 입꼬리를 따라 선명한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가 안나마리의 뇌리에 울렸다.
-달아나거라, 어서.
"선생님...?"
-괜찮아, 이 숲만 벗어나면 국경이야. 휴 삼촌이 기다리고 계셔. 어서, 달아나.
"안돼요, 선생님을 두고 갈 수 없어요!"
-가야 해. 약속했잖니, 행복해지겠다고, 나에게 널 지킬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아악!!
탕! 탕!!
연달아 울린 두 발의 총성에 엘레느의 몸이 격하게 튀었다. 직접 머릿속에 울리던 소리였기 때문에 갑작스런 격통에 비명을 참지 못한 것이다. 그녀를 끌어안은 안나마리의 안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그러면서도 교묘하게 엘레느 한 사람을 겨냥한 악의 어린 저격이었다.
"저열한 이등국민 주제에, 그동안 봐준 은혜도 모르고 감히 내 딸을 유괴하려 들다니."
블라우하임 박사가 그렇지 않아도 가느다란 눈을 더욱 가느랗게 뜨며 엘레느를 노려보았다. 경멸과 혐오의 빛이 역력한 시선이 딸의 가정교사와, 딸을 아울러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이쪽으로 오너라, 안네 마리아. 더 이상 반항은 용납하지 않겠다."
"나...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이라도 돌아가겠다고 말할까? 그럼 선생님을 살려줄까? 응급치료를 해야 하는데, 나, 나에게는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 같은 건 없는데, 병원에, 아니, 아버지가 의사잖아, 지금이라도 치료를, 내가 돌아갈 테니까, 제발, 누구라도 좋아, 아버지라도, 상관없어. 빨리, 선생님을, 도와줘요, 난 아무래도 좋으니까, 선생님을, 선생님을...!
"당장 이리 오지 못하겠느냐? 계속 반항한다면 정말로 따끔한 맛을..."
크르르르릉-
야성의 적의가 선명한 목울림이 블라우하임 박사의 목소리를 끊어냈다. 안나마리는 블라우하임 박사 못지 않게 놀란 눈으로, 자신과 아버지 사이를 가로막은 짐승을 바라보았다. 죽은 줄 알았던 라임이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부하들에게 쫓겨 함정으로 몰리는 짐승처럼 들어오게 된 슈바르츠발트의 숲속에서 만난, 품종도 알 수 없는 잡종개. 먹을 것을 주고 조금 놀아줬더니 안나마리가 마음에 든다며 숲에 있는 동안 동무를 해주겠다던 잔망스러운 여자아이. 개의 예민한 후각이 좁혀오는 포위망을 발견한 것은 엘레느가 서리 내리는 아침에 만났으니 '라임(Rime)'이라고 이름을 붙여준 직후였다. 용맹하게도 아버지의 부하를 습격해 쓰러뜨려 주었지만, 블라우하임 박사는 사격의 명수였다.
마치 조금 전의 엘레느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 앞을 막아서는 라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나마리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버지가 든 권총은 6연발이고, 라임에게 두 발, 선생님에게 세 발을 쐈으니까, 지금 남은 건 한 발. 라임이, 라임이 그것만 막아준다면,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뭐야, 이건? 아직도 안 죽었나? 잡종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질기기 그지없군. 아무리 내 딸이지만, 순수한 아리아인의 혈통을 가지고 고작 하는 짓이 짐승을 부리고 이등국민과 놀아나다니, 수치를 모르는 천것 같으니. 꼭 지어미를 닮아서..."
"닥쳐!!"
커어엉!!!
탕!
듣다 못한 안나마리의 절규와 라임의 포효가 거의 동시에 울리고, 한 발 늦게 총성이 울렸다. 귀를 막은 채 눈을 감고 비명을 질렀던 안나마리는, 총성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손목을 움켜쥐고 쓰러진 블라우하임 박사와 박사 위로 올라타고 목덜미를 물어뜯으려고 하얀 송곳니를 드러낸 라임을 보았다. 우리 엄마를 괴롭히지 마, 더러운 냄새가 나는 두발짐승아!! 머릿속에 라임의 외침이 아플 정도로 차갑고 깨끗하게 울려 퍼졌다. 이 여자사람은 우리 엄마야, 이제부터 우리 엄마야. 너 따위는 꺼져, 죽어버려, 더러운 두발짐승!!
"이...이...개새끼가..."
철컥.
"안돼, 라임! 돌아와!!"
안나마리가 외치자마자 라임이 몸을 날려 블라우하임 박사에게서 멀어진 다음 순간, 박사의 품속에서 뭔가 기묘하고도 불길한 쇳조각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철컥, 딸칵, 펑.
"으아악!"
일련의 쇳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블라우하임 박사의 비명은 더욱 날카롭고 기괴한 것이었다. 자신의 품속에서 김새듯 희미한 소리와 함께 팽창한 무언가를 라임에게 끼얹는 대신 자신이 뒤집어쓴 남자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비명과 신음을 거듭 되풀이하며 비틀비틀 몸을 굴려 숲속으로 사라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지 못해 멍하니 아버지가 사라진 숲을 바라보던 안나마리의 품속에서,
-휴 삼촌...
"선생님?!"
엘레느의 희미한 목소리가 울렸다. 안나마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그들 곁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벌써 땅거미가 내려 어둑해져서인지 그녀들에게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안나마리가 당황하고 라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꼬리를 살살 흔드는 동안, 남자는 그들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엘레느 위로 몸을 기울였다.
"무리했구나, 헬렌."
-늦으셨네요...
"국경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좀 더 버틸 수 있겠느냐?"
-글쎄요...괜찮아...울지 마...
힘겹게 이어지던 '소리'는 휴 싱클레어의 뇌리를 휘돌아 안나마리에게 닿았다. 울먹이기 시작한 소녀의 뺨을 따라 굴어떨어진 물방울이 엘레느의 얼굴에 떨어졌다.
"하지만...하지만...나 때문에...선생님이...나 때문에...!!"
-너 때문이 아니야, 안나마리...너를 위해서...내 선택이고...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건...내 권리...
"그만, 능력을 더 쓰는 건 위험하다."
-휴 삼촌, 안나마리를...
"헬렌."
-안나마리를...울리지 마세요...늘 안아주고...웃게...소중한 것을 많이...만들 수 있...게...
"...선생님?"
엘레느 - 헬렌의 '소리'가 멎었다. 끄응- 다가온 라임이 그녀의 피묻은 뺨을 살짝 핥았다. 하지만 헬렌의 눈은 감긴 채로, 희미하게 미소를 그린 입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안나마리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다랗게 뜨여진 채, '선생님' 소리조차 내지 못하도록 목구멍에 틀어막힌 무언가가 당장이라고 터지고 찢어져 솟구칠 것 같은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기 시작하는데,
"안나마리."
두툼한 어른 남자의 손이 그녀의 머리에 얹혔다.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뻣뻣이 굳은 어깨를 토닥였다.
"일어설 수 있겠니?"
"...저...저는...선...선생님이...저..."
"차를 숲밖에 대어 두었다. 헬렌을 데리고, 국경을 벗어나야 해. 블라우하임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안전한 곳으로 헬렌을 데려가야 해. 일어설 수 있겠니?"
'휴 삼촌'의 목소리는 다정하지만 준엄했다. 안나마리는 다시금 품속에서 고요하게, 마치 잠들듯 평온해 보이는 헬렌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한 끝에, 겨우 사람의 목소리 같은 것을 낼 수 있었다. 끄응끄응- 라임이 재우치듯, 격려하듯, 그녀에게 두툼한 등짝을 들이밀고 머리를 부볐다.
"선생님...선생님을 안아 주세요. 저는 할 수 없어요...흔들리지 않게, 많이 아프실 거에요..."
"음, 내가 힘이 좀 세지. 헬렌이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더냐?"
'휴 삼촌'이 넉살좋게 웃으며, 축 늘어진 조카를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일어났다. 뒤따라 일어나려던 안나마리는 무릎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 했지만, 라임이 재빨리 머리를 들이대 그녀를 부축했다. 고마워, 라임. 별말씀을, 울지 마, 엄마, 힘내, 걷자, 나 걷는 거 좋아해. 엄마가 웃는 거 좋아해. 있잖아, 어서 선생님이 말한 베이컨이라는 거 먹어 보고 싶어. 엄마는 배 안 고파? 선생님이랑 같이 커피라는 거 마시고 싶다고 했지?
"응...머핀도. 바닷가도, 핑크색 제라늄도..."
선생님하고 약속했으니까, 먹을 거야. 보러 갈 거고, 거닐 거고, 웃을 거고, 울 거고, 소중한 걸 잔뜩 만들 거고, 절대로 행복해질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선생님, 제 곁에 라임이 있어요. 휴 삼촌을 만났어요. 하지만 선생님이 한 번만 더 웃어준다면, 한 번만 더 안아준다면, 한 번만 더 입맞춰 준다면, 저는 좀 더 쉽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좀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한 번만, 한 번만 더...!!
***
1932년 6월 18일, 영국 남서부 콘월, 실리 제도의 어느 섬.
"말리셔도 소용 없어요. 저한테는 행복해질 권리뿐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지킬 권리도 있다는 걸 가르쳐주신 건 바로 선생님이시잖아요."
-네가 위험해지기를 바란 건 아니었어.
"그리고 제가 이렇게 고집쟁이인 줄 예전에 몰랐다고 말씀하실 차례죠, 이젠?"
-메어리 앤 입스위치!
"식어요."
-뭐?
"선생님이 그렇게 풀네임을 부르실 때는 잔소리를 시작하시겠다는 거잖아요. 저 머핀 구워왔단 말이에요. 이제야 겨우 사람이 먹을 만한 게 만들어졌는데, 식어버리면 또 무슨 맛으로 변할지 모르거든요."
-보통 머핀이라는 음식은 식는다고 맛이 그렇게 심하게 변하지는 않아.
"제가 만드는 건 보통 머핀이 아니라 괴물 머핀이라 그런가부죠."
-얘가 점점! 휴 삼촌한테서 넉살 좋은 것만 배웠니?
"저 원래 넉살 좋았어요. 계발이 덜되서 그렇지."
태연히 자신의 유년기를 싸잡아 부정하며, 안나마리는 병상의 사이드 테이블 위에 싱싱한 데이지꽃을 곁들여 정성껏 포장한 머핀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풀 생각은 없었다. 따스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이 살며시 닿도록 주의깊에 창가에 배치된 병상에 누운 여성은, 머핀을 먹기는커녕 눈꺼풀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몸이었으니까. 병상 위로 훌쩍 뛰어오른 라임이 발치에 실꾸러미처럼 둥그렇게 몸을 말고, 마지막 세균 한 마리까지도 박멸할 기세로 간호사들이 박박 소독한 발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킁킁 냄새를 맡다가 맹렬하게 핥기 시작했다.
-라임더러, 간지러우니까 내 발등 위에서 탈탈거리지 말라고 전해줄래?
"직접 말씀하시지 그러세요?"
-네 개잖니.
"선생님 드릴까요? 곁에 두면 심심하지는 않으실 텐데."
-네 동반자인 걸. 없으면 울다가 잠도 못들 거면서. 나는 네가 잊을만 하면 쳐들어와서 귀가 아프도록 떠들다 가는 걸로 충분히 심심파적이 된단다.
"저 뭐부터 상처받을까요? 울어요? 잊어요? 아파요?!"
-머핀, 식기 전에 먹으렴.
"혼자 먹으면 맛 없는데요."
나 먹을 수 있어, 먹을래, 먹을 거야! 왜 이번에는 나 하나도 안 줘? 전에 구운 건 다 나 줬잖아!
"라임!"
-맛있었니, 라임?
응! 굉장히 특이한 맛이 났어! 엄마가 만드는 머핀 같은 맛이 나는 건 또 없어! 어제도 다섯 접시나 먹었어! 근데 여섯 접시째는 나 안줬어!
"라임! 이 고자질쟁이가!"
응? 고자질? 뭐가? 엄마가 선생님 앞에서는 착한 개가 되라고 했잖아? 라임 착한 개인데? 솔직한데?
크림색 곱슬털이 보들한 스파니엘 잡종개가 견주의 머리칼과 같은 밤갈색의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견주와 견주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안나마리의 얼굴이 노을빛으로 물들었고, 헬렌 싱클레어의 '소리'가 명랑하게 웃었다. 뭐라고 화를 내야할지 몰라 씩씩대던 안나마리가 이윽고 어깨에 힘을 빼더니 웃기 시작했고, 들리는 소리와 들리지 않는 소리, 하지만 그 모든 소리가 들리는 라임은 엄마와 엄마의 '선생님'이 웃는 것이 기뻐서 꺄르르 꺄르르 떠들다가 결국 달려온 간호사에게 짐승은 조용히 하라며 야단을 맞았다.
런던 테임즈 강가에 본사를 둔 다이스 앤드 선(Dice & Son) 국제무역회사에 2년 전부터 견습사원으로 일하던 메어리 앤 '안나마리' 입스위치가 정식 사원으로 임명되어 T의 코드네임을 받은 지 며칠 뒤, 그녀의 18번째 생일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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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포스트 리플레이가 끝났다! 순식간에 안나마리의 과거가 밝혀졌군요. 어릴 때는 그래도 제법 순진하고 순수하고 연약하던 안나마리였습니다, 믿거나~말거나~
생각해보면 헬렌 선생님도 오버드니까 죽을 리가 없는데(그 와중에 설마 침식률이 100% 넘지는 않았겠...지?;;;) 리저렉션에 너무 턴을 소비하신 듯한...
1930년 11월 4일, 독일 뉘른베르크 교외.
"왜 이렇게 늦지? 벌써 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
석양이 뉘엿거리며 사위를 주홍빛으로 물들일 무렵, 삼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작고 한적한 저택 입구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20대 후반에 완벽하게 틀어올린 브루넷과 야하지 않으면서도 화사한 화장, 소박한 디자인이지만 고급 원단을 아낌없이 쓴 샤넬 수트에 은은히 풍기는 장미향까지, 프러시아 남동부의 시골에서는 이채로울 정도로 우아하고 세련된 남유럽풍의 미인이었다. 여자는 연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저택으로 쭉 이어지는 외길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때때로 파리지엔느의 나른한 분위기를 두르는 것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벌써 몇십분째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저기!"
드디어 노을이 황혼을 지나, 땅거미가 밤의 어둠으로 녹아들 무렵, 여자는 이쪽을 향해 털털거리며 굴러오는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보았다. 안타까울 정도로 천천히 달린 차는 저택 바로 앞에서 불평하듯 투르르 소리를 내며 엔진을 껐다.
"안나마리! Ma petit!!"
운전석에서 내린, 사복을 입었지만 누가 봐도 군인임이 분명한 절도가 몸에 밴 젊은이가 뒷문을 여는 것보다 먼저, 여자가 달려들어 뒷문을 열었다. 뒷좌석에 깊이 몸을 파묻고 있던 소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엘레느 선생님..."
"왜 이렇게 늦었니, 걱정했잖아...Mon Dieu, 너 안색이 왜 이러니! 무슨 일 있었어?!"
"아니에요, 조금 피곤해서..."
오늘 실험이 좀 길었어요. 평소보다 거칠었구요. 멀미가 날까봐 차를 천천히 몰아달라고 해서 더 늦었어요.
언제나처럼, 엘레느 생 브륙은 안네 마리아 - 그녀의 안나마리가 하지 않은 말, 하지만 하고 싶어하는 말까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운전수를 한 번 노려보는 것으로 호들갑을 끝내고, 열여섯의 나이가 무색하도록 작고 여윈 안나마리를 힘들이지 않고 부축하여 집안으로 들어갔다.
"페트라, 페트라? 안나마리를 방으로 데려갈 거에요. 저녁은 방에서 먹을 거에요. 빨리 방을 정돈해 줘요. 오늘도 저녁 식사에 생선 요리를 올리면 정말 화를 낼 거에요. Magnez-vous!"
젊은 가정교사의 독일어는 너무 빠르고, 버터를 너무 넣어 태운 송어구이처럼 프랑스어 억양이 진하게 배어 듣기 괴로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귓전에 쏙쏙 들어박히며 거역하기는커녕 못 들은 척 하기도 어렵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늙은 독일인 하녀는 내심 자기가 뭔 줄 아냐고 투덜거리면서도 명령 때문이 아니라 어린 애기씨에 대한 애틋함 때문에, 아픈 무릎을 절뚝이며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가 안나마리의 침대를 정돈했다.
엘레느는 안나마리를 침대에 눕히고, 코트와 스커트를 벗긴 뒤 실내복으로 갈아입혔다. 차가운 물수건을 창백한 이마에 얹어 눈에 그늘을 지우고, 물수건으로 손발을 닦은 다음 슬리퍼를 신겼다. 그녀가 안나마리의 가정교사(라고 쓰고 보모라고 읽으며 유일한 친구라고 소리나는 위치)가 된 이래 5년이 지났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온 날이면 묵은 흔적 위에 선명하게 덧새겨진 수갑이나 차꼬, 전극과 주사바늘 자국에도 익숙해져 있었지만, 오늘은 특히 더 심했다. 얼마나 비명을 질렀는지 목소리는 형편없이 쉬어 있었고, 예전에 없던 상처가 있는가 하면 깨물어 터진 입술에 손바닥은 피묻은 생채기 투성이였다.
빌어먹을 매드 사이언티스트야, 이 애는 네 딸이야! 네 아내가 낳은 친딸을 모르는 사람이나 말 못하는 짐승이나 감정이 없는 물건처럼 취급하지 말란 말이다, DAMN IT! CONFOUND YOU!! CURSE YOU!!!
내심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총동원해 울베르트 폰 블라우하임을 격렬하게 매도하며, 엘레느는 약상자를 가져와 안나마리의 팔다리에 난 상처를 소독하고 치료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열여섯의 나이였다. 그나마 옷을 벗어야 볼 수 있는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는 것을 안심해야 할까? 일기장마저 보여줄 정도로 - 물론 읽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짐짓 자비롭게 열람을 허가하는 장난이었지만 - 신뢰하는 그녀에게조차, 안나마리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아버지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지, 병원이 어디인지, 어떤 치료인지 결코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기에,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기에, 더욱 안타깝고 괴로웠다. 이 아이만큼은 상처 입히지 않겠다던 엘레느 생 브룩 - 헬렌 싱클레어의 다짐은 이제 이 아이만은 지키겠다는, 그리고 이 생지옥에서 반드시 구해내겠다는 결심으로 자라나 있었다.
"선생님..."
"Chut, 목 아프지? 아무 말 말고 푹 쉬거라."
안나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엘레느는 그녀가 아침에 땋아 주었던 소녀의 머리를 풀고, 조심스럽게 빗질하기 시작했다. 너도밤나무의 나이테처럼 바림이 진 밤갈색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사르륵 펼쳐질 즈음, 안나마리가 살며시 눈을 뜨고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선생님...어머니는요?"
"...이따 저녁 먹고, 기운 차려서 뵈러 가자꾸나."
"...네..."
안나마리가 다시 눈을 감았다. 눈꼬리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엘레느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손끝으로 훔쳤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한 저택 어딘가에서 낮고 단조로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안나마리의 모친, 마르타가 초빙하여 며칠 전부터 묵고 있는 성 루치아 수녀원의 수녀들이 부르는 성가였다. 마르타가 언제 발작을 일으키더라도 종부성사를 집전해줄 신부도 베갯머리를 지키고 있었다. 신실한 교도들의 무리가 자아내는 평화와 은총. 거기에는 마르타의 악마 같은 남편이나 그 남자의 씨앗인 괴물 같은 딸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
1930년 11월 6일.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제 어머니는 내가 곁에 가도 소리를 지르지 않으신다. 내가 손을 잡아도 뿌리치지 않으신다. 내가 뺨에 입을 맞춰도 밀치지 않으신다. 물론 내게 미소를 짓거나 안아주거나 입을 맞춰주지 않으시지만, 무슨 상관인가. 살아 계실 때에도 해주신 적 없는 것을.
어머니는 나를 낳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내가 태어난 순간 비명을 지르며 나를 집어던지려고 하셨다. 잡아뜯은 탯줄로 내 목을 조르려고 하셨다. 젖을 먹이기는커녕 손도 대지 않으려고 하셨다. 그때가 6월의 따뜻한 밤이 아니었다면, 내 울음소리를 들은 어미곰과 어미늑대가 다가오지 않았다면, 나는 얼어죽거나 굶어죽거나 어머니의 피와 내 피로 범벅이 되어 죽어버렸을 것이다.
태어나서 16년 동안 한 번도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셨다. 나를 증오하고 혐오하고 두려워하셨다. 하지만 내가 괴물이라서가 아니었다. 내가 동물이나 식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마녀의 눈을 가져서, 말하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천재여서가 아니었다.
내가 아버지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외할아버지가 단지 이름과 성 사이에 von이 붙는다는 이유만으로 간택한 남자. 어머니가 자신을 혐오한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을 승락한 남자. 어머니가 나를 임신할 때까지 의무적으로 잠자리를 같이 하고, 외할아버지가 태어날 외손이 딸이든 아들이든 전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하자마자 사고를 가장해 외할아버지를 살해한 남자. 수의사라고 하지만 사실은 잔혹한 생체실험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그리고 자신의 딸조차 이능력을 가진 실험체로 생각하는 그런 남자의 딸이기 때문에.
하지만 어머니, 나도 그런 남자의 딸인 게 싫어요. 그런 아버지에게서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어머니의 딸이기도 했어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증오할 수도 있었어요. 함께 손을 잡고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단둘이서 살 수도 있었어요. 어머니, 왜 나를 포기하셨던 건가요.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어머니가 나를 안고 미소 지어주는 기억이 있었다면, 한 번이라도 어머니의 젖을 물고, 어머니에게 입맞춤을 받은 기억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랬다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1925년 6월 18일.
내 이름은 안네 마리아 폰 블라우하임이다. 나는 오늘 열한 살이 되었다. 나는 지금 엘레느 선생님의 방에서 이 일기를 쓰고 있다. 이 일기장은 엘레느 선생님이 생일을 축하한다면서 주신 것이다. 내 생일을 축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 놀랍다고 말했더니 선생님이 우셨다. 선생님은 지금 주무신다. 방금 아래층에서 시계가 12번 울렸다. 열한 번째 생일이 지났다. 뒷뜰 주목나무에 사는 게으른 올빼미가 배고프다고 울면서 날아갔다. 아래층에서 어머니의 비명 소리가 계속 들린다. 내일밤까지 발작을 계속하실 것이다. 지금까지 내 생일마다 그러셨으니까.
어머니 생각을 하면 우울해지니까 딴 이야기를 써야겠다. 이 일기장은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보는 생일 선물이다. 보들보들한 가죽 장정에 성서처럼 두툼한데 속지는 보헤미아산의 고급 종이다. 크림색이고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아 꼭 실크 같다. 펜촉이 사각사각 긁히는 감촉이 기분 좋다. 아까도 선생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지만 내일 아침에 또 말씀드려야겠다. 선물을 주신 것도 기쁘지만, 이 일기장은 선생님의 소중한 보물이었기 때문에 더 기쁘다.
일기장의 속표지에는 'To My dearest Helene, From Your uncle, Hugh'라고 정갈한 남자 글씨체로 적혀 있다. 선생님이 고향을 떠날 때 삼촌에게 받은 선물이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엘레느 생 브룩이라는 프랑스인으로 행세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영어로 헌사가 적힌 영국산 일기장을 발견했을 때 굉장히 당황하셨다. 다른 사람이 보면 안되는 물건이라면 갖고 오지 않으면 될 텐데, 소중한 사람이 진심을 담아 준 선물이기 때문에 두고 올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사람이 사람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뭔가 주고, 거기에 마음을 담고, 그 담긴 마음을 알아차리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한 마디로 '선물'이라고 하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말했더니 선생님이 우셨다. 어른이 우는 건 자주 봤지만, 선생님처럼 예쁘고 아프게 우는 사람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선생님이 영국인인 건 알지만 아무한테도 말 안하겠다고 말해버렸다. 선생님도 당황하셨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의 프랑스어는 진짜 파리지엔느처럼 완벽하기 때문에, 가지고 오신 핑크색 제라늄이 콘월에서 왔다고 말해주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라는 말까지 해버렸다. 선생님은 진짜 당황하셨다. 만약 선생님이 성호를 긋거나 거짓말 하지 말라고 화를 내거나 아버지를 부르거나 도망치셨다면 난 정말 울어버렸을 거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러는 대신 내 이름 - 세상에서 오직 선생님만 부르는 '안나마리'라는 애칭 - 을 부르며 안아주셨다. 다 큰 어른이 꼭 어린애처럼 울면서, 나더러도 울고 싶을 때는 울어도 된다고 하셨다. 나는 어린애니까 어린애처럼 울어도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난 울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일기장의 속표지 뒷장에는 'To My dearest Anna-Marie, From Your mentor, Helene'이라고 적혀 있다. 선생님은 생일 선물로 새것이 아니라 미안하지만, 선생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나한테 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기쁘게 이 일기장을 받았다. 언젠가 선생님의 생신 때 나도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기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소중한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또 우셨다. 선생님이 우실 때마다 정말 곤란하다.
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선생님이 좋았다. 선생님 이름이 엘레느든 헬렌이든 헬레나든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선생님이 사실은 영국 사람이고, 영국과 독일은 지금 다시 한 번 큰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의 대치 상황이고, 선생님은 아버지가 속한 조직과 적대하는 조직 소속인데 아버지를 감시하기 위해 우리집에 왔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다. 특히 아버지한테는 절대로 알려주지 않을 거다. 지금처럼 계속 선생님을 멍청한 프랑스 여자라고 생각하고, 그러면서도 혹시나 실수를 하지 않을까 프랑스어를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으라지. 사람들은 뱀을 사악하고 교활하다고 하지만, 사실 뱀은 순진하고 멍청한 동물이다. 풀숲의 뱀이 먹이를 먹으려면 뱀보다 더 멍청한 먹이가 눈앞을 지나가야만 한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으면 뱀은 그대로 굶어 죽는다. 그래서 나랑 선생님은 우리 둘만 있을 때는 아랍어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아랍어를 모른다. 자기가 듣지 않을 때에도 자기가 아는 말로 이야기하라고 명령하지는 못할 걸? 자기가 듣지 않을 때 우리가 무슨 말로 이야기하는지 어떻게 아는지 설명할 수 없을 거니까.
그리고 나는 이 일기를 솔로모니쉬(Solomenish)로 적고 있다. 솔로모니쉬는 내가 만든 언어다. 그래서 나만 읽고 쓰고 말할 수 있다. 선생님도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아랍어와 이탈리아어와 라틴어를 할 수 있지만, 솔로모니쉬는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겠다고, 선생님 조직의 요원들에게 해독시켜 보면 재미있겠다고 웃으셨다.
그런데 선생님이 아까 이상한 이야기를 하셨다. 어머니가 던진 접시에 맞아 찢어진 내 이마에 붕대를 감아 주시면서, 또 우시면서, 나는 절대로 저주 받은 것도 악마의 씨앗도 아니라고 하셨다. 사실 세상에는 나처럼 이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가끔 나타나는데, 그 중에는 나랑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그 사람이라면 솔로모니쉬라도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셨다. 이 세상 어딘가에 나처럼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모두 할 줄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아버지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안다면 그 사람을 잡아 와서 나처럼 실험 대상으로 쓸까?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로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면 안된다. 내일 선생님께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꼭 이야기해야겠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랑 친구가 되어 줄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나보다 나이가 많을까, 적을까?
방금 엄청나게 큰 소리가 났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다. 어머니 방쪽인데, 어머니 방에는 이제 부술 물건이 남아 있지 않다. 설마 성모님 제단을 부수신 건 아니겠지. 아, 비명소리. 아버지가 고함치는 소리. 아버지가 자제력을 잃을 정도면 오늘 어머니의 발작은 굉장히 심한가 보다. 나처럼 던지시는 물건에 얻어맞은 건 아닐까? 아버지가 다치는 건 상관없지만 어머니가 다치시면 안된다. 살짝 보러 갔다 올까?
방금 엘레느 선생님이 깨어나셨다. 나 대신 보고 오겠다고 나가셨다. 선생님을 따라 가야 하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일기를 쓰는 건 재미있다. 이렇게 내 이야기를 많이 해본 건 처음이다. 앞으로도 종종 써야지.
* 세계관
- 더블크로스 2nd 위어드 에이지
- PC가 오버드(레니게이드 바이러스에 의해 특수한 능력을 지니게 된 사람)가 되어
1930년대의 대체역사 속에서 나치스를 공동의 적으로 맞아 세계를 지키는 이야기.
* 마스터 / 팀
- Panzerwind /
Team Ajick-anya
* 캐릭터명 / 코드네임
- 안나마리 = 메어리 앤 입스위치 = 안네 마리아 폰 블라우하임 / T
(Thalia)
* 신드롬
- 노이만 / 오르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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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PG /팀 동물농장/에서 굴리던 캐릭터 안나마리의 캐릭터시트입니다.
세계관이 변경되어 현재 사용하는 시트와는 다릅니다.
예전 도서관에 올렸던 글을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