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지구는 캐피탈의 동서쪽 변두리였다. 대부분의 거주자는 이놉 노동자로, 도미나토는 많지 않았다. 수십 년 전에 번화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인적이 보이는 거리보다 폐공장이나 버려진 건물, 빈터와 쓰이지 않는 길이 더 많았다. 중심가 혹은 번화가라고 할만한 거리는 지구 도서관이 위치한 지구 공무소 앞 사거리 정도였다.
갑작스레 내린 비에, 거리에는 허둥지둥 비를 긋는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 아이들도 비를 그으려 가까운 건물로 뛰어들었겠지. 마침 도서관이라 흥미 가는 책을 찾아보았을 것이고, 하급시민이 대출중이라는 기록을 보고 충동적으로 대출신청을 했을 것이다.
“진짜 이놉이었잖아?”
“주제도 모르고, 이놉이 무슨 책이야.”
“웩, 난 저 책 소독하기 전에는 안 빌려가.”
반납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샤를 둘러싸고 이죽거리는 태가 딱 그랬다. 같은 생물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한쪽은 당연히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다른 쪽에는 절대로 없다. 이를 축복으로 감사할 것인가, 결핍으로 산정할 것인가. 그 태도의 선택이 세계를 가르고 국경을 긋고 계급을 만들었다.
“야, 이놉. 안 들리냐? 귀머거리야?”
아샤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미나토와 이놉의 차이를 ‘결핍’으로 이해하는 상대에게 이놉 여자애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요게 끝까지 대꾸를 안 하네, 건방지게.”
“버르장머리가 없군?”
“버릇을 고쳐줘야겠다.”
27지구 바깥으로 나가본 적 없는 아샤는 비교할 도리가 없겠지만, 27지구 같은 변두리의 도미나토는 질이 나쁘다. 기껏해야 D급 이하의 중하급 능력자들이면서, 소수가 다수의 이놉을 지배하는 동안 높아진 자만심은 상급시민 못지 않다. 무례하고 거만하고 난폭하다.
“야, 잡아.”
“그래, 잡아서…어?”
한 아이가 뻗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샤의 발목을 훑으며 미끄러졌다. 아샤의 어깨를 떠밀려던 [보이지 않는 손]은 어깨너머로 흘러갔다. 아이들은 서로 마주 보며 당황했다. 아샤는 제 몸에 닿았다 사라진 감촉에 진저리를 쳤다. 빨리 책을 반납하고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한 아샤가 달리듯 급한 걸음으로 아이들 사이를 지나쳐 반납처로 향하는데,
“이씨, 거기 서라고!”
“아얏!”
한 아이가 총총 땋은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다른 아이는 휘청거리는 아샤의 가방을 붙잡고 벽에 밀어붙였다. 반납처에는 이런 상황을 예견했던 것처럼 처음부터 사서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주변에는 인적이 없었다. 아무도 아이들을 말리거나 아샤를 돕지 않았다. 도울 수 없었다. 그늘은 이놉이고, 결핍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요게 그래도 도망가려고!”
“이거 놔!!”
팔뚝을 잡힌 아샤가 새되게 소리쳤다. 그녀는 도미나토를 싫어했다. 그들이 몸에 두른 에우리빛도, [보이지 않는 손]도, [녹색 손가락]도, [뒤덮는 소리]도 모두 싫어했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이놉 고아보다 자기들이 우월하다고 여기는 사고방식을 싫어했다.
“이거 놓으란 말야!!”
“어쭈, 반항해?”
“이게 미쳤나?”
“단단히 혼을 내줘!”
무릎을 걷어차여 휘청거리다가 뺨을 때리려던 손에 관자놀이를 맞았다.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난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따끔하게 아픈 자리에서 미지근한 액체가 배어나는 느낌이 끔찍했다. 아샤는 얼굴을 싸쥐었다. 그녀는 정말 도미나토가 싫었다. 이 아이들이 싫었다. 이런 상황이 싫었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결핍된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모든 것이…
“무슨 짓이냐!”
매서운 외침이 채찍처럼 아샤를 감싼 공간과 생각을 끊었다. 막 이놉 계집애를 때리고 걷어차려던 아이들이 방해자를 향해 화난 얼굴을 돌리고, 상대가 20대 중반의 어른이며 또한 군복을 입은 것을 보고 떨떠름하게 손발을 내렸다.
“공공장소에서 이게 무슨 행패야. 이름과 소속을 대라.”
“그, 그걸 알아서 뭐하게요?”
“보고해야지. 이런 짓을 하고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나?”
“당신이 뭔데 참견이야!”
아샤의 머리를 잡아당기고 뺨을 때린 아이가 버럭 화를 냈다. 무모하게도 [보이지 않는 손]을 움켜쥐고 상대를 때리려 든다. 단정한 미간을 찌푸린 라실 피올린의 에우리빛이 불길한 검붉은 색으로 일렁였다.
“으아아!”
“야, 왜 그…아야야~!”
“아파, 아파…!!!”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고, [보이지 않는 손]은 맥없이 꺾여 스러졌다. 놀라서 돌아보던 다른 아이들도 저마다 아프다 소리를 질러가며 바닥을 굴렀다. 도미나토 부모 슬하에서 자란 도미나토 아이들은 처음 겪는 폭력이고 고통일 것이다.
“괜찮니? 아샤…아시엘린.”
아샤를 둘러싼 아이들을 쓰레기처럼 신발 안쪽으로 밀어내며 다가온 라실이 아샤를 부축해 일으킨다. 한쪽 이마는 찢어져 피가 배어나고, 다른 쪽 뺨은 얼룩덜룩하게 멍이 올라온다. 라실의 눈꼬리처럼 에우리빛이 매섭게 치켜 올라가고, 아이들의 비명이 더 커진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올린 선생님.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여자애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다니, 못된 것들. 소독하고 약을 발라야겠다.”
라실은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으며 말을 돌린다. 아샤가 도미나토를 싫어하는 줄 알아서, 그녀의 이름에 열어 두었던 [뒤덮는 소리]를 듣고 [긴 달음]에 온 것이나, [무거운 바람]을 써서 아이들을 혼내준 것이나, [너머 소리]로 아이들을 체포하고 조사할 것을 명령한 것이나, 어느 하나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도서관에 응급약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내 병원으로 갈까?”
“저, 그 전에 먼저 책을 반납해야 해요.”
“다 읽었니?”
“아뇨, 아직…그렇지만 저 아이들이…”
“다 읽고 반납하렴. 어차피 저 애들은 한동안 책 읽을 시간은 없을 거니까.”
아샤는 납득했다기보다는 포기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제3고아원에 배치된 공중의(公衆醫)는 캐피털 시립의료원 27분원 공중보건위생부 책임자인 라실 피올린 소령이다. 이놉도 군인이 될 수 있지만 장교는 될 수 있다. 모든 것이 이놉인 아샤에게는 보이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은 에우리빛의 권능일 것이다. 벽. 넘을 수도 허물 수도 없는 벽.
“아시엘린…”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올린 선생님.”
아샤가 한 걸음 물러나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5년 전, 라실은 아샤의 아버지가 조무사로 일하던 병원의 수련의였다. 예고 없는 비가 내려 사건사고가 많았기 때문에 수련의인 그도 현장에 파견되었다. 아샤를 구하기 위해 그녀를 감싼 차체와 인체를 잘라낸 [보라색 칼날]은 라실 피올린의 특기였다. 아샤는 그 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우산은 있니?”
“네.”
“그래…원장님께 내가 곧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리렴. 조심해서 가거라.”
“네.”
다시 한 번 꾸벅 인사한 아샤가 라실에게도, 아직도 바닥에 뒹굴며 신음하는 도미나토 아이들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총총히 그 자리를 떠난다. 라실은 여위고 작은 여자아이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그녀의 피가 묻은 손수건을 손아귀에서 구긴다.
-피올린 소령님.
[먼 속삭임]이 머릿속에 흘러든다. 라실은 옷깃에 달린 증폭기를 켜서 자신의 생각을 [먼 속삭임]으로 변환한다.
-무슨 일입니까.
-‘손님’의 상태가 불안정합니다. 오늘 사고를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곧 돌아가지요.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냐고 말하지 않는 점이 그답다. 라실은 눈을 감았다. 그의 미약한 [금색 시선]에, 우산을 켜고 도서관을 빠져나가는 아샤가 보인다. 멀어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