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너 바보냐? 아치볼드가 지 혼자 살겠다고 다 죽어가는 레온 두고 튄 거 기억 안 나? 애인은 뭔놈의 애인이야."
"아니요, 그게 보스...그놈은 좀 특별해서....아치볼드가 끼고 산다고...아마 알 거라고..."
"육갑한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한 시간 내로 아치볼드 놈 있는 데를 알아와. 못 알아오면 네놈부터 물고기밥이다."
"히이익- 아, 알았습니다!!!"
프라임원에서 '물고기밥'이라고 하면 수장시킨다는 은어가 아니다. 말 그대로, 언더보스가 기르는 이계의 물고기에게 던져준다는 뜻이다. 코브의 심기를 심하게 거스른 부하가 허공에서 나타난 기괴한 존재의 예리한 이빨에 바스라지는 걸 본 적 있는 부하는 새파랗게 질려, 아픈 다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코브의 거실을 뛰쳐나갔다.
"멍청한 놈."
코브는 시가를 깊이 빨아들인 뒤 가죽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앞으로 한 시간이라고 말은 했지만, 이 시가만 다 피우고 나면 내려가 볼 생각이었다. 그가 아는 아치볼드는 아무도 믿지 않는 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애인이라는 계집 - 아니, 놈이랬지, 참 - 이 정말로 특별했다면 데리고 사라졌거나 이쪽에서 찾지 못하게 잘 숨겼겠지. 저 멍청한 부하놈이 잡아왔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놈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증거인 것이다. 남자 하나 잘못 만난 죄밖에 없는 애꿎은 민간인이 물고기밥으로나 써먹을 부하놈들 손에 만신창이가 되기 전에 적당히 살려서 내보내야...
"지금 가 보는 게 좋을 걸."
"뭐?!"
코브는 그로써는 드물게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가 앉은 커다란 소파의 등받이 너머, 푹신한 방석과 큼직한 쿠션을 잔뜩 놓아 만든 둥지처럼 아늑한 자리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마른풀색의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고, 포도주빛 망토 자락 사이로 붕대를 감은 여위고 창백한 팔다리가 내보인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은 흡사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 같았다.
"그거 나한테 한 말이냐?"
"응."
마치 복화술사의 인형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담담하게 말하는 소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하긴, 어차피 본다 해도 초첨이 흐린 호박색 눈동자로 코브에게, 그리고 그녀 자신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것을 응시하고 있겠지만.
세간의 소문과 달리, 프라임원의 언더보스는 마녀를 기르고 있지 않았다. 코브와 이블린의 관계는 주군과 부하, 주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그 어느 것과도 달랐다. 묻는 사람도 없었지만, 만약 누군가에게 굳이 대답을 해줘야 한다면 무심한 집주인과 뻔뻔한 길냥이 같은 관계, 라고 코브는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이 진기한 생물이 라이벌의 손에 들어가 자신을 겨누는 화살촉이 되는 것이나, 멍청한 호사가의 손에 들어가 그 가냘픈 아름다움이 훼손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블린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강제하거나, 혹은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았다. 코브의 거처에 눌러앉은 것이 이블린이 머물기를 선택한 결과인지, 떠나기를 선택하지 않은 결과인지 궁금해한 적도 없었다. 그저 고양이처럼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인간에게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존재에게 그의 사적인 공간과 시간을 나누어 주었을 뿐.
"무슨 또 재수없는 소리를 하려고?"
"늦었어."
"뭐?"
코브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블린이 먼저 그에게 말을 건네는 일은 참으로 드물었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이해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결과적으로 어긋난 적도 한 번도 없었다. 그야말로 불길하기 이를 데 없는 마녀의 예언.
"서둘러. 아니면 후회할 거야."
"빌어먹을."
대체 아래에서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코브는 피우던 시가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 - 불이라도 났을 때 저 생물이 살기 위해 불길을 잡으려고 노력하리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 벌떡 일어났다. 다급히 뛰쳐나가는 언더보스의 뒤에서, 쾅! 거세게 닫힌 문이 부서져라 비명을 질렀다. 그 삐걱거리는 신음에 맞춰, 마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Ask her to do me this courtesy,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And ask for a like favour from me,
And then she'll be a true love of mine.
"야, 혀 깨문다! 잡아!!"
"뭐라도 물려! 씨발, 이 새끼 이대로 죽으면 우린 물고기밥이라고!"
"아얏! 날 물었어! 썅!!"
"야! 얌마! 진짜로 치면 어떻게 하냐! 기절했잖아!"
멍청한 놈들은 끝까지 멍청해서, 아래층의 창고 겸 감옥 겸 고문실의 문이 칠칠맞지 못하게도 반쯤 열려 있었다. 아, 그래. 시가 한 대 피우고 내려왔으면 벌써 늦었겠군. 고작 이런 일로 후회할 거라는 둥 겁줘서 보냈단 말이지? 두고 보자, 마녀야. 코브는 내심 짜증을 내며, 뛰어오던 걸음을 늦춰 천천히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씨발, 야, 물통에 쳐넣어! 시간 없으니까 빨랑 깨워서...으악! 보, 보스!"
"보스?!"
아까 보고하러 왔던 부하가 문간에 선 코브를 발견하고 사색이 되었다. 한 남자의 어깨와 발을 각각 잡고 들어올리던 부하 둘도 화들짝 놀라 손을 놓았고, 덕분에 바닥에 내팽겨쳐진 남자가 엎어진 채 희미하게 신음했다. 여윈 몸에 걸린 채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셔츠와 그 아래 하얀 피부에 더욱 두드러지는 붉은 채찍 자국, 그리고 반쯤 벗겨진 바지와 찢어진 브리프.
"너네 지금 뭐 하냐?"
"예? 아, 그, 아치볼드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려고..."
"저놈 바지를 벗겨서?"
문간에 삐딱하게 기대 선 코브가 느긋한 어조로 물었다. 그가 세 층 위의 거처에서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 내려왔다는 건 알지 못했지만, 부하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육식동물이나 다름없는 단순하고도 굵직한 본능이 위험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 그게, 보스, 보스가 한 시간 주신다고 해서..."
"해서?"
"이놈이 하도 독하게 버티길래, 그, 아치볼드 놈 깔이랬으니까, 그, 저..."
"돌림빵이라도 해보려고 하셨다?"
"아, 아뇨, 그게, 즐기려고 한 게 아니고, 저, 거...저..."
"비켜."
부하들이 인기척을 느낀 갯강구처럼 후다닥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코브는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알전구 아래에서는 남자의 머리색을 알 수 없었다. 여위고 창백할 정도로 하얀 몸이 책상물림인가 생각했는데,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의외로 장신에 뼈대가 바르고 근육이 잘 발달해 있었다. 나이도 그리 어리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껏 아치볼드가 사귀었던 남자들은 대개 겨우 소년티를 벗은 젊고 낭창낭창한 청년들 - 저 레온처럼 - 이었기 때문에, 가벼운 호기심을 느낀 코브는 남자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들어올렸다. 어디, 얼굴 좀 볼...
"...야."
"예, 예? 보스?"
"아치볼드 애인이라고? 확실해?"
"예? 화, 확실합니다...야, 맞지?"
"어, 맞아...맞습니다. 아치볼드가 이놈 집에 머무는 걸 본 놈들이...보스?!"
부하들은 깜짝 놀랐다. 코브가 남자를 안아올린 것이다. 마치 걷지 못하는 마녀를 대할 때처럼 두 팔로 소중히 안고,
"으읏...아..."
"쉬이...괜찮아. 괜찮으니까, 조금만 참아...그래, 착하지..."
그 바람에 상처가 쓸린 듯 신음하는 남자를 부드럽게 달래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저 냉혹하고 비정한 Deviant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에 얼이 빠진 부하들을 내버려둔 채, 코브는 그대로 창고를 나가버렸다.
"저, 보...보스?"
"아참."
아니, 문지방을 넘어선 직후에 걸음을 멈추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마치 침을 뱉듯 한 마디 내뱉기는 했다.
"배거즈 뱅큇."
"-----!!!!!!"
영창이 끝나자마자 창고 안은 갈라진 시공의 틈새에서 쏟아진 무수한 이빨투성이의 물고기들로 가득찼다. 멍청하고도 멍청한 부하들이 산채로 아귀아귀 먹히는 소리를 뒤로 하고, 코브는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뛰어올라갔다. 지나가는 부하에게 주치의를 불러오라고 지시하고 자신의 거처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 그의 귓가에, 마녀의 희미한 노랫소리가 압생트처럼 쓰라리게 스며들었다.
When he has done and finished his work,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Ask him to come for his cambric shirt,
For then he'll be a true love of mine.
-To Be Continued...
***2013/04/24
트위터 이웃 @archbernriri님께 드리는 콥베른입니다. 키워드는 '감금된 베른', '손목에 키스'.
앞부분 썰계에 풀어놓고 뒷부분은 수위라서 블로그로 가겠다고 했는데, 양치기 소년이 되어 죄송합니다. 곰은 양을 좋아해요. 맛있습니다. 특히 일품각의 양꼬치라든가 보라달에서 먹는 양구이...넵, 뻘소리.
쓰다 보니 꽤 길어지게 되어, 나머지 반절은 차후 올리겠습니다. 수위 맞아요. 열심히 부지런히 크고 아름다운 떡을 빚고 있습니다, 이 곰 믿어주세요...(ㅌㅌㅌ)
병신새끼. 그러니까 내가 저자식들이랑 덱 짜기 싫다고 싫댔잖아. 리즈는 쯧-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침이라도 뱉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따님 - 빌어먹을 지시자 인형 - 이 질색팔색을 하며 벌을 주기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거 침 좀 뱉으면 어때서. 어차피 현실도 아닌 세계에,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원령인데.
"...리...히..."
그러니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원령이라고. 씨발, 골렘 돌주먹에 머리통 좀 부서졌다고 뭐 문젠데? 어차피 바인더로 돌아가면 멀쩡하게 살아날 거잖아. 그건 그놈 시체도 아냐. 그냥 흔적이라고! 부서지다 만 찌꺼기!!
"아오, 썅! 언제까지 청승 떨고 있을 거야? 야! 베른하르트!!!"
"선배..."
썩은 압생트처럼 흐릿한 눈깔이 리즈를 한 번 보고, 지시자를 한 번 보고,
"선배...리...리...프리...드리히...가..."
다시 자기 품에 안긴 프리드리히 - 였던 것을 본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이 당장이라도 숨넘어갈 것 같다. 지랄한다. 어차피 듀얼에서 지는 거 아니면 지시자 허락 없이 죽지도 못하는 주제에.
"야, 저거 좀 어떻게 해봐."
"..."
인형이 무표정한 머리를 살래살래 흔든다. 지 편리할 때만 벙어리 흉내야, 씨발년. 아오, 프리드리히 개새끼야. 그러니까 니 형하고 같은 덱일 때는 죽지 말라 그랬지. 망할 것. 빌어먹을. 젠장. 씨발.
리즈는 알 고 있는 - 사실 얼마 되지도 않는 - 욕을 수없이 되풀이하며, 부주의하게 쌍둥이 형의 눈앞에서 죽은 프리드리히를, 동생의 죽음을 몇 번이나 목격했으면서도 마치 처음 보는 듯 충격을 받은 베른하르트를, 그런 두 놈을 기어코 같은 덱에 넣어온 지시자를 부정하고 모욕하고 저주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리즈가 모욕하고 저주하는 것은 바로 자신자신이었다. 지금 그의 쑥색 눈동자는 온전히 지시자의 안와에 들어찬 유리구슬과 똑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마치 자식의 죽음 앞에서 비탄에 잠긴 모습 그대로 젖빛 돌이 되어 영원히 전해지게 되었다는 어머니처럼, 자신의 실수로 멸망한 고국 앞에서 울다 지쳐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공주처럼, 혈관에 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창백하게 바랜 베른하르트는 아름다우리만치 처연했다. 지시자가 보기를 바랐던 바로 그 모습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자기자신을, 리즈는 거듭 모욕하고 저주할 망정, 부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오, 썅.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다음부터는 차라리 내가 제일 먼저 죽어야지. 그래야 저 꼴을 안 보지. 그래야 베른이...
-널 위해서 울지는 않을 거야.
마치 리즈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인형이 말했다. 아니, 읽었을지도 모른다. 읽었을 것이다. Firestarter의 오른손이 불꽃을 일으키고, 칼자루를 움켜쥐고, 도약할 것처럼 무릎에 힘을 주고,
-날 위해서도 울지 않겠지.
"...빌어먹을."
입술을 깨물고, 불꽃을 꺼뜨리고, 몸에서 힘을 풀었다. 털썩, 리즈가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을, 마치 눈이 커다란 새처럼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각도까지 고개를 돌린 인형이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맞닿은 시선 너머에서, 베른하르트의 품에 안긴 프리드리히의 잔해가 서서히 재로 변하고 있었다.
-END.
"쉐리,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어요. 친한 척 이름 부르지 말아요."
매몰찬 대답에도 당신은 웃는다. 눈가에 자글자글한 잔주름은 당신이 얼마나 잘 웃는지를 말해준다. 인형은 아무리 웃어도 그런 주름이 생기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당신은, 인형은 아무리 부/서/져/도/ 곧 수/리/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부서진 인형의 팔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자기 목숨을 소중히 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해하지 말라는 설교 같은 거 듣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미소가 얼어붙는다. 말간 눈동자에 비친 보랏빛 드레스의 여자아이는, 어째서인지 울 것 같은 얼굴이다. 당신이 멋쩍게 웃으며 내민 손은 매섭게 내쳐졌다. 또 미움을 받았나. 당신이 중얼거린다. 또? 아니다. 당신은 언제나 미움을 받고 있다. 생명을 가진 자가 그 생명을 소중히 하지 않는데, 생명을 가지지 못한 인형이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닥터한테 해달라고 할 거에요. 참견쟁이 탐정 같으니!"
애써 감았던 붕대가 거칠게 뜯겨, 아직도 녹색 체액이 엉겨 붙은 파/손/부/위/가 드러나는 것을 당신은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당신은 어른이다. 짐짓 허리에 손을 얹고 메~ 혀를 내미는 어리고 유치하고 어설픈 사과를, 당신은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당신은 정말 바보다.
-END.
2013/03/21
그날 아침 레지먼트의 아침 반찬은 피클도 아니고 정말 닭인지 의심스러운 조류의 고기를 튀긴 강정도 아니고 동방의 매운 양념으로 절인 라이스 바통 케이크도 아니었어. 식당에 모인 대원들은 대부분 숟가락으로 뜬 스프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한눈을 팔며 수다를 떨고 있었지. 그들이 주목한 것은, 언제나 중대장급의 간부들이 앉아 식사하는 상석이었고, 그 가운데 입을 꾹 다물고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남자였어.
"굉장하다."
"박력이 넘치는데."
"난 중대장님 다시 봤어."
"보기 좋은데, 가끔 입으시지."
"그보다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렇게 차려입으신 거지?"
마지막 질문을 누가 했는지는 몰라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던 건 확실히. 할 수가 없었지.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레지먼트 제복도 대충 벗고 다니던 - "갑갑하다고." - 미리안이, 그의 옷장에 그런 옷도 있었나 모두가 놀랄 정도로 - 눈썰미가 좋은 몇몇은 새옷이라든가 그의 남다른 거구에 맞춘 수제라는 걸 알아보았지만 - 산뜻한 수트 차림으로 나타난 거야. 검정에 가까운 잉크색 수트는 자켓의 라펠이 다소 넓은 클래시컬한 디자인이었고, 그에 어울리는 새하얀 드레스 셔츠에 금사로 물결무늬를 넣은 조붓한 타이를 싱글노트로 매고, 심지어 소맷단 아래 드러난 커프스에는 푸른돌을 박은 커프스단추까지 꽂혀 있었어. 바짓단이 살짝 덮인 구두도 깨끗한 검은색이었지. 한 마디로 요란하게 멋을 내지는 않았지만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신사였어. 크고 작은, 새롭고 오래된 상처가 잔뜩 난 커다란 손과 박박 깎은 잉크색 머리칼, 그리고 얼굴을 1/3쯤 가린 선글라스만 아니었다면 좀 더 완벽했겠지만.
"식사 안 하십니까?"
말을 건 것은 - 역시나, 랄까 - 베른하르트였어. 다른 사람들은 미리안이 말없이 피워올리는 살기에 질리거나, 아무래도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그 살기에 찔려 죽을 거 같아서 다가가기를 포기하거나, 혹은 이것은 해로운 상황이다- 라고 판단하고 이 또한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었거든.
"음."
미리안이 목을 울렸어. 대답하기 싫다는 투가 역력했지만, 베른하르트는 포기하지 않았지. 가까이에서 보니까, 중대장의 짙은 피부에 붉은기운이 도는 게 보였거든. 목덜미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구. 도대체 미리안이 왜 이런 고난을 사서 겪는 건지, 그에게 심정적으로 마음의 빚을 늘 품고 있는 베른하르트는 심하게 신경이 쓰였지.
"앉아도 되겠습니까."
"으음."
"감사합니다."
내가 안된다고 말한 거 알아들었으면서! 미리안이 베른하르트를 노려보았어 - 아마도. 선글라스를 썼으니 시선이 보이지 않았거든. 베른하르트는 여윈 뺨을 풀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어.
"그런 옷도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음."
"오늘 비번이신 줄 알았습니다만, 어디 외출이라도 하십니까?"
"으음."
"아까부터 아무 것도 드시지 않고 계신 것 같은데..."
"어, 미안. 내가 좀 늦었지?"
갑자기 등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베른하르트는 깜짝 놀라 뒤돌아봤어. 그리고 로쏘의 - '너 지금 이 다음 대답은 음일까 으음일까 궁금하다고 생각했지?'라고 말하는 것 같은 - 환한 미소와 마주쳤지.
"로쏘 기관?"
"미안하지만 좀 비켜주겠나, 베른하르트? 미리안은 지금부터 나랑 아침 먹을 거야."
"아, 그런가?"
모든 의문이 풀렸다! 베른하르트는 계시를 받은 기분이었어. 그러면 그렇지, 로쏘야. 이 정도 고급 수트 일습이라면 판데모니움에서 조달이 가능하겠지. 그리고 레지먼트 내에서 미리안에게 하기 싫은 일을 시킬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되지만, 그 중에서도 이런 장관을 공들여 연출할 사람이라면 역시 로쏘뿐이지.
"자아, 미리안. 오래 기다렸지?"
로쏘는 두 손으로 정성껏 받쳐들고 온 쟁반을 미리안 앞에 내려놓았어. 제법 큰 쟁반에는 뚜껑을 덮은 푼주가 하나, 역시 뚜껑이 덮인 접시가 하나, 뚜껑이 덮인 머그컵이 하나 놓여 있었지. 뭐가 들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베른하르트는 냄새로 대충 짐작할 수 있었어.
"중대장님?"
베른하르트가 의아한 듯 미리안을 바라보았어.
"토마토, 싫어하시지 않았던가요?"
토마토 스프에, 토마토 샐러드, 토마토 주스. 베른하르트는 팔짱을 낀 미리안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았어. 로쏘가 미리안 맞은편에 앉아, 졸라짱쎈투명고양이처럼 웃는 얼굴을 깍지낀 손 위에 얹는 것도 보았지. 아아. 베른하르트는 조용히 일어났어. 그리고 아닌 척 이쪽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대원들에게 근엄하게 명령했지.
"다들, 식사 끝난 것 같으니 임무로 돌아가라."
"예, 옙!"
그리고 베른하르트는 마지막 대원을 따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나갔어. 미리안은 그때만큼 베른하르트가 예뻐 보인 적이 없었다지.
"식겠다, 어서 먹어. 식으면 '더' 맛없을 걸."
로쏘가 참 상냥하게도 뚱겨줬어. 식었든 뜨겁든 이 시뻘건 악마의 열매가 맛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내기는 내기였으니까, 사나이 체면에 벌칙을 피할 수는 없지. 미리안은 참으로 결연한 의지를 품고, 그의 혀와 위를 공략하기 위해 로쏘가 정성들여 제조한 식단을 내려다 보았어. 빌어먹을, 어디서 이상한 테크닉을 배워와서는...다음 번에는 절대로 지지 않겠다!
한참이 지나서야 남자가 한 마디 한다. 무릎 위로 엎어진 채 한참을 미동도 않기에 잠든 줄 알았던 마녀는, 어이가 없달까 우습달까 한심하달까 화가 난달까,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되어 남자의 뒤통수를 노려본다. 어릴 적 스승님의 서가에서 자주 보았던 바랜 양피지 색깔의 머리가 천천히 돌아가며, 푸른 문신이 새겨진 뺨을 드러낸다.
-뭘해도 안되는 날은 안돼. 진짜 기력 빠진다. 한 대 맞아 찌그러진 찐빵이 된 기분이야.
-...
마녀는 어이가 없는 것도 우스운 것도 한심한 것도 화가 나는 것도 아니다. 마녀는 당황한다. 이 남자는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이 남자는 나에게 뭘 바라는 걸까. 이 남자는 왜 한숨을 쉬는 걸까. 이 남자는 왜 이리도 지쳐 보이는 걸까. 그리고 대체...
-너, 찐빵이 뭔지는 알아?
찐빵이라는 건 뭘까. 마녀는 고개를 젓는다. 마녀 쪽을 보고 있었어도 몰랐을 미미한 움직임. 하지만 남자는 늘어뜨린 손끝에 닿은 마른풀색 머리칼이 떨리는 것으로 마녀의 대답을 알아듣는다.
-동방에서 굽는 빵이야. 하얗고, 몽실몽실하고, 안에 단팥이 들었지. 뜨거울 때 먹으면 아주 맛있어.
-...
그래서 뭐 어쩌라고. 마녀는 곤란하다. 이 남자는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먹고 싶지 않냐? 나는 말만 해도 먹고 싶어지는데. 아참, 뭔지도 모르니까 얼마나 맛있는지도 모르겠군.
-...
문득, 마녀는 변덕스러운 기분이 된다. 어쩌면 당장이라도 죽일 듯, 혹은 죽을 듯한 얼굴로 문을 박차고 들어와, 다짜고짜 무릎을 빼앗은 남자에게 사소한 복수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먹고 싶어.
-그게 얼마나 맛있냐면 말이지...뭐?
-먹고 싶어. 찐빵.
-...
갑자기 남자가 벌떡 일어난다. 마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나타났을 때처럼 난폭하게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하지만 마녀는 걱정하지 않는다. 남자는 곧 돌아올 것이다.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다고 했으니까, 서둘러 돌아올 것이다.
예감이 나빴다. 지독하게 나빴다. 로키는 서재 문을 열기 전부터 이 너머에 뭔가 나쁜 일, 지독하게 나쁜 일, 엄청나게 나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예감했다. 틀림없이 잠가 두고 나갔던 문이 심지어 닫혀 있지도 않다는 사실이 그 예감을 보증했다. 로키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한 손으로 짧지만 강력한 반격 - 방어가 아니라는 점이 참으로 로키다웠다 - 마법진을 준비하며, 다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맙소사."
눈에 보인 광경은 각오했던 것보다 더 나빴다. 쓰러진 책장이나 실험대, 바닥에 마구잡이로 쏟아진 책이나 부서진 실험도구는 괜찮았다. 언제나 남을 골탕 먹이는 마법을 연구하는 로키의 서재가 시련을 겪는 일은 드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토르?"
"꾸, 꾸엉..."
서재 한가운데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토르가 마치 달아날 기회를 놓쳤다는 듯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달아날 기회라니, 그에게는 그런 것 따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의. 토르에게는 그랬다.
"꾸엉..."
"닥치고 잠깐만 기다려 봐."
"꾸..."
토르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로키는 마법진을 그리려던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차피 일어난 일이라면 재빨리 수습해야 한다. 다행히 로키의 서재에는, 꼭 와야 하는 용건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 꼭 와야 하는 용건이 있더라도 문밖에 방해하지 말라는 팻말을 걸어 둔 이상 먼저 노크를 할 것이다. 아참, 팻말을 걸어야지. 어디 있더라...없었지. 그럼 만들어야겠군.
간단한 문구가 써진 팻말을 만드는 마법은 아스가르드 제일의 마법사에게는 손가락을 튀기는 것처럼 손쉬운 일이었다. 시전자의 심기를 그대로 반영한 <건드리면 뭅니다>라는 경고가 유려한 룬 문자로 써진 팻말을 문밖에 걸고 문을 잠근 로키는,
"아무 거나 손대지 마!!!"
돌아서자마자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꾸엉?!!!"
땅에 떨어진 플라스크를 어설프게 집어 들던 토르가 화들짝 놀랐다. 플라스크는 바닥에 떨어졌고, 쨍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고, 안에 들어 있던 겨울의 정수가 사방으로 튀었고, 얼음 알갱이처럼 차디찬 파편에 놀란 토르가 주저앉았고, 그의 엉덩이 아래에서 어떻게 들어도 방귀로 착각할 수 없는 꽈직!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깐 기다리랬잖아, 이 미련곰퉁이야!"
"꾸어? 쿼허허..."
그 목울림은 폭소가 틀림없었다. 어떻게 이런 때에 웃을 수가 있지? 하긴 곰을 미련곰퉁이라고 불렀으니 웃기기도 하겠다. 그 대책 없는 낙천주의는 곰.이.되.어.서.도. 여전하군, 마이 브라더.
"형은 정말 골칫거리야, 토르."
"꾸엉..."
토르는, 놀랍도록 평소와 똑같이 푸르른 눈동자를 꿈뻑꿈뻑하더니, 멋쩍은 듯 굵은 목을 좌우로 돌렸다. 로키도 그리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지금의 토르는 평소보다 두 배 정도 높고 세 배 정도 넓었다. 고개를 한껏 젖히고 올려다봐야 할 만큼 높은 곳에서 커다란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창문으로 비껴드는 햇살에 이 거대한 곰의 전신을 감싼 금색 터럭이 번쩍번쩍 빛났다.
"내 짐작이 맞다면, 지금 형이 깔아뭉갠 건 실험대 위에 있던 시험관이야. 아냐, 일어나지 마. 유리 파편으로 그 두툼한 가죽에 흠집 하나 날 것 같아? 형은 지금 절망에 주저앉아 있는 게 맞아. 그 시험관에는 오늘 아침 완성한 해독제가 들어 있었단 말이야."
"꾸어엉?"
"친애하는 토르, 나는 뱀의 혀가 없다 보니 곰소리는 못 알아들어. 하지만 지금 그 소리가 '뭐?'였다고 보고, 기쁘게 대답해 줄게. 모습을 바꾸는 독의 해독제야. 형이 내 허락도 없이 널름 집어먹은 - 틀림없이 그랬을 거라고 난 확신해 - 황금사과에 주입해 두었던 거."
"꾸어...어어어어?!"
큼직한 앞발을 조붓한 주둥이 앞에 대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 사람 얼굴만큼 큰 앞발에 날카로운 네 개의 발톱이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포근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바람에 로키는 새삼 치를 떨었다 - 곰이 깜짝 놀라 주둥이를 커다랗게 벌렸다. 로키의 목을 단숨에 물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예리한 송곳니가 곰 전용 치약 - 이라는 것이 있다면 - 광고를 찍는 것처럼 하얗게 반짝반짝 빛났다.
"그래, 이제 형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알겠어?"
"꾸웅..."
토르 - 였던 거대한 금색 곰은 푸른 눈을 꿈뻑거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꼬시다. 로키는 곤란하고 화가 나는 와중에도 한 가닥 희열을 맛보았다. 어차피 독과 해독제가 모두 완성되면 토르에게 먹이려고 했었지만 - 그렇다, 로키는 벌써 몇 번이나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토르를 골탕 먹이겠다는 야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 이렇게 어설픈 형태여서는 안되었다. 독과 해독제를 만들어낸 이상으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시간과 장소를 정할 생각이었다. 그게 언제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 여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똑똑.
"로키, 아직 멀었어?"
경쾌한 노크 소리와 함께 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할.
"마법서 하나 찾는데 얼마나 걸리는 거야? 올파더가 서두르라셔."
그렇다. 로키는 지금 오딘 올파더에게 겨울의 정령에 관련된 마법서를 가져다 드려야 한다. 그리고 그 마법서는 저 미련곰퉁이가 푸짐한 엉덩이로 깔고 앉은 무수한 책더미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게다가,
"혹시 오면서 토르 못 봤어? 올파더가 기왕이면 토르도 불러 오라셨어. 누가 아까 이쪽으로 가는 걸 봤다던데."
운명은 로키의 편이 아니었다, 늘 그랬듯이. 로키는 얆다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로키? 문 열어줘. 아니면 내가 열어도 돼? 내가 문 열어도 물 거야?"
"잠깐만, 시프."
로키는 재빨리 마음을 정했다. 그리 자주 쓴 적은 없지만 익숙하게 암기하고 있는 주문을 외우며, 간단해 보이지만 실로 정교하고 복잡한 손길로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잘 가, 마이 브라더. 언젠가 다시 만나자구."
"꾸엉? 꾸엉? 꾸어어어어?!"
"로키? 이게 무슨 소리야?"
문이 덜컥 열렸다. 아니, 자물쇠가 잠긴 채로 여신의 손에 부서졌다. 뒤틀린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민 시프는,
"우와, 이게 다 무슨 난장판이야?"
쓰러진 책장이나 실험대, 바닥에 마구잡이로 쏟아진 책이나 부서진 실험도구, 그 위로 소복하게 흩날리는 금빛 먼지와 몇 가닥의 금색 터럭,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는 로키를 보았다.
"시프, 나야말로 토르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
로키가 무흠한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를 내리깔고 서글프게 말을 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내 서재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물어봐야 하거든."
"뭐? 토르가 이랬어? 왜 그랬지?"
그거야 갑자기 거대한 곰으로 변신했기 때문이지.
"일단 올파더가 말씀하신 책부터 찾자. 나머지는 나중에 정리하는 거 도와줄게."
선량한 시프, 언제나 다정하고 올곧은 여신이 성큼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군화발 아래,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시험관이 철퍽, 로키의 눈처럼 선명한 녹색 액체를 퍼뜨렸다.
"으악! 이거 뭐야? 내가 깬 거 아니지?"
"아니야, 시프. 신경 쓰지 마. 나중에 다시 만들면 되는 거니까."
그래, 토르에게 먹일 해독제 따위 나중에 다시 만들면 돼. 일단 미드가르드로 가서, 곰의 모습 그대로 날려간 토르가 어떤 꼴로 지내는지 충분히 비웃어 준 다음에 말이야.
*****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처음에는 화전민들이 긴가민가 주고받는 객쩍은 소리였다. 점차 목격자가 늘어났다. 야수나 넘어지는 나무, 낙석, 홍수로 불어난 계곡 등에서 목숨을 구원 받았다는 간증도 이어졌다.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는 아이들의 주장은 쉽게 무시되었지만. 소문은 산자락을 타고 내려와 저잣거리에 풀리고, 도시에 전해지고, 상인과 영주와 사제와 왕들의 귀에 들어갔다.
곰이었다, 일단 모양새는. 놀랍도록 거대하고, 인간의 말을 이해하며, 더없이 선량하고 호의적인 데다, 이교도의 옛 전설에나 나올 법한 황금색 모피를 지녔다고 했다. 그렇다면 평범한 짐승일 리 없다. 문제는 그것이 신의 사자인가? 아니면 악마의 화신인가.
왕들은 그것이 자신의 권위를 축복하기 위해 신이 보낸 사자이기를 바랐다. 사제들은 그것이 퇴치하여 자신들이 모시는 신의 위엄을 보일 수 있는 악마의 화신이기를 바랐다. 상인들은 그것이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희귀한 보물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사냥꾼들은 그것이 정말로 인간의 말을 이해하는 선량하고 호의적인 영물이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꾸어어어어엉!"
"놔라, 이 괴물!!!"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곰에게 붙들린 사냥꾼이 하나뿐인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갈고리 같은 손톱을 허리띠에 걸어 실팍한 장정을 가볍게 들어 올린 곰이, 그대로 패대기를 치려다 말고 움찔 멈췄다.
"자극하지 마세요, 삼촌! 그러다 돌아가시면 병상에 계신 숙모님은 어떻게 해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잡이가 소리쳤다. 이미 다른 사냥꾼들은 무기를 집어던지고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난 뒤였지만, 처음 한 대의 화살을 곰의 어깨에 박아 넣은 - 잘 구운 생선을 덥석 물었다가 생선 가시에 입천장을 찔리는 만큼도 아프지 않았지만 - 매처럼 예리한 눈에 팔뚝이 두툼한 젊은이 하나는 끝까지 남아 있었다. 보아하니 이 외눈의 칼잡이 사냥꾼의 조카인 모양이다.
"꾸어..."
잠깐 고민하던 곰이, 가까운 나무 위에 사냥꾼을 올려놓았다. 좀 더 정확히는, 손톱에 걸린 거스러미를 떼어내듯 긁었다. 사냥꾼은 나뭇가지에 덥석 매달려 재빨리 제일 높은 곳까지 기어올라 갔다.
"지금 약값이 문제냐? 그놈의 빈티지인지 뭔지 종이 쪼가리가 왜 그렇게 비싼지...어?!"
"꾸어."
그 커다란 덩치가 어쩌면 이리도 날렵한지. 어느새 지척에 다가와 있는 금색 곰을 본 사냥꾼 숙질이 바짝 긴장했다. 겨우 화살이 닿을 정도로 멀찍히 떨어져서 보았을 때와는 박력이 달랐다. 소나기가 내린 뒤 비구름 사이로 비끼는 햇살처럼 밝은 금색 터럭이 풍성하고, 비구름이 개이면 나타나는 하늘처럼 선명한 파란색 눈은 이성과 지성이 깃들었다고 믿을 만한 이채異彩를 띄고 있었다.
"어, 어...서, 설마 우, 우리를 죽이려고..."
"아닌 거 같은데요, 삼촌. 저기...그렇죠? 저기...곰 씨?"
"꾸허허..."
뭐라 불러야할지 난감해 하는 젊은이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곰이 다시 한 번 목을 울렸다. 그리고는 앞발을 들어 사냥꾼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가볍다고는 하지만 인간이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그 손길 - 발길? - 에 담긴 명백한 의도에, 사냥꾼은 머뭇머뭇 바닥에 앉았다. 잘했다는 듯 끄덕끄덕 고개를 흔든 곰이 어슬렁어슬렁 자리를 뜬다. 사냥꾼이 살며시 일어나려고 하자,
"꾸어!"
"삼촌, 앉아 있으라는 거 같은데요."
"나도 알아들어, 임마."
"꾸허허허허..."
숲 속으로 들어간 곰의 웃음소리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돌아온 곰은 입에 물고 있던 덩어리를 툭, 사냥꾼의 무릎 위로 던졌다. 맵싸한 냄새를 물씬 풍기는 식물이었다. 젊은이 팔뚝만큼 크고 굵직한 뿌리는 네 개의 길고 짧은 가지가 나 있어 어설프게 만든 인형 같았다. 뿌리 위쪽에 가느다란 줄기를 따라 장상掌狀 복엽複葉, 실례, 손바닥 모양의 이파리가 서너 쌍 나 있는 사이로 새빨간 구슬 같은 열매가 달려 있었다.
"이건 뭐지? 처음 보는 풀인데..."
"꾸어, 꾸어, 꾸어? 꾸어..."
"어...뭐라는 건지 모르겠는데..."
"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거 아니구요?"
"얌마, 아무리 그래도 영물인데 그럴 리가...있나?"
"꾸어어~ 꾸어, 꾸어..."
"음, 잘은 모르겠지만 몸에 좋은 거니까 숙모한테 먹이라는 거 같아요."
"꿯허허허허..."
곰이 호탕하게 웃으며 - 도저히 그 포효에 어울리는 다른 묘사가 없었다 - 젊은이의 듬직한 어깨를 앞발로 두드렸다. 공격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힘찬 두드림에 젊은이가 휘청거리며 켁켁 기침을 했지만, 곰은 유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사냥꾼을 향해 앞발을 들었다. 사냥꾼은 재빨리 약초를 품에 넣고 두 걸음 물러났다.
"고맙수다, 곰 양반. 저기, 그...공격해서 미안했수."
"꾸어어~"
"우린 이만 가볼 테니까, 잘 지내슈. 거 어지간하면 사람 눈에 띄이지 말고."
"그래요. 신의 사자라는둥 악마의 화신이라는둥 금색 곰을 잡으면 형편 핀다는둥 소문이 짜하다구요."
"꾸어! 꾸어어!!"
"네네, 당신은 신의 사자도 악마의 화신도 아니고, 그냥 곰이라구요?"
"꾸어어-"
"곰도 아니라구요? 에이, 그게 뭐야."
제법 친해졌다고, 젊은이가 - 치약 광고를 찍어도 좋을 만큼 -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외눈의 삼촌과 활잡이 조카가 연신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것을, 금색 곰은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다. 그들이 숲 너머로 사라진 다음에야, 한숨과 흡사한 큰 호흡을 뱉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아 앞발을 들여다본다. 어느덧 익숙해진 굵직한 금색 앞발과 두툼하고 거칠거칠한 발바닥. 로키가 변했던 고양이에 비하면 턱없이 크고 거친 야수.
어차피 변할 거라면 로키처럼 작은 동물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변신한 몸에 익숙하지 않다고 책장을 넘어뜨리지도 않았을 거고, 넘어뜨린 실험대를 깔고 앉지도 않았을 거고, 해독제를 깨뜨리지도 않았을 거고, 화가 난 로키가 - 토르는 로키가 젠체하는 주제에 객기 넘치고 덤벙대는 귀여운 동생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 미드가르드로 날려버리지도 않았을 거고, 그리고...
"정말 멍청하다니까. 그건 산삼이 아니라 만드라고라였다고. 틀림없이 무식하게 잡아 뽑아서 끽 소리도 못하고 기절했겠지."
"꾸어?!"
토르가 금색 머리를 후딱 들었다. 멀지 않은 나무 우듬지 위에 청록색과 금색 갑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우아하게 휜 두 가닥 뿔이 달린 투구 아래, 단아한 하얀 얼굴이 일그러진 미소를 띄고 곰을 내려다보았다.
"굉장한 생존력이네. 난 벌써 어딘가 궁정의 벽난로 깔개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기다려, 이 미련곰퉁이야!"
"꾸어! 꾸어어- 꾸어!!"
하지만 토르는, 곰이 아니었더라도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벌떡 일어난 거대한 금색 덩어리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재빠르게 몸을 날려 달려드는 데에, 아무리 수령樹齡 기십 년의 아름드리 고목이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휘청한 그대로 끼이이이- 등 터진 새우 같은 비명을 지르며 넘어가는 나무 우듬지에서, 로키가 날렵하게 몸을 날려 땅에 내려섰다.
"나참, 머릿속까지 곰이 되어버린 거야? 좀 차분하게..."
"꾸어어어어~"
"곰이 사람을 습격한다!!!"
"응?"
무시무시한 기세로 홱 방향을 바꾸어 다시 달려들려는 토르에게 내심 긴장했던 로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외침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떨어진 산등성이를 타고 바람서리 불변할 철갑을 두른 일단의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영주님! 금색 곰입니다!"
"오오! 사람을 습격하다니, 듣던 바와는 달리 흉폭한 놈이로군!"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은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장년의 남자였다. 붉은색과 금색으로 화려하게 채색된 갑옷의 흉갑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커다란 보석이 박혀 있었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저 금색 모피를 윈터펠의 중앙홀 난로 앞에 깔 것이다!"
"뭐야, 저 인간은..."
예감이 나빴다. 지독하게 나빴다. 로키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망할, 이번에도 운명은 로키의 편이 아니었다.
"토니 스타크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명심하라! 겨울이 오고 있...으아악! 자비스!!"
기세등등하게 외치던 영주는 갑자기 말이 앞다리를 높이 들고 절규하는 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거대한 금색 동체가 단숨에 거리를 좁혀 병사들 가운데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로키는 저 높은 발할라를 향해 소리 없이 절규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난 기만의 신이야! 내 본분을 다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노르넨은, 성질 고약한 운명의 여신들은 언제나 그렇듯 대답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이야기의 씨실과 날실이 어긋나는 소리만이 꺄르르르 들려올 뿐이었다.
*****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묻지 않겠다, 아들아...아들들아."
"..."
"..."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없는 토르는 물론, 신의 언어를 할 수 있는 로키조차 할 말이 없었다. 다급하게 시전하기는 했지만, 로키의 마법은 언제나 완벽했다. 그러니 둘은 로키의 서재에 나타났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타난 곳은 발할라의 중앙홀, 옥좌에 좌정한 오딘과 그 곁에 선 프리가의 앞이었다. 시프와 판드랄, 볼스태그, 호건을 비롯한 제신諸神들이, 안색이 창백해진 로키와 거대한 금색 곰 - 이 조합이라면 곰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할 신족은 아무도 없었다 - 을 바라보며 수군수군 키들키들 떠들어 대는 소리가 로키의 복장을 박박 긁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알고 있겠지? 로키."
빌어먹을. 로키는 다시 한 번 입술을 짓깨물었다. 자신의 이동 마법에 관여했을 정도면, 올파더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전 자신이 소녀나 고양이가 되었을 때도 원래대로 되돌려 주지 않았던가. 지금 저 무거운 손을 잠깐 흔들어 토르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를 의미했다.
꼬시다, 이놈아.
"제가 책임지고 토르를 원래대로 돌려놓겠습니다."
"그래. 그때까지 토르는 너의 서재에서 기르..."
"여보."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기묘한 표정으로 - 곰토르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으신 거겠죠, 어머니 - 프리가가 끼어들었다.
"흠흠, 함께 지내도록 하여라."
"..."
"알겠느냐, 로키?"
"...예, 올파더."
이번만큼은 - 로키의 쓸데없이 짱짱한 자존심은 '이번에도'라는 말을 무의식 레벨에서 거절했다 -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걸 깨달은 로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엄격한 표정을 거둔 오딘이 흐뭇하게 웃으며 토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키의 서재로 가기 전에, 나와 함께 산책이나 하지 않겠느냐, 아들아?"
"어머나, 여보. 그 전에 토르를 목욕시켜야 해요. 빗질이 끝나면 오늘밤은 저와 함께 잘 거랍니다."
"앗, 프리가님. 그렇다면 이 시프도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목욕하기 전에 우리 셋과 레슬링 한 판 어떻소!"
기다렸다는 듯, 둘러싸고 있던 신들이 우- 몰려들었다. 여자들은 토르의 푹신한 털을 쓰다듬으며 거대한 곰돌이라고 좋아했고, 남자들은 두툼한 근육을 두드리며 한 판 붙어보자고 난리였다. 인파에서 밀려난 로키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움켜쥐었다. 두고 보자, 토르. 언젠가는 반드시 골탕 먹이고 말 거야!
"꾸어~"
인파 한가운데에서, 즐거운지 곤란한지 알 수 없는 금색 곰의 포효가 들려왔다.
-END.
***2013/02/11
황금숲토끼(@lokithorloki)님의 개인지 <Amnesia>에 축전으로 드린 글입니다. 허락 하에 공개합니다.
올려다본 하늘은 참으로 맑았다. 흩뿌려진 은사 같은 별무리는 금새라도 시조 한수나 노래 한 가락, 춤 한 사위가 흘러나올 것처럼 아름다웠다.
아름다웠으나,
"저희 섬에서는 아이들에게 이런 밤이면 발밑을 조심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림자가 엷어지면 그 안에서 꽁꽁 싸매 두었던 귀신이 뛰쳐나오기 쉬우니까요."
참말로 애들에게나 먹힐 법한 소리가, 星宵의 한 조각처럼 희고 단려한 옆얼굴이 진지하게 읊어대면 또 그럴 듯하게 들리는 것이 신묘하다. 깊어가는 밤이 아름답고, 이지러진 달이 아름답고, 소슬결에 밤하늘이 부서지는 蓮塘이 아름답고, 갸름한 손에 쥐어진 술병이 아름답고, 술병을 쥐고 곁에 다가앉은 청년이 아름답다. 켜켜이 아름답고 아름다워 하 기괴하고 어그러인 月夜를 讚하지 못할 바에야, 잘 갈린 칼날에 달빛을 휘감듯 한 잔 미주로 세 치 혀를 축임이 옳으리라.
"사람의 그림자 속에 귀신이 산단 말입니까?"
"아니오."
내민 술잔에 마지막 술병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따른 청년이 해사하게 웃는다. 가늘게 휘어진 눈초리가 초승달 같고, 冷然히 내치는 손짓이 그믐달 같다. 칼날 같은 시선에 맑은 달빛이 바스라진다.
맑은 달빛이 바스라지는 칼날 같은 시선.
"귀신은 사람의 마음 속에 삽니다."
휘어 바람을 가르는 죽엽. 새하얀 도포자락이 녹음에 눈부시다. 부서지는 海表. 찢어진 치마폭에 삼라히 맺힌 붉은 눈물. 천상을 갈구하는 마지막 숨결이 깨진 나각의 가두리에 걸려 흩날린다. 하나, 둘, 셋, 넷, 다섯...여섯. 보이지 않아도 들리고 들리지 않아도 만져지고 만질 수 없어도 품을 수 있는 것이라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고개를 돌리고 마룻장 아래 웅크려 앉은 목덜미를 잡아채는 손끝도 차갑지만은 않으리라. 통곡은 바닷바람이 되고 오열은 파도소리가 되어 버려진 처마 밑을 맴돈다. 피비린내 물씬한 우물에서 건져낸 옷자락이 새벽구름처럼 흰데, 조각조각 찢어지는 네 살결이 어찌 이리도 함함할까...
"나으리?"
눈꺼풀을 여닫는 永遠 사이로 스러지는, 마지막 밤의 가장 짧은 惡夢.
-END.
***2005/05/24 작성, 2013/03/24 수정.
하드를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쪽글입니다. 그러니까 8년 전에 썼던...와, <혈의 누>가 나온 지 8년이나 됐어! (...응?;)
공포영화는 고사하고 스릴러도 잘 못 보는 곰이지만, 원규(차승원 扮)와 인권(박용우 扮)의 투샷이 너무 예뻐서 얼굴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봤다는 거 아닙니까...지금이라면 다시 볼 수 있을지? 조만간 시도해봐야겠네요.
8년 전에 쓴 글을 이제 와서 (아무리 가필했다고는 해도!) 올리다니 셀프능욕도 정도껏이란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ㅎㅎOTL 지금이라면 절대로 이런 글을 쓸 수는 없을 거니까요. 기념 삼아 발굴해서 올려 봅니다 :3
해거름에 잠긴 로젠베르크의 거리는 스산했다. 야귀가 출몰하는 밤이 오기 전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인파에 묻혀, 탐정은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고 조용히 걸음을 재촉했다. 차갑게 식은 바람에 흐트러진 겨자색 머플러를 끌어당겨 구부정하게 기운 목에 감았다. 벗겨질 것 같은 중절모를 눌러 쓰는 손에는 아직 피딱지가 마르지 않은 생채기가 드문드문 나 있었다.
상점에 들러 붕대와 약, 무엇보다도 저녁거리를 사야 했다. 하지만 이 시간까지 여는 상점은 루드의 가게뿐이었고, 루드는 틀림없이 비아냥 한 마디를 빼놓지 않을 것이다. 평소라면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받아넘기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브라우닝은 묵묵히 걸었다. 붕대와 약은 그렇더라도 먹을 것은 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을 때였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 와서 걸음을 돌려 나가기에는 귀찮았다. 무의미했다. 브라우닝은 웃었다, 지치고 허기진 육신을, 외로운 마음을 비웃었다.
사흘에 걸쳐 완수한 의뢰였다. 유괴된 아이는 상처 하나 없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고, 탐정은 비록 그 아이 대신 다소의 상처는 입었지만 약속했던 보수 이상의 대가와 솔직한 감사를 받았다. 흐뭇하게 돌아서야 마땅했건만, 그럴 수 없었다. 아이가 돌아온 것으로 마지막 조각이 맞춰진 퍼즐처럼 완벽한 가족의 그림이, 그가 오래 전 마음의 선반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고 잊어버렸던 무언가를 끌어내려 머리 위로 떨어뜨린 것 같았다. 그것은 지독한 허기와도 흡사했지만, 어떤 산해진미로도 채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듣더라도,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지울 수 없을 거라는 확신마저 들었다.
그래서 브라우닝은 어디에도 들리지 않고, 누구도 만나지 않고,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이 넓은 마도에서 오직 한 곳, 그의 보금자리이자 피난처, 둥지이자 무덤인 탐정사무소로 돌아왔다.
"...응?"
부주의했다. 사무실의 문을 닫아 잠그고 돌아선 다음에야, 브라우닝은 자신이 문을 열 때 열쇠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 그가 잠그고 갔던 문을 열어둔 것이다. 블라인드가 내려진 사무실은 낮에도 어두컴컴했고, 해가 진 지금은 완벽하게 어두웠다. 그 네모난 어둠 속에, 누군가 있었다.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자 자신의 것이 아닌 호흡이 들려왔다. 낮고 고른, 깊이 잠든 숨소리.
"읏!"
브라우닝이 조용히 팔을 뻗어 전등을 켰다. 누군가 외마디 신음과 함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건가, 닥터."
"아, 이제야 왔군."
"왔군이 아니라..."
"보면 모르나? 자네를 기다렸다 잠들었어."
워켄이 흐트러진 잉크색 머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투가 사실은 쑥스러워 그런다는 걸, 브라우닝은 알았다.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그는 워켄이라는 의사를 알고 있었다.
"기다리다니, 나를? 왜?"
"의뢰할 게 있어서."
하지만 워켄은 몰랐다. 그는 자신이 브라우닝이라는 탐정을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점한 시간과 공간이 브라우닝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워켄은 알지 못했다.
"의뢰? 아아, 그래. 의뢰..."
"응, 내가 일전에...잠깐만, 브라우닝."
"응? 어...어?!"
워켄이 갑자기 말을 끊고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의사를 바라보던 브라우닝은, 잉크색 장갑을 낀 가느다란 손가락이 자신의 손목을 잡았을 때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탕! 탐정의 등이 문에 부딪혀 가볍게 울렸다.
"왜 그러나?"
"아, 아니...괜찮아. 내가 하겠네. 별로 큰 상처도 아니고, 처음 다치는 것도 아니고, 아, 그러니까..."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어 곤란했다. 너무 잘 알 것 같아 부끄러웠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브라우닝을 눈썹을 찌푸리고 바라보던 워켄이 냅다 팔을 뻗었다. 갑자기 양쪽 어깨를 움켜쥐는 바람에, 탐정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다 혀를 깨물 뻔했다.
"머리도 다쳤군? 아픈가?"
"응? 아, 아니...괜찮아. 그냥 총알이 스친 거..."
"괜찮지 않잖아!"
워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움찔 놀란 브라우닝은, 이맛살을 찌푸린 의사의 얼굴이 다가오는 바람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인상 쓰지 마. 상처가 당겨지잖나. 왜 이렇게 애처럼 구나. 우리 애들도 안 이러겠네."
"...그 아가씨들은 여전히 씩씩한가 보군."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하기 위해서는 짧은 침묵이 필요했다. 다행히 그 침묵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아내지 못한 워켄은 흥, 코웃음을 치며 브라우닝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놓고,
"애들하고 비교 당하는 걸 부끄러워해야지."
"그야...아?!"
탐정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질질 끌려간 브라우닝은 가볍게 떠밀려 소파에 주저앉았다. 조금 전까지 워켄이 누워 있던 소파에는 아직도 희미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언제나 차갑고 어둡게, 그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던 공간이,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구급상자 어딨나?"
워켄의 존재로 브라우닝을 휘둘렀다.
"브라우닝? 브라우닝...자네, 지금 우는 건가?"
"응? 어?"
눈앞이 흐려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액체에 당황한 브라우닝이 황급히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고,
"아얏..."
"손 내려!"
날카로운 워켄의 질타에 화들짝 놀라 상처가 짜디짠 물에 젖어 쓰라린 손을 떨어뜨렸다.
"애도 아니고, 정말이지....구급상자 어딨냐니까?"
"어? 어...거기, 지금 자네가 들고 있는데..."
"..."
아마, '애도 아니고'를 연거푸 말하는 게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때 구급상자였던 빈 상자를 내려놓은 워켄은 잘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작은 필통 같은 상자와 손수건을 꺼내고, 재단하듯 브라우닝을 훑어본 뒤,
"쯧."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머리보다 조금 밝은 청람색의 머플러를 풀었다.
"워켄?"
"자네에게 맞추려니 나까지 원시적이 되잖나."
겨우 들릴락 말락 목소리는, 기묘하게도 소년의 투정 같았다. 워켄은 상자를 열어 약솜과 투명한 액체가 든 앰풀을 꺼냈다. 앰풀을 따자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 내밀게."
"어? 어, 응..."
브라우닝은 어정쩡하게 손을 내밀었다. 명백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태도로, 그의 손목을 낚아챈 워켄이,
"읏, 따거..."
"좀 참게. 애도 아니고."
결국 했던 말을 다시 하며 소독약에 적신 약솜으로 브라우닝의 손에 난 상처를 닦았다. 거즈 대신 손수건으로 손을 감싸고, 머플러를 길게 접어 붕대 대신 감아 묶었다.
"임시방편이네. 꼭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응? 어, 응..."
"나 좀 보게, 브라우닝."
"어, 어?"
"쯧."
줄곧 제대로 된 말보다는 흐리멍덩한 대꾸밖에 하지 않는 브라우닝을 아예 애 취급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워켄은 더 이상 브라우닝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탐정의 모자를 휙 벗겨 던진 다음 턱을 잡고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이제야 학습이 된 브라우닝은, 소독약이 상처에 닿는 동안 입술을 깨물고 신음을 참았다.
"이건 어쩔 도리가 없군. 제대로 치료를 받기 전까지는 손대지 말게."
"...아, 응...고맙네."
"울지 말라니까."
아마 또 '애도 아니고'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라우닝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워켄이 뻗은 손은 잠깐 시야를 가렸을 뿐이지만, 뺨에 닿은 손끝은 마치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술을 꿰맨 것처럼, 모든 감각을 송두리째 그 희미한 감촉에 끌어들였다.
"울 정도로 아팠으면 알아서 병원에 갔어야지."
워켄의 손과 브라우닝의 뺨 사이에 걸린 얇은 천이 무구하게 탐정의 눈물을 빨아들였다. 브라우닝은 눈을 깜빡거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고, 절실했다. 그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을 때,
꼬르륵.
"...저녁 안 먹었나?"
잠시 후, 워켄이 허탈한 어조로 물었다. 브라우닝은 노력했다.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참으로 얼빠진 듯 웃을 수 있었다.
"음, 바빠서."
"물을 필요도 없는 것 같지만, 여기 먹을 건 있나?"
"그거 정말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군."
"하!"
외마디와 함께 워켄이 훌쩍 떠나갔다.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책상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든다. 그가 빠르게 말을 잇는 것을 흘려들으며, 브라우닝은 심호흡을 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체취와 체온으로 데워진 공기가 폐부를 채우고 명치를 치며 목구멍으로 차올랐다.
"비켜 주게."
"어?"
"...나도 앉게 옆으로 좀 비켜 달라고."
다행히 워켄은 브라우닝의 어리석은 반응을 부상과 공복 때문으로 여긴 것 같았다. 놀랍도록 부드러운 그의 어조에, 브라우닝은 황급히 옆으로 옮겨 앉았다. 2인용 소파의 언제나 비어 있던 절반을 워켄이 채웠다.
"애들에게 먹을 걸 좀 가져오라고 했으니 잠깐만 기다리게."
"어...어?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내 딸들이야."
워켄의 짧은 대답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자부심이 드러났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만든 두 개의 오토마타를 딸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순간 브라우닝은 격렬한 감정을 느꼈고, 곧 워켄의 '딸들' 역시 자신에게 그와 유사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불공평하다고, 그건..."
"응? 뭐라고?"
"아니야, 아무...것도..."
말하던 중 묵직한 무게를 잔등에 느낀 브라우닝이 말을 더듬었다.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워켄이 희미한 중얼거림을 더 잘 들으려고 몸을 기울인 것이다.
"구급상자도 가져오라고 했으니 제대로 치료해주지. 그때까지, 잠깐만 기다리게..."
브라우닝의 어깨에 체중을 실은 워켄의 목소리가 느리게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고 했다. 조심스럽게 곁눈질하자, 단아한 얼굴이 창백하고 눈 밑에 거뭇한 그늘이 보였다.
"피곤하면 전화하지 그랬나. 아니면 아가씨들을 보내던가."
"아니야, 내가 직접 이야기하고 싶었어...그 김에 오랜만에 자네도 만나고..."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새 잠이 들다니, 정말 피곤한 것 같았다. 새근새근- 낮고 고른 숨소리가, 마치 처음 사무실에 들려왔을 때처럼, 그러나 놀랍도록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마법은 풀리지 않은 채, 너무나 따스하고 안온하게 그를 감싸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저주였다. 차라리 망각을 갈구할 정도로 잔혹한 저주였다.
브라우닝은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와 워켄의 접촉이, 혹시라도 자신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브라우닝은 무방비하게 기대어 잠든 워켄의 체온이, 무게가, 존재가, 자신의 은밀하고 절실한 소망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되었다.
"하하..."
탐정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헛헛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뺨을 따라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워켄이 이해할 수도 없고, 닦아줄 수도 없는 눈물이었다.
-END.
***2013/02/15
Y님의 "서로 외로워하는데 탐정은 사무쳐서 모른 척 감추려 애쓰고 닥터는 정말 모르고 있었으면 좋겠다. 갈급한데 채울 줄 모르는 사람 둘이 만나서, 채우는 것보다 흘리는 게 더 많았으면 좋겠다. 근데 뭐 다른 관계여도 좋고 남이 연성한 게 보고싶 읍읍" 이라는 트윗을 보고 찰싹이 와서 써보았습니다. 브라우닝은 정말 울리는 기쁨이 있는 남자...읍읍...
그가 이토록 곤란한 지경에 처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하급 사서라는 신분보다는 판데모니엄의 수장 레드그레이브의 심복이라는 입장에서, 아무리 사소한 실수라도 주군에게 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언제나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예측하고 대비하여, 어떤 돌발 상황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다시 말해, 지금과 같은 예상외의 곤경에 처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거의'라고 여지를 두는 것은 레드그레이브 때문이다. 살가드의 주군은, 때때로 돌발적인 언행을 하고서는 거기에 놀라고 당황하는 심복의 반응을 즐기는 짓궂은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지금처럼.
살가드는 한숨을 - 무릎 위에 얹힌 머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 내쉬었다. 자그마한 초콜릿색 귀가 쫑긋 흔들렸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고르게 호흡하고 있지만 잠든 것은 아니다.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자는 척 하고서, 무릎 위에 누운 자신 때문에 일어나지 못해 곤란해 하는 살가드의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았다.
"너는...어쩌면 이리 하는 짓이 꼭 레드그레이브님 같으냐."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하고, 살가드는 제풀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여기는 판데모니엄에서 존재마저 지워진 장소였으니까. 오랫동안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던 이 장소에 지금 있는 것은 오직 살가드와, 그의 무릎에 올라앉은 작고 부드러운 온기뿐이었다.
*****
오늘은 하급 사서에게 주어지는 정기휴일이다. 그리고 오래 전 은폐된 어떤 사건에 대한 자료를 찾아오라는 레드그레이브의 명령을 수행하는 날이기도 했다. 수십 년 전의 기밀문서를 소장한 채 폐기된 문헌보관실의 소재를 찾고, 이목을 피해 잠긴 문을 따고 들어오는 일은 쉬웠다. 오히려 어려운 것은, 정리되지 않은 방대한 문건 속에서 레드그레이브가 원하는 자료를 찾는 쪽이었다.
물론, 레드그레이브가 한 번 명령을 내린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고 말 터였지만.
냐-
놀랄만한 집중력으로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작파하고 있던 살가드는, 그래서 처음에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냐아-냐아-냐아오옹-
이게 무슨 소리지? 몇 번이나 거듭 들려온 다음에야, 살가드는 그 작고 가느다란 소리를 인식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물론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분명히 들려오고 있었다. 창틀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팽팽하게 당긴 현을 울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가 조르는 소리 같기도 한, 생전처음 듣는 낯선 소리였다. 언제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거지? 어디에서 들리는 거지? 왜 들려오는 거지?
냐아-냐-!!
마치 그 의문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소리는 점점 더 크고 분명하고 날카롭게 울렸다. 이제 살가드는 그 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창이라고는 하지만, 판데모니엄의 외곽에 위치한 인적 드문 건물, 그 가장 바깥쪽, 그 가장 낮은 지층에 위치한 문헌보관실의 벽이 갈라진 것이나 다름없는 틈새였다. 부서진 창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옆 건물의 뒷벽, 판데모니엄의 장벽을 이루는 무수한 시설들이 시작되는 방벽,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채 버려진 손바닥만 한 땅뙈기뿐이었다. 물론 살가드는 여기에 들어오자마자, 그 창문으로는 오랫동안 바람과 먼지 외에는 드나든 것이 없으며, 누군가 엿보거나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가능성은 없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확인했다.
하지만 소리는 분명 그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살가드는 바짝 경계하여, 왼손에 감은 와이어를 오른손 손끝으로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갔다. 잠깐 기척을 읽은 뒤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보았고,
냐!
왜 이제야 내다보느냐는 듯 매서운 소리를 낸 상대를 본 순간,
"...어?"
참으로 그답지 않게도, 멍청하게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냐웅!
명령하는 듯한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몸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가 물러나 생긴 공간으로, 창밖에 있던 존재가 창틀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살가드는 자신과 눈높이가 비슷해진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연기를 뭉친 듯 길고 보들보들한 은회색 털이 풍성하게 난 몸은 아주 크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작지도 않았다. 세모난 귀가 쫑긋 솟은 둥글넓적한 머리에서 목덜미, 등을 지나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곡선은 부드럽고 우아하며, 단정하게 모아 앉은 네 개의 발을, 역시 털이 복실하게 난 긴 꼬리가 휘감고 있었다. 귀와 코끝, 발끝은 진하게 끓인 초콜릿 같은 갈색이었다. 살가드의 멍한 시선을 마주보는 동공은 마수의 것처럼 세로로 길었지만, 해질녘의 동쪽 하늘처럼 고운 청보라색 눈동자는 마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영롱했다. 그리고 어쩐지 낯설지 않았는데...
"...고양이?"
냐아.
멍하니 바라보며 밀려오는 기시감을 애써 분석하던 살가드가, 드디어 박물학 서적에서 본 삽화를 떠올렸다. 코웃음 같기도 하고 한숨 같기도 한 부드러운 대꾸에, 정답을 말했다는 걸 알았다. 그렇구나, 너는 고양이구나. 그런데 고양이? 고양이라고? 살가드는 자신이 낸 결론에 자신이 당황했다. 모든 것이 통제되고 제어되는 판데모니엄에 야생동물이 있을 리 없다. 하물며 오래 전 멸종해 박물학 서적에나 등장하는 생물이 아닌가. 혹시 어떤 생물학자가 연구를 위해 재생하거나 비슷한 외형으로 창조한 실험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녀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혹시 실험실에서 도망친 것이라면, 지금쯤 누군가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누군가가 여기까지 온다면, 그래서 이 문헌보관실의 소재가 알려지게 된다면...
냐아...
거듭되는 불길한 예측에 혼란스러워진 살가드를 부르기라도 하듯, 고양이가 낮은 목소리로 울었다. 불렀다고? 나를? 잠깐만, 이 생물의 지능은 어느 정도지?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있나? 아까부터 나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살가드는 자신이 고양이에 대해, 그것이 고양이라고 불린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삼 경계했다. 아니, 경계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냐아?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고양이가, 정말로 자그마하고, 부드럽고, 복슬복슬하고, 우아하고, 새침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살가드는 이런 생물이 자신에게 악의나 적의를 품고 위해를 가하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물론 세상에는 보기와 다른 생물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살가드의 주군 레드그레이브가 그러했다.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녀의 몸은 인간이 아닌 인형, 오토마타였다. 인형의 몸을 하고 있지만 그녀의 두뇌는 인간,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여성이었다. 예리한 지성과 냉철한 판단력, 심지가 굳고 인내심이 강하며, 때로는 상냥하며 때로는 비정한 판데모니엄의 수장. 바로 살가드가 주군으로 충성을 맹세한 단 한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라는 생물은 예리한 발톱과 이빨을 숨긴 채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다고 책에 적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저 갓 구운 빵처럼 말랑말랑하고 몽실몽실한 발에 예리한 발톱이 달려 있다고? 살가드는 고양이가 단정하게 모은 네발을 미심쩍은 듯 바라보았다. 만져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그래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고양이가 화내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이 고양이는 왜 여기에 온 걸까? 무슨 목적으로, 뭘 원해서?
냐!
마치 레드그레이브가 코웃음을 칠 때 같은 어조로, 고양이는 다시 한 번 살가드를 한 걸음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치 체중이 없거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우아한 동작으로 창틀에서 바닥으로 내려섰다. 참으로 유연하고 부드럽게 사지를 쭉 뻗어 기지개를 편 고양이는 오만하게 코끝을 들어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고,
"어? 자, 잠깐만!"
조금 전까지 살가드가 앉아 있었던 책상을 향해 서슴없이 걸어갔다. 여왕의 행진처럼 위풍당당한 걸음걸이였다. 책상 옆에 놓인 작은 바구니 앞에 선 고양이는 코끝을 바구니에 대고 잠깐 냄새를 맡은 뒤, 허둥지둥 따라온 살가드를 올려다보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냐, 냐.
"...너, 혹시 배고프니?"
그것은 살가드의 도시락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은 어느덧 점심때를 지나고 있었고, 시간을 깨닫자마자 허기가 물밀듯 밀려왔다. 무릎을 꿇고 바구니를 집어 드는 살가드를 바라보는 고양이의 눈이 초승달처럼 곱게 휘었다.
*****
"앗, 이봐! 지금 뭐하는 거야!!"
식사를 마친 뒤 - 속이 빈약한 샌드위치와 과일주스였지만, 고양이는 제법 맛있게 먹어주었다 - , 부스러기를 모아 바구니를 치우느라 잠깐 자리를 비웠던 살가드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역시나 하는 사달로 입증된 현장을 목격하고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책상 가운데 올라앉아 잔뜩 쌓인 서류를 마치 읽는 것처럼 앞발로 툭툭 치고 있던 고양이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고, 기다란 꼬리에 휩쓸린 서류 더미 하나가 와르르 무너졌다.
"너, 이게 대체 무슨 짓...!"
냐아오오-!!!
"...이야...아?"
버럭 언성을 높이던 살가드는 흠칫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고양이가 잘못한 것인데, 오히려 저쪽이 더 앙칼지게 소리를 지른다. 활처럼 휜 등의 털을 빳빳하게 곤두세우고, 부드럽게 펼쳐져 있던 수염을 전극이라도 맞은 것처럼 삐죽삐죽 뻗치며, 가늘던 동공이 커다랗게 확대되고, 작은 입에서는 새하얀 송곳니마저 드러났다.
왜 갑자기 큰소리를 내는 것이냐! 깜짝 놀랐지 않느냐!!
레드그레이브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화를 냈을 것이다. 번쩍번쩍 빛나는 청보라색 눈동자는, 비록 동공의 모양은 달랐지만 어쩐지 그녀의 커다란 자수정색 눈동자와 비슷한 것도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살가드는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길게 한숨을 쉬고, 흩어진 서류를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예민한 감각은 고양이가 훌쩍 책상에서 뛰어내려, 방 저편에 앵돌아앉아 앞발이며 등을 핥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그래, 너는 잘못한 게 없다 이거지. 헛웃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낯설지 않다. 그러모은 서류를 책상 위에 올리고 의자에 앉아 바싹 당기려는데,
"...너..."
소리 없이 다가온 고양이가 슬그머니 무릎 위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마치 그가 의자의 일부나 되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등을 돌리고 자세를 가다듬는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좀 더 묵직한 부피가 인간보다 좀 더 높은 온도를 품고 얹혔다.
"혹시, 사과하는 거니?"
이야웅-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는 심드렁한 대답. 하지만 대답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살가드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저도 모르게 고양이의 등에 손을 얹었다. 흠칫. 닿은 순간 놀란 것은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고양이는 소리를 지르거나 달아나지 않았다. 풍성한 털은 생각대로 보들보들하고, 그 안에 묻힌 몸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살가드는 조심스럽게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목덜미를 지나 쫑긋 선 귀 뒤를 긁어주자, 고양이는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감고 고륵고륵- 귀여운 소리를 냈다. 아마 제 나름으로 사과하는 것이리라 짐작한 살가드는 기꺼이 고양이에게 무릎을 내주고, 한 손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모피의 감촉을 음미하며 다른 손으로 서류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
살가드가, 고양이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생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의 일이었다.
*****
"저기, 음...고양이야? 내가...음, 좀 일어났으면 하는데..."
살가드는 곤란했다. 그가 이토록 곤란한 지경에 처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이하생략.
처음 한동안은 괜찮았다. 하지만 아무리 단련된 몸이라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은 자세를 유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책상 위의 서류를 모두 분류했으니 다른 서류 더미를 가져와야 했고, 쥐가 날 것 같은 다리를 펴고 싶었고, 목도 살짝 말랐다. 그리고 고양이는 그의 무릎 위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리인 것처럼, 동그마니 몸을 말고 고른 숨소리를 냈다. 잠이 든 것 같았다. 자는 척 하는지도 몰랐다. 수염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잠투정인지 키득거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밀어내면 될 일이었다. 깨지 앉도록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어딘가 안전한 장소에 내려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살가드는 차마 고양이의 낮잠을 깨울지도 모르는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마치 격무에 지친 레드그레이브가 충직한 심복 외에는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서 꼬박꼬박 조는 것을 발견했을 때처럼, 한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에라, 모르겠다.
살가드는 포기했다. 자신답지 않은 결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좌절하거나 우울해지기는커녕, 잔잔한 미소가 단정한 입가에 떠올랐다.
레드그레이브님께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시면, 이 녀석을 보여드리자. 어디서 온 녀석이든, 레드그레이브님께 맡기면 잘 처리해 주시겠지. 절대 해를 입거나 곤란하지 않도록 해주실 거야...어쩌면 마음에 들어 곁에 두실지도 모르지...이렇게나...꼭 닮았으니...레드그레이브님과...고양...이...
따스한 체온과 부드러운 감촉, 고르게 울리는 생명의 박자에 홀려, 살가드는 눈을 감았다. 상아색 머리카락이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청보라색 눈을 가늘게 뜨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남자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느긋하게 펼쳐진 수염이 바람에 일렁이는 잔물결처럼 웃었다.
*****
고맙다, 살가드여.
다정한 목소리가 아늑하게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대는 참으로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심복이로다. 잘 쉬다 가느니라.
*****
깨어났을 때, 살가드는 홀로 남은 자신을 발견했다. 고양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꿈을 꾸었는가 생각했지만, 무릎 위에 희미하게 남은 온기도, 옷에 묻은 몇 가닥의 은회색 기다락 터럭도, 그리고 어깨를 덮은 어디서 본 것도 같은 모포도 모두가 현실이었다. 살가드는 멍하니, 고양이처럼 부드럽고 두툼한 모포를 어루만졌다. 어디서 보았는가 하면, 레드그레이브의 집무실에 딸린 개인 거실이다.
어떤 놀람이나 동요, 의문도 없었다. 오직 평온하고 안온하게,
"레드그레이브님..."
주군의 이름을 부른다.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는 따스한 잔등을 쓸어내리듯 부드러운 어조였다. 하급 사서의 짙고 해사한 얼굴 위로 초콜릿이 녹아내리듯 부드러운 미소가 짙게 번졌다.
신지는 어깨를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겨울을 맞아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을씨년스럽게 둘러선 공원 한켠, 보기만 해도 얼어붙을 것 같은 아이스 블루로 도색된 벤치에 앉은 소년의 조붓한 몸은 모직코트 한 벌을 걸쳤을 뿐, 목도리도 장갑도 없었다.
"추워..."
신지는 맨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벌써 몇 번째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지 모른다.
"하아..."
하지만 새어나오는 한숨은 보일듯 말듯 엷었다. 소년의 드러난 귓불이며 뺨도 그리 빨갛지 않았다. 사실 그리 추운 날씨는 아니었던 것이다. 며칠째 계속되던 한파 끝에 찾아온 겨울 치고는 따스한 날씨에다 주말이었다. 거리에는 모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외출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무작정 거리로 뛰쳐나온 신지를 혼란시켜 이 외진 공원 한켠까지 몰아붙일 정도로, 모두가 즐겁고 행복하고 기뻐 보였다. 모두 동행이 있거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나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가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갈 곳도, 기다리는 사람도, 기다려 줄 사람도.
"카오루군..."
신지는 자기가 부른 이름에 자기가 흠칫 놀랐다. 누가 들었을까봐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거리의 인파 속을 헤맬 때에도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아무도 이 소년이 제3신동경시의, 인류의, 세계의 구세주라는 걸 몰랐다. 그저 단정하고 반듯하고 숫기 없어 보이는 중학생 남자아이로 볼 뿐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랬다.
에바에 타지 않은, 플러그 수트를 입지 않은, 어른들과 함께 있지 않은 이카리 신지는 그저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자신에게 모두가 주목하고, 기대하고, 성과를 요구한다. 힘들었다. 괴로웠다. 무서웠다. 그래서 도망쳤다. 갈 곳도 없는데 달아났다. 그리고 이 넓은 세상에서 자신만이 홀로 외톨이라는 걸 깨닫기 전, 한 사람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우리집에 갈래? 누추하고 대접도 변변찮지만,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괜찮아.
"카오루군..."
신지는 두 손을 입가에 모아 언 손을 녹이는 척, 한숨을 쉬는 척, 그의 이름을 작게 불러보았다. 나기사 카오루. 자신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묻지 않고, 강요하지 않는 오직 한 사람. 같은 나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럽고, 다정하고, 아름다운 소년.
'카오루군...지금쯤 어쩌고 있을까...'
며칠째 집에만 있던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을까? 찾아다니고 있을까?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남기지 않고 돌아갔다고 생각할까? 뭐 이런 무례한 녀석이 있냐고 화를 냈을까? 섭섭하다고 원망했을까? 혹시 경멸한 건 아닐까? 다시는 초대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어떻게 하지?
상상하면 할수록, 신지 안의 카오루는 웃음을 그치고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하게 돌아섰다. 멀어졌다. 싸늘한 바람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추웠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추웠다.
"추워..."
신지는 고개를 떨궜다. 카오루는 나쁘지 않았다. 상냥하고 친절했다. 나쁜 건 자신이다. 달아났다. 매번 달아나면 안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결국은 또 달아났다. 아버지에게서, 에바에게서, 사도에게서, 제3신동경시에게서, 네르프에게서 달아났던 것처럼, 카오루에게서도 달아나고 말았다.
차라리 나 자신에게서 달아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자살 같은 거창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어리숙하고 무능하고 무력한 스스로가 지긋지긋했다. 좀 더 영리했더라면, 좀 더 용감했더라면, 좀 더 분별력이 있었더라면, 좀 더 의지와 인내력이 있어서,
"좋아...하는데..."
깨닫는 순간 포기할 수 있었더라면.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마음속에서 뭉클뭉클 자라나는 감정을 짓밟고 억누를 수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쯤 이렇게 창백한 겨울 햇살 아래 외로이 홀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코타츠 아래에서 가끔 발을 부딪히고 귤을 까먹으며 시시한 TV프로와 잡지를 화제 삼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을 텐데.
"카오루군..."
"응? 신지군."
"어?!"
깜짝 놀라 고개를 드는 것보다 먼저, 두툼하고 폭신한 무게가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목도리도 안 하고 나갔던 거야? 아무리 날이 풀렸어도 겨울이야. 감기 걸려."
"카, 카오루군..."
"응?"
대꾸하는 목소리는 목도리를 둘러주는 손길 만큼이나 따스했다. 멍하니 바라보는 신지의 시선을 상냥하게 받아주는 무구한 붉은 눈동자.
"점점 바람이 차가워지네. 이만 집에 가자."
"카오루군, 나..."
해사한 얼굴이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모든 것을 아는 듯, 아무 것도 모르는 듯, 신지의 두 손을 맞잡았다.
"장갑도 없이, 이 손 차가운 것 좀 봐. 집에 가자."
"...카오루군..."
손을 감싼 온기가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흘러들어간다. 가진 바 없는 분별력과 의지와 용기를 받은 것처럼, 심장이 두근두근 울리기 시작했다. 신지는 눈을 깜빡거렸고,
"신지군?"
"응, 미안."
웃었다. 겨울 햇살처럼 창백하고 눈부신 미소. 이번에는 카오루가 눈을 깜빡거릴 차례였다.
"집에 가자, 카오루군."
"...그래."
신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잠깐 서로를 마주 보았고, 멋쩍게 혹은 수줍게 웃었고,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두 사람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처럼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END
***2013/01/14
트위터에서 대선 투표율 RT 이벤트로 받은 리퀘입니다.
은렌님의 카오루x신지 커플링인데요. 미성년이셔서 수위가 없으므로 그냥 신지로 표기했습니다^^;
수업시간의 학교는 조용하다. 물론 각 교실마다 수업하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쉬는 시간에 천여 명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와글와글 떠들던 것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희미하고 따분한 소음이었다. 그 파도처럼 희미한 울림들을 자장가 삼아 잠들었던 살가드는 몸을 휘감는 한기에 눈을 떴다. 작고 하얀 알갱이들이 흐릿한 시야를 얼룩덜룩하게 물들였다. 잠이 덜 깼나 싶어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자 차가운 습기가 묻어난다.
"...눈?"
그러고 보니 아침에 우산을 가져가라는 아버지 부인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강설예보라도 있었나? 어쩐지 운동장에 체육수업 하나 안 보이더라니. 짜증나네. 살가드는 급수탱크 위에서 일어났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곳을 찾아 여기까지 올라오긴 했지만, 아침의 초겨울답지 않게 따뜻하던 햇살은 간데없이 잔뜩 찌푸린 잿빛 하늘과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낮잠을 잘 수는 없었으니까.
흘끗, 교사 정문의 시계탑에 시선을 던졌다. 보아하니 곧 오후 첫 번째 수업이 끝날 시각이다. 설렁설렁 교실로 돌아가면 종이 치겠지. 따뜻한 교실에서 10분쯤 자고, 그 다음 수업이 뭐더라? 봐서 만만한 선생이면 계속 자고, 아니면 양호실에 가서 아프다고 좀 누워 있다 수업 끝나면 집에 가야지. 이사장인 아버지는 결석만 하지 않는다면 수업 시간 동안 교내 어디서 뭘 하며 시간을 때우든지 참견하지 않앗다. 체면 때문이겠지,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아들이라는 - 빌어먹을.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바람에 기분이 나빠졌다. 살가드는 교실로 돌아가는 걸 관두고 바로 양호실로 향했다. 평소 지나갈 일이 없는 2학년 교실이 늘어선 복도와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는데,
"내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고?"
난처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고막에 꽂혔다.
*****
"...오늘은 여기까지. 황혼의 시대는 기말시험에 나오니까 복습 꼭 해."
시험이라는 말에 투덜투덜 웅성거리기 시작한 아이들의 머리 위로, 레드그레이브는 벽에 걸린 시계에 시선을 던졌다. 수업이 끝나려면 17분이나 남았다. 종이 울리자마자 나가야 한다. 10분 내로 넓은 교정 어딘가에 - 물론 그 공주가 아닌 바보가 있을 곳은 대략 짐작이 가지만 - 숨어 있는 살가드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오전 내내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니 점심은 먹었을까? 안 먹었으면 일단 밥부터 먹여야 하나? 지금 시간에 그 애 밥을 먹일만한 데가...아니지, 일단 찾아낸 다음 고민해도 늦지 않아. 이런 저런 생각으로 초조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교탁 위의 수업자료를 추스리는데,
"눈이다!"
"어? 진짜! 첫눈이다!!"
학생들이 일제히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서 오후에 비 또는 진눈깨비가 내릴 거라더니, 흩날리는 것은 제법 그럴듯한 가루눈이었다. 마침 수업도 끝났겠다, 저마다 재잘재잘 떠들며 창가를 바라보며 또 일어나 창가로 가려는 것을 본 레드그레이브가 손바닥으로 교탁을 쳤다.
"자자, 앉아. 수업시간 아직 남았으니까 조용히 자습해라."
"에이~"
학생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올해 처음 부임한, 자그마하고 앳되고 예쁘장한 여선생이라면 천둥벌거숭이 같은 고등학생들에게 만만하게 보이기 딱 좋다. 하지만 레드그레이브에게는 어떤 역경에도 주장을 관철하는 불굴의 의지, 수백수천 명의 남녀학생들이 번갈아 질러대는 기상천외한 말썽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담대함, 무엇보다도 철근도 떡볶이처럼 씹어먹으며 밟아도 꺾이지 않는 천혜의 체력을 지닌 10대들조차 두려워할 만큼 강건하고 매서운 손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어리어리한 여선생을 우습게 보고 들어댔던 불량학생들은 물론, 소위 '일진 짱'까지 그녀의 '사랑의 매'에 굴복한 뒤부터는 아무도 그녀에게 반항하지 못했다.
"선생님!"
"뭐니, 프리드리히."
"첫사랑 이야기 해주세요!"
물론 이런 건 반항 축에도 들지 않는다. 타고난 너스레와 미워할 수 없는 웃음 덕분에 입학 이래 2년 연속 전교 오락부장을 역임하고 있는 옅은 석간주색 머리칼의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외쳤다.
"뭐?"
"수업 끝났잖아요. 첫눈도 내리는 우리 어여쁘신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와아-"
오오, 맞다! 바로 그거다! 굿쟙! 과연 리리! 아이들이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반장이자 프리드리히의 쌍둥이 형인 베른하르트가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빅웨이브를 타기 시작한 급우들을 말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내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고?"
레드그레이브는 난감했다. 오늘 진도는 다 나갔고, 10분이라는 애매한 시간이 남아 있고, 그녀에게도 첫사랑은 있었다. 문제는 그 첫사랑이라는 것이 아이들이 상상하듯 첫눈처럼 정결하고 풋풋하지 않았다는 사실...
콰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교실 앞문이 난폭하게 열렸다. 와글와글 시끄럽던 교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온 장본인을 알아본 순간 의아함과 당혹감, 호기심이 잔물결처럼 소근소근 퍼졌다.
"살가드?"
곧 찾아 나서려던 상대가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당황한 레드그레이브가 눈을 깜빡였다. 제비꽃 색깔의 커다란 눈동자에,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어두운 피부의 소년이 또렷하게 비쳤다.
"너 지금까지 어디 있었...살가드?!"
다짜고짜 손을 내밀어 레드그레이브의 손목을 낚아챈 살가드가 그대로 몸을 돌려 교실을 나갔다. 영문을 모르고 얼떨결에 따라가던 레드그레이브가 뭔가 말하려 했을 때, 마치 그 말이 이미 들리기라도 한 듯 우뚝 걸음을 멈춘 살가드가 어깨 너머로 교실 안을 훑어보았다.
"니네, 어디 가서 선생님 이야기 떠들면 다 죽여버린다."
"살가드! 선배님들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
"농담 아니니까 알아서들 잘 해, 가요, 선생님."
"살가드? 잠깐만, 살가드..."
콰당!
아까보다는 조금 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교실 앞문이 닫혔다. 비록 레드그레이브에게 - 패배자의 진영에서는 '정정당당한 일기토에 석패했다'고 주장했지만 - 무참하게 얻어은 끝에 교내에서는 얌전한 강아지가 되긴 했지만, 입학 후 2주만에 학교뿐 아니라 학군 내의 '일진 짱'으로 등극한 무시무시한 1학년의 경고였다. 학생들은 레드그레이브가 그랬듯 눈만 깜빡이며, 살가드의 거친 발소리와 레드그레이브의 당황한 잰걸음이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것을 듣고만 있었다.
살가드의 손을 뿌리친 레드그레이브가 말했다. 질문처럼 들리지만 말꼬리가 내려간 것은 그만큼 화가 났다는 증거이다. 태연한 얼굴로 학습자료실의 문을 잠그고 돌아서긴 했지만, 살가드는 내심 바짝 긴장했다. 수업시간에는 쓰이지 않는 학교 구석의 학습자료실까지 끌려오는 동안 레드그레이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큰소리를 내서 다른 교실의 수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것도 있지만, 굳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이 상황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리라. 그것은 오만이 아니라 올바른 판단이었고, 그래서 이미 그녀에게 '결투'에서 패배한 적 있는 살가드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이야기하기 싫으셨잖아요."
"뭐?"
"첫사랑 이야기, 하기 싫으셨잖아요."
"오지랖이 넓구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레드그레이브가 팔짱을 단단히 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자수정처럼 싸늘하게 빛나던 눈동자가 누그러진 것을 확인한 살가드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뇨. 선생님은 거짓말 못하잖아요. 거절해서 분위기를 깨든, 이야기를 해서 분위기를 깨든, 아무튼 그 자리 안 좋게 끝났을 거에요. 그렇다고 리리 자식을 패서 닥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대신 선생님을 데리고 나온 거에요. 내가 잘못했어요?"
"제가."
"아, 예. 그러니까 제가 잘못했어요?"
"살가드."
"형 이야기하는 거 싫어하잖아요, 레드그레이브...누나."
"..."
레드그레이브는 뭔가 말하려던 입술을 앙다물었다. 살가드는 그 입술이 함박꽃처럼 환하게 웃던 때를 똑똑히 기억했다. 어린 소년의 눈에, 어느 날 나타난 영특하고 지혜로운 연상의 소녀는 마치 여신처럼 비쳤다. 그리고 그녀는, 소년이 또한 영웅으로 숭배하던 형을 볼 때 가장 아름답게 웃었더랜다.
"...나참."
이윽고 표정을 추스린 레드그레이브가 웃었다. 그 허허롭지만 밝은 미소에 잠깐 방심한 나머지 그녀가 팔짱을 푸는 것에 주목하지 못한 살가드는,
"학교에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랬지?"
딱!!
작은 주먹이지만 눈물이 찔끔 나도록 매서운 딱밤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아야야..."
"도와주려고 한 건 알겠다. 하지만 나한테 참견할 생각 말고 네 앞가림부터 해. 학생이 수업을 제대로 들어야지."
"누...선생님 수업은 제대로 듣잖아요."
"다른 수업도."
"재미없어요."
"그래도 들어. 아버님이 너한테 많이 기대하고 계시잖니."
살가드는 입을 다물었다. 레드그레이브는 모른다.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장남을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정하게 내버린 남자가, 다루기 어렵다는 이유로 투명인간 취급하던 차남을 후계자로 임명한 이유를. 어째서 장남의 약혼녀였던 원로 영애를 차남이 다니고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학교에 배속되도록 손을 썼는지,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다. 살가드도 굳이 자신과 죽은 형과 부친 사이에 질척하게 고인 심연을, 이 결곡한 여성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오늘, 첫눈이, 형이 죽던 날처럼, 내리고, 바로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그녀를 보기 전까지는.
딩동-딩동-
"이런, 교재를 다 두고 왔잖아. 나 이만 가볼 테니까, 너도 교실로 돌아가. 이 다음 수업부터는 착실히 듣고..."
눈앞에서 등을 돌려 멀어지려는 레드그레이브를 향해, 살가드는 손을 뻗었다. 어느새 자신보다 낮아진 조붓한 어깨를 붙들고, 돌려세워,
"무..."
레드그레이브의 입술은 상상했던 것처럼 보드랍고,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차가웠다. 그것은 참으로 독신瀆神과도 같은 충동이어서, 살가드는 차마 자신의 온기로 그녀의 입술을 녹이지도 못하고, 재빨리 얼굴을 들어올렸다. 레드그레이브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가드, 너..."
"레그."
하려던 말도, 하려던 행동도, 그 한 마디에 얼어붙었다. 그녀가 부모님과 할아버지를 제외한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한 애칭은, 그 한 사람이 자신 외에 사랑했던 또 단 한 명의 목소리를 빌어 참으로 감미롭게 내렸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아이였고, 숨을 거둔 약혼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았을 때는 소년이었던 그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어느새 남자의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좋아해요."
"...살가드."
"좋아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계속."
"..."
레드그레이브는 대답 대신, 자신을 끌어안은 살가드를 밀어냈다. 저항을 거부하고 난폭하게 굴 수도 있지만, 상대는 레드그레이브였다. 그럴 이유도 없거니와 그럴 수도 없다. 살가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고백의 대가를 지금 바로 치르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눈을 감아야 하나? 하지만 살가드는 눈을 감지 않았다. 레드그레이브가 그랬듯,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손을 똑바로 지켜보았다.
"언제, 이만큼 커서는."
각오와 달리 레드그레이브는 그를 때리지 않았다.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뺨을 어루만졌을 뿐.
"아직은 한참 더 동생으로 있어줄 줄 알았는데."
"레그..."
"학교에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잖니."
물기 어린 목소리가 낮게 흘러내렸다. 살가드는 뺨 위에서 떨리는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레드그레이브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조용히 자신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기는 살가드를 똑바로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좋아해요."
'..."
대답 대신, 그녀는 눈을 감았다. 살가드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두 번째 입맞춤은 좀 더 길었다. 두 사람의 맞닿은 뺨 사이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미안해요.
레드그레이브와 살가드는 같은 사람을 향해, 똑같은 말을 떠올렸다.
미안해요. 하지만 나 이 사람을 좋아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좋아했어요. 미안해요...
커튼이 반쯤 걷힌 유리창 너머로, 어느덧 굵어진 눈발이 세상의 모든 소리와 모든 색깔을 하얗게 물들이며 쏟아졌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소리가 되지 못한 투명한 목소리가 거듭 얽히며, 서로의 등을 끌어안은 손이 알 수 없는 미래의 한기에 바르르 떨렸다. 눈이, 그날처럼, 그들이 서로의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렸던 날처럼, 그들을 감싼 세상에 계속 내리고 있었다.
-END.
***2012/12/30
BGM 'Powder Snow' by Rina Ogata
트위터에서 대선 투표율 RT 이벤트로 받은 리퀘입니다.
레아님의 "학원물로 선생님인 레드그레이브와 학생인 살가드" 리퀘인데요...제가 학교를 졸업하고도 강산이 한 번 변하는 바람에...학원물은 정말 감이 안 잡히더랍니다OTL 일단 한국인답게 학원물은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이 연애하는 드라마! 라고 써보긴 했습니다만,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갑자기 무릎 위에 올라앉은 보드라운 한기에 노인은 눈을 떴다. 방금까지 밖에 있었는지, 어린 손녀의 코트는 온통 눈투성이였고 볼은 사과처럼 새빨갰다. 노인은 담요 아래에서 손을 꺼내 손녀의 얼굴을 감쌌다. 띠뜻하게 데워진 커다란 손 안에서 자그마한 얼굴이 꺄르르 웃었다.
"우와! 따뜻해~"
"마리! 할아버지 주무시는데 방해하면 안된다고 했잖니!”
"그치만 엄마아~ 할아버지는 맨날 주무시잖아~"
거실 문간에 버티고 선 어머니가 앞치마를 두른 허리에 손을 얹고 케이크 반죽이 묻은 국자를 휘둘렀다. 하지만 손녀는 할아버지의 품이 도피성逃避城이라는 걸 알고 있어, 어리광을 섞어 칭얼거리며 할아버지의 가슴팍에 차갑게 식은 머리를 묻었다. 노인이 허허 웃으며 담요자락으로 손녀를 감쌌다. 아이가 함빡 휘감고 온 바깥공기는 눈내음이 배어 차갑고도 상쾌했다.
"할아버지, 응, 마리가 눈사람, 이마-안큼 커다란 거 만들었는데, 폴 오빠가 부숴버렸어요. 빵- 하고 차버렸어요. 그래도 마리 안 울었어요. 착하죠? 응? 마리 착하죠?"
"그래요, 우리 공주님. 장하기도 하지."
"눈사람 또 만들 거에요. 할아버지두 같이 가면 안되어요?"
"나도?"
"응! 할아버지도 같이 가요!"
"허허...그러자꾸나."
겨울이 시작된 뒤로는 때로 교회도 갈 수 없을 정도로 자리보전을 했다. 하지만 오늘은 함박눈이 내려서인지 한겨울 같지 않게 포근하여, 불을 세게 돋운 거실 벽난로 앞에 담요를 두르고 앉아 있으려니 조금 더울 정도였다. 딸 부부의 정성어린 보살핌 속에서 휴식을 취한 덕분일까. 근래 기억에 없을 정도로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다. 잠깐 정도라면 괜찮겠지.
딸랑-딸랑-
노인은 팔꿈치 옆의 테이블에 얹힌 종을 집어들어 울렸다. 언제나 그의 시중을 들던 늙은 하인이 휴가를 받아 집에 갔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은, 딸의 모습이 다시 거실 문간에 나타난 다음이었다.
"부르셨어요, 아버지?"
"으음, 바쁜 데 미안하구나, 얘야. 잠깐 밖에 나가보려는데..."
"밖에요? 추우실 텐데요."
"좀 껴입으면 괜찮지 않겠니? 너무 오래 집안에만 있었더니 갑갑하구나."
"하지만..."
딸은 고민했다. 아버지는 남달리 강건한 사람이었지만 나이를 이기지는 못했다. 한 손으로 자신을 안아들고 다른 손으로 생존과 평안을 찾아 절벽을 기어올라가던 아버지는 얼마나 늠름하고 믿음직했던가! 세월의 흐름을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이만큼 안정을 찾아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게 된 지금, 그때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랬듯 자신 역시 아버지의 바람은 모두 들어드리고 싶은 것이 딸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오늘은 바람도 없고 해도 높으니까 잠깐이라면 괜찮겠네요. 그이를 불러올게요."
마침내 결심한 딸은 지금쯤 왕진에서 돌아왔을 남편을 부르러 갔다. 신나서 들까부는 아이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와 그녀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
밤새 내리던 눈은 아침나절에 그치고, 두터운 눈이불을 덮은 세상을 네려다보는 하늘은 손을 대면 부서질 것처럼 투명한 유리색이었다. 나뭇가지에 앉은 눈을 떨어내는 짓궂은 겨울바람도 사람 키만큼 높고 두텁게 다듬은 사철나무 울타리가 미로처럼 얼기설기 엮인 정원 안쪽까지는 들어오지 못했다. 정원의 중심이 되는 분수는 얼어붙어 물소리도 물을 마시는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원을 장악한 것은 눈이불을 소리없이 밟으며 겨울을 춤추는 정적뿐이었다.
담요를 깐 벤치에 두터운 겉옷과 스툴을 겹겹이 두른 노인을 앉히고, 발치와 벤치 양쪽 끝에 벌겋게 달아오른 숯화로까지 놓은 다음에야 딸과 사위는 물러갔다. 모처럼 난롯가를 벗어난 할아버지와 놀겠노라 칭얼대던 손녀는 결국 제 아버지 어깨 위에서 통곡하며 실려갔다. 그렇게 노인은 자신 외에는 살아 움직이는 것 하나 없는 정원에 홀로 남게 되었다.
아니, 이토록 혹독하고 모진 겨울에도 자연은 살아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딸이 두고 간 바구니의 반쯤 열린 뚜껑 사이로 소담스런 갈색 털뭉치가 보인다. 노인이 부지불식간에 팔을 뻗자 화다닥 놀라 달아났던 다람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심스럽게 눈더미 사이에서 머리를 내밀었고, 노인이 던져준 머핀을 좋아라 물고 갔다. 한겨울답지 않게 따스한 날씨에 동면중이던 작은 생물들이 깨어난 걸까. 빵 부스러기를 보고 내려앉는 새들이 있어, 노인은 바구니에 담겨 있던 빵과 과자를 모두 뿌려주었다. 한 번 연구에 몰두하면 환자가 오는 소리도 듣지 못하는 사위는 물론, 만찬 준비에 정신없이 바쁜 딸은 앞으로 한동안은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되었건 자신은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두 번 다시 굶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아아, 그렇구나.
노인은 탄식하고, 딸의 사랑처럼 따스하고 보드랍게 감싸는 직물들 속에서 편안하게 어깨의 힘을 뺐다. 깨달음은 갑작스러우나 놀랍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낭보나 되는 양,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아아, 그렇구나.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로구나.
이제야 다시...
떨구어진 시선 속에 떠올랐던 손은 고개를 들어올리는 동안 사라졌다. 노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 거칠거칠한 손의 임자를 찾았다. 그리고 그 대신, 낯익은 얼굴들을 보았다.
드디어 끝났구나, 기중기!
끈질긴 놈, 오래도 살았다!
행복했냐? 어? 행복했냐고!!
브르베, 슈닐디외, 코슈파유. 배운 바 없고 가진 바 없던 저속하고 천박한 무리. 오래 전에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고통스러울 뿐인 보잘것없는 삶을 마쳤을 죄수들은, 아아, 그간 얼마나 깊은 사랑 속에서 얼마만큼의 위로를 받고 얼마만큼의 참회의 눈물을 흘렸을까. 빈정대고 비웃을망정 그 면면에서는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친우들을 만난 듯한 반가움에 노인은 손을 내밀었다. 비쩍 마른 손끝에 어딘가의 문이 열린 것처럼 희미한 바람이 느껴졌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지. 죽지 못해 살고 있었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밤을 보낼 수 있었던 침대에 감사하고 그 침대에서 다시 오늘밤을 보내기를 기도했었지!
아아, 고마워라. 당신이 우리에게 일용할 빵을 주었지요. 우리가 일할 수 있게 해주었지요. 고마워라. 감사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던가요?
당신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겠지만, 그것이 당신이 우리에게 베풀 수 있었던 최고의 자비. 그러니까 감사하겠소, 시장님, 당신은 좋은 사람이었어.
정말로 자신은 아무 것도 몰랐다. 단지 그 순간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행했을 뿐. 설사 그것이 위선이고 사회를 속이는 짓이었을지라도, 그 행위로 인해 누군가는 빵을 얻었고 누군가는 옷가지를 얻었고 누군가는 또 하루를 영위할 수 있었다. 잘한 일이었기를, 저 유복하고 만족스러워 보이는 낯선 이들이 그때에는 힘든 일상에 찌들려 썩어가던 몽트뢰유 쉬르 메르의 직공들이기를 바랄 뿐.
용서할게요, 아저씨.
검댕으로 시꺼멓게 굳은 폐를 주체하지 못해 숨을 거두었던 소년은, 마치 기념으로 남겨두었다는 듯 간간이 검은 얼룩이 내비치는 얼굴에 밝은 미소를 떠올리며 재잘댔다.
용서할게요. 봐요, 아저씨는 내게 이만큼이나 많은 40수를 주었잖아요?
노인을 향해 내민 검댕으로 더럽혀진 작은 손바닥 위에는 불에 타 겨우 은전이었던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눈부시게 반짝이는 새 은화가 한 닢, 또 한 닢, 바라보는 동안 노인이 수많은 프티 제르베들에게 쥐어주었던 40수 은화가 손바닥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소복이 쌓인 은화가 무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손바닥을 뒤집어 은빛 폭우를 노인의 무릎 위로 쏟아 부은 소년이, 그 소리만큼이나 밝게 부서지는 웃음을 터뜨리며 내달려 가버렸다.
아니, 쏟아진 것은 한낮의 햇살에 반짝이는 눈송이였다. 크고 보드랍고 서늘한,
평안하시기를.
다정하게 닿아 축복을 내리는 생플리스 수녀의 손처럼 새하얀 눈송이가 노인의 머리와 어깨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제가 당신을 위해 한 거짓말이 그랬듯이, 당신이 지금까지 저질렀던 모든 과오와 죄악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저 높은 곳에서 헤아려지기를.
그는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에 노인은 화들짝 놀랐다. 돌아보고 싶었으나 돌아볼 용기가 없었다. 닿을 리 없는 손길이 어깨에 닿아 느껴질 리 없는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2천여 년 전 존귀하고 성스러우신 분께서 그러하셨을 것처럼 자비롭고 온화한 목소리가 그를 위해 저 높은 곳을 향해 탄원했다.
이 사람은 저와 한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여섯 벌의 은식기와 은스푼 하나, 은촛대 두 개는 그의 영혼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대가였습니다. 그는 연민을 알았고 자비를 배웠으며 사랑과 용서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저와 한 약속을 지켰습니다.
눈보라를 예고하는 바람처럼, 선량한 늙은 성직자의 손이 노인의 머리와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노인이 주름진 눈꺼풀을 깜빡이자, 흐려진 눈에 맺혀 있던 습기가 방울졌다. 피처럼 뜨거운 물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혁명을!
바람조차 없던 정원 가득 피어오르기 시작한 폭연爆煙. 부서진 포도鋪道 위로 쏟아지는 총탄과 포탄. 흩날리는 삼색기. 덧없이 스러졌던 젊고 찬란한 생명들은, 그러나 과연 덧없는 것이었을까? 사회는 변했을지도 모르고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원하던 방향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르고 바뀌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노랫소리는 누군가에게 들렸을지도 모르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변화와 개선과 혁명을 위해 스스로를 아낌없이 내던진 젊은이들의 노랫소리를 한 사람이라도 귀담아 들었다면, 한 사람이라도 기억하고 있다면, 시대의 지표는 그들의 피가 프랑스의 들판을 물들이기 전과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그 순수한 열정들이 바라던 바는 그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었을 터!
동지여! 공화국은 그대에게 감사드립니다.
어떤 때에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던 금빛 고수머리와 흰 얼굴의 젊은이는 천상의 빛 속에서 더욱 아름답고 성결해 보였다. 선량하나 현명하기보다는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젊은이들의 행진이 사철나무 미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펄럭이는 삼색기가 종연終演의 막처럼 내려진 뒤,
감사드립니다, 무슈.
아니, 당신은 나에게 감사할 것이 없소. 나는 당신을 구하지 못했소.
아닙니다. 당신의 정원에서 가장 아름답게 핀 장미를 꺾으려던 염치없는 도둑을 구하기 위해 파리의 지하 미궁을 헤메고 다니셨지요. 당신의 등에서 숨을 거둘 때 저는 조금도 괴롭거나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베풀어주신 자비와 용서, 사랑과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멀리 손녀를 부르는 딸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젊은이는 해사하게 미소지으며 사랑했고, 사랑하며 또한 사랑할 여인을 축복했다.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따님이,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어머니, 한 가정의 안주인이 되어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것에...
뒤돌아 사라지는 젊은이를, 몸에 맞지 않는 큼직한 신사용 코트를 걸친 처녀가 따라간다. 겅둥겅둥 깨금발로 뛰는 어깨 너머로 돌아보는 얼굴이 마치 처음 보았던 어렸을 때처럼 다복스레 환히 웃으며,
오세요, 할아버지. 여기 엄청 좋아요. 얼른 오세요!
자아, 함께 가요.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타고났을 아름다움을 되찾아, 새하얀 옷자락 위로 금빛 머리타래를 늘어뜨린 여인의 모습은 마치 성화聖畵의 천사 같았다.
제 딸을 사랑으로 길러주셨지요. 당신에게 무한한 영광과 평안이 있기를! 함께 가요. 당신을 기다리는 곳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의 곁으로.
가요. 네? 가요!
이제야 맞으러 왔어요. 같이 가요.
어서 가요, 삼촌!
풍성한 치맛자락 뒤에서 하나둘씩 고개를 내미는 어린아이들. 수더분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또 한 사람의 천사. 처음 보았던 바로 그 거칠고 메말라 갈라진 손이, 내밀어져 바라보는 동안 보드랍게 차올라 윤기가 흐른다. 아무리 오래도록 생각해 보아도 얼굴도 목소리도 떠오르지 않았던,
누님...
가자꾸나. 오래도록 기다렸단다. 나는 좀 더 기다리고 싶었지만...
시간이 되었다.
난데없이 거세게 불기 시작한 바람은 굵은 눈발과 함께 한 남자의 모습을 부려놓았다. 노인은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단장短杖과 그것을 쥔 장갑 낀 손을 보았다.
주어진 시간이 다 했으니, 일어나라. 나와 함께 가자.
...
왜 웃는 거지?
참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를 데려가기에, 나 이상으로 어울리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그가 웃었다. 사람의 탈을 쓰고 태어난 번견番犬처럼 평생 법과 사회와 정의의 주구 노릇을 하면서도 순수함과 정직함과 솔직함을 잃지 않았던 그가, 살아서는 땅의 법을 따랐던 것처럼 죽어서는 하늘의 법을 따르게 되어, 저 높은 곳에서 내려주신 간명하면서도 위대하고 숭고한 그 법을 따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내 손을 잡아라, 24601호. 너를 기다리는 곳으로 가자.
가요.
그래요, 이제는 가요.
저마다 내밀어주는 손들이 다정하고 따스하여, 노인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맞이하러 온 사람들을 따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디뎠다. 그토록 무겁고 둔중하던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 아아, 몇 걸음 걷지 않아 정말로 날고 있는 것만 같지 않은가!
“할아버지! 할아버지!! 엄마, 할아버지가 눈을 안 떠!!”
어깨 너머로 돌아본 광경 속에, 흐뭇하게 미소지은 얼굴을 살짝 기울인 채 눈을 감은 자신에게 매달린 손녀와 놀라 달려오는 딸이 있었다. 아아, 울지 말아라, 코제트. 네 미소를 보기 위해 나는 콧노래를 부르고 인형을 고르고 네 손을 잡아주지 않았더냐. 나 없이 살아갈 시간이 아무리 길다 해도, 언젠가 너를 맞이하러 올 내 손을 잡고 뒤돌아 보면 그리 길지 않은 여정일 터.
문득, 노인은 처음으로 그와 나란히 걷고 있는 잉크빛 제복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당신에게는 말해본 적 없군요.
나에게? 무엇을?
Joyeux Noël.
...
Joyeux Noël, Monsieur Javert.
...Joyeux Noël, Jean Valjean.
*****
1840년 12월 24일, 영국 요크셔의 한 병원 후원에서 윌팀 포슐르방 - 태어나서 25년 간 장 발장이라고 불렸으며 이후 19년을 24601, 이후 8년 간 마들렌이라 불렸던 사내가 죽었다. 향년 71세. 1832년 시가전으로 혼란스러운 파리를 탈출하여 요크셔에 자리를 잡은 뒤 외동딸을 지역 유지 출신의 저명한 의사와 결혼시키고, ‘무슈’라는 호칭과 함께 마을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을 한 몸에 받았던 자애로운 노인이었다.
Good tidings we bring to you and your kin
Good tidings for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END
***2004/12/25 작성, 2012/12/25 수정.
Joyeux Noël (English: Merry Christmas)
뮤지컬 <레미제라블> 10주년 기념 콘서트에 빠져 있던 8년 전 크리스마스를 맞아 썼던 글을, 뮤지컬이 영화화된 2012년 크리스마스에 다시 수정하려 올려봅니다. 원작과 달리 발장이 코제트의 결혼식 날 죽지 않고, 마리우스가 죽은 뒤 예정대로 코제트와 영국으로 떠나 천수를 누렸다는 패러렐입니다. 당시 <레미제라블> 완역본을 읽은 다음이라 뮤지컬에 없던 설정도 다수 포함되어 있네요. 물론 발장은 콤 윌킨슨, 자베르는 필립 콰스트 이미지입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제 안의 발장과 자베르는 저 두 분의 이미지로 남을 듯 합니다. 미안해요, 휴 잭맨. 러셀 크로에게는 별로 미안하지 않...
따님이 찻잔을 입술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었다. 단단하고 매끄러우며 '인형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작고 아름다운 얼굴이 갸웃거렸다. 티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레드그레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이 열매의 달 30일이잖아요. 축제는 내일부터 시작이지만, 벌써부터 들떠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에요."
"무슨 축제?"
"그거야 페리아름이죠."
"페리아름?"
따님은 마치 처음 듣는 단어라는 듯 되물었다. 내가 발음을 잘못 했나? 레드그레이브는 내심 당황하여 재빨리 말을 이었다.
"네, 페리아름. 한 해의 끝에 닷새 동안 열리는 미덕과 행운, 성실과 평화, 희망의 축제 말이에요."
"한 해의 끝이라니? 아직 가을이잖아?"
"곧 추분이니까요. 한 해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는..."
"아니, 그러니까 왜 가을에 한 해가 끝나는 건데?"
"왜라뇨..."
레드그레이브는 말문이 탁 막혔다. 따님의 진지한 어조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들의 지시자는 농담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 침실 밖에서는. 그러므로 따님이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아 묻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문제는 '왜 가을에 한 해가 끝나느냐'는 질문이 '왜 사람에게는 손가락이 다섯 개 달린 손이 두 개 있느냐'라든가 '왜 닭은 병아리가 아니라 달걀을 낳느냐'와 같은 수위에 있다는 점이었다. 즉, 너무 당연한 나머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설명할 수는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저, 주제넘은 말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레드그레이브는 저도 모르게 안도하며 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살가드가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따님께서 절기節氣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신 게 아닐까요?"
"아! 그럴 수도 있..."
"난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았어."
칼날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반색하는 목소리를 내리쳤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보석처럼 다채로운 경질硬質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살가드가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찔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어머니 성녀님의 딸들은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아. 너희들과는 다르다구."
성녀님의 이름이 레드그레이브와 살가드의 영혼 깊숙이 새겨진 계명誡命을 울렸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인형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소녀는 화염의 성녀께서 친히 성유계에 세우신 당신의 따님이었다. 평행세계의 연옥에서 끌어올려진 전사를 현세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성녀님의 계명으로 묶인 전사들은 결코 따님을 거역할 수 없었다. 게다가 레드그레이브와 살가드가 속한 '덱'이 섬기는 따님은 평소 자상하고 상냥한 만큼 분노는 과격하고 처벌은 혹독했기에, 두 사람은 더 이상 따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난 기억을 잃지 않았어. 한 해는 가을에 끝나지 않는다고. 한 해는..."
고집스럽게 중얼거리면서도, 따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찻잔을 든 가늘고 단단한 손가락이 달달 떨릴 때마다 울리는 소리가 얄궂도록 영롱했다.
"둘 다 나가. 당장."
다행히 따님에게는 걷잡을 수 없이 기분이 나빠지기 전에, 아직 아무런 실수도 저지르지 않은 자신의 전사들을 물러가게 할 분별력이 남아 있었다. 덕분에 레드그레이브와 살가드는 어떤 상처나 고통, 눈물과 수치심 없이 따님의 거처를 나올 수 있었다. 그날의 티타임은 그렇게 끝났다.
그럴 터였다.
"저...잠깐, 시간 괜찮아?"
*****
처음에는 잘못 본 것인가 했다. 해거름에 젖어 어둑어둑한 마도에 인적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봐도 요마가 아닌 사람이었고, 주의깊게 보는 동안 그 실루엣이 낯익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치볼드는 걸음을 멈추고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짐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함께 걷고 있던 동료 역시 걸음을 멈췄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이 정도 일에 일일이 소리내어 의사를 전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갈색 머리칼의 어콜라이트가 경계하며 바라보는 가운데, 방랑자는 황야에서 마수를 추적할 때처럼 소리없이 걸음을 옮겼다. 목표는 거리 저편, 외딴 골목 언저리에서 어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였다.
"브라우닝?"
"흑!"
어깨를 잡힌 탐정이 소스라치게 놀라 목이 메이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런 목소리가 어떨 때 나오는지 알고 있는 아치볼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브라우닝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남자치고 작은 편은 아니지만 자신에 비하면 호리호리하고 아담한 몸이 어이없을 만치 간단히 휘돌렸다.
"브라우닝, 자네 얼굴이..."
"아파, 아치볼드. 놔줘."
"아, 미안하군."
아치볼드는 황급히 잡은 손을 놓았다. 브라우닝은 입술을 깨물고 잡혔던 어깨를 다른쪽 손으로 감싸쥐었다. 평소 바르게 뻗어 있던 등의 선이 굽은 것이 눈에 거슬렸다.
"뭐야, 브라우닝이었어요?"
브라우닝도 익히 알고 있는 밝은 음성이, 벌써 깔리기 시작한 밤안개 너머에서 들려왔다.
"오랜만이네요. 이쪽으로 올래요?"
"아, 메렌, 나는..."
"난 지금 움직일 수 없으니까, 이쪽으로 와요."
카드 매지션의 목소리는 명랑했지만, 주장을 관철시키는데 익숙한 어콜라이트 특유의 고집이 배어 있었다. 아치볼드는 어깨를 으쓱하고, 목소리가 들린 쪽을 가리켰다. 브라우닝은 잠깐 머뭇거린 다음 메렌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걸음이 그리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 것 역시 눈에 거슬려, 아치볼드는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오랜만이네요, 브라우닝."
"오랜만...그건 다 뭐야?"
마침내 서로가 보일 정도로 다가선 브라우닝이 놀란 어조로 물었다. 밤에 다니는 사람이 없는 만큼 형식적으로 밝혀진 가로등 아래 메렌이 서 있었다. 크고 작은 상자를 너댓 개 겹쳐 두 손으로 받쳐들고, 발치에도 비슷한 상자가 든 종이가방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혼자 다 들 수 없는 분량이었으니, 잠시나마 길바닥에 내려놓고 아치볼드를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귀중한 물건일 것이다.
"아, 저희 따님 심부름이에요. 사오라고 하신대로 사다 보니 이렇게 많아졌지 뭐예요."
"심부름..."
희미해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불빛 때문에 얼굴을 완전히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얼굴을 부서져라 응시하는 회갈색 눈동자가 시각이 아니라 촉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 브라우닝은 몇 번 눈을 깜빡인 끝에 제법 그럴듯하게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군."
"뭘요, 이제 다 왔는 걸. 그보다 브라우닝은 이런 시간에 혼자 밖에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밤의 마도는 위험할 텐데."
"응? 아아, 나도 심부름을...흡!"
불쑥 뻗어나온 손이 턱을 잡아채는 바람에 브라우닝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거칠게 젖혀진 머리에서 중절모가 굴러떨어져, 가로등 불빛 아래 탐정의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너무하네요, 아치볼드. 기껏 사람이 모르는 척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건가, 이 얼굴은."
아치볼드는 브라우닝의 허세를 무시했던 것처럼 메렌의 불평 역시 무시했다. 브라우닝의 단정한 얼굴은 보랏빛 멍과 붉은 생채기로 무참하게 얼룩져 있었다. 젖혀진 목에 휘감긴 밧줄무늬가 셔츠 칼라 아래로 기어들어가, 굳이 보지 않아도 그 아래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놔줘...아치볼드."
"어떻게 된 건가."
"아치볼드..."
"어떻게 된 거냐고 묻고 있다."
"뻔한 거 묻지 말고 놔줘요, 아치볼드. 정말 아파 보이니까."
메렌의 뾰족한 목소리에 찔린 다음에야 아치볼드는 손을 놓았다. 브라우닝은 억지로 젖혀졌던 어깨를 감싸쥐고 고개를 숙었다. 들고 있던 상자를 조심해서 내려놓은 메렌이 굴러떨어진 중절모를 집어들었다. 탐정의 머리에 모자를 올려놓으며 해사한 얼굴이 굳어졌던 것도 잠시, 곧 밝게 웃으며 명랑한 목소리를 던졌다.
"그래서, 어떻게 따님에게서 도망쳤어요?"
"메렌!"
놀란 것은 브라우닝만이 아니었다. 깜짝 놀라는 방랑자를 향해, 성녀님의 어콜라이트이자 당신 따님의 '덱'에 속한 청년이 쓴웃음을 보냈다.
"뭘 그렇게 놀라요, 아치볼드."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따님에게서 도망치다니."
"왜요? 코브나 로쏘는 자주 달아나잖아요."
"그리고 항상 '불려' 오지. 따님에게 계약한 전사를 언제 어디서나 불러올 수 있는 권능이 있는 이상, 달아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가혹한 소리를 하는 건가."
"가혹한가요?"
메렌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브라우닝이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어콜라이트의 차분한 목소리는 그가 사용하는 카드처럼 예리하게 탐정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따님께서 그러는 게 재미있으시다면..."
"메렌!"
퍽! 난폭한 소리에 브라우닝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상체를 휘청이며 한 걸음 물러서는 메렌과 뻗은 주먹을 휘둘러 다시 후려치려는 아치볼드. 생각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그만둬, 아치볼드...윽!"
"브라우닝!!"
아치볼드의 팔을 잡고 말리려던 브라우닝이 제풀에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꺾고 비틀거렸다. 깜짝 놀란 아치볼드가 그를 부축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에요, 브라우닝."
그 사이 몸을 바로잡은 메렌이 재빨리 다가와 휘청이는 탐정을 살폈다.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창백한 얼굴, 호흡은 거칠고 짙은 색깔의 수트에서는 희미하게 피냄새가 흘러나온다. 메렌은 쯧, 혀를 차고 아치볼드를 돌아보았다.
"내가 여기서 짐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브라우닝을 데리고 집으로 가세요. 가서 누구든 보내줘요."
"혼자 있어도 괜찮겠나?"
"안 괜찮다고 하면, 피냄새 풀풀 풍기는 브라우닝을 데리고 여기 있어줄 건가요?"
메렌이 피식 웃으면서 품에서 한 뭉치의 카드를 꺼냈다. 밤의 마도는 아무리 숙련된 전사라도 혼자 있기에는 위험한 곳이다. 하지만 메렌은 자신이 브라우닝과 함께 돌아가겠다는 말도, 따님이 요구한 물건들 대신 브라우닝을 포기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브라우닝의 안위를 온전히 아치볼드에게 맡기고 자신이 위험을 자초할 뿐. 그것이 방금 구사한 언어폭력에 대한 사죄라는 것을, 아치볼드는 물론 서서히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브라우닝도 알 수 있었다.
"아수라와 맥스를 보내도록 하지. 잠깐만 기다려라."
그래서 아치볼드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의 품에 안긴 브라우닝이 희미한 신음과 함께 메렌의 이름을 불렀다. 불렀나? 착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라우닝이 정신을 잃으며 마지막으로 불러준 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생각만으로도 메렌은 웃을 수 있었다.
짓궂게 굴어 미안해요, 브라우닝. 당신이 당신의 따님에게 얼마나 사랑받는지 알 때마다, 당신과 다른 따님을 모시게 된 내 '이번 생'을 용서할 수가 없게 되지 뭐에요. 이런 나를, 아마 성녀님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시겠죠?
첫 번째 야귀의 목이, 메렌이 날린 하트의 6에 깔끔하게 베어 체액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날아갔다.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감각은 시각이 아니라 통각이었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처럼 아팠다. 고통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따님의 사랑은 언제나 처음 느끼는 고통으로 그를 물들였다. 이번만큼은 죽는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잃고, 마치 새로 태어난 듯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떠 고통과 수치심에 울며 몸부림 치던 과거의 자신을 배신했다.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복종할 수 없었다. 굴복하지 못해 반항하면 하는 만큼, 견디다 못해 도망치면 도망치는 만큼, 따님은 그를 사랑하셨다. 가장 재미있는 장난감으로 소중히 여겨주셨다. 그래서 브라우닝은 언제나 죽고, 언제나 다시 태어나고, 언제나 울고, 언제나 희망을 품고, 언제나 믿고, 언제나 배신 당하고, 언제나 좌절하고, 언제나 죽었다.
"...으윽..."
"깨어났나?"
두 번쩨 감각은 청각, 그리고 촉각. 눈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눈 위에 얹힌 보드랍고 촉촉한 물수건 때문이었다. 몇 걸음 밖에서 시작된 목소리가 한 마디만에 곁으로 다가오고, 수건이 살그머니 사라졌다. 눈을 깜빡이자, 낯선 천정과 어둑한 방안,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 보는 구릿빛 얼굴이 보였다. 희미하게, 흐릿하게, 흔들리며.
"아치...볼드..."
"아직 아플 거야. 치료하지 못했으니까. 무리해서 말하지 말게. 조금 더 누워 있어도 괜찮아."
"여기는..."
"우리 따님의 집이야. 자네가 정신을 잃는 바람에 이리 데려올 수밖에 없었어."
그 말에, 브라우닝은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던 때를 기억해냈다. 처음으로 따님의 발치가 아닌 곳에서 정신을 잃었다. 따님에게 쫓겨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따님은 '심부름을 보낸다'고 하셨지만, 그 이룰 수 없는 명령은 완곡한 추방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아이자크에게 떠밀려 나온 뒤 정처없이 걷던 중 밤이 되었고, 자신을 발견한 아치볼드와 메렌이,
메렌이,
"메렌! 아치볼드, 메렌은...!"
"아아, 자네가 자기를 걱정하더라고 전해주겠네. 기뻐할 거야."
"무사하...한가?"
"다른 병실에서 마르그리드가 돌보고 있네."
"아...다행..."
브라우닝은 눈을 감았다. 눈꼬리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아치볼드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어 더욱 안타까운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고, 따스한 물방울은 방랑자의 거친 손끝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아치볼드는 조심스럽게, 그렇지 않아도 안팎으로 상처 입은 얼굴에 한 조각의 통증이라도 더할까 주의하며, 브라우닝의 뺨에 손끝을 대었다.
"아치볼드..."
"어째서 자네는, 브라우닝, 자네는 항상 이렇게..."
"브라우닝은 깨어났어?"
문이 열리는 소리, 묵직한 발소리, 낭랑한 목소리. 아치볼드의 목소리와 손끝이 사라졌다. 브라우닝은 힘겹게 고개를 젖혀 소리가 들린 문쪽을 바라보았고, 당황하여 몸을 일으키다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아읏...!"
"아, 무리해서 일어나지 마. 비명도 당신의 따님을 위해서 아껴두고."
노래하듯 리드미컬한 목소리가 높은 곳에서 흘러내렸다. 성녀님의 따님들은 서로 비슷한 듯 하면서도 이목구비와 표정, 머리 모양과 색깔, 옷과 장신구가 모두 다르다. 호두색 머리를 소년처럼 짧게 자르고 눈매가 영롱한 브라우닝의 지시자와 달리, 아치볼드들의 지시자는 바다색 곱슬머리를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졸린 듯 나른한 표정으로 워켄의 품에 마치 인형처럼 - 진짜 인형처럼 - 안겨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다른 '덱'의 전사를 줍다니 재미있네. 덕분에 우리 메렌이 많이 다쳤어."
"죄송...죄송합니다..."
"뭐, 괜찮아. 덕분에 그 아이가 아파하는 걸 오랜만에 봤거든. 재미있었어. 괜찮아."
따님이 느긋하게 웃으며 워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각진 마디를 가진 자그마한 손이 의사의 옷깃 위로 드러난 목덜미를 아프게 움켜쥐었고, 손톱 끝은 금새 붉게 물들었다. 감히 성녀님의 따님 앞에 누워 있다는 황망한 상황과 자신의 것이 아닌 피냄새에 당황한 브라우닝이 몸둘 바를 몰라 하자, 아치볼드는 한숨을 쉬고 탐정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따님, 이대로 돌려보내겠다고 결정하셨다면 너무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
"어머나, 나는 워켄을 괴롭히고 있는 걸. 왜 브라우닝을 걱정하지?"
눈꼬리가 낮게 깔린 따님의 시선이 브라우닝을 휘돌아 아치볼드를 향했다. 자신의 따님이 그러하듯 와이번의 발톱처럼 매섭게 내려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시선은 충분히 서펜트의 사냥에 비견할 만큼 육중하고 위협적이었다. 브라우닝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고, 아치볼드의 손이 떨림을 숨기기라도 하듯 탐정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제가 왜 브라우닝을 걱정하는지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사자에게 자기 입으로 들려주는 걸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브라우닝은 치료가 필요합니다. 다른 '덱'의 전사가 이 집에서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브라우닝이 듣기에 따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벨벳처럼 부드럽고 나른했다. 하지만 그와 맞닿은 아치볼드의 손이 움찔 경련했고, 방랑자는 그대로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머리를 숙였다.
"자비를, 따님, 부디 자비를."
"벌써? 재미없게. 좀 더 버틸 줄 알았다구~"
따님의 실망한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때까지 손톱으로 후벼파고 있던 목덜미를 놓은 손이 의사의 입술을 살짝 건드렸다. 워켄은 고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깨물고 있던 입술을 벌려, 자신의 피로 젖은 손끝을 핥았다. 따님이 간지러운 듯 키득키득 웃었다.
"있잖아, 브라우닝. 워켄은 내 허락도 없이 너를 치료하려다 나한테 벌을 받고 있어. 아치볼드는 너를 너의 따님께 돌려보내 달라고 나한테 간청하고 있고. 내 '덱'에서 제일 자존심이 강한 두 사람이 이렇게 쉽게 굴복하다니, 당신 정말 재미있어. 내 '덱'에 두고 싶을 정도야."
"...원하시는대로...될지도 모릅니다."
"어?"
그 의외의 대답에, 따님이 놀란 듯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브라우닝을 바라보았다. 탐정은 조금도 치료가 되지 않아 여전히 만신창이인 몸을 힘겹게 일으켜, 침대 위에 앉는 것까지 간신히 성공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저의 따님께서는...불가능한 심부름을...이룰 때까지 돌아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추방 당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니..."
"무슨 소리야. 그렇게 시시하게 자기 전사를 포기하는 자매는 없어."
"예?"
"수수께끼라니 재미있네. 얘기해 봐. 무슨 심부름이었어?"
"아..."
"말해 보라니까. 어딘지 모르는 곳에 가서 무엇인지 모르는 거라도 가져오라고 했어?"
"에? 그, 그걸 어떻게?!"
브라우닝은 말 그대로 소스라치게 놀라 따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토록 느긋하고 여유롭던 따님 역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것에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어, 그러네...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을까...어떻게..."
따님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이제는 핏방울 하나 남지 않은 손을 볼에 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들의 지시자를, 아치볼드와 워켄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그들의 태도에서, 이 따님에게는 드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수라. 그거 가져와."
문득 고개를 든 따님이 뜬금없이 말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잠시 후 상자 하나가 브라우닝이 앉은 침대 발치에 나타났다. 옆면에 멋들어진 숙녀용 모자와 작은 새가 그려지고, 거미줄처럼 섬세한 레이스를 겹겹이 접은 하얀 리본으로 포장된 직사각형 상자였다. 두 뼘 폭에 세 뼘 길이, 한 뼘 높이. 시트 위에 놓인 모양새로 보아 가볍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무거운 것도 아니어 보였다.
"아치볼드. 저거랑 브라우닝을 가져가."
"예?"
"아니지. 브라우닝을 데려다 주고, 가는 김에 저것도 갖다 줘."
"알겠습니다."
"저...따님...?"
"브라우닝."
아치볼드들의 지시자가 브라우닝을 바라보았다.
"너의 따님에게 전해줘. 저거하고, 나의 인사..."
그리고 또 따님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그렇지. 평화를 담아, Holy Advent- 라고."
단단하고 매끄러우며 '인형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작고 아름다운 얼굴이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
"내게, 이것을...?"
따님이 중얼거렸다. 두툼한 카펫 위에 방금 쌓은 넝마더미처럼 구깃구깃하게 쓰러진 브라우닝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의 손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아치볼드의 안장 앞에 앉아 안기다시피 기계마를 타고 온 브라우닝은 이번에야말로 따님의 발치에서 정신을 잃었다.
"자매가 내게 이것을, 평화를 담아..."
그것은 레드그레이브나 쉐리, 리즈, 에바리스트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은색 금속을 세공해, 길쭉한 육각형에 끄트머리가 가시처럼 뾰죽한 이파리가 어우러져 월계관처럼 원형 테를 이루었다. 원형의 사방에는 촛대의 받침과 흡사한 가시가 솟은 원형 돌기가 네 개 묻혀 있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네 개의 초를 꽂을 수 있는, 가시면류관 형태의 촛대였다.
"저, 따님. 초가 같이 들어 있습니다."
레드그레이브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언제나 그녀의 등 뒤를 지키던 살가드는 보이지 않았다. 브라우닝이 '심부름'을 간 뒤 따님의 침실로 불려간 그는 밤새도록 비명을 질렀고, '손을 떨지 않고 찻잔에 홍차를 따를 수 있을 때까지'라는 단서와 함께 자신의 거처에서 근신 중이었다.
"초?"
"예. 네 개인데요."
따님의 시선이 촛대에서 브라우닝을 지나 레드그레이브가 손에 든 초에 멈췄다. 피처럼 붉은 색깔의 길고 가느다란 초가 네 개. 따님은 눈을 깜빡였다. 깜빡, 깜빡. 시야 끄트머리에 비친 창 밖으로 낙엽이 흩날려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본디 하얀 파편이 흩날리며, 더 춥고, 더 다망하고, 모든 것을 마감하고 또다시 시작하는, 어제와 오늘이 실은 다르지 아니하나 의미를 부여하여 같지 아니하게 보내는 특별한 한때.
"초를 꽂아...아니, 이리 줘."
"네? 아, 네..."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레드그레이브는 따님에게 초를 건넸다. 따님의 손은 그 초 뭉치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로 작고 가냘팠지만, 그래도 떨어뜨리거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은으로 조각한 호랑가시나무 화환 모양의 촛대에 네 개의 초를 꽂을 수 있었다.
"리즈, 불을."
"네."
레지먼트 제복이 피부처럼 잘 어울리는 청년이 손끝을 튕겨 한 개의 초에 불을 붙였다. 두 번째 초에 불을 붙이기 전에 따님을 바라본 것은 오랜 세월 전장에서 살아남은 에이스의 직감이었다. 과연 따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흔들어 그를 물러나게 했다. 네 개의 초, 한 개의 불꽃, 세 개의 기다림.
"나중에 붙일 거야. 일주일 뒤에 하나. 또 일주일 뒤에 하나 더, 그리고 또 일주일 뒤에 마지막 하나. 그러고 나면..."
한 해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지.
따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와 계약한 전사들의 영혼 깊숙이 새겨진 계명을 울렸다. 높은 탑에 매달린 크고 작은 종들처럼, 영롱하고 조화롭게, 딩-댕-동.
함박눈이 내리고, 하얀 입김을 벙어리장갑으로 녹이고, 거리에는 알록달록한 불빛과 노랫소리, 새파란 나무와 빠르게 달리는 사슴, 예쁘게 포장된 상자와 졸리지만 잠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이들. 산산이 부서진 기억의 파편이 이어지고 끊어지고 부서지고 흩어져, 따님의 뺨에 투명한 얼룩을 남겼다.
"고마워, 브라우닝. 사랑해. 이제...편히 쉬어."
브라우닝이 숨을 거두었다. 따님은 언제고 부르기만 하면 그녀 곁으로 돌아올 가장 사랑하는 전사의 육신이 재로 돌아가는 것을, 애처롭고도 정다운 미소를 띄고 지켜보았다.
강림절의 첫 번째 불꽃이 파르르 떨렸다.
-END
***2012/12/18
원래는 때도 때인 만큼 따뜻하고 훈훈한 연말연시 풍경을 써보려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진도가 안 나가더라구요. 하룻밤이면 될 줄 알았던 글을 일주일 동안 잡고 끙끙댄 결과 깨달았습니다. 훈훈은 개뿔=ㅅ= 여기는 피와 살과 눈물과 체액과 배신과 음모가 난무하는 세계였던 거예요! 그래서 이성을 버리고 본능이 흐르는대로 썼습니다. 후후후, 이게 나의 따님이야! 나의 언라이트라고!! 연말이니까 내가 나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다 덤벼, 내가 이 구역의 따님이다!!!
브라우닝은 선잠에 젖어 몽롱하게 취한 채 생각했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 함석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저 아래 석재도로를 때리는 빗소리가 저마다 다른 중량과 리듬과 거리감으로 자아내는 불협화음이 그의 잠을 조금씩 긁어냈다.
"...비?!"
번뜩 정신이 든 탐정은 침대 겸용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으아아, 신음을 내며 상체를 부여잡았다. 몸을 웅크리고 어금니를 앙다문 것도 잠시, 브라우닝은 굴러떨어지듯 소파에서 내려왔다. 시간이 없었다.
하필 오늘 같은 날 늦잠을 자다니, 그러니까 어제는 곤란하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투덜거리며 서류의 산과 자료의 계곡 사이에서 모자와 코트를 찾았다. 어젯밤 너무 피곤해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쓰러진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개수대에서 대충 얼굴을 씻고, 상처나 멍이 남아 있지 않은지 거울을 흘끗 본 다음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매서운 장대비에 등짝을 호되게 얻어맞은 뒤였다. 사무실에 다시 올라가서 어디 있는지도 모를 우산을 찾아 도로 내려올 시간 따위는 없었다. 최근 일거리가 없었던 사립탐정의 주머니에는 여분의 우산을 살 돈도 없었다. 그리고 그 빈곤한 탐정은 반드시 오늘 의뢰인과 만날 약속을 지켜야했다.
뭐, 빨리 가면 그만큼 비를 덜 맞겠지.
브라우닝은 목적지를 정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침은커녕 어젯밤부터 굶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몇 걸음 달리지 않아서였다.
*****
비는 의뢰인의 집을 나올 때까지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장대비에서 꽤 잦아든 이슬비였고, 이미 속옷까지 쫄딱 젖은 브라우닝에게는 더이상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지만.
의뢰인인 검은 옷의 노부인은 약속시간에 7분 늦은 사립탐정을 매우 못마땅한 듯 노려보았지만, 다행히 의뢰를 취소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녀가 수소문한 탐정 중 브라우닝의 의뢰비가 가장 낮았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 구두쇠 노파는 몸을 닦을 수건이나 한기를 재울 뜨거운 차 한 잔은커녕, 비에 젖은 탐정을 집안에 들이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나마 시간도 금이라 아낀답시고 용건만 간단히 해준 것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만약 왜 자기가 아들의 두 번째 부인의 불륜을 의심하게 되었는지 늘어놓기 시작했다면 사흘밤낮이 걸려도 모자랄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거, 오늘은 좀 힘드네...
브라우닝은 어깨를 움츠렸다. 추웠던 적도 배고팠던 적도 아팠던 적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유독 춥고, 유독 배고프고, 유독 아팠다. 이미 뼛속까지 스며든 한기를 내쫓으려는 헛된 몸부림으로 어깨를 끌어안았을 때, 등줄기를 달리는 낯익은 통증에 진저리를 치며 팔을 내리고 말았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정도로 힘들었다. 하지만 아직 사무실에 도착하려면 한참을 더 걸어야 했다. 의뢰인이 첫 번째 보고서를 받기 전까지는 의뢰비를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여전히 지갑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승합차를 부를 수도, 우산을 살 수도, 식사를 할 수도 없었다. 오직 조금이라도 빨리 사무실로 돌아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진하게 우린 차를 마시는 것만이 지금 그가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었다.
"브라우닝?"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주머니 깊숙이 꽂고 터덜터덜 걸어가던 브라우닝이 우뚝 멈춰섰다. 차박차박, 다가오는 발소리 끝에 깨끗하게 닦인 갈색 구두코가 시야에 들어왔다. 머리 위로 반투명한 그림자가 내리며 비가 그쳤다.
"일하는 중이에요? 왜 이렇게 비를 맞고 다녀요?"
"...메렌."
브라우닝은 힘들게 고개를 들었다. 잘 연마된 호박석처럼 따스한 온기를 품은 황갈색 눈동자가 걱정스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이 브라우닝의 뺨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뺨이 젖었네요.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은 무슨. 비 맞았지, 보다시피."
오늘 처음으로, 비가 내린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완전히 젖었네요. 감기 들겠어요. 시간 있어요? 우리집에 들러서 말리고 가요. 바로 이 근처잖아요."
"아냐, 괜찮아, 난...아."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젓던 브라우닝의 얼굴이 문득 새하얗게 질렸다. 자기가 어디를 걷고 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그리고 메렌의 제안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깨닫지도 못할 정도로 지친 것 같았다. 메렌은 안쓰러운 마음에 다시 한 번 브라우닝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괜찮아요. 루드는 내일까지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이리, 좀 더 다가와요. 그러다 계속 비를 맞겠..."
"아!"
딱히 난폭하게 끌어안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우산을 좀 더 씌워주려고, 어깨에 돌린 팔로 잔등을 부드럽게 밀었을 뿐이다. 하지만 브라우닝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손에 닿은 몸은 명백한 고통으로 떨렸으며, 젖은 이마는 구겨졌다. 입술을 깨물면서 외로 돌리는 탐정의 창백한 뺨에 꽃잎 같은 홍조가 번지고, 메렌은 그 핏빛 향을 맡았다.
"...어젯밤, 루드와 함께 있었군요."
"...미안."
"아니, 나에게 미안할 건 없어요...나도 당신에게 사과하지는 않을 거니까요."
메렌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같은 어콜라이트이지만, 페어지만, 그가 루드에게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아무 것도 없었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브라우닝은 그와 루드가 맞물리는 교집합에 속하지 않을 터였다. 그 어떤 따님도 루드와 브라우닝을 얽어맨 가시덩쿨만은 끊어내지 못할 거라는 기시감마저 느껴졌다.
"우리...나와 루드의 집은 별로 편하지 않겠군요. 억지로 쉬어가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대로 괜찮겠어요? 사무실은 아직 멀잖아요."
"괜찮아...갈 수 있어."
"...내가 바래다준다고 해도 거절할 거죠?"
"아아. 마음만은 고맙게 받도록 하지."
"그래요. 우산은 가져가세요...아니, 이것까지 거절하지는 말아요."
나는 루드의 페어이지, 루드가 아니잖아요.
하지 않은 말은 한 것보다 더욱 선명하게 귓전을 때렸다. 브라우닝은 폐부를 퍼내듯 한숨을 내쉬었고, 구부정하던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손을 내밀어 우산을 건네받는 탐정의 얼굴은 설화석고처럼 창백했지만, 둔중한 끌로 내리친 듯 희미하나마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폐를 끼치는군. 나중에 돌려줄게."
"신경 쓰지 마세요. 다음에 같이 식사나 해요."
"아아, 언제든지 사무실로 찾아오라고. 그럼 이만."
우산을 똑바로 받쳐든 브라우닝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메렌은 반듯한 탐정의 뒷모습이 서서히 는개로 옅어지는 빗속에서 멀어지고 멀어지다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카드 매지션의 한숨이 습기를 머금고 묵직하게 흘러내렸다.
차라리...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브라우닝? 이제야 오는군."
어?
브라우닝은 흐린 시야를 애써 닦아냈다. 그는 어느새 사무실에 있었다. 우산을 곱게 접어 문가에 두고, 문을 열었다 닫고, 모자를 벗어 문 옆의 옷걸이에 걸고, 냉랭하게 식어 있을 터인 혼자만의 공간이 따뜻하고 고소하고 활기차게 그를 맞이하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열려 있길래 금방 돌아올 줄 알았는데, 비가 오는데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녀? 밥은 먹었고? 막 빵을 구우려던 참인데...브라우닝?"
"...아치볼드?"
"어? 왜? 부엌 마음대로 썼다고 화내려고?"
"아치볼드..."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아치볼드가 당황한 채 파도를 맞았다. 왈칵 치민 물보라가 아치볼드를 적시고 사무실을 채우고 브라우닝을 빠뜨렸다. 세상이 어두워지고, 뒤집혔다.
"브라우닝? 어이, 브라우닝!! 정신 차려!!!"
이미 그쳤을 터인 빗소리가 세차게 쏟아져, 더 이상 아치볼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어제는 그렇게 화창하더니, 오늘은 언제 폭우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궂은 날씨다. 뭐 이리 변덕스러워. 이놈의 나라는 날씨마저 거지 같다. 선장은 날씨가 영 마뜩잖은지 꼭 배를 띄워야겠냐고 물었다. 평생 바다에서 살았다는 늙숙한 뱃사람의 예감에는 무슨 사달이 날 것처럼 불길한 모양이다. 당연한 거 아냐?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아침에 호텔을 체크아웃하는데 프론트의 접수원이 장미꽃을 한 송이 주었다. 그리스식 속전속결 연애인가 했더니, 오늘이 성 발렌타인의 날이라나 뭐라나. 어쩐지 C가 벨기에 초콜릿 상자를 보냈더라니. 어휴, 정말이지 아저씨가 주책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초콜릿이라니, 하지만 헬렌 선생님께도 똑같은 걸 보냈겠지, 정말이지, 정말이지! 이번 출장에서 돌아가면 선생님이랑 초코 머핀이라도 구워야겠다. C한테 주나 봐라, 흥이다! 거지 같은 그리스, 그 질 좋은 올리브로 술도 담글 줄 모르는 나라에 출장이나 보내고 말이지, 아, 정말이지!!!
***
"저기가 트리토니스 섬이군요?"
작은 어선의 뱃머리에 서서 수평선에 고인 짙은 안개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작은 땅덩어리를 가리키며 안나마리가 물었다. 늙은 그리스인 선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바닷바람을 맞으며 질겨진 얼굴가죽에는 할 수만 있다면 섬 가까이는커녕 섬쪽으로 뱃머리도 돌리고 싶지 않았다는 내심이 송글송글 배어 나왔다.
엄마, 이 할아버지 말 못해? 아님 엄마 말 못 알아들어?
"아니야, 라임. 선장님은 상냥한 분이셔서, 엄마가 외지인을 반기지 않는 섬에 가는 걸 말리고 싶으신 거야. 걱정이 되니까, 하지만 엄마는 공무원이라서 상사가 가라면 어디든 가야 하거든."
응, 라임 알아! 공무원! 라임이 막 물어뜯고 엄마가 막 총 쏘고 몇 번 죽었다 살아나고 그러면 C 아저씨가 라임 간식 살 돈 주는 그거 말이지!
"그래요, 그거. 아유, 우리 라임 잔망스럽기도 하지."
꺄르르 웃으며 뭐라뭐라 아르르 웅얼대는 개를 얼르는 젊은 여자를 보며 선장은 결론을 내렸다. 영국 해적놈들도 프러시아 산적놈들만큼 제정신이 아니구만. 빨리 내려놓고 튀는 게 상책이겄어.
"진짜 내릴 거요?"
하지만 정작 트리토니스 섬의 항구가 보일 때까지 접근했을 때, 선장은 배의 속도를 늦추고 출항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외딴 섬이라도 백여 명의 주민이 사는, 그리고 목재가 풍부한 섬의 하나뿐인 항구라면 어른 남성의 - 때로는 남녀불문하고 어른의, 또는 노소 불문하고 남성의 - 숫자만큼 크고 작은 배가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트리토니스 섬의 작고 오래된 항구에는 한 척의 배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크고 작은 배를 구성하고 있었을 널빤지와 돛대와 돛뿐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배의 잔해들이 수면 아래에서부터 수면 위까지 허물어진 그대로, 그 배의 선원이었던 남자들의 시체를 품거나 혹은 파도에 빼앗긴 채 쌓여 있었다.
"한 발 늦었군."
안나마리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항구의 몇 안되는 건물도 모두 포격으로 부서진 상태였다. 남자와 여자, 아이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허물어진 무더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나 오랜 세월 발로 다져진 단단한 땅 위에 고여 굳어가는 핏자국으로 미루어 습격이 이루어진 것은 서너 시간 전인 듯 했다. 크르릉- 라임이 머리를 낮추고 목을 울렸다. 개의 몇 억분지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후각으로도 바람결에 떠도는 쇳내와 탄내를 맡을 수 있었다.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도 습격과 파괴와 살육이 일어났고, 어쩌면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인간의 귀에 들리는 총성이나 비명은 없었지만, 그건 라임도 마찬가지인 듯, 곧 머리를 들고 뱃전에 매달려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선장님, 배를 선착장에 대주세요."
"내릴 거요?"
"내려야 합니다."
테바이 여자처럼 나긋나긋하게 말하던 영국 여자의 유창한 그리스어에 처음으로, 칼로 베어낼 듯한 날카로움이 서렸다. 그래서 선장은 더 이상 염려의 말을 낭비하지 않고, 선착장 주변에 부비트랩처럼 산재한 배의 잔해를 피해 뱃전을 선착장에 바싹 당겨 댔다.
"라임, 선장님께 인사드리렴."
멍멍! 고개를 돌려 조타륜을 쥔 선장에게 가볍게 짖은 라임이 뱃전을 훌쩍 뛰어넘어 선착장에 내려섰다. 선장은 널을 내리지 않았고 안나마리도 그런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행가방을 호텔 프론트에 맡기고 - "사흘이 지나도 내가 찾으러 오지 않는다면 아테네의 영국 대사관에 연락해 주시겠어요?" - 소박하고 질긴 갈색 트위드 여행복 위에 크로스백을 하나 두른, 당일치기 소풍이라도 나온 듯한 가벼운 차림이었다. 안나마리는 뱃전을 짚고 선착장 위로 몸을 날렸고, 그녀의 단단한 여행용 부츠가 대지를 안정적으로 디딘 것과 동시에 등뒤에서 어선의 기척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안나마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서서, 일부러 활기차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수하세요!!"
본토에 도착하거든 섬의 피습 사실을 알리라든가, 최대한 빨리 돌아가라든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나치스의 잠수함을 조심하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작금의 그리스에서 앞으로는 바다, 뒤로는 독립전쟁과 싸우며 환갑을 넘긴 뱃사람에게는 무의미한 조언이었으니까.
엄마, 저 할아버지 엄마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어! 좋은 사람이야!
"그래, 라임. 세상에는 아직 좋은 사람이 많이 남아 있구나. 그럼 우린 그 좋은 사람들을 위해서 나쁜 사람들을 해치우러 가볼까?"
안나마리는 허리를 쭉 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배 위에서 판단한 바와 같이, 생존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사망자의 숫자는 대략 스무 명 남짓이었다. 여기서만 이 작은 섬의 거주민 중 1/5이 사망한 것이다.
트리토니스 섬은 에게해에 깨알처럼 뿌려진 수많은 섬들 중 하나로, 어떤 제도諸島에도 속하지 않는 낙도였다. 섬 주변에 복잡하게 꼬인 해류의 탓도 있지만, 본래부터 배타적인 일족이 거주하고 있어 외부와의 교류는 거의 없다. 약 백여 명 되는 거주민은 전원 팔라니아스라는, 도시국가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해묵은 가문의 일원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포세이돈의 후예라 칭하며, 팔라스 아테나의 핏줄을 신관으로 받들고 제우스를 섬기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 신앙의 중심에는 '뇌정雷霆'이라 불리는 유물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제우스가 사용하던 벼락의 정수라고 했다. 이 유물을 나치스가 원하고 있는 것이다. '뇌정'이 단순한 고대 유물이라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절대로 나치스의 손에 넘겨줘서는 안된다. 에게해는 대영제국의 피보호자인 이집트의 앞마당인 것이다. 따라서 코드네임 T는 현지에서 '뇌정'의 실체를 조사하고, 만약 그것이 나치스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판단된다면 전력을 다해 아넨에르베를 저지하라. 이상이 며칠 전 C가 안나마리에게 전달한 임무였다.
'만약' 좋아하시네. 안나마리는 크로스백에서 꺼낸 권총의 장전을 확인하며 코웃음 쳤다. 아테네에 도착한 그녀는 제일 먼저, 나치스 1개 중대 규모 병력이 트리토니스 섬으로 은밀히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달 받았다. 게다가 그 가운데 아넨에르베의 연구자 다수와 '오버드(Overed)'가 1인 이상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역십자 콧수염이나 숭배하는 망상병 환자들이 들이닥쳐 개싸움이 될 게 뻔한 난장판에 보내면서, '만약' 좋아하시네, 가서 사달 나면 잘 죽고 오라는 말이잖아. 아무튼 아저씨가, 진짜 너구리도 아니면서, 넉살만 좋아서는, 아, 정말이지!!
엄마?
"응, 라임?"
저쪽에서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있어. 많아!
"저쪽?"
아테네 지부가 제공한 트리토니스 섬의 지도는 폐쇄적인 섬 분위기와 지금껏 주목할 이유가 없었던 점으로 인해 축적을 비롯한 정밀함이 완벽하게 무시된, 참으로 신화의 나라다운 고대 벽화 수준의 손그림이었다. 납작하게 주름진 올리브 열매처럼 생긴 섬의 북부에 솟아오른 산봉우리에서 시작된 비탈은 북쪽 해안에서 절벽으로 떨어지고, 동쪽과 서쪽에서는 바닷물을 끌어안으며, 남쪽에서는 해안선을 몇 발짝 앞두고 숨이 다해 쓰러진다. 섬에 하나뿐인 항구 - 지금 안나마리와 라임이 서 있는 장소 - 는 섬의 남쪽, 산자락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좁다란 평지에 옹송그리고 있다. 항구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지도에 따르면 항구를 둘러싼 산자락 너머로 섬의 동남쪽와 동서쪽에 작은 촌락이 두 개, 항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듯 위치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라임이 바라보는 방향은 섬의 서쪽이었다.
"물론이지. 우리 라임처럼 귀여운 강아지가 놀아달라 그러는데 안 놀아줄 사람이 어딨겠니?"
그런 사람이 있으면 엄마가 혼내줄께. 철컥- 권총은 언제라도 쏠 수 있는 상태였다, 언제나처럼. 안나마리는 신이 나서 겅중겅중 달려가는 라임을 앞세우고 항구를 가로질렀다. '꼬리잡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
엄마, 저기! 언니야랑 아저씨들이 놀고 있어! 라임 빼놓고 놀고 있어!
"어머나, 그러네?"
안나마리는 항구를 둘러싼 낮은 언덕에 듬성듬성 자라난 숲 가장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 사이의 숲이 끊어지고 드러난 얕은 공터에 두 무리의 사람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 무리를 이루는 두 여자 중 한 사람이, 다른 무리를 이루는 1개 소대 분량의 나치스 병사를 차례로 쓰러뜨리고 있었다.
"이얍!"
힘차게 땅을 디디며 팔을 휘두를 때마다 내뱉는 기합 소리가 호쾌하다. 호리호리하면서도 단단한 몸집의 열대여섯 살 남짓한 소녀로, 고동색 길고 곧은 머리채를 자줏빛 비단띠로 단정히 묶고, 벚꽃잎 같은 분홍빛 겹저고리와 감색 통이 넓은 바지에 왜나막신을 받쳐 신고 있었다. 하카마라고 하던가? 자포니즘의 유행으로 서구에도 낯설지 않은 일본옷이다. 소녀의 윤곽이 또렷한 얼굴 역시 우키요에에서 걸어나온 것처럼 단아하고 아름다웠다.
"이, 이 괴물이!"
"괴물이라니, 요조숙녀에게 그 무슨 실례의 말씀을! 하앗!!"
아름답고 정숙한 여자를 일본에서 일러 야마토 나데시코라고 하던가? 하지만 나긋나긋한 소녀의 희고 섬세한 손에 쥐어진 것은 그녀의 키와 엇비슷할 정도로 길고 날렵한 일본도였다. 잔뜩 찌푸린 에게해의 하늘 아래에서 둔중하게 빛나는 칼날이 흩날릴 때마다, 정련된 병사들이 피와 비명과 생명을 흘리며 쓰러진다. 당황해서 발사하는 총탄마저 튕겨내고 갈라버린다. 등뒤에서 덜덜 떨며 겁에 질린 다른 소녀에게 다가오기는커녕 유탄 하나 맞추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리고 가냘픈 소녀가 저토록 능숙하고 현란하게 검을 사용하다니, 과연 동양의 신비라고 감탄할 법도 했지만,
와, 엄마, 저 언니야도 엄마랑 같아!
라임이 큼직하니 축 늘어진 귀를 쫑긋하며 소녀와 안나마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렇네, 안나마리는 중얼거렸다. 그녀가 속한 조직에서는 평범한 인간이 노력이나 학습을 통해 후천적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선천적으로 이능력을 타고난 자들을 오버드(Overed)라고 칭한다. 안나마리는 정보와 언어에 특화된 오버드였기 저 일본인 소녀가 그녀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치스, 아마도 아넨에르베에 소속되어 기현상과 이능력자에게 어느 정도 적응된 병사들마저 '괴물'이라고 경악할 정도로 비약적인 육체와 전력戰力을 지닌 전투 특화의 오버드.
엄마, 엄마, 저 언니야 나치스 아저씨들이랑 싸우고 있어! 그럼 우리편이야, 그지? 응, 엄마? 우리 편이지?
"글쎄다, 라임. 그러면 좋겠는데..."
안나마리는 말꼬리를 흐렸다. 잠깐 서서 지켜보는 동안, 이미 반토막이었던 소대의 숫자는 신속하게 줄어들어, 어느새 한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 저열한 황인종이! 괴물 같으니! 보르츠만 대령님께서 꼭 이 복수를 해주실 것이다! 두고 보자!!"
마지막 남은 병사가 진부한 대사를 읊더니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역시 어린애라서 마무리가 약하군. 안나마리가 혀를 차며 그녀에게 점점 더 가까워지는 병사를 향해 총을 겨눴다.
탕!
퍼슉!!
"으아악!!"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한 걸음에 - '한달음'이 아니다. 그녀는 정말로 한 걸음만에 병사가 필사적으로 달린 거리를 건너뛰었다 - 쓰러진 병사에게 다가가 등에 꽂힌 장검을 뽑아든 소녀가, 병사의 관자놀이에 난 총구멍과 거기서 솟구치는 선혈을 놀란 듯 바라보았다.
"거기 누구죠?"
소녀의 독일어는 모국어 수준까지는 아니라도 상당히 유창했다. 대답하기 전, 안나마리는 잠깐 망설였다. 전투에 특화된 오버드일뿐 아니라 그녀가 잠깐 오해했던 것과는 달리 생명을 건 싸움 자체에도 익숙해 보인다. 2년 전 독일과 일본이 방공협정防共協定을 맺은 이래, 아넨에르베는 양국의 돈독한 국교國交를 등에 업고 동방의 팔백만 신위神位를 게걸스럽게 탐했다. 이 독일어에 능숙한 일본인 오버드 소녀가, 과연 라임의 추측 - 이라기보다는 바람 - 대로 지금 나치스에 대적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편'이라고 볼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방금 보인 가공할 전투력을 어떻게 대응해야...
이쁜 언니야! 던지기 놀이야? 라임하고도 하자! 다시 던져봐! 이번에는 라임이 물어올게! 라임하고도 놀아줘! 놀아줘!!
"라임!"
작지 않은 크기의 개가 입을 벌려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고 전력으로 달려드는데 경계하지 않을 사람은 드물다. 카기모리 아리스[鍵守アリス]는 저도 모르게 칼을 들어올렸지만, 길다란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빙글빙글 돌리며 아몬드 같은 갈색 눈을 반짝이는 개에게서 딱히 적의가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내리긋는 것을 망설였다. 그사이 개는 그녀의 발치까지 들이닥쳤다. 몸을 한껏 낮추더니 펄쩍 뛰어올라 그녀의 가슴팍까지 앞발을 얹고 겅중겅중 뛰며 얼굴을 핥으려 든다. 금수의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놀아줄 거지? 응? 놀아줄 거지? 보채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 했다.
"라임, 앉아!"
숲그늘 아래 서 있던 여자가 단호하게 외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끼이잉- 개는 부채처럼 팔랑팔랑하던 귀를 축 늘어뜨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코를 울렸다. 어, 이거 좀 귀여운데. 아리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개가 기다렸다는 듯 머리를 들이댔다. 살짝 쓰다듬어 보니 크림색 털로 뒤덮인 이마가 따스하고 보들보들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를 돌려 대며 그녀의 손길을 느끼는 개의 표정이 어찌나 흐뭇해 보이던지, 아리스는 그만 칼을 등뒤에 맨 칼집으로 되돌리고 몸을 굽혀 두 손으로 개의 목덜미와 턱을 긁었다.
"이 녀석,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렇게 들이대는 거 아니랬지?"
아차. 아리스가 고개를 들자, 어느새 여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아까 쏘았던 권총은 홀스터에 집어넣었는지 빈손으로, 엄한 목소리였지만 애정이 담뿍 담긴 손길로 개의 두툼한 엉덩이를 가볍게 때린다. 그녀의 태도에는 방금까지 보였던 날선 경계심도, 어떤 적의나 긴장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개는 아리스의 손을 한 번 핥은 다음, 사과하듯 여자의 종아리에 머리를 부비며 애교를 떨었다. 그런 개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인 여자가, 이번에는 아리스를 향해 예의바른 미소를 건넸다.
"미안해요, 이 애가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놀랐죠?"
"아니요, 괜찮아요."
상대가 영어로 말했기 때문에, 아리스도 서툰 영어로 대답했다. 계부는 독일어만 할 수 있으면 세계 어디서든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확언했지만, 그 말은 절반의 진실이었다. 마치 계부 자신이 보여준 애정과 진심이 모두 절반의 진실이었던 것처럼. 계부를 쫓아 일본에서 미국을 가로질러 여기 에게해에 도착하기까지, 아리스는 필요에 의해 영어를 익혀야만 했다.
"음, 당신이 원한다면 독일어로 말해도 좋지만...아가씨는 어때요? 영어 할 수 있어요?"
"네? 저, 저요?!"
갑자기 자신에게 말이 돌려져 화들짝 놀란 것은 지금껏 아리스 등뒤에 숨어 있던 소녀였다. 아리스 또래의 열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그리스 소녀였다. 밤바다처럼 굵게 물결치는 검은 머리칼과 아침바다처럼 맑고 커다란 청록색 눈동자가 퍽이나 아름다운데, 흰 블라우스와 검은 치마라는 소박한 현대식 옷차림이 어쩐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어설퍼 보이는 것이 아쉬웠다.
"아, 네...조금, 할 수 있어요."
"다행이네요. 나는 메어리 앤 입스위치, 영국인 여행자예요. 당신들은?"
"저는 카기모리 아리스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왔어요."
"저는 메리나, 메리나 아말리아라고 합니다. 이 섬에 살고 있어요."
"메리나 아말리아...팔라니아스가 아니라 아말리아?"
"저를 아시나요?!"
메리나가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만들어낸 공백에, 어깨 위 칼자루에 손을 댄 아리스가 끼어들었다. 안나마리는 갑작스럽게 긴장하는 두 소녀의 반응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섬에는 팔라니아스 일족밖에 살고 있지 않다고 들어서 물어본 것뿐인데요."
"아, 네. 그럼..."
"당신이 이 섬의 비보...'뇌정'과 관련이 있다는 건 지금 알았구요."
챙!
아리스가 칼을 뽑았다. 그나마 그대로 찔러 들어가지 않은 건, 팔짱을 끼고 이쪽을 보는 안나마리의 태도에서 적의나 투지, 욕망, 지금까지 그녀들을 쫓아다니던 나치스가 보였던 그 어떤 구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신 누구예요?"
"나는 나치스의 적. 아넨에르베의 행사를 방해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입니다."
엄마, 그 대사 민망해서 하기 싫대며?
안나마리의 발치에 털푸덕 주저앉아 느긋하게 귀 뒤를 탈탈 털던 라임이 초콜릿 같은 눈으로 빤히 올려다보았다. 안나마리는 피식 웃었다. 보송보송한 크림색 정수리를 어루만져 주려다가, 괜히 아리스를 자극할까봐 그만뒀다. 요녀석아, 어른이 되면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늘어나는 법이야.
"나치스의 적?"
"다시 한 번 자기 소개를 하지요. 내 이름은 안나마리, 코드네임은 T. MI6 소속의 정보부원이예요."
"MI6?"
"영국 정보국 비밀정보부. 국왕 폐하의 공복이라오."
"?!!!!"
"꺄앗!!"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린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메리나가 비명을 지르며 아리스에게 매달렸다. 철컥- 안나마리가 재빨리 권총을 꺼내 겨누는 것만큼이나 아리스의 반응 역시 빨랐지만, 메리나가 매달리는 바람에 휘청거리느라 상대를 겨눈 것은 한 순간 지난 뒤의 일이었다.
"숙녀들을 놀래키다니 실례예요."
"오오, 이런. 무례를 사과하겠소."
차가운 총구와 번뜩이는 칼날이 미간과 목덜미를 겨누고 있는데도, 남자는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여유롭게 웃으며, 한쪽 손끝을 실크햇 챙에 대고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다. 나이는 40대 초반? 희고 빳빳한 드레스 셔츠와 녹색 체크무늬 크러뱃, 검은 모닝코트 위에 풍성한 인버네스를 두르고, 흰 가죽 장갑을 끼고 짧은 단장을 들었다. 잘 닦인 구두에는 흙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았다. 에게 해의 낙도보다는 곧 무도회가 시작될 대저택 로비에 어울릴 법한 영국 신사였고, 누구도 그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지어 라임마저도.
우와, 엄마, 굉장해! 저 아저씨, 쉭! 하더니 슝! 하고 나타났어! 굉장해!! 뭐야, 저거? 마법이야? 마법이다, 그치?!
"누구시죠?"
"아, 숙녀분들께서 조금만 경계를 늦춰주신다면 내 소개를 하고 싶소만."
"누구시죠?"
안나마리는 조금도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남자의 말을 튕겨냈다. 그 시간과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느긋함이 그녀의 신경을 거슬렀다.
"흠, 내 안주머니에 명함이 있소만, 꺼내도 좋겠소?"
"라임."
멍! 라임이 대답처럼 짧게 짖으며 벌떡 일어났다. 상당한 장신인 남자의 가슴께까지 단박에 뛰어올라, 앞발로 가슴을 가볍게 박차며 안주머니에 코를 들이냈다. 그때 남자의 인버네스가 바람도 불지 않는데 펄럭이며 라임의 머리를 슬쩍 휘감았다. 끼잉- 라임이 코를 울리며 뛰어올랐을 때처럼 훌쩍 뛰어내렸다. 두툼한 크림색 주둥이에는 아무 것도 물려 있지 않았다.
우와, 엄마, 진짜 굉장해! 저 할아버지 굉장히 많아! 굉장히 넓어! 라임 어지러워~
라임이 귀를 팔랑팔랑 흔들며 비틀거렸다. 안나마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런 라임에게서 시선을 들어올렸다. 남자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안나마리는 권총을 거두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곁눈질한 아리스 역시 남자의 목덜미를 겨누던 칼을 거두었지만, 칼집으로 되돌리지는 않았다. 안나마리는 권총을 치맛자락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진 홀스터에 집어넣고, 크로스백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초면에 무례를 저질렀군요. 라임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흠, 예의를 아는 숙녀시군. 무례를 용서하겠소."
남자는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고 온화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가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꺼낸 명함을 안나마리의 것과 교환했다. 그가 받은 명함에는 '다이스&선 국제무역회사 해외사업부 메어리 앤 입스위치'라고 적혀 있었고, 안나마리가 받은 명함에는,
"옥스퍼드 대학 역사지리학 교수...DD?"
"직함이나 존칭은 붙이지 않아도 좋소. 편하게 DD라고 부르시구려."
"알겠습니다. 그러면 DD, 이 섬에 무슨 목적으로 오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흠..."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무례함을 포장하고 단호함으로 리본을 두른 듯한 안나마리의 태도에 DD는 화가 나기보다는 웃음이 스며나왔다. 그 태도에서 그를 여기로 보낸 누군가와 런던 근교 그의 자택 연구실에서, 방금 전, 나눈 대화가 생각난 탓이었다.
"DD, 내게 자네에게 나를 도울 기회를 선사하는 자비를 베풀도록 해 주겠나?"
"제대로 된 퀸즈 잉글리쉬로 말할 생각이 아니라면 당장 내 공간에서 나가게."
"나 좀 도와주게, DD. 자네밖에 믿을 사람이 없네."
"또 무슨 사고를 친 건가, 알리스터."
"사고라니 무례하군."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공간을 찢고 멋대로 들어온 자네가 더 무례하다고 생각되네만."
"흠흠...트리토니스 섬을 알고 있나?"
"그리스의 지명 같군."
"에게 해의 작은 섬이네. 거기에 '뇌정'이라는 아티팩트가 있어. 제우스의 벼락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고대의 유물이네."
"그런 것이 지금까지 잘도 숨겨져 있었군."
"딱히 잘 숨겨두었던 것도 아니야. 덕분에 베를린의 콧수염 하사가 알아버렸지."
"그런 일인가."
"그런 일이네. 나는 마도대전을 대비하느라 도저히 몸을 뺄 수 없으니 자네가 가주겠나?"
"싫다고 해봤자 소용 없을 것 같군."
"어설픈 마법사를 보냈다간 '뇌정'에 먹혀버릴 거야. 나나 자네 수준의 천재가 아니면 곤란하네."
"대체 얼마나 위험한 일이길래 그리 치켜세우는 겐가?"
"매우 위험한 일이지. 내가 말 안했던가?" "일언반구도."
"그럼 스바스티카[卍]의 도당徒黨 중 '뇌명雷鳴의 기사騎士'라고 불리는 마술사관魔術士官이 관련되었다는 말도 안했나?"
"금시초문인데."
"저런, 그럼 설마 내가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 지금 당장 자네 발밑에 트리토니다스 섬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틈새를 열어주겠다는 말도 안했다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친애하는 알리스터 크롤리, 내가 지금 바로 그 말을 하려던 참이네."
"허허허, 이 친구 참..."
"허허허...알리스터?"
"왜 그러나, DD?"
"돌아오면 보세."
"자네가 무사히 돌아오면, 말이지?"
"DD?"
악담에도 정도가 있다네, 친구. 무사히 돌아오면, 말이지? 이를 말인가. 내 무사히 돌아가겠네. 이번에야말로 그 뻔뻔한 면상, 실례, 불굴의 마이페이스에 에인션트 드래곤을 끼얹어 줄 테니 목 씻고 기다리라고...
"DD? 듣고 계신가요?"
"...아, 실례.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그답지 않게 적나라한 예언의 말을 늘어놓던 DD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안나마리는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 보았다. 어이가 없다 못해 언짢은 기색이 역력하다.
"이 섬에 무슨 목적으로 오셨는지 물었습니다."
"흠..."
대답하기 전, DD는 시선을 안나마리에게서 돌렸다. DD가 나타난 이래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아리스는 줄곧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 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등뒤에는 팔라니아스의 딸이 숨듯이 기대 있었다. 메리나의 몸에 희미하게 감도는 번개의 아우라. DD는 바로 그 소녀가 그를 여기에 오게 한 '뇌정'에 깊이 관련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순수하게 신뢰하고 있는 아리스의 올곧은 시선을 지나, 다시금 바라본 안나마리는, 뭐, 초면에 터놓기에는 너무 구운 스톤케이크처럼 딱딱해 보이지만, 그래도 국가 공복이다. 저 C가 자랑하는 '바벨의 혀'가 아닌가. 믿을 수밖에 없겠지.
"'뇌정'을 지키기 위해서 왔소."
"아!"
메리나가 낮은 비명을 지르며 아리스의 등뒤에 완전히 몸을 숨겼다. 아리스는 깜짝 놀라 DD를 보았고, 안나마리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안나마리?!"
"그렇다면 저와 DD의 목적은 같다고 할 수 있겠군요. 동행과 협력을 요청드려도 될까요?"
"숙녀분들께서 허락해주신다면, 기꺼이."
"...라고 하시는군요, 아리스, 메리나."
"아..."
낯선 서양인들이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주고 받는 함의에 젖은 대화와 등뒤에 바싹 붙은 연약하고 따스한 소녀가 아리스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내 계부는 독일인이에요. 어머니를 속이고 가문의 비보를 훔쳐 달아났습니다. 당신들이 아넨에르베라고 부르는 조직에 속해 있다더군요. 그를 쫓는 중에 메리나를 만났어요. 나치스에게 쫓기는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빼앗긴 '뇌정'을 되찾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어요."
"'뇌정'을 빼앗겼다고?"
DD와 안나마리가 동시에 말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경악의 비명은 아니었고, 그럴 줄 알았다는 탄식에 가까웠다. 아리스와 메리나는 물론, 당사자들마저 그런 서로의 반응에 놀란 듯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어쩌면 바다와 대륙과 바다를 건너 영국에서 C와 알리스터 크롤리는 동시에 재채기를 하거나 간지러운 귀를 후비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네..."
줄곧 아리스의 등뒤에 숨어 있던 메리나가 이윽고 결심한 듯 앞으로 나섰다. 아리스의 왼손을 쥔 그녀의 오른손은 아직도 달달 떨리고 있었지만, 메리나는 아침바다처럼 선명한 청록색 눈으로 DD와 안나마리, 아리스를 차례로 돌아보며 말했다.
"저는 메리나 아말리아 팔라니아스, 아말리아의 딸은 대대로 팔라스 아테나의 환생으로 여겨지며, '뇌정'을 다스릴 수 있는 펜던트를 물려받습니다.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 펜던트는 제게 계승되었어요. 하지만 그걸 그 남자...그 무서운 나치스의 장교에게 빼앗겼습니다..."
"나치스의 장교라면, 보르츠만 대령을 말하는 것이오?"
"보르츠만!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알고 계신가요, DD?"
"흠...'뇌명의 기사'라고 불리는 곤란한 적이라고 들었소."
"그 남자가...'뇌정'을 조종하기 위해 신전으로 향했어요. 저는 섬 바깥까지 도망쳤다가, 아리스의 도움으로 겨우 되돌아 왔습니다만..."
"우린 지금 당장 신전으로 가야 해요."
메리나의 떨리는 목소리를 받쳐주듯 아리스가 힘주어 말했다. 안나마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줄곧 그녀의 발치에서 뒹굴던 라임이 무슨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방향을 향해 발랄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기다려, 라임! 네가 달리면 우리가 따라갈 수 없어!"
하지만 엄마, 빨리 안 가면 늦어. 벌써 눈 떴단 말야. 라임 놀고 싶어! 같이 놀고 싶어! 나치스 꽉 물어주고 싶어!
"서둘지 마, 이 녀석아."
"안나마리, 라임이 가는 방향은...저 애 지금 신전으로 가는 건가요?"
"그래요. 서둘자고 하네요. 벌써 '눈을 떴다'고."
"아..."
메리나가 입술을 깨물고 아리스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좌중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부탁드립니다! '뇌정'을 되찾게 저를 도와주세요! 제 힘으로는 나치스를 물리칠 수 없어요! 부디 도와주세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숙인 메리나의 머리 위로 안나마리의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지나갔다.
"시간낭비는 좋지 않소, 아가씨."
웃음을 머금은 DD의 목소리도 지나갔다.
"메리나? 시간 없다잖아요. 빨리 와요."
처음 만난 사흘 전부터 지금까지 들은 것 중 가장 발랄한 아리스의 목소리가 메리나의 손목을 잡아 채고 힘차게 끌어당겼다. 메리나는 고개를 들고, 이미 라임이 달려간 방향으로 재게 걸음을 옮기는 안나마리와 DD의 뒷모습을 보았다. 저만치 앞에서 라임이 짖는 소리가 들렸다.
"와, 라임이 뭐라고 말하는지 나도 알 것 같아."
"아리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느라 낭비할 시간 같은 거 우리한테 없다고 그러는 거, 메리나한테는 안 들려요?"
아리스가 방긋 웃었다. 그 이국의 꽃 같은 얼굴이 어찌나 아름답고 따스하던지, 메리나는 그만 왈칵 솟구치는 눈물을 황급히 손등으로 닦았다. 그래, 낭비할 시간 같은 건 없어. 머뭇거릴 시간도, 눈물을 흘릴 시간도. 빼앗긴 것을 되찾고 침략자들에게 천벌을 내리기에도 시간은 모자랄 테니까.
***
-어머나, 그것 참 감동적인 파티의 결성이구나. 그래서?
"그래서요?"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어떻게 되긴요. 열심히 산을 올라가서, 올라가면서 만난 족족 나치스 부대를 박살 내고, 산꼭대기에 난 동굴을 들어가서, 올라간 만큼 내려가서, 박살 낸 만큼 또 박살 내고, 보르츠만 대령을 만나서, '뇌명의 기사'인지 뭔지, 깨끗하게 베고 쏘고 치고 깨물고 할퀴고 해치웠죠."
-어머, 얘!
"'뇌정'이 한 번 폭주하긴 했지만 뭐 메리나가 무녀답게 잘 제어했구요, 앞으로 천년 아니면 백년 아니면 십년 정도는 조용할 거구요, C가 사람을 보냈으니 나치스도 또다시 '뇌정'을 차지하니 어쩌니 앞발을 내밀지 못할 거구요."
-안나마리.
"아리스는 도둑 맞은 가문의 비보를 찾아서 다시 여행을 떠났구요, DD는 나타났을 때처럼 쉭하고 슝하니 사라지려고 했지만 제가, 아니 라임이 잡아서, 일단 보고서 쓰는 건 도와준다고 했구요. 저는 보시다시피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이랑 말린 무화과랑 황금양털이랑 바리바리 싸들고 선생님 문병 왔구요. 다 잘 끝났으니 해피엔딩, 해피엔딩."
요양원의 양지바른 정원. 바퀴의자에 앉은 헬렌의 발치에 앉아 그녀의 무릎을 덮은 양털 무릎덮개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안나마리가 참으로 무성의한 말투로 그녀의 이번 임무를 세 줄 다섯 줄 요약하는 동안, 다른쪽 발치에 엎드려 그새 눈도장을 찍고 귀여움을 받는 간호사가 준 뼈다귀를 아작아작 씹고 있던 라임이 불쑥 끼어들었다.
엄마 부끄러워서 그래, 선생님.
"라임!"
-부끄럽다니, 뭐가?
엄마 이번에 죽었잖아. 그것도 네 번이나. 부끄러워서 그래. 또 죽었다고.
-...안나마리.
"네 번 아니야. 세 번이야. 너는 개가 되어서 셋넷도 못 세니?"
나 셋넷 셀 수 있어, 엄마! 하루에 밥은 세 번, 간식은 네 번. 엄마 이번에 나 간식 먹는 만큼 죽었잖아.
"라임, 너..."
-메어리 앤 입스위치.
"저 안 부끄러워요."
안나마리는 헬렌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자의로 움직일 수 없는 헬렌은 그녀의 얼굴을 들어 표정을 보는 것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안나마리는 거기 있었다. 그녀에게 닿은 채, 체온을 나눈 채, 나즉하게 말을 이으며.
"죽은 거, 안 부끄러워요. 이렇게 다시 살아났잖아요. 다시 살아서 선생님 만나러 왔잖아요. 그러니까 죽은 거 안 부끄러워요."
-안나마리, 얘야...
"부끄러운 건, 선생님이 걱정하시니까 그래요. 저도 이제 스물네 살인데, 언제까지나 갓 요원이 된 열여덞 살 신참처럼, 이번에 죽으면 못 돌아올 것처럼 걱정하시니까, 선생님 걱정하시게 한 제가 부끄러워요. 그러니까 별로 자랑스러운 이야기 아니에요. 자세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안나마리...
라임이 할게! 라임이 할 수 있어!
아직 한참 남은 굵은 뼈다귀를 퉤- 뱉은 라임이 벌떡 일어나더니 헬렌의 무릎 위로 벌떡 뛰어올랐다. 넓적하고 푹신한 앞발로 안나마리의 머리를 토닥토닥하더니 분홍색 혀를 내밀어 헬렌의 뺨을 핥았다.
"라임..."
라임 잘 하지! 라임 토닥토닥 할짝할짝 부비부비 다 할 수 있어! 응, 할 수 있어!
큼직한 스파니엘 잡종개는 헬렌의 품에 가득 차고 넘칠 정도로 기럭지가 쭉쭉했다. 사람보다도 따뜻하고 복실한 개의 온기가 헬렌의 품에 넘치고 안나마리에게로 전해졌다. 헬렌이 말없이 웃고, 안나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려가라, 라임."
하지만 엄마, 엄마는 겁쟁이라서 못한다며? 라임이 대신 해줄 수 있는데?
"엄마 겁쟁이 아냐. 네발짐승이 대신 안 해줘도 엄마가 할 수 있어."
라임이 투덜거리며 내려선 헬렌의 무릎 위로, 안나마리가 몸을 기울였다. 흐트러진 무릎덮개를 바로한 그녀는 다정하게 헬렌의 목을 감싸 안고 뺨을 부볐다.
"죄송해요, 아직 서툴러서, 걱정하시게 해서, 감사해요. 늘, 지켜 보고, 기다려 주셔서."
-...안나마리.
"감사해요, 선생님."
헬렌은 안나마리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틀림없이 그랬다. 안나마리는 확신했다. 라임도 안아줘, 선생님, 라임도! 옆에서 겅중겅중 뛰는 잔망스러운 네발짐승이 없었어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번에도 죽었고, 다시 살아났고, 돌아와야할 곳으로 돌아와, 기다리는 사람의 품에 안겨, 체온과 애정을 나누고, 그리고 다시금 죽을 곳을 향해 가게 되리란 사실을.
-끝.
---
그러니까 이거 한 편 쓰는데 왜 두 달이나 걸렸냐면, 0화는 리플레이 기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
***
사랑하는 안나마리, 허락도 받지 않고 네 일기장에 글을 남기는 무례를 용서하렴.
이건 나만의 언어, 말하자면 나의 솔로모니쉬란다. 그러니 너는 말하거나 쓸 수는 없어도 읽을 수 있을 거야. 나에게 너의 솔로모니쉬가 그런 것처럼.
언젠가 이야기했었지? 너는 절대로 괴물이나 악마가 아니야. 세상에는 너처럼 이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존재하고, 그 중에는 너와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다고. 그게 나라는 말을 좀 더 일찍 하지 못해 미안하다. 언젠가는 말하려고 했지만,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게 되어 정말로 유감이구나.
아까 점심때 내 정체가 발각되었으니 즉각 피신하라는 지령을 받았단다. 이미 경찰이 왔다 갔니? 블라우하임 부인(주여, 그 분의 영혼을 축복하소서!)의 보석함이 사라진 걸 발견했나 모르겠구나. 손버릇이 나쁜 프랑스 여자 행세를 하려고 내가 가져간다. 어차피 내일 블라우하임 박사가 베를린에서 돌아오면 다 들통날 사소한 공작인데, 어머님의 유품을 멋대로 다루어서 미안하구나.
그래, 블라우하임 박사가 내일 돌아온다고 했어. 열흘 동안 아넨에르베 본부에서 뭘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과학자 몇 명과 SS가 동행할 예정이라고 하더구나. 이제 네 어머님도 계시지 않으니, 그 미친 과학자가 이번에는 네게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가지 않아. 그러니 안나마리, 나와 함께 떠나지 않겠니?
난 널 지키고 싶구나. 널 사랑해. 네 어머니 대신은 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모나 언니는 될 수 있지 않을까? 네 아버지라는 작자의 집, 네가 폰 블라우하임의 이름을 쓰는 이 군국주의 망상병 환자들의 나라가 아니라면, 너는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웃으면서, 소중한 것을 훨씬 더 많이, 더 솔직하게 만들 수 있을 거야.
안나마리, 나와 함께 영국으로 가자. 휴 삼촌을 만나게 해줄게. 함께 콘월의 바닷가를 거닐고, 핑크색 제라늄을 정원 가득 심고, 같이 머핀을 만들고, 네가 좋아하는 개를 여러 마리 기르면서 함께 살 수 있어. 자정까지 떡갈나무숲의 남쪽 끄트머리에서 기다릴게. 언젠가 같이 발견했던 버려진 새둥지 기억 나니? 네가 오지 않는다면 거기 어머님의 보석함을 두고 가겠어. 와 주렴, 안나마리. Ma cher petit, 너에게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 부디 와 주렴. 기다릴게, 제발. 내게 널 지킬 기회를 주렴.
- 헬렌 싱클레어, 너의 엘레느가.
***
1930년 11월 7일.
자정까지 몇 분 남지 않았다. 서둘러야겠다.
나는 아무나 치면 울리는 쇠가 아니야.
아버지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
탕!!!
총성은, 그 소리가 극적으로 울리도록 의도적으로 길게 끌린 침묵 끝에 들려와, 더욱 요란하고 날카로왔다. 안나마리는 마치 뺨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녀 앞을 굳건히 막아서고 있던 엘레느의 뒷모습이 서서히 허물어지며, 아직도 총연이 피어오르는 권총을 겨누고 있는 울베르트 폰 블라우하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선생님?!"
"안...나...마리..."
털썩. 엘레느가 아직 서리도 녹지 않은 차가운 땅바닥에 무릎을 부딪히며 쓰러졌다. 안나마리는 다급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수수한 갈색 트위드 여행복의 가슴팍에 생긴 짙은 얼룩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선생님...안돼요, 선생님...선생님!!"
"..."
엘레느가 소리없이 입술을 움직이자 입꼬리를 따라 선명한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가 안나마리의 뇌리에 울렸다.
-달아나거라, 어서.
"선생님...?"
-괜찮아, 이 숲만 벗어나면 국경이야. 휴 삼촌이 기다리고 계셔. 어서, 달아나.
"안돼요, 선생님을 두고 갈 수 없어요!"
-가야 해. 약속했잖니, 행복해지겠다고, 나에게 널 지킬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아악!!
탕! 탕!!
연달아 울린 두 발의 총성에 엘레느의 몸이 격하게 튀었다. 직접 머릿속에 울리던 소리였기 때문에 갑작스런 격통에 비명을 참지 못한 것이다. 그녀를 끌어안은 안나마리의 안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그러면서도 교묘하게 엘레느 한 사람을 겨냥한 악의 어린 저격이었다.
"저열한 이등국민 주제에, 그동안 봐준 은혜도 모르고 감히 내 딸을 유괴하려 들다니."
블라우하임 박사가 그렇지 않아도 가느다란 눈을 더욱 가느랗게 뜨며 엘레느를 노려보았다. 경멸과 혐오의 빛이 역력한 시선이 딸의 가정교사와, 딸을 아울러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이쪽으로 오너라, 안네 마리아. 더 이상 반항은 용납하지 않겠다."
"나...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이라도 돌아가겠다고 말할까? 그럼 선생님을 살려줄까? 응급치료를 해야 하는데, 나, 나에게는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 같은 건 없는데, 병원에, 아니, 아버지가 의사잖아, 지금이라도 치료를, 내가 돌아갈 테니까, 제발, 누구라도 좋아, 아버지라도, 상관없어. 빨리, 선생님을, 도와줘요, 난 아무래도 좋으니까, 선생님을, 선생님을...!
"당장 이리 오지 못하겠느냐? 계속 반항한다면 정말로 따끔한 맛을..."
크르르르릉-
야성의 적의가 선명한 목울림이 블라우하임 박사의 목소리를 끊어냈다. 안나마리는 블라우하임 박사 못지 않게 놀란 눈으로, 자신과 아버지 사이를 가로막은 짐승을 바라보았다. 죽은 줄 알았던 라임이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부하들에게 쫓겨 함정으로 몰리는 짐승처럼 들어오게 된 슈바르츠발트의 숲속에서 만난, 품종도 알 수 없는 잡종개. 먹을 것을 주고 조금 놀아줬더니 안나마리가 마음에 든다며 숲에 있는 동안 동무를 해주겠다던 잔망스러운 여자아이. 개의 예민한 후각이 좁혀오는 포위망을 발견한 것은 엘레느가 서리 내리는 아침에 만났으니 '라임(Rime)'이라고 이름을 붙여준 직후였다. 용맹하게도 아버지의 부하를 습격해 쓰러뜨려 주었지만, 블라우하임 박사는 사격의 명수였다.
마치 조금 전의 엘레느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 앞을 막아서는 라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나마리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버지가 든 권총은 6연발이고, 라임에게 두 발, 선생님에게 세 발을 쐈으니까, 지금 남은 건 한 발. 라임이, 라임이 그것만 막아준다면,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뭐야, 이건? 아직도 안 죽었나? 잡종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질기기 그지없군. 아무리 내 딸이지만, 순수한 아리아인의 혈통을 가지고 고작 하는 짓이 짐승을 부리고 이등국민과 놀아나다니, 수치를 모르는 천것 같으니. 꼭 지어미를 닮아서..."
"닥쳐!!"
커어엉!!!
탕!
듣다 못한 안나마리의 절규와 라임의 포효가 거의 동시에 울리고, 한 발 늦게 총성이 울렸다. 귀를 막은 채 눈을 감고 비명을 질렀던 안나마리는, 총성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손목을 움켜쥐고 쓰러진 블라우하임 박사와 박사 위로 올라타고 목덜미를 물어뜯으려고 하얀 송곳니를 드러낸 라임을 보았다. 우리 엄마를 괴롭히지 마, 더러운 냄새가 나는 두발짐승아!! 머릿속에 라임의 외침이 아플 정도로 차갑고 깨끗하게 울려 퍼졌다. 이 여자사람은 우리 엄마야, 이제부터 우리 엄마야. 너 따위는 꺼져, 죽어버려, 더러운 두발짐승!!
"이...이...개새끼가..."
철컥.
"안돼, 라임! 돌아와!!"
안나마리가 외치자마자 라임이 몸을 날려 블라우하임 박사에게서 멀어진 다음 순간, 박사의 품속에서 뭔가 기묘하고도 불길한 쇳조각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철컥, 딸칵, 펑.
"으아악!"
일련의 쇳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블라우하임 박사의 비명은 더욱 날카롭고 기괴한 것이었다. 자신의 품속에서 김새듯 희미한 소리와 함께 팽창한 무언가를 라임에게 끼얹는 대신 자신이 뒤집어쓴 남자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비명과 신음을 거듭 되풀이하며 비틀비틀 몸을 굴려 숲속으로 사라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지 못해 멍하니 아버지가 사라진 숲을 바라보던 안나마리의 품속에서,
-휴 삼촌...
"선생님?!"
엘레느의 희미한 목소리가 울렸다. 안나마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그들 곁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벌써 땅거미가 내려 어둑해져서인지 그녀들에게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안나마리가 당황하고 라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꼬리를 살살 흔드는 동안, 남자는 그들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엘레느 위로 몸을 기울였다.
"무리했구나, 헬렌."
-늦으셨네요...
"국경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좀 더 버틸 수 있겠느냐?"
-글쎄요...괜찮아...울지 마...
힘겹게 이어지던 '소리'는 휴 싱클레어의 뇌리를 휘돌아 안나마리에게 닿았다. 울먹이기 시작한 소녀의 뺨을 따라 굴어떨어진 물방울이 엘레느의 얼굴에 떨어졌다.
"하지만...하지만...나 때문에...선생님이...나 때문에...!!"
-너 때문이 아니야, 안나마리...너를 위해서...내 선택이고...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건...내 권리...
"그만, 능력을 더 쓰는 건 위험하다."
-휴 삼촌, 안나마리를...
"헬렌."
-안나마리를...울리지 마세요...늘 안아주고...웃게...소중한 것을 많이...만들 수 있...게...
"...선생님?"
엘레느 - 헬렌의 '소리'가 멎었다. 끄응- 다가온 라임이 그녀의 피묻은 뺨을 살짝 핥았다. 하지만 헬렌의 눈은 감긴 채로, 희미하게 미소를 그린 입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안나마리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다랗게 뜨여진 채, '선생님' 소리조차 내지 못하도록 목구멍에 틀어막힌 무언가가 당장이라고 터지고 찢어져 솟구칠 것 같은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기 시작하는데,
"안나마리."
두툼한 어른 남자의 손이 그녀의 머리에 얹혔다.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뻣뻣이 굳은 어깨를 토닥였다.
"일어설 수 있겠니?"
"...저...저는...선...선생님이...저..."
"차를 숲밖에 대어 두었다. 헬렌을 데리고, 국경을 벗어나야 해. 블라우하임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안전한 곳으로 헬렌을 데려가야 해. 일어설 수 있겠니?"
'휴 삼촌'의 목소리는 다정하지만 준엄했다. 안나마리는 다시금 품속에서 고요하게, 마치 잠들듯 평온해 보이는 헬렌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한 끝에, 겨우 사람의 목소리 같은 것을 낼 수 있었다. 끄응끄응- 라임이 재우치듯, 격려하듯, 그녀에게 두툼한 등짝을 들이밀고 머리를 부볐다.
"선생님...선생님을 안아 주세요. 저는 할 수 없어요...흔들리지 않게, 많이 아프실 거에요..."
"음, 내가 힘이 좀 세지. 헬렌이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더냐?"
'휴 삼촌'이 넉살좋게 웃으며, 축 늘어진 조카를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일어났다. 뒤따라 일어나려던 안나마리는 무릎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 했지만, 라임이 재빨리 머리를 들이대 그녀를 부축했다. 고마워, 라임. 별말씀을, 울지 마, 엄마, 힘내, 걷자, 나 걷는 거 좋아해. 엄마가 웃는 거 좋아해. 있잖아, 어서 선생님이 말한 베이컨이라는 거 먹어 보고 싶어. 엄마는 배 안 고파? 선생님이랑 같이 커피라는 거 마시고 싶다고 했지?
"응...머핀도. 바닷가도, 핑크색 제라늄도..."
선생님하고 약속했으니까, 먹을 거야. 보러 갈 거고, 거닐 거고, 웃을 거고, 울 거고, 소중한 걸 잔뜩 만들 거고, 절대로 행복해질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선생님, 제 곁에 라임이 있어요. 휴 삼촌을 만났어요. 하지만 선생님이 한 번만 더 웃어준다면, 한 번만 더 안아준다면, 한 번만 더 입맞춰 준다면, 저는 좀 더 쉽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좀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한 번만, 한 번만 더...!!
***
1932년 6월 18일, 영국 남서부 콘월, 실리 제도의 어느 섬.
"말리셔도 소용 없어요. 저한테는 행복해질 권리뿐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지킬 권리도 있다는 걸 가르쳐주신 건 바로 선생님이시잖아요."
-네가 위험해지기를 바란 건 아니었어.
"그리고 제가 이렇게 고집쟁이인 줄 예전에 몰랐다고 말씀하실 차례죠, 이젠?"
-메어리 앤 입스위치!
"식어요."
-뭐?
"선생님이 그렇게 풀네임을 부르실 때는 잔소리를 시작하시겠다는 거잖아요. 저 머핀 구워왔단 말이에요. 이제야 겨우 사람이 먹을 만한 게 만들어졌는데, 식어버리면 또 무슨 맛으로 변할지 모르거든요."
-보통 머핀이라는 음식은 식는다고 맛이 그렇게 심하게 변하지는 않아.
"제가 만드는 건 보통 머핀이 아니라 괴물 머핀이라 그런가부죠."
-얘가 점점! 휴 삼촌한테서 넉살 좋은 것만 배웠니?
"저 원래 넉살 좋았어요. 계발이 덜되서 그렇지."
태연히 자신의 유년기를 싸잡아 부정하며, 안나마리는 병상의 사이드 테이블 위에 싱싱한 데이지꽃을 곁들여 정성껏 포장한 머핀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풀 생각은 없었다. 따스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이 살며시 닿도록 주의깊에 창가에 배치된 병상에 누운 여성은, 머핀을 먹기는커녕 눈꺼풀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몸이었으니까. 병상 위로 훌쩍 뛰어오른 라임이 발치에 실꾸러미처럼 둥그렇게 몸을 말고, 마지막 세균 한 마리까지도 박멸할 기세로 간호사들이 박박 소독한 발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킁킁 냄새를 맡다가 맹렬하게 핥기 시작했다.
-라임더러, 간지러우니까 내 발등 위에서 탈탈거리지 말라고 전해줄래?
"직접 말씀하시지 그러세요?"
-네 개잖니.
"선생님 드릴까요? 곁에 두면 심심하지는 않으실 텐데."
-네 동반자인 걸. 없으면 울다가 잠도 못들 거면서. 나는 네가 잊을만 하면 쳐들어와서 귀가 아프도록 떠들다 가는 걸로 충분히 심심파적이 된단다.
"저 뭐부터 상처받을까요? 울어요? 잊어요? 아파요?!"
-머핀, 식기 전에 먹으렴.
"혼자 먹으면 맛 없는데요."
나 먹을 수 있어, 먹을래, 먹을 거야! 왜 이번에는 나 하나도 안 줘? 전에 구운 건 다 나 줬잖아!
"라임!"
-맛있었니, 라임?
응! 굉장히 특이한 맛이 났어! 엄마가 만드는 머핀 같은 맛이 나는 건 또 없어! 어제도 다섯 접시나 먹었어! 근데 여섯 접시째는 나 안줬어!
크림색 곱슬털이 보들한 스파니엘 잡종개가 견주의 머리칼과 같은 밤갈색의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견주와 견주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안나마리의 얼굴이 노을빛으로 물들었고, 헬렌 싱클레어의 '소리'가 명랑하게 웃었다. 뭐라고 화를 내야할지 몰라 씩씩대던 안나마리가 이윽고 어깨에 힘을 빼더니 웃기 시작했고, 들리는 소리와 들리지 않는 소리, 하지만 그 모든 소리가 들리는 라임은 엄마와 엄마의 '선생님'이 웃는 것이 기뻐서 꺄르르 꺄르르 떠들다가 결국 달려온 간호사에게 짐승은 조용히 하라며 야단을 맞았다.
런던 테임즈 강가에 본사를 둔 다이스 앤드 선(Dice & Son) 국제무역회사에 2년 전부터 견습사원으로 일하던 메어리 앤 '안나마리' 입스위치가 정식 사원으로 임명되어 T의 코드네임을 받은 지 며칠 뒤, 그녀의 18번째 생일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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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포스트 리플레이가 끝났다! 순식간에 안나마리의 과거가 밝혀졌군요. 어릴 때는 그래도 제법 순진하고 순수하고 연약하던 안나마리였습니다, 믿거나~말거나~
생각해보면 헬렌 선생님도 오버드니까 죽을 리가 없는데(그 와중에 설마 침식률이 100% 넘지는 않았겠...지?;;;) 리저렉션에 너무 턴을 소비하신 듯한...
석양이 뉘엿거리며 사위를 주홍빛으로 물들일 무렵, 삼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작고 한적한 저택 입구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20대 후반에 완벽하게 틀어올린 브루넷과 야하지 않으면서도 화사한 화장, 소박한 디자인이지만 고급 원단을 아낌없이 쓴 샤넬 수트에 은은히 풍기는 장미향까지, 프러시아 남동부의 시골에서는 이채로울 정도로 우아하고 세련된 남유럽풍의 미인이었다. 여자는 연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저택으로 쭉 이어지는 외길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때때로 파리지엔느의 나른한 분위기를 두르는 것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벌써 몇십분째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저기!"
드디어 노을이 황혼을 지나, 땅거미가 밤의 어둠으로 녹아들 무렵, 여자는 이쪽을 향해 털털거리며 굴러오는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보았다. 안타까울 정도로 천천히 달린 차는 저택 바로 앞에서 불평하듯 투르르 소리를 내며 엔진을 껐다.
"안나마리! Ma petit!!"
운전석에서 내린, 사복을 입었지만 누가 봐도 군인임이 분명한 절도가 몸에 밴 젊은이가 뒷문을 여는 것보다 먼저, 여자가 달려들어 뒷문을 열었다. 뒷좌석에 깊이 몸을 파묻고 있던 소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엘레느 선생님..."
"왜 이렇게 늦었니, 걱정했잖아...Mon Dieu, 너 안색이 왜 이러니! 무슨 일 있었어?!"
"아니에요, 조금 피곤해서..."
오늘 실험이 좀 길었어요. 평소보다 거칠었구요. 멀미가 날까봐 차를 천천히 몰아달라고 해서 더 늦었어요.
언제나처럼, 엘레느 생 브륙은 안네 마리아 - 그녀의 안나마리가 하지 않은 말, 하지만 하고 싶어하는 말까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운전수를 한 번 노려보는 것으로 호들갑을 끝내고, 열여섯의 나이가 무색하도록 작고 여윈 안나마리를 힘들이지 않고 부축하여 집안으로 들어갔다.
"페트라, 페트라? 안나마리를 방으로 데려갈 거에요. 저녁은 방에서 먹을 거에요. 빨리 방을 정돈해 줘요. 오늘도 저녁 식사에 생선 요리를 올리면 정말 화를 낼 거에요. Magnez-vous!"
젊은 가정교사의 독일어는 너무 빠르고, 버터를 너무 넣어 태운 송어구이처럼 프랑스어 억양이 진하게 배어 듣기 괴로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귓전에 쏙쏙 들어박히며 거역하기는커녕 못 들은 척 하기도 어렵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늙은 독일인 하녀는 내심 자기가 뭔 줄 아냐고 투덜거리면서도 명령 때문이 아니라 어린 애기씨에 대한 애틋함 때문에, 아픈 무릎을 절뚝이며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가 안나마리의 침대를 정돈했다.
엘레느는 안나마리를 침대에 눕히고, 코트와 스커트를 벗긴 뒤 실내복으로 갈아입혔다. 차가운 물수건을 창백한 이마에 얹어 눈에 그늘을 지우고, 물수건으로 손발을 닦은 다음 슬리퍼를 신겼다. 그녀가 안나마리의 가정교사(라고 쓰고 보모라고 읽으며 유일한 친구라고 소리나는 위치)가 된 이래 5년이 지났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온 날이면 묵은 흔적 위에 선명하게 덧새겨진 수갑이나 차꼬, 전극과 주사바늘 자국에도 익숙해져 있었지만, 오늘은 특히 더 심했다. 얼마나 비명을 질렀는지 목소리는 형편없이 쉬어 있었고, 예전에 없던 상처가 있는가 하면 깨물어 터진 입술에 손바닥은 피묻은 생채기 투성이였다.
빌어먹을 매드 사이언티스트야, 이 애는 네 딸이야! 네 아내가 낳은 친딸을 모르는 사람이나 말 못하는 짐승이나 감정이 없는 물건처럼 취급하지 말란 말이다, DAMN IT! CONFOUND YOU!! CURSE YOU!!!
내심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총동원해 울베르트 폰 블라우하임을 격렬하게 매도하며, 엘레느는 약상자를 가져와 안나마리의 팔다리에 난 상처를 소독하고 치료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열여섯의 나이였다. 그나마 옷을 벗어야 볼 수 있는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는 것을 안심해야 할까? 일기장마저 보여줄 정도로 - 물론 읽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짐짓 자비롭게 열람을 허가하는 장난이었지만 - 신뢰하는 그녀에게조차, 안나마리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아버지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지, 병원이 어디인지, 어떤 치료인지 결코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기에,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기에, 더욱 안타깝고 괴로웠다. 이 아이만큼은 상처 입히지 않겠다던 엘레느 생 브룩 - 헬렌 싱클레어의 다짐은 이제 이 아이만은 지키겠다는, 그리고 이 생지옥에서 반드시 구해내겠다는 결심으로 자라나 있었다.
"선생님..."
"Chut, 목 아프지? 아무 말 말고 푹 쉬거라."
안나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엘레느는 그녀가 아침에 땋아 주었던 소녀의 머리를 풀고, 조심스럽게 빗질하기 시작했다. 너도밤나무의 나이테처럼 바림이 진 밤갈색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사르륵 펼쳐질 즈음, 안나마리가 살며시 눈을 뜨고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선생님...어머니는요?"
"...이따 저녁 먹고, 기운 차려서 뵈러 가자꾸나."
"...네..."
안나마리가 다시 눈을 감았다. 눈꼬리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엘레느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손끝으로 훔쳤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한 저택 어딘가에서 낮고 단조로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안나마리의 모친, 마르타가 초빙하여 며칠 전부터 묵고 있는 성 루치아 수녀원의 수녀들이 부르는 성가였다. 마르타가 언제 발작을 일으키더라도 종부성사를 집전해줄 신부도 베갯머리를 지키고 있었다. 신실한 교도들의 무리가 자아내는 평화와 은총. 거기에는 마르타의 악마 같은 남편이나 그 남자의 씨앗인 괴물 같은 딸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
1930년 11월 6일.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제 어머니는 내가 곁에 가도 소리를 지르지 않으신다. 내가 손을 잡아도 뿌리치지 않으신다. 내가 뺨에 입을 맞춰도 밀치지 않으신다. 물론 내게 미소를 짓거나 안아주거나 입을 맞춰주지 않으시지만, 무슨 상관인가. 살아 계실 때에도 해주신 적 없는 것을.
어머니는 나를 낳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내가 태어난 순간 비명을 지르며 나를 집어던지려고 하셨다. 잡아뜯은 탯줄로 내 목을 조르려고 하셨다. 젖을 먹이기는커녕 손도 대지 않으려고 하셨다. 그때가 6월의 따뜻한 밤이 아니었다면, 내 울음소리를 들은 어미곰과 어미늑대가 다가오지 않았다면, 나는 얼어죽거나 굶어죽거나 어머니의 피와 내 피로 범벅이 되어 죽어버렸을 것이다.
태어나서 16년 동안 한 번도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셨다. 나를 증오하고 혐오하고 두려워하셨다. 하지만 내가 괴물이라서가 아니었다. 내가 동물이나 식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마녀의 눈을 가져서, 말하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천재여서가 아니었다.
내가 아버지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외할아버지가 단지 이름과 성 사이에 von이 붙는다는 이유만으로 간택한 남자. 어머니가 자신을 혐오한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을 승락한 남자. 어머니가 나를 임신할 때까지 의무적으로 잠자리를 같이 하고, 외할아버지가 태어날 외손이 딸이든 아들이든 전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하자마자 사고를 가장해 외할아버지를 살해한 남자. 수의사라고 하지만 사실은 잔혹한 생체실험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그리고 자신의 딸조차 이능력을 가진 실험체로 생각하는 그런 남자의 딸이기 때문에.
하지만 어머니, 나도 그런 남자의 딸인 게 싫어요. 그런 아버지에게서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어머니의 딸이기도 했어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증오할 수도 있었어요. 함께 손을 잡고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단둘이서 살 수도 있었어요. 어머니, 왜 나를 포기하셨던 건가요.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어머니가 나를 안고 미소 지어주는 기억이 있었다면, 한 번이라도 어머니의 젖을 물고, 어머니에게 입맞춤을 받은 기억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랬다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내 이름은 안네 마리아 폰 블라우하임이다. 나는 오늘 열한 살이 되었다. 나는 지금 엘레느 선생님의 방에서 이 일기를 쓰고 있다. 이 일기장은 엘레느 선생님이 생일을 축하한다면서 주신 것이다. 내 생일을 축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 놀랍다고 말했더니 선생님이 우셨다. 선생님은 지금 주무신다. 방금 아래층에서 시계가 12번 울렸다. 열한 번째 생일이 지났다. 뒷뜰 주목나무에 사는 게으른 올빼미가 배고프다고 울면서 날아갔다. 아래층에서 어머니의 비명 소리가 계속 들린다. 내일밤까지 발작을 계속하실 것이다. 지금까지 내 생일마다 그러셨으니까.
어머니 생각을 하면 우울해지니까 딴 이야기를 써야겠다. 이 일기장은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보는 생일 선물이다. 보들보들한 가죽 장정에 성서처럼 두툼한데 속지는 보헤미아산의 고급 종이다. 크림색이고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아 꼭 실크 같다. 펜촉이 사각사각 긁히는 감촉이 기분 좋다. 아까도 선생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지만 내일 아침에 또 말씀드려야겠다. 선물을 주신 것도 기쁘지만, 이 일기장은 선생님의 소중한 보물이었기 때문에 더 기쁘다.
일기장의 속표지에는 'To My dearest Helene, From Your uncle, Hugh'라고 정갈한 남자 글씨체로 적혀 있다. 선생님이 고향을 떠날 때 삼촌에게 받은 선물이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엘레느 생 브룩이라는 프랑스인으로 행세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영어로 헌사가 적힌 영국산 일기장을 발견했을 때 굉장히 당황하셨다. 다른 사람이 보면 안되는 물건이라면 갖고 오지 않으면 될 텐데, 소중한 사람이 진심을 담아 준 선물이기 때문에 두고 올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사람이 사람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뭔가 주고, 거기에 마음을 담고, 그 담긴 마음을 알아차리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한 마디로 '선물'이라고 하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말했더니 선생님이 우셨다. 어른이 우는 건 자주 봤지만, 선생님처럼 예쁘고 아프게 우는 사람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선생님이 영국인인 건 알지만 아무한테도 말 안하겠다고 말해버렸다. 선생님도 당황하셨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의 프랑스어는 진짜 파리지엔느처럼 완벽하기 때문에, 가지고 오신 핑크색 제라늄이 콘월에서 왔다고 말해주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라는 말까지 해버렸다. 선생님은 진짜 당황하셨다. 만약 선생님이 성호를 긋거나 거짓말 하지 말라고 화를 내거나 아버지를 부르거나 도망치셨다면 난 정말 울어버렸을 거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러는 대신 내 이름 - 세상에서 오직 선생님만 부르는 '안나마리'라는 애칭 - 을 부르며 안아주셨다. 다 큰 어른이 꼭 어린애처럼 울면서, 나더러도 울고 싶을 때는 울어도 된다고 하셨다. 나는 어린애니까 어린애처럼 울어도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난 울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일기장의 속표지 뒷장에는 'To My dearest Anna-Marie, From Your mentor, Helene'이라고 적혀 있다. 선생님은 생일 선물로 새것이 아니라 미안하지만, 선생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나한테 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기쁘게 이 일기장을 받았다. 언젠가 선생님의 생신 때 나도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기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소중한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또 우셨다. 선생님이 우실 때마다 정말 곤란하다.
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선생님이 좋았다. 선생님 이름이 엘레느든 헬렌이든 헬레나든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선생님이 사실은 영국 사람이고, 영국과 독일은 지금 다시 한 번 큰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의 대치 상황이고, 선생님은 아버지가 속한 조직과 적대하는 조직 소속인데 아버지를 감시하기 위해 우리집에 왔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다. 특히 아버지한테는 절대로 알려주지 않을 거다. 지금처럼 계속 선생님을 멍청한 프랑스 여자라고 생각하고, 그러면서도 혹시나 실수를 하지 않을까 프랑스어를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으라지. 사람들은 뱀을 사악하고 교활하다고 하지만, 사실 뱀은 순진하고 멍청한 동물이다. 풀숲의 뱀이 먹이를 먹으려면 뱀보다 더 멍청한 먹이가 눈앞을 지나가야만 한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으면 뱀은 그대로 굶어 죽는다. 그래서 나랑 선생님은 우리 둘만 있을 때는 아랍어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아랍어를 모른다. 자기가 듣지 않을 때에도 자기가 아는 말로 이야기하라고 명령하지는 못할 걸? 자기가 듣지 않을 때 우리가 무슨 말로 이야기하는지 어떻게 아는지 설명할 수 없을 거니까.
그리고 나는 이 일기를 솔로모니쉬(Solomenish)로 적고 있다. 솔로모니쉬는 내가 만든 언어다. 그래서 나만 읽고 쓰고 말할 수 있다. 선생님도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아랍어와 이탈리아어와 라틴어를 할 수 있지만, 솔로모니쉬는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겠다고, 선생님 조직의 요원들에게 해독시켜 보면 재미있겠다고 웃으셨다.
그런데 선생님이 아까 이상한 이야기를 하셨다. 어머니가 던진 접시에 맞아 찢어진 내 이마에 붕대를 감아 주시면서, 또 우시면서, 나는 절대로 저주 받은 것도 악마의 씨앗도 아니라고 하셨다. 사실 세상에는 나처럼 이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가끔 나타나는데, 그 중에는 나랑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그 사람이라면 솔로모니쉬라도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셨다. 이 세상 어딘가에 나처럼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모두 할 줄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아버지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안다면 그 사람을 잡아 와서 나처럼 실험 대상으로 쓸까?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로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면 안된다. 내일 선생님께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꼭 이야기해야겠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랑 친구가 되어 줄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나보다 나이가 많을까, 적을까?
방금 엄청나게 큰 소리가 났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다. 어머니 방쪽인데, 어머니 방에는 이제 부술 물건이 남아 있지 않다. 설마 성모님 제단을 부수신 건 아니겠지. 아, 비명소리. 아버지가 고함치는 소리. 아버지가 자제력을 잃을 정도면 오늘 어머니의 발작은 굉장히 심한가 보다. 나처럼 던지시는 물건에 얻어맞은 건 아닐까? 아버지가 다치는 건 상관없지만 어머니가 다치시면 안된다. 살짝 보러 갔다 올까?
방금 엘레느 선생님이 깨어나셨다. 나 대신 보고 오겠다고 나가셨다. 선생님을 따라 가야 하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일기를 쓰는 건 재미있다. 이렇게 내 이야기를 많이 해본 건 처음이다. 앞으로도 종종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