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척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죠. 그뿐인가요? 제법 잘생긴 데다가, 늘 생글생글 웃고 있죠. 옷차림도 그만하면 준수하고, 늘 끼고 다니는 헤드셋도 센스 있고. 혈통에 비해 머리도 좋고, 어느 쪽이냐면 수재급이잖아요? 물론 C.C. 씨 옆에 있어서 늘 빛이 바래지만 - 아차, 이런 말 하면 안되는데. 그 사람, C.C. 씨랑 비교되는 걸 엄청나게 싫어하거든요. 말로 한 적은 없지만,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표정이 굳어져요. 그걸 또 대놓고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로쏘 반장 정도일까. 반장만큼 성격 나쁜 엔지니어도 흔하지 않으니까요. 저번에 의장님 보좌관 의수를 수리하면서 둘이 싸우는 걸 당신도 봤어야 하는데...
아하하, 미안해요. 정말 이야기가 산으로 갔네요. 그러게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으니까 빨리 이야기할게요. 어디까지 했었더라? 그래요, 맞아요. 그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이야기였죠.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다는 걸 알아본 건 아니에요. 그랬다고 말하면 듣기에야 그럴듯하겠지만, 이제 와서 우리 사이에 그런 허세는 필요 없겠죠.
처음 타이렐 씨가 이상해 보인 건, 어디 보자, 아마 우리 섹션에 온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였을 거에요. 내 파트너였던 C.C. 씨가 상급 연구원으로 승진하는 바람에 빈 자리를 채운 거라서, 처음부터 나랑 같이 근무했었죠. 솔직히 말해 오기 전부터 얕잡아 보고 있었어요. 그렇잖아요? 절대로 테크노크라트가 될 수 없는 혈통의 엔지니어 따위를 어디에 써먹어요. 기껏해야 내 발목이나 잡다가 로쏘 반장한테 매도 당하면서 쫓겨날 거다, 그 뒤치다꺼리는 다 내가 하겠구나, 재수 옴붙었다, 그렇게 생각했죠.
그런데 막상 만나 보니까 예상과는 다른 거였어요. 늘 웃고, 유들유들하고, 보비위도 잘 하고, 무엇보다 여기까지 올 만하구나 싶게 실력도 있고. 싫어할 이유가 없더라고요. 아유, 놀리지 말아요.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나도 여자인 걸. 타이렐 씨 같은 남자가 누님 누님 하면서 애교를 부리는데 그럼 어떻게 해요. 자기도 주제를 알면 날 밟고 올라갈 생각 같은 건 꿈에도 안할 테니까, 쓸만한 후배 하나 생긴 셈 치기로 했죠.
그러다 일주일 쯤, 그러니까 우리 조가 비번인 날이었어요. 브런치를 먹으러 아케이드에 나갔다가 C.C. 씨랑 타이렐 씨를 보았죠. 둘 다 쇼핑 중인데 한 짐씩 들고 있었고, 그쪽도 우연히 만났는지 잠깐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지더군요. 사실 이야기라기보다는 C.C. 씨가 일방적으로 말하다가 가버린 거였죠. 당신도 알잖아요, C.C. 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기가 하는 말이 남한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전혀 계산을 못했죠. 너무 천진난만해서, 그렇게 젊고 예쁘고 천재가 아니었다면 그보다 훨씬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되었을 것을.
아무튼 그때 난 봐 버린 거에요. 타이렐 씨는 C.C. 씨가 안 보일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거리가 좀 있었고 비스듬한 옆얼굴이긴 했지만, 그래도 난 봤어요. 잘못 본 건 아니었어요. 잘못 봤을 리가 없죠. 그런 표정은 처음 보았거든요. 그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딱딱하게 굳어 있는데 그렇다고 무표정인 건 아니고, 난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다는 건 몰랐어요. 뭐랄까, 데드 마스크 본 적 있어요? 사람이 죽는 순간 짓는 표정 말이에요. 난 지금도 가끔 그때 그 표정을 생각해요. 그건 꼭, 그래요, 오버워킹 끝에 정지한 모니터를 본 기분이었어요. 표현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한꺼번에 할 수가 없어서 아예 멈춰 버린, 맞아요,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은 표정이었어요.
그때 말을 걸었냐고요? 아니요. 멈춰 버린 기계에게 말을 걸어봤자 대답할 리가 없잖아요. 난 그 자리에서 벗어났어요. 뭐, 솔직하게 도망쳤다고 해도 좋겠네요. 이제 와서 뭘 부끄러워 감추겠어요.
며칠 뒤에 C.C. 씨에게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C.C. 씨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더군요. 타이렐 씨의 취미가 뭔지 알고 있냐고.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까지는 한 적 없다고 대답했더니, 아, 지금도 기억 나요. C.C. 씨는 정말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어요.
- 고물상을 순회하면서 폐품을 수집하는 거래요. 그걸 또 타이렐 씨는 보물이라고 부르더라구요? 아하하~ 정말 귀엽지 않아요? 타이렐 씨답다고, 힘내라고 해줬어요. 네? 어디가 타이렐 씨답냐구요? 그야, 그 사람은 더 이상 출세할 수 없잖아요. 평생 우리 섹션에서 말단 연구원으로 일하는 게 고작일 거에요. 그러니까 폐품 수집하는 거, 꼭 어울리잖아요.
그때 연구실에는 우리 둘뿐이었어요. 하지만 타이렐 씨가 어디선가 엿듣지는 않았을 거에요. 그럴 필요가 있었겠어요? 어차피 그 사람은 면전에서 들었을 텐데. 폐품 수집이라니, 꼭 당신 처지 같아서 잘 어울린다고.
그래요, 아마 그 말 때문이었을 거에요.
타이렐 씨가 C.C. 씨를 죽인 건.
물론 처음부터 바로 타이렐 씨가 범인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왜냐면 난 그 때 그 사람을 동정하고 있었거든요. 면전에서 그런 모욕을 받고도 화낼 수 없었다는 거잖아요. 게다가 타이렐 씨는 그 뒤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면서 C.C. 씨를 대했거든요. 판데모니움에서 저급한 혈통이 살아가려면 그런 수모도 감수해야하는 거였더라구요. 불쌍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렇게까지 하면서 여기서 버텨야 하나 경멸스럽기도 했어요.
그래서 난 그 뒤로 연구원들이 타이렐 씨를 놀릴 때 끼지 않았어요. 물론 그만두게 하지도 않았죠. 일개 연구원인 내가 어떻게 그러겠어요. 타이렐 씨의 취미를 퍼뜨린 건 상급 연구원인 C.C. 씨였는 걸요.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닐 거에요. 그 전부터 C.C. 씨는 타이렐 씨와 친해지고 싶어했거든요. 맞아요, 아시는군요. 그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좋아해줄 걸 당연하게 여겼죠. 그러니까 거리를 두는 타이렐 씨가 신경 쓰여서, 어떻게든 대화를 나누려고 했던 거였죠.
하지만 그게 타이렐 씨에는 참을 수 없었던 거에요. 우리 섹션의 마돈나였잖아요, C.C. 씨. 다른 연구원들이 그냥 두고 보지 않았죠. 고물상을 순회하면서 폐품을 수집하는 취미가 얼마나 비하될 수 있는지, 젊은이들의 어휘력이 놀라울 정도였어요. 글쎄요? 정말 그랬을까요? 난 그때 내가 끼어들었다 해도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 와서 결과값을 낼 수 없는 가설은 세우지 말기로 해요. 우린 시간이 별로 없잖아요?
C.C. 씨의 죽음은 굉장한 화제였죠. 테크노크라트 후보 중 1순위로 손꼽히는 천재가 토막난 시체로, 그것도 머리가 없어진 채로 발견되는 일은 판데모니움 역사상 전무후무했으니까요. 잠깐 동안 우리 섹션은 폐쇄되기도 했어요. 그걸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았다고 억지로 재개한 게 로쏘 반장이었죠. 그때는 그 젊은 패기가 고마웠는데, 지금은 좀 원망스럽네요. 그대로 섹션이 폐쇄된 채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면, 두 번째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또 결과값을 낼 수 없는 가설이군요. 하지만 이번에는 동의해요. 그래요, 섹션이 폐쇄되었더라도 두 번째 살인은 일어났을 거에요. 물론 그랬다면 로쏘 반장이나 당신, 혹은 내가 피해자는 아니었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그 젊은이들은 C.C. 씨를 잃어버린 울분을 타이렐 씨에게 푸는 걸 관두지 않았을 거에요. 맞아요. 그래서 타이렐 씨는 살인을 멈출 수 없었겠죠. 자기 영역에 허락 없이 들어선 C.C. 씨를 죽였던 것처럼, 자기 취미를 비하하는 젊은이들을 죽이고, 범인을 알아낸 로쏘 반장을 죽이고, 당신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나를 죽이고...
어머나, 부끄럽네요. 이런 몸이 되어서도 나는 낡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군요. 그래요, 당신 지적이 옳아요. 타이렐 씨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는 한 번도 살인을 저지른 적이 없어요. 한 번도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살인이라고 표현했던 걸 용서하세요.
타이렐 씨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요. 그저 취미 생활을 계속했을 뿐. 그저 폐품을 수집했을 뿐.
그래서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거죠, 안 그래요? 그에게 수집된 '폐품'으로, 쓸모없는 머리통들의 집합으로.
그러지 말아요, C.C. 씨. 이 보존액은 ph에 민감하게 반응한답니다.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폐품은 우는 법이 아니랍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지 물어도 거울 속의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거울 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이봐, 악몽이라면 네가 나한테 뭔가 말해줘야지. 다그쳐 보았지만 소년은 얼음처럼 차가운 물로 샤워하는 바람에 파르스름하게 물든 입술을 삐죽이기만 했다. 추웠다. 알몸을 바늘처럼 찌르는 추위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들어올린 손의 굳은살은 아직 아물지 않았고, 그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뺨은 젖살이 한 겹 남아 폭신하고 보드라웠다. 지독하게 낯선, 까마득히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뺨을 쓸어 내린 손이 다시 쓸어 올렸을 때 아얏! 절로 비명이 나왔다. 거울 속 소년의 왼쪽 광대뼈가 짙은 자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맞은 자국이었다. 맙소사, 언제 맞았는지, 누구에게, 왜 맞았는지, 지금 막 생각이 나려고, 싫은, 싫지만, 하지만,
"베른? 멀었어? 나 급한데~"
"아, 나간다. 미안."
문 밖에서 찡찡대는 목소리 못지 않게, 황급히 대답한 목소리 역시 변성기를 지났을 뿐 어설프기는 매한가지였다. 앞으로 두 달 뒤면 18세가 되는, 소년도 청년도 아닌 그런 어정쩡한 나이였다. '그날 아침'의 나는, 그래서...
"으아악, 이건 무슨 냉동고야! 찬물로 샤워했어? 이제 가을이라고! 애도 아니고!!!"
베른하르트와 엇갈려 욕실 안으로 뛰어들어간 프리드리히가 비명을 질렀다. 요란한 물소리가 들려오고, 덜 닫힌 문틈으로 하얀 증기가 새어나왔다. 너야말로 애냐. 문을 꼭 닫으며 베른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레지먼트 기숙사의 시설은 좋았다. 신참인데도 쌍둥이라고 2인실을 쓰게 해줬고, 방에 딸린 욕실에서 뜨거운 물도 바로바로 나왔고, 세간도 군납품 치고는 질이 좋았고, 식사도 그럭저럭 맛있었고, 수업 - 이 아니라 훈련도 할 만했고, 동료나 상관들도...
똑똑.
멍하니 9년 전의 레지먼트를 되새기던 베른하르트가 움찔 놀랐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7시. 조반이 시작되는 7시 30분 전까지는 자유시간이지만, 이런 시간에 서로의 방을 왕래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실례가 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라면 모를까. 그리고 베른하르트와 프리드리히에게는 아직 그만큼 친한 사람이 없었다.
아니, 베른하르트에게는 있었고, 어젯밤까지는,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누구십니까?"
-나다.
없, 다고...생각했는데...베른하르트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투시능력이라도 생긴 것처럼, 그 너머에 서 있는 - 있을 사람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한참 자라는 자신에게 언젠가는 추월 당하는 게 아니냐며 투덜거리던 남자는 백금색에 가까운 연한 금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언제나 등을 똑바로 펴서 175cm보다 조금 더 커 보였다. 형제가 입대하기 얼마 전 바뀌어 다들 어색해 하는 신제복도, 마치 처음부터 입고 있었던 것처럼 단련된 어깨와 허리에 꼭 맞아, 소년이 홀린 듯 바라보게 만들었더랜다.
-이른 아침이지만 실례하겠다. 잠깐 들어가마.
"..."
베른하르트는 대답할 수 없었다. 문 너머에서 들리는 가벼운 헛기침 소리도, 욕실 안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와 박자에 맞지 않는 노랫소리도, 문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도, 모든 것이 꿈만, 다시 한 번 꾸는 꿈만 같았다.
"이런..."
방문을 열고 들어선 그는 방금 망막에 떠올랐던 것과 똑같아, 마치 베른하르트의 기억 속에서 걸어나온 것 같았다. 이른 아침에도 깔끔하게 제복을 차려 입고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넘겼다. 굵직굵직한 이목구비는 오랜 야외활동에 엷은 차색으로 그을리고, 머리칼과 같은 백금색 눈썹은 강직한 성격을 나타내듯 굵고 짧았다. 우묵하게 파인 눈두덩 아래 잠긴 눈동자는 터키석 단검처럼 예리하던 빛을 흐리고,
"옷을, 입는 중이면,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아직 물기도 채 마르지 않은 알몸에 눈 둘 바를 몰라 허둥대는 것이었다. 황급히 외로 돌린 뺨에서 굵은 목덜미로 한 가닥 홍조가 번졌다. 서로 알몸을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닌데, 몸을 겹친 적이 없는 것도 아닌데, 바로 어젯밤의 일이었건만,
"감기 들겠다. 옷, 어서 입어라."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순결한 연인을 대하는 총각처럼 수줍고 정중하고 상냥하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번사이드의 폐허에서, 쌍둥이 동생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심지어 낳아준 부모마저도 원하지 않았던 자신을 마치 세상에서 둘도 없는 보물처럼 소중히 끌어올려 주었다. 항상 지켜보고, 상냥하게 대해 주었다. 넘어질 때 잡아주는 대신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 법을, 다쳐도 울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어젯밤, 이제는 나 없이도 살 수 있지 않겠느냐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안아달라는 벌거벗은 진심을, 내치려고, 맞았고, 울었고, 하지만 결국에는 두 겹의 체온이 녹아내렸고, 그리고,
"뭐하는 거냐. 어서, 이제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다. 감기 들지 않게, 어서 웃을..."
"클라우스."
"베른하르트. 나한테 화난 건 알겠다만...?!"
"클라우스!!!"
엷게 물든 부드러운 발바닥이 거끌거끌한 마루를 걷어찼다. 클라우스는 자신의 품으로 달려드는 나신을 반사적으로 끌어안았다. 텅- 그의 널찍한 등이 문에 부딪혀 성당의 종소리처럼 둔탁하게 울렸다.
"클라우스...클라우스..."
"베른하르트, 왜 이러는..."
"사랑해요."
잠든 소년의 귓가에, 세상에 단 하나뿐인 피붙이끼리는 오히려 낯부끄러워 해본 적 없는 한 마디를, 새기듯 천천히, 몇 번이고 말해 주었던 사람.
"베, 베른하르트..."
"처음부터...처음부터...항상, 언제나..."
"...베른하르트."
북받쳐 오르는 오열에 제대로 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클라우스 로데는 품 속에서 흐느끼는 소년을 가만히 끌어안고, 끊어진 로자리오의 구슬처럼 띄엄띄엄 흘러내리는 단어를 조용히 귀담았다.
"보고 있었어요...당신보다, 내가...먼저...그러니까, 그러니까..."
"쉬이, 베른하르트. 그만, 더 말 안해도 괜찮다."
"아니야...당신이 잘못한 게...당신이..."
베른하르트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거리낌 없이 울 수 있는 그 순수함이 부럽고도 사랑스러워, 클라우스는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구겨진 이마에 입을 맞추자 거기서부터 비둘기의 심장을 터뜨려 얻은 순결한 피 같은 선홍색 꽃물이 번지기 시작한다.
"당신보다 내가 먼저, 그러니까...그러니까 어젯밤 일은..."
"베른하르트..."
"어젯밤, 일은, 당신이...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에요..."
그 누구라도 좋다. 화염의 성녀라도, 성녀의 딸이라도, 속내를 알 수 없는 어콜라이트들이라도, 헤아릴 수 없는 이능을 지닌 낯선 동료들이라도, 숲과 폐허와 호수의 마물들이라도 상관없다. 그저 이 비참한 미혼迷魂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서, 말할 수 있게 해주어서,
"사랑해요."
"베른하르트!"
"사랑해요...사랑해요...그러니까 제발...제발, 클라우스..."
죽지 말아요. 제발, 더, 살아줘요...
클라우스가 와락, 베른하르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저 북쪽 바닷가에 전해지는 저주 받은 고래처럼 꺾일 듯 젖혀진 목덜미를 거슬러 수원水源과도 같은 입술을 덮치고, 애절한 마지막 호흡을 들이마신 순간,
Ring out the bells again
Like we did when spring began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베른하르트가 사라졌다. 아아, 또...클라우스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아직도 서늘하고 촉촉하고 나긋나긋한 소년의 감촉이 남아 있는 품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 달콤한 입술을 조금만 더 오래 맛볼 수 있었다면, 한 마디만 더 할 수 있었다면,
"사랑한다, 베른하르트."
그러니 죽지 말아라. 제발, 너만은 살아다오. 마치 연인이 아직 품 속에 있는 것처럼 다정하게 속삭이며, 클라우스는 굳은 피로 끈적거리는 셉터를 두 손으로 고쳐쥐었다. 그는 <소용돌이> 안에 있었다. 무수한 이형생물에게 둘러싸여, 빠져나갈 길도 그럴 생각도 없는 채, 그를 두고 간 자들이 무사히 코어를 가지고 멀어질 시간을 벌기 위해.
"고맙다 - 매번 하는 말이지만."
둘러싼 이형생물들에게서 그의 말을 알아듣는 듯한 지성도, 이해하는 듯한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 그들 중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소용돌이> 자체인지도 모른다. '처음' 죽음을 맞이했을 때, 마지막 호흡을 '그날 아침'의 첫 호흡으로 이어준 존재가.
물때를 놓치고 모래사장에서 죽어가는 고래처럼, 죽음은 썰물처럼 밀려왔다가 클라우스를 적시고 밀물처럼 사라지며 한 톨 진주 같은 미몽迷夢을 남겼다. 몇 번이나 보았는지 셀 수도 없다. D중대가 <소용돌이>의 코어를 회수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격하던 날 아침의 일이었다. 스승과 제자, 상관과 부하, 남자와 소년, 구원자와 피구원자 사이에서 위태롭게 이어지던 가느다란 존경과 연정과 욕망의 끈이 꼬이고 얽힌 채로 팽팽히 당겨진 끝에 끊어진 밤이 밝아오고, 예리하게 벤 상처를 어설프게 봉합한 상흔에서 흐르는 피냄새에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살리기 위해 저가 죽으려 했던, 그 지옥 같은 시간을 알지 못했던 '그날 아침' - 3377년 포도의 달 9일(*)의 아침.
"자,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오직 본능만이 남은 벌레 같은 존재들이, 돌팔매처럼 내던진 도발에 반응하여 웅웅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한 번 더 '그날 아침'으로 돌아가 어린 연인의 숨결을 호흡하고 체온을 나눌지도 모르지. 보장도 담보도 없는 지독한 도박.
베른하르트...아아, 베른하르트...!!
클라우스는 짐승이 포효하듯 웃었다. 사랑했다, 사랑한다, 언제까지나 사랑하리라. 베른하르트, 베른하르트! 너는 나를 잊어라. 잊고 살아라! 살아남아라! 죽음에 삭아 바스라질 때까지, 그래도 나는 영원히 너를 구원하고, 귀애하고, 폭행하고, 범하고, 또한 사랑할 테니까!!!
Summer has come and passed
The innocent can never last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눈을 떴을 때, 베른하르트는 자신이 '부활'했음을 알았다. 알 수 없는 재질로 만들어진 인형이 눈꺼풀도 없는 말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눈꺼풀을 깜빡이자, 축축하게 젖고 부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울면서, 깨어났나...
베른하르트는 서둘러 일어났다. 다른 전사들이 보기 전에 세수를 해야 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턱을 괴고 있던 인형은 고개만 까딱 들어올려, 과묵한 검사의 길다란 그림자가 호숫가로 사라지는 것을 따라 머리를 돌렸다. 한 바퀴 돌아온 인형은 땅바닥에 제 손가락을 썼던 글씨를 보고, 빨간 구두를 신은 발끝으로 문질러 지웠다. 지금은 묻지 말자. 다음 번에 또 베른하르트가 죽으면, 또 울면서 되살아나면, 그때 물어보자.
클라우스가 누구야? 왜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그 사람 이름을 부르면서 울어?
그 사람, 사랑했어?
나보다 더?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END.
***2013/09/26
(*)9월 30일
BGM :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by Green Day
에우리피데스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결코 현명한 사람이 아니다. 은하계 변두리의 고유명사조차 없이 코드명으로 불리는 식민위성에서 태어난 것도, 유전자 결함으로 지니게 된 능력도, 부모님의 사고도, 탐정이 된 것도, 심지어 로젠부르크에 정착한 일조차도 어느 하나 자신이 선택하여 결정한 결과가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브라우닝은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 좀 현명하지 못하면 어때서. 필사적으로 추구할 원대한 야망도, 아득바득 기를 써서 성취할 목표도 없다. 제 한 몸 편히 누일 소파와 향긋한 커피 한 잔의 여유 정도는 다른 탐정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을 하찮은 의뢰를 설렁설렁 해치워 버는 푼돈으로 충분했다. 양지바른 공터에서 께느른하게 낮잠을 즐기는 늙은 길고양이처럼 나태하고 무의미한 삶. 브라우닝은 그런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며 마도 로젠부르크 10계층의 탁한 구정물 속에서 길고 가늘게 호흡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게, 대체…"
브라우닝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고 심지어 비벼 보기도 했다. 조작법을 알았다면 메인 디스플레이를 껐다 켠다던가 서브 디스플레이에 뜬 데이터를 다시 검색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뭘 해도 눈에 보이는 광경은 달라지지 않았고, 우주선의 조작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빌어먹을.]
등 뒤의 통신 스크린에서, 프라임원의 언더보스가 내뱉은 욕설이 몇십 광년을 격하여 들려왔다. 브라우닝이 본 것을 그도 보았다는 의미였다.
서브 디스플레이어가 띄운 데이터에 따르면, 지금 데비안트 호가 다다른 좌표에는 몇백만 년 동안 착실하게 수축하며 항성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원시성이 있 ― 어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 메인 디스플레이에 비치는 것은 무수한 무기질의 파편뿐이었다. 마치 거대한 손이 그 어린 별을 움켜쥐고 부서뜨린 다음 멋대로 휘저어 이쪽에는 소용돌이를 그리고 저쪽에 호선과 직선을 긋던 끝에 어설픈 것인지 고의적으로 뒤튼 것인지 알 수 없는 점묘화를 만들다 만 것 같은, 천문학도 물리학도 양자역학도 상식도 이성도 비겁한 자기보호본능마저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비현실적인 광경이…
"…맙소사."
원격으로 조종되는 브릿지의 함장석 끄트머리에 어설프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던 브라우닝은 하마터면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별을 살해한 손은 잠시 쉬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마치 데비안트 호를 환영하기라도 하듯 물결치는 흐름이 이쪽 파편을 밀어내고 저쪽 파편을 긁어온다. 잠시 그 거대한 손짓을 멍하니 바라보던 브라우닝이 입술을 깨물어 욕설인지 비명인지 노호怒號인지 모를 격한 숨을 되삼켰고,
[오타는 애교라 이건가? 제법 재치가 넘치는 악마님이군.]
코브가 안도의 한숨을 얼버무리듯 비아냥거렸다. 농담을 할 여유를 찾은 것을 보면, 드디어 이블린이 지독하게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두통에서 벗어난 모양이었다. 그 가엾은 어린 마녀에게 암흑공간의 침묵이 영원히 함께하기를. 입술을 짓깨물어 피를 보기 전에, 브라우닝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격렬한 적의도, 쓰디쓴 패배감도, 에일 듯한 좌절감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가장 낮은 시궁창의 구정물처럼 고여 썩어가는 인생에는 그런 화려한 감정이 불탈 여지가 없었다.
"이블린은 어떤가?"
[잠들었다. 평안해 보여. 정말 그 악마 때문이었나.]
"음…"
브라우닝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그 악마 때문이라네. 나한테 필요도 없는 선물을 잔뜩 안겨 주고, 소중한 사람은 생기는 족족 빼앗아 가고, 저 좋을대로 내 삶을 휘저어 놓는 변태 바이올리니스트 때문이지.
그리고,
―미안해요, 브라우닝. 내가 석류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발푸르기스에서 춤을 추는 바람에, 그 악마의 바이올린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미안해요, 브라우닝, 나 때문에, 당신이, 그 악마가, 당신을 찾아내서, 당신을…
피를 토할 것처럼, 발작하듯 흐느끼며 내게 사죄하던 자네의 작은 마녀 때문이라네. 나는 한 번도 현명하거나 부유하거나 유능하거나 위대하기를 바란 적이 없었어. 그저 없는 듯 숨죽여 살다가 없었던 듯 사라지고 싶었어. 저 변덕스러운 악마의 총애를 받는 삶을 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비겁하고 치사할 수 있었지.
자네의 작은 마녀가 울지만 않았어도.
"가야겠군. 여기까지 태워줘서 고맙네, 코브. 데비안트 호가 무사히 돌아가면 좋겠군."
[원격조작이니까 신경 쓰지 마라. 그보다 돌아올 때는 어쩔 건데?]
"글쎄."
돌아가게 해줄까? 그 악마가. 브라우닝은 웃었다.
D, A, V, i, d, B, R, o, W, n, n, i, g.
죽음의 선율을 연주하는 악마가, 자신이 살해한 별의 시체로 짜맞춘 어설픈 현수막 앞에서.
"그동안 신세 졌네, 코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자, 자, 감동적인 이별은 거기까지. 깜빡, 깜빡. 브릿지의 조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브라우닝의 이름을 부르던 통신 스크린이 꺼졌다. 존재했고 존재할 리 없는 데이터를 토해내던 서브 디스플레이가 꺼졌다. 단두대에 목이 잘린 귀족으로 만든 마리오네트처럼 수욕受辱의 춤을 추기 시작하는 별의 사체를 비추던 메인 디스플레이가 꺼졌다. 한 줌 미지근한 공기를 품은 금속상자에 갇힌 채 공기도 온도도 중력도 빛도 소리도 없는 암흑공간에 홀로 내던져진 브라우닝이, 이윽고 한숨을 쉬었다.
"그만큼 오래 살았으면서 내 이름 스펠링도 틀리는 거냐. 내가 다 부끄럽다."
"내가 어릴 때는 습자習字 수업이 없었거든."
카렌베르크의 손가락은 대리석으로 깎은 천사의 그것처럼 희고, 아름답고, 차가웠다. 그 손가락은 아무리 오래 져지를 연주해도, 방금 끓인 찻잔을 쥐어도, 브라우닝이 턱이 아플 정도로 머금어도, 뻣뻣한 몸이 녹아내리며 비명을 지를 때까지 브라우닝의 안을 유린해도 결코 데워진 적이 없었다. 그 선뜩한 열 개의 손끝이 브라우닝의 목덜미를 지판指板처럼 짚고,
"드디어 돌아왔구나. 어서와, 데이비."
"…죽어버려라, 망할 악마야."
후후후― 유쾌한 악마의 웃음소리를 도입부로 죽은 별에게 바치는 진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즉흥적으로, 현란하게, 한 박자 쉬고, 단조를 장조로 바꾸어, 춤추듯 발랄한 당김음을 건너뛰어, 죽어가는 탐정에게 바치는 광시곡이 데비안트 호도, 별의 시체도, 빛도, 체온도, 소리도, 카렌베르크와 브라우닝이 아닌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윌은 읽고 있던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알라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온 책을 윌이 앉은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 괴짜 '특별'수사관에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은 옷에 밴 시취屍臭를 지우기 위해 탈취제를 쓰는 게 고작일 테니까.
하지만...알라나는 책상 가두리에 걸터앉아 윌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구부정하게 숙인 윌의 뒷덜미는 책상물림답게 그리 그을린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그 창백한 목덜미에서 희미하게 묻어나는 향은...
"로션 바꿨어, 그럼?"
"나 로션 안 쓰는데."
"애프터쉐이브."
"알라나."
겨우 책에서 뗀 시선을 그녀에게 돌린 윌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턱에 다복하게 난 수염을 보아하니 면도한 지 사흘쯤 지난 것 같다. 그럼 애프터쉐이브는 아니란 이야기인데...
"대상사건 연도가 달라. 복간 말고 초쇄初刷 없었어?"
"있었어. 거기 놔둔 책 제일 위에."
"고마워."
"천만에요. 그럼 다른 거 바꿨어? 음...바디워시나 샴푸라던가."
"안 바꿨어. 아직 한참 남았는데 뭐하러 바꿔, 귀찮게."
"아, 그래...응?"
그럼 어디 다른 데서 묻어왔나? 생각하던 알라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며칠 전 윌을 데리러 갔을 때, 윌의 네발짐승 가족들이 다 쓴 샴푸통을 장난감처럼 차고 굴리면서 노는 걸 봤던 것이다. 그 때 바로 현장으로 데려갔다가 어제 다시 집으로 데려다 줄 때까지 윌은 계속 현장 아니면 부검소, 잭 크로포드의 사무실에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 병아리를 보듬는 암탉처럼 윌의 법정근로시간을 준수하지 않으면 노동부에 고소하겠다고 잭을 을러댄 것이 바로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그런데 아직 한참 남았다고? 어디서 새 샴푸를 산 거야? 그 허허벌판에 월마트라도 생겼나?
"알라나?"
"네?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들어올린 알라나에게, 한니발 렉터 박사는 한 손가락을 입술 앞에 가로세우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쉿, 알아채지 못했으면 모르는 채로 내버려 둬요. 어머나, 그러면 박사님이? 그래요. 그가 언제 알아차리나 두고 봅시다. 그냥 두면 평생 알아차리지 못할 걸요? 그건 그 나름대로 재미있겠지요. 하긴 그러네요. 후후...후후훗...
-다들 왜 이래.
비록 책에 얼굴을 파묻은 채 원하는 정보를 찾는데 골몰하는 중이었지만, 윌의 압지押紙처럼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은 머리 위의 공기를 물들이는 불순한 음모를 감지하고 있었다. 적당히 좀 해두라고. 윌은 페이지를 넘긴 손의 손등으로 다복한 수염과 그 속에 파묻힌 부드러운 색깔의 입술을 성마르게 문질렀다. 오늘따라 샤워를 끝내고 나온 자신을 방금 발라낸 뼈다귀나 되듯 힘차게 꼬리를 흔들며 들이대서 냄새를 맡고 또 맡고 핥고 핥아서 골수를 빨아먹을 듯 매달리던 네발짐승 동반자들이 스쳐갔다. 그동안 너무 안 놀아줬나. 오늘은 꼭 돌아가는 길에 개껌과 간식을 사가야지. 가만, 그거 말고도 사야할 게 있었던 것 같은데...음, 모르겠다. 그보다 이 책 초쇄인 건 맞아? 왜 연도가 안 맞아...
투덜대며 페이지를 넘기는 윌의 어깨를 알라나가 기특하다는 듯 쓰다듬었다.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다정한 손길을, 한니발은 난간에 숨긴 손끝으로 따라그렸다. 언젠가는 그에게도 그럴 기회가 올 것이다. 언젠가는, 저 피부에 밴 향기를 쓰다듬을 날이, 맡을 날이, 맛볼 날이, 그리하여 윌의 모든 것이 그의 것이 될 날이, 언젠가는...!
-END.
***2013/06/30
사슴중독자 토끼(@lok*)의,
[개 먹이 주러 윌의 집에 가신 박사님이 슬그머니 윌의 애프터쉐이브와 바디워시를 다른걸로 바꿔놨으면 좋겠다. 그리고 윌에게는 '병을 떨어트려서 바꿔 놨다'고 되도않는 변명을 늘어놓는 거 보고 싶다.]
5월 22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이날 동굴곰은 무슨 배짱인지 밀린 업이 산더미인데! 합작이 세 개나 있는데!! 평소 언라에서 커플이라고 생각하던 아홉 쌍을 가지고 사다리를 탔습니다. 네, 시키지도 않은 사약을 열심히 고으기 시작한 거죠.
업보는 밀리고 밀려 아직 반밖에 고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조금씩 채워나갈 생각입니다. 어디선가 누군가는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고 계시겠죠, 아마도...
※커플링은 무작위이므로 성별과 수위, 취향이 제각각입니다. 주의하시길.
"그대가 이번 세대의 '신부'인가."
베른하드는 흠칫 놀랐다. 나름 검술을 익힌 몸이라 자부하고 있었으나, 누군가 나타난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도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감지할 수 없었다. 과연 인간이 아닌 것인가. 베른하드는 마른 입술을 깨물며 한삼 아래 숨겨둔 비수를 고쳐쥐었다. 정신만 바짝 차리면, 적어도 한 번은, 한 번쯤은 기회가 있지 않을까.
"긴장할 것 없다. 해치지 않을 테니."
수백 년 동안 왕실의 피가 가장 진한 소녀를 받아갔던 이계의 마왕에게, 한 번쯤은...
"남자를 받는 것은 처음이라, 내쪽이 오히려 긴장된다만."
"?!"
갑자기 왼쪽 어깨 위에서 들린,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비수를 뽑아들고 말았다. 그러나 '신부'로 결정된 날 벼린 뒤 매일밤 갈아 머리카락도 자를 정도로 예리하게 날을 세운 비수는 비단 한삼과 거기 감싸여 있던 여윈 손을 조금 베었을 뿐,
"위험한 장난감을 가지고 있군."
손은, 남자인 베른하드의 손이 작아 보일 정도로 크고 흑옥을 조각한 것처럼 새까맣다는 걸 제외하면, 인간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짐승의 발톱이나 악마의 뿔 같은 것도 나 있지 않았다.
"봐라, 다쳤지 않느냐."
단지, 커다란 만큼 과연 악력이 대단한 손이 비수를 움켜쥔 베른하드의 손목을 조용히 압박하며,
"놓아라."
"으...읏...!"
"고집이 세군. 뭐, 그런 인간도 싫어하지는 않는다."
"...흡!"
마왕은 인간처럼 생긴 것이 아닌가? 지금 자신의 손을 쥐고 있는 팔로 미루어 이해할 수 없는 각도에서 다른 손이 뻗어나와 턱을 움켜쥐고 들어올려, 베른하드는 눈을 크게 떴다. 저항할 틈도 없이, 놀라 살짝 벌어진 채로 입술을 내리누른다. 상냥하지만 엄격하게 치열을 가르고 들어와 혀를 빨아들이며 입안을 유린하는 혀를 깨물려고도 해보았지만, 그럴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땡그렁. 참으로 무력하게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놓친 비수가, 태고의 사당 바닥을 뒤덮은 이끼 낀 석파 위로 떨어졌다.
"가자, '신부'여."
다정한 목소리가, 마치 어둠 그 자체인 것처럼 헤아릴 수 없는 허공에서 들려왔다. 두 개의 굳건한 팔이 여위었으나 장신의 남자, 그것도 한 세대에 한 번 치러지는 '마왕의 결혼식'을 위해 왕실이 금고를 털어 마련한 의상과 장신구로 치렁치렁하게 감싸진 몸을 가볍게 안아올렸다.
"두려워할 것 없다."
젖은 입술이 귓가에서 속삭여, 베른하드는 저도 모르게 움찔 떨었다. 목소리가 낮고 그윽하게 웃으며 그를 고쳐 안았다.
"상냥하게 대해주마."
너희들 인간은 너무나 연약하니 말이다. 오만한 이계의 존재가 베푸는 자비의 언약에, 베른하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어둠 한 자락이 부드럽게 훔쳐 주었다.
-END.
"마치 네쪽이 신부인 것 같구나."
"모욕입니다."
"그러하냐."
천공의 여왕이 조용히 웃었다. 7백년 동안 철혈로 옥좌를 지켜온 여왕의 정신은 유리와 쇠로 된 어린 소녀 인형에 깃들어 있었다. 감히 갖혀 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보석을 아로새긴 눈동자는 영명하게 빛났다.
"허나 너는 아름답다, 브레이즈. 그 미모는 자만해도 될 것이다."
"저는 사내입니다. 반반한 얼굴을 자랑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호오..."
여왕이 신부의 베일 아래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브레이즈는 난처한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천공의 여왕이 지상에서 배필을 골라 올리는 이 혼약은 결코 동등한 것이 아니었다. 여왕에게는 단지 잘생긴 신랑이 필요할 뿐이지만, 지상의 공자에게는 가난하고 무력한 조국을 부흥할 기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너무 무례했나? 어찌 변명해야 하나? 이제 와서 웃으며 입발림을 해야 하나? 웃음을 팔아야 하는가?!
"그럴 필요는 없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은 듯한 말에, 브레이즈는 놀라 시선을 들어올렸다. 연회장의 상석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었기에, 어린 소녀의 얼굴은 - 마치 그의 여동생처럼 - 브레이즈보다 낮은 눈높이로 연회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억지로 웃을 필요는 없다. 웃어주면 좋겠다만."
"폐하..."
"레드그레이브라고 부르거라, 브레이즈. 너는 이제 짐의 신랑이 아니냐."
"..."
"브레이즈."
소녀의 옆얼굴이 쓴웃음을 떠올린 채 말을 이었다.
"타고난 것을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네가 원하여 얻은 것도, 거부하여 버린 것도 아닐 터. 나는 아름다운 신랑을 원하였고, 너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내였다. 그러니 네게 기회를 준 너의 미모에 감사함이 옳다...단."
레드그레이브가 나란히 앉은 브레이즈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차갑고, 무겁고, 작고, 가느다란 쇠인형의 손이 다정하게 따스하고 부드러운 남자의 손을 도닥였다.
"네가 원하여 얻은 것, 거부하여 버린 것을 지금부터 내게 보여주려무나. 그리하여 내가 브레이즈라는 사내가 스스로 원하여 된 바를 판단하게 해주거라."
"...알겠습니다, 레드그레이브."
"앞으로가 즐겁겠구나."
여왕이 호호호- 소녀라기보다는 노파처럼 느긋하게 웃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연회는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END.
"고양이를 물렸더니 개를 데려오다니, 중신이라는 것들이 생각하는 바가 어찌 이리 진부하냐."
어찌나 기가 찼던지, 그룬왈드는 평소보가 말이 길었다. 물론 그가 평소 어떻게 말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파르모는 그저 커다란 노을빛 눈동자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비켜라."
"싫어."
"베겠다."
"해보시지. 동맹이 깨어질 걸."
"하."
조그만 계집애가 제법 당돌하구나.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닌지라, 그룬왈드는 그녀의 목을 당장이라도 찌를 듯 매섭게 들이대고 있던 검을 늦추었다. 하지만 그대로 거두는 것도 어쩐지 약오르는 노릇이라 손목을 슬쩍 내렸다. 쇄골 사이를 지나 아래로 떨어지는 칼끝을 따라 하늘하늘 얄따란 잠옷에 실금이 그어지는가 싶더니,
"꺄악!"
크르르르릉-
팔락이며 흘러내리는 천조각 사이로 평소 햇빛을 보지 않아 뽀얀 속살이 드러나는 바람에, 파르모는 당황하여 실프 앞으로 가로막으며 벌리고 있던 팔을 모아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녀 뒤에 머리를 낮추고 경계하고 있던 실프가 다시금 목을 울리고 등의 털을 세웠다.
"흠, 계집임에는 틀림없군."
"이, 이...야만인!!!"
"숲의 민족이 할 말이냐."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든 파르모가 다른 색깔의 눈물을 머금으며 그룬왈드를 노려보았다. 오직 자기 손에 죽은 자만을 벗하고 신뢰한다 알려진 론즈브라우의 젊은 왕이 오른손에 든 애검을 왼손의 칼집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빈 손을 자신에게 내미는 것을, 파르모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어?"
"들어가자."
"...실프는?"
"우문이군."
그룬왈드의 단정한 얼굴에 실소가 피어올랐다. 처음 보았을 때, 시체가 겹겹이 쌓인 전장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로 물든 채 악마처럼 광소하고 있던 바로 그 남자가. 파르모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초야를 개와 셋이 보내랴? 돌려 보내라."
"...베지 않는 거지?"
"충성하는 개는 싫지 않다. 혼수라 생각하지."
"..."
무어라 말할 듯 연지색 입술을 오물거리던 파르모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실프의 목을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 옷자락을 여미느라 한쪽 팔만 써서 어색하고 불편한 자세였지만, 커다란 신수는 귀를 살짝 젖히고 부드러운 콧소리를 내어 어린 주인을 격려했다. 파르모가 코끝에 살짝 입을 맞추자, 실프는 커다란 몸을 소리없이 일으켜 나타났을 때처럼, 마치 여기가 탑 중턱의 신방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테라스 난간을 넘어 사라졌다.
"들어가자."
"아..."
실프가 떠나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는 파르모의 어깨 위로 묵직한 천이 덮였다. 그룬왈드가 평소 걸치는 질박한 망토였다. 소박하지만 격식을 갖춘 예복으로 가마에서 내린 신부를 맞이한 론즈브라우 왕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제복 차림이었고, 심지어 검대를 풀지도 않았었다. 먼저 신방으로 안내되어 정중하지만 무정한 시녀들의 손에 예복이 벗겨지고 반투명한 레이스 잠옷 한 겹을 입었을 뿐인 파르모 앞에 다시 나타난 그룬왈드는 옷깃 하나 달라지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때는 굴욕에 떨며 팔려온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지만,
"저기..."
"음?"
"내가...밉지 않아?"
"..."
한 발 앞서 테라스와 침실을 잇는 문으로 들어가던 그룬왈드가 걸음을 멈추었다. 기껏 친절을 베풀어 주었는데, 지금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르모는 알고 싶었다. 오늘 두 사람은 론즈브라우와 콜가르의 적법한 절차에 따라 부부가 되었다. 이제 두 사람은 초야를 치를 것이다. 두 사람의 결합은 곧 론즈브라우와 콜가르, 나아가 루비오나의 동맹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파르모는 알아야 했다. 자신의 지아비가 된 이 남자가, 그토록 광기어린 살육을 일삼던 이 남자가, 자신에게 재갈을 물리고 고삐를 채우는 언약을 하게 만든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숲의 소녀야."
"파르모."
"...파르모."
이제부터 영원토록 반려가 될 여자의 이름을 혀끝에서 굴리며, 그룬왈드는 돌아섰다. 달빛 아래, 커다란 눈 가득 눈물을 머금고, 그러나 입술을 꼭 깨물고, 자신의 망토로 자그마한 몸을 감싼 채 올려다 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자신의 운명은 죽이고 또 죽인 끝에 죽는 것이라 여겼다. 부모도, 형제도, 충신과 역신도, 백성도, 아군도, 적군도, 모두 그를 죽이지 못해 그에게 죽어갔다.
그렇다면 이 숲에서 온, 핏방울 하나 묻지 않은 순결한 여자아이는 어떨까.
"파르모."
그룬왈드가 웃으며 손을 내밀어 파르모의 어깨를 잡았다.
"기억해 두어라. 증오하는 것은 쉽다. 어려운 것은 살아남는 것이지."
"무슨...꺅!"
"힘써 살아남아 보아라, 숲의 딸아."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그룬왈드는 가볍게 파르모를 안아올렸다. 초야를 맞이하기 위해 신방으로 향하는 론즈브라우 국왕의 등 뒤에서, 말라붙은 핏빛처럼 묵직한 커튼이 밤바람에 파르르 떨렸다.
-END.
잠을 깨운 것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었다. 아직 땀이 덜 말라 촉촉한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쓸어넘기고,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 숨은 귓불을 찾아내 만지작거리는가 싶더니 뺨을 쓸어내린다. 그러고도 직성이 풀리지 않는 듯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쓰다듬기 시작하여,
"그...그만 해라..."
딱히 말을 더듬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목이 잠겨 제대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스스로 들어도 낯설 정도로 쉰 목소리는 의도만큼 매섭게 쏘아붙일 수 없었고, 떨리는 말꼬리는 움직이는 입술을 쓰다듬는 손가락에 묻혀 스러졌다.
"깼어?"
그리고 밤새 그가 울고 소리치도록 괴롭힌 끝에 결국 목이 쉬게 만든 장본인은 한쪽 팔로 머리를 받치고 모로 누워서 한 손을 뻗어 살가드를 어루만진다는 참으로 느긋하고 제멋대로인 자세를 취한 채, 뻔뻔스러울 정도로 상큼한 윙크를 날리는 것이었다.
"그렇게...주무르면, 누구라도...깬다."
"아하하, 미안, 미안. 자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귀엽..."
살가드는 말문이 턱 막혔다. 야만인의 언어는 의미가 다른가? 아무리 이쪽의 키와 체중이 10 단위로 작다고 하지만, 그래도 전사의 훈련까지 받은 어엿한 성인 남성이지 않은가. 어젯밤 침대에서 연신 예쁘다는 둥 곱다는 둥 떠들어댈 때는 발정한 야만인의 헛소리로 흘려들었지만...까지 생각했을 때, 그의 뺨에 짙은 피부색으로도 숨길 수 없는 홍조가 번졌다. 어젯밤에는 흘려듣지 않았더라도 다잡아 따질 상황이 아니었던 것까지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안색의 변화로 생각마저 읽어낸 것처럼,
"좋았지?"
"무...므슨 소리얏!"
시선을 떨군 빈틈을 놓치지 않고 찔러 들어오는 은근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머지 새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스스로의 추태에 고개를 숙인 살가드의 머리 위로 쿡쿡쿡, 유쾌한 웃음소리가 우박처럼 떨어졌다.
"이것 참, 정숙한 신/부/로군."
"...읏..."
살가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 그는 이 남자, 프리드리히의 신부였다. 어제, 두 사람은 판데모니움의 여왕 레드그레이브와 레지먼트의 수장 베른하르트를 비롯한 양국의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혼례를 치렀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부부가 된 두 사람은, 이제 어느 한쪽이 죽더라도 결코 끊어지지 않을 인연으로 맺어진 상태인 것이다.
물론 강요된 혼인은 아니었다. 제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심사숙고한 끝에 승락한 것은 분명 살가드 본인의 의지였다. 레드그레이브님을 위해, 천공과 지상 간에 유구하게 이어져 마땅한 평화를 위해, 이 야만인의 반려가 되는 것을...!
"어이어이, 어려운 생각 하지 마."
불쑥 다가온 손이 살가드의 턱을 잡고 들어올렸다. 억지로 마주친 시선은 투명한 초록색으로, 빙글빙글 웃고 있는 큼직한 입매와 달리 겨울의 압생트처럼 차갑게 얼어 있었다. 그래, 이 눈이다. 혼례식에서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마음에 걸렸던 것은.
"예쁜 이마에 주름지잖아. 우린 그냥 이형생물이나 쳐잡고 맛있는 걸 먹고 신나게 즐기면 되는 거야. 평화니 맹약이니 정치 같은 어려운 건 형이랑 그 꼬마 여왕님께 맡겨두고."
"...뭐?"
"너, 그 여왕님을 위해 나하고 결혼한 거지? 굉장한 충성심이야. 나, 그런 거 싫어하지 않거든..."
"닥쳐라! 감히 레드그레이브님을!!"
저도 모르게 발끈한 살가드가 프리드리히의 손을 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대로 침대에서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
"귀엽기는 한데..."
등을 돌린 것이 패인이었다. 억센 손이 뒤통수를 움켜쥐고는 그대로 베개에 쳐박아버린 것이다. 숨을 쉴 수도 비명을 지를 수도 없어 단지 버둥거릴 뿐인 몸부림을 잠깐 동안 음미한 프리드리히는,
"신랑한테 그런 말버릇은 곤란해, 나의 신부."
"흐...읏...너, 이...야만인..."
손을 놓는 대신 엎어진 살가드의 허리를 타고 앉아버렸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느라 물결치는 짙은 색깔의 등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그러니까 벌을 줘야지."
"아읏!"
작살을 찌르듯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 목소리는 귓가를 지나 목덜미에 닿았고, 아이들을 겁주는 옛날 이야기의 피를 빨아먹는 괴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섭게 깨물고 세차게 빨아들였다. 살가드는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지만, 이미 밤새도록 충분히 시달린 몸은 허리를 깔린 상태에서 변변하게 반항할 수 없었다.
야만인. 짐승. 살가드의 반려는 야수였다. 잡을 수 없는 사냥감, 혹은 사냥감을 놓치지 않는 사냥꾼. 그것은 유서 깊은 천공도시 판데모니움에서 태어나 그 질서와 조화 속에서 살아온 라이브리언이 일찌기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원초적인 폭력이었다.
"그만...아파...그만해...그만해, 프리드리히...제발!!!"
"...흠."
듣고 싶어하는 말을 들려준 다음에야 살가드의 고통은 끝났다. 고통과 수치심에 울먹이는 신부를 끌어안고, 프리드리히는 나른하게 속삭였다.
"울지 마. 멍이 예쁘게 들었으니까. 이제 좀 남자답네."
"...야만인..."
"그 야만인과 정략결혼을 선택한 건 너희 천공의 돼지들이지, 안 그래?"
"..."
"또, 또 어려운 생각 한다."
주름진다니까. 마디가 굵은 손이 짙은 색깔의 이마를 문질렀다. 피차 벌거벗었고, 밤새도록 구하고 구해졌던 몸들이다. 살가드는 프리드리히의 손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고, 프리드리히는 살가드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더 이상 인간의 언어가 필요 없게 되기 전, 지상의 야수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속삭였다.
"둘만 있을 때는 마음대로 굴어도 돼."
"진심인가?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하하, 마음대로. 저 위에서는 어떤 짐승을 기르는지 궁금하니까."
"...레드그레이브님을 무례하게 언급하지 마라, 야만인."
"음, 아까는 실례했어."
"모든 것은 레드그레이브님을 위해서다."
"난 형을 위해 섹스하지는 않는데."
"야만인."
"너는 그 야만인의 반려라고."
프리드리히가 유쾌하게 웃었다. 반려의 홍조에 녹아내린 독주가 가늘게 뜬 눈꼬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흐트러진 아마색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녹색 눈의 야수는 생각했다. 재미있는 신혼이 되겠군. 결혼이란 거, 나쁘지 않은데?
오늘 케이크 스퀘어에서 날조된 '베른쪽을 사랑하는 소녀들의 모임(곰이 멋대로 붙임)'에서 남의살을 흡입하려 아x백에 갔을 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가지고 곰이 그 자리에서 끄적거린 글입니다. 모든 것은 @cld*이 리리베른 책을 내시는 그날까지! 지크베른!!
"나 오늘 피곤하니까 건드리지 마라."
그건 방금 저녁식사를 마치고 휴게실로 이동하면서 쌍둥이 동생에게 하기에는 좀 이상한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식사하는 내내 테이블 아래에서 발끝으로 종아리를 집적거리다 결국 걷어차인 프리드리히에게는,
"에이~ 평소에도 못 건드리게 하면서~"
씨알도 안 먹혔다. 베른하르트는 깊이 한숨을 푹 쉬면서, 최근 스킨쉽이 쓸데없이 심해진 동생이 목덜미를 감는 척 하면서 가슴으로 미끄러뜨리는 손을 매섭게 쳐냈다.
"베에르은~"
냉정하다는 둥 매정하다는 둥 궁시렁거리면서도 프리드리히는 베른하르트 뒤를 쫄랑쫄랑 따라갔다. 그렇게 피곤하면 식후커피는 생략하고 일찍 자도 좋으련만, 습관이라는 게 뭔지 굳이 짐승 같은 놈들이 바글바글 기다리는 휴게실로 가는 것이다. 정말이지 베른은 내가 왜 화내는지도 모르고...에휴.
"여, 베른하르트."
나타났구나, 짐승 1호. 베른하르트의 어깨 너머에서 소리없이 갈기를 세우는 프리드리히를 상큼하게 무시하고,
"커피? 마침 내린 게 있는데."
"감사하지만, 직접 내리겠습니다."
"쳇, 연습 많이 했는데."
리즈가 투덜거리며 들고 있던 머그잔에 가득 담긴 액체를 원샷하더니 뜨겁다는 둥 쓰다는 둥 난리다. 베른이 미쳤다고 니가 만든 커피향 나는 물을 마시냐. 커피 스탠드로 다가가는 베른하르트를 따라가며 프리드리히가 빼- 혀를 내밀었고, 이번에는 리즈가 캿- 갈기를 세웠다.
"피곤하다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베른하르트만, 커피를 내리는 내내 옆에 붙어서 어깨를 주무른다 허리를 끌어안는다 부산을 떠는 프리드리히를 밀어냈다. 안 그래도 레지먼트 상급장교 전용 휴게실 분위기가 별로 좋은 편이 아닌데 네 녀석까지 왜 이러냐고.
"베른, 피곤하면 숙소 돌아갈까?"
"음, 이것만 마시고."
그거야 베른이 뺨 위로 속눈썹 그늘 내리깔리게 눈 반쯤 감고 커피 한 모금 머금고 혀끝으로 굴리면서 흐뭇한 미소를 은은히 머금을 때마다 다른 놈들이 안 보는 척 안 홀린 척 쳐다보고 있으니까! 도저히 베른하르트에게 할 수 없는 말을 머리 위로 뭉개뭉개 피워올리며, 프리드리히는 으르릉크르릉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베른이야! 쳐다보지 마! 다가오지 마! 말 걸지 마!!
"베른하르트, 여기 있었군. 할 말이 있어서 찾아다녔는데."
하지만 마치 그 지나친 경계심이 불러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아직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술 끝에 걸친 아치볼드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찾아다니기는 뭘 찾아다녀, 어차피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나 하면서 은근슬쩍 손을 겹친다든가 어깨를 잡는다든가 음흉하게 쳐다본다든가 할 거면서. 프리드리히는 저 베른하르트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짐승 2호를 어떻게 쫓아낼까 고민하다가,
"으아, 나 다리 아프다!"
"읏, 프리츠!"
베른하르트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황급히 소파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프리드리히가 보란 듯이 그의 무릎 위에 앉아버린 것이다.
"무슨 짓이냐, 애도 아니고."
"가끔은 좋잖아. 어릴 때는 자주 무릎에 앉혀 줬으면서."
아늑하고 좋네. 나 안 무겁지. 괜찮지? 정말 어린애처럼 어깨에 머리까지 기대면서 어리광을 부리는 프리드리히의 짧게 깎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베른하르트가 쓰게 웃었다. 어휴, 이 아무리 커도 애 같은 녀석...
"오, 의자 놀이냐? 나도!"
긁어 부스럼이라던가. 마침 휴게실에 들어오던 리즈가 그 미소를 보고만 것이다. 단 걸음에 쌍둥이를 향해 달려든 리즈가 덥석! 프리드리히의 무릎 위에 앉아버렸다.
"무슨 짓이야, 선배! 저리가!!"
"흥, 네놈만 베른하르트 무릎의자에 앉겠다고?"
"선배쯤 되면 이미 내 무릎이거든?"
"쌍둥이니까 눈 감으면 똑같다고 말한 게 어디의 누구..."
"으아아아! 야 다들 붙어! 붙어!!"
프리드리히가 두고두고 후회하며 겁화연옥에 타오를 말을 하기 전, 리즈가 포효하듯 소리질렀다. 은근슬쩍 베른하르트를 둘러싼 실랑이를 부럽게 바라보던 레지먼트 동기들이 - 물론 아치볼드가 제일 먼저 - 신나게 리즈 위로 무릎의자를 겹겹이 쌓기 시작했다. 흥, 그래봤자 베른 위에 앉은 건 나뿐이지! 니네들은 전부 내 위에 앉은 거지! 그러니까 베른은 내 밑에 있는 거지! 베른은 내 거지!! 프리드리히는 되지도 않는 베른부심을 부리며 손을 뒤로 내밀어 자기 허리를 잡고 밀어내려다 어정쩡하게 붙은 베른의 손을 잡았다. 메마른 손이, 마치 쓴웃음을 전해주듯, 쌍둥이 동생의 손을 꼬옥 붙들었다가,
"해방검."
아, 베른. 기술 영창하는 목소리도 좋아. 내 고막을 생각해서 속삭여준 거 고마워. 꿈에도 잊지 못할 거 같아...다른 레지먼트 대원들과 소파와 커튼과 유리창과 벽, 천정, 다시 말해 휴게실을 구성하던 일부와 함께 날려가며 프리드리히가 몽롱한 미소를 지었다. 저 자식 대체 언제 철이 드나. 셉터를 갈무리하며 베른하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깊이, 아주 깊이.
"아흑! 아...아으...좋...좋긴 한데...등! 등 배겨서 아프다고! 자리 옮겨서..."
삑삑삑삑삑-
"프리츠? 안에 있는 것 같은데 왜 문을 안 열어주고..."
덜컹. 현관문이 열렸다. 젠장할, 체인 안 걸었네. 이게 다 아치 자식이 신발도 벗기 전에 그럼 어디 죽여 보라고 달려들었기 때문이잖아!!
"여어, 베른."
"너희들 지금 대체 뭘...아니, 대답하지 마라. 궁금하지 않으니까."
베른하르트는 한숨을 푹 내쉬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려는 아치볼드의 입을 막았다. 아무리 금욕적인 성품이라고 해도 성인 남성이다. 신체 건장한 두 남자가 웃옷은 목덜미에, 바지와 속옷은 발목에 걸친 채로 현관 매트 위에 겹쳐서 누워 있는 꼴을 보고도, '아, 자네들 새로운 취미로 아테네식 레슬링을 시작했나 보군. 아니라고? 그럼 스파르타식인가?' 할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두 남자의 신체가 아직도 결합된 상태라는 것을, 비록 아치의 탱탱한 엉덩이와 튼실한 허벅지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르지 않을 정도로 보고 듣고 겪은(!) 바가 충분했던 것이다.
"무슨 일이야, 베른? 오늘밤은 리즈가 오는 거 아니었어?"
"아, 그랬는데...사정이 좀 생겼다. 여기서 자고 가도 될까? 물론 두 사람을 방해하지는 않겠다."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방해인데. 아니면 차라리 셋이서...아얏!"
"닥쳐, 이 변태에로드러머 영감탱이야."
"나 너희보다 두 살 어리거든?"
"그럼 형님 대접을 하던가. 젊다고 자랑하냐? 그만 세우고 빨랑 빼."
"베른하르트가 보는 앞에서?"
"씨발, 그럼 계속 넣고 있겠다고?!"
"그만, 됐다. 내가 잘못 생각했군."
대체 누가 더 변태에로 영감탱이인지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만담을 보다 못한 베른하르트가 선언했다.
"가까운 모텔에 방 잡을 거니까, 내일 아침에 스튜디오 나갈 때 전화해라."
"어? 어."
"그럼 이만."
뻔뻔스럽게도 홍조 하나 없는 살색이 어우러진 풍경을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매정하게 등을 돌린 베른하르트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이 활짝 열리기도 전에 멈칫하더니,
"아니다, 역시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야겠다."
쾅! 현관문을 요란하게 닫는다. 썩어도 준치라고, 제법 예리한 프리드리히와 아치볼드의 귀는 그 틈에 흘러들어온 귀에 익은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어이, 나갔어? 베른하르트? 대체 어딜 간거야?
"저기, 지금 들린 거 리즈 목소리야?"
"아니다."
삑삑삑- 철컥. 재빠른 손길로 번호키에 안전장치를 걸고 체인을 지른다.
"리즈가 베른하르트를 부르는 목소리 같던데..."
"아니라니까."
그대로 철문에 이마를 기댄 베른하르트가 한숨을 푹 쉬었다.
"등 돌리고 있을 테니까, 그거 좀 빨리 어떻게 해라."
"그거?"
"아치."
야, 베른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닌 거 같아.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근데 왜 저래? 리즈는 기껏해야 메이드복이랬는데...
"너희들, 알고 있었던 거냐."
"어? 아, 아니. 어, 프리드리히? 우리 그만 일어나자. 나 뺄테니까..."
"야, 안돼! 갑자기 그러면, 안에...으앗! 으아앙! 자, 잠깐만...!"
베른하르트는 눈을 꾹 감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기껏해야 메이드복? 그게 메이드복이면 내가 평소 입고 자는 파자마는 스리피스 모닝코트 정장이겠다! 낮의 RB 의상도 그렇고, 대체 어디서 그렇게 내 몸에 꼭 맞는...그만, 생각하지 말자. 깊이 생각하지 말고, 더 숭한 꼴 보기 전에 헤어지자. 까짓 거 계약 파기하겠다면 하라지. 안돼, 난 더 이상 못 해.
쭈뿌? 마치 마음 속의 외침에 대꾸하는 듯한 메세지 착신음. 베른하르트는 뒤를 돌아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 그거 빼는 게 뭐 그렇게 오래 걸려! 이런 상황에서 즐기지 말라고!! - 핸드폰을 들여다 보았다.
-베른하르트? 진짜 어디 간 거야? 화났어? 역시 코르셋은 좀 너무했나? 가터벨트도 싫으면 관둘게. 혹시 메이드복이 싫은 거면 바니걸도...
탁. 베른하르트는 메시지를 끝까지 읽기도 전에 핸드폰을 닫았다. 이 관계, 이제 끝이야!
-END.
2013/05/14
듀얼 100패를 기념하며.
"아저씨, 정줄 놨지?"
쬐끄만 기집애가 나오자마자 어른한테 하는 말본새 좀 봐라. 하지만 한 마디 타이를 호흡도 아까워, 베른하르트는 대꾸하지 않고 오른손 손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붉은 땀을 닦았다. 셉터를 쥔 손으로 하기에는 힘겨운 동작이었지만, 아까 금발의 소년이 부리는 오토마타에 얻어맞은 왼팔이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팔뿐 아니라, 랜드마인에 몇 번이나 얻어맞은 다리도 무거웠다. Ex기지는커녕 기지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애새끼라고 봐주니까 그 꼬라지가 되는 거야. 듀얼 처음 해?"
찰칵찰칵. 곱다란 손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크고 예리한 가위가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마도의 밤하늘을 갈랐다.
"여자애가..."
베른하르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리 멀리서 따님이 노려보는 시선에 등짝이 뚫릴 지경이라도, 폐가 바스라지는 한이 있어도, 어른 된 입장에서 할 말은 해야 했다.
분홍색 머리에 커다란 리본을 토끼귀처럼 앙증맞에 맨 여자애가 핏빛 가윗날에 매달려, 진짜 토끼처럼 팔짝팔짝 뛰었다. 짧은 플레어 스커트 아래 쭉 뻗은 다리가 율동하는 광경은 참으로 보기 흐뭇한 것이었지만, 그 순간은 베른하르트에게 호흡을 고를 소중한 휴식일뿐이었다. 애초에 여자 다리가 홀랑 드러났다고 시선을 주는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지금 팔짱을 끼고 말없이 그를 노려보고 있을 따님의 발치에는 랜드마인에 타죽은 리즈 - "불꽃남자 주제에 타죽다니, 바인더에 돌아가서 두고 봐!" - 와 오토마타에 맞아죽은 프리드리히 - "내가 여자랑 애라고 봐주랬어, 봐주지 말랬어?" - 가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이다.
"아저씨, 숨 다 골랐어? 이제 슬슬 간다?"
여자아이가 가위를 치켜들고 금색 눈을 번득이며 소리쳤다. 알고 있었던 건가? 이것 참, 여자아이의 자비에 기대다니 이 나도 체면이 말이 아니군. 베른하르트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아아, 잘 부탁한다."
겨우 가다듬은 소중한 호흡 한 마디를 써서 듀얼 상대에게 예의를 갖췄다. 이길 자신은 없다. 그렇다면 최소한 제대로 져야 했다. 그것이 제 잘난 맛에 살지만 의리 하나는 확실한 선배와 덤벙대지만 사람 좋은 동생을, 꼴사나운 패배에 조용히 분노하고 있는 지시자에게서 지켜낼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의 지시자는 시시한 승리보다 재미있는 패배를 선호하지 않았던가.
"얏!"
"읏!!!"
챙강! 분홍색 머리가 붉게 물드는가 싶더니, 여자아이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재빠르게 간격을 좁혔다. 셉터를 들어올리는 것이 한순간이라도 늦었다면 가윗날에 목이 베었을 것이다. 평소 기지를 쓰던 감각으로 겨우 첫 일격을 막아냈지만,
챙! 캉! 채챙!! 검날과 가윗날이 부딪힐 때마다 불꽃과 함께 쏟아지는 쇳소리보다, 살을 가르고 뼈를 부수기 위해 벼려진 거대한 가위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내지르는 광소가 더욱 귀를 따갑게 찔렀다. 지독한 광기였다. 바인더에 온 첫날 딱 한 번 듀얼에 나간 뒤로는 언제나 거실 한구석에서 코바늘로 로브 목도리나 짜고 있는 우리집의 스테이시아와는 박력이 달랐다.
"방심하면! 여자를 앞에 두고 딴 생각 하면!"
"허읏!!"
"죽일 거야! 꺄하하하!!!"
찰라간의 일이었다. 마도의 하늘을 교교히 비추던 보름달 대신 너무 크게 벌어진 눈꼬리가 찢어져 붉은 방울이 맺힐 것 같은 정금正金의 눈동자가 시야에 확 퍼치는가 싶더니,
푸슉- 푸슈슉!!
"으...으아아!!"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비명을 참을 수 있었을까? 눈깜짝할 사이에 분해되어 마치 시계탑에서 뜯어낸 시계바늘 같은, 사람 키보다도 크고 예리한 가윗날이 오른쪽 어깨와 왼쪽 허벅지를 관통한 채 바닥에 꽂히는 고통을 겪고도, 오직 자존심과 긍지를 지키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다물 수 있었을까?
"와, 아저씨 진짜 예쁜 소리로 운다?"
"무...스...윽!"
"말캉말캉~"
퍼덕이는 잠자리 날개를 뜯어내고 개구리 배를 산 채로 가르듯, 여자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가윗날이 꽂힌 베른하르트의 허벅지를 지그시 밟았다.
"몰랑몰랑~ 기분 좋아~ 아하하~"
"으...그, 그만...그만해!!!"
어째서 그대로 숨을 끊지 않는 거지? 이미 승패는 결정났을 텐데! 따님? 어째서 말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따님!!
"크게~ 크게~"
박자도 음정도 맞지 않는 노래를 흥알거리며,
"흐어억!!!"
"비명~ 비명~ 죽어~ 죽어~"
베른하르트의 어깨에 꽂힌 가윗날을 수월하게 뽑은 스테이시아는, 문득 고개를 들고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푸르스름한 머리칼의 여자애 인형이 죽은 전사들 사이에 오도카니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재미있어 보이지? 재밌다? 너도 할래? 같이 놀래?"
인형이 잘래잘래 고개를 흔들었다.
"안 놀 거야? 그럼 방해할 거야? 이 남자, 구할 거야?"
다시 한 번 잘래잘래. 뭐니, 쟤. 자기 덱의 전사잖아. 웃겨. 나도 웃기는 인형이지만, 너도 웃기는 인형이셔. 스테이시아는 히죽히죽 웃으며,
"하~나~더~!"
"흐...으아아!!"
아무리 예상하고 각오한 고통이라고 해도, 허벅지에 꽂혀 있던 가윗날이 뽑혀 나가는데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은 무리였다.
"좋은 소리~ 맑은 소리~"
뽑아낸 두 개의 가윗날을 하나로 결합해 거대한 가위를 만든 스테이시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고통에 꿈툴거리는 베른하르트의 명치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신음과 경련에 맞춰, 몸에 난 커다란 구멍에서 울컥울컥 핏물이 솟구치며 진득한 피비린내가 진하게 번졌다.
"따뜻하고~ 폭신하고~ 아이참 재미있다~"
스테이시아가 두 손에 쥔 가위를 높이 들어올렸다. 깔고 앉은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 경악? 공포? 분노? 광기의 인형이 웃었다. 그 무엇이든 좋다. 지금 이 순간, 이 남자가, 내 눈에 내 귀에 내 코에 내 혀에 내 피부에 내 손에 내 몸에 내 마음에 내 영혼에 내 기쁨에 내 욕망에 내 갈망에 내 절규에, 이 남자가, 이 남자의 온기가 촉감이 호흡이 고통이 생명이 박동이,
"---!!!"
강하게 내리친 가윗날이 늑골을 부수며 폐부에 박혔다. 질걱질걱 탐욕스러운 소리를 내며 피에 젖은 쇳덩이가 내장을 뭉개고 흐트러 끊었다. 깔고 앉은 몸의 뒤틀림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남자의 비명이 경련이 출혈이 고통이 단말마가 죽음이 죽음이 죽음이...
"...벌써?"
서서히 식어가는 육신을 꿰찌르고 땅에 박힌 가위에 매달린 스테이시아가 가냘픈 목소리를 바르르 떨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있는 사람은 모두 죽었고,
"벌써 끝난 거야? 응? 벌써?"
애원하듯 던진 금색 시선 끝에는 대답할 수 없는 인형이, 마치 그것밖에 할 수 없는 것처럼 고개를 잘래잘래 내저었다.
"왜 벌써? 텟샤는 나쁘지 않은데...잘못하지 않았는데..."
돌아올 수 없는 대답을 갈구하며, 금색 눈이 흥건히 젖어들었다.
"조금 더...응? 조금만 더 놀아주면 안돼? 응?"
스테이시아는 깔고앉은 남자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졸랐다. 철퍽, 철퍽. 절명한 남자의 부서진 몸이 끔찍한 소리로 거절할 따름이었다. 채 닫기지 않은 눈꺼풀 아래 빛을 잃은 연두색 눈동자가 칭얼대는 여자아이를 비추었다. 듀얼을 끝났다. 베른하르트는 패배했다. 시시한 패배였는가? 지시자는 즐거웠는가?
답을 아는 것은 오직 답을 말할 수 없는 인형뿐이었다.
-END.
2013/05/15
좀 더 일찍 이럴 것을 그랬다. 그랬으면 그토록 고민할 일도, 괴로워할 일도, 너를 미워할 일도 없었을 텐데. 안다, 지금 네가 하려는 말을. 싫다는 거지? 이러지 말라는 거지? 너는 정말 이기적이군. 지금껏 내 기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네 마음대로 했으면서, 내가 마음대로 행동하는 건 안된다는 건 너무 불공평해. 우는 거냐? 우습구나. 네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게 이번이 처음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하지만 안돼. 그런 눈으로 봐도 소용없다. 울든 화내든 난 신경 안 쓸 거다. 지금까지 참을 만큼 참았으니까. 이제부터는 나도 내 마음대로 할 거다. 네가 했던 그대로, 네가 보는 앞에서 그를 사랑할 거다. 그래야 공평하잖니.
우린 쌍둥이니까.
듣고 있는 거 다 알고 있네. 기절한 척 하지 말게. 왜 이러느냐고? 난 자네에게 실망했다네, 아치볼드. 어째서 좀 더 솔직하게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나? 왜, 내가 자네가 날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놀랐나?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자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자네를 사랑했으니까. 항상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자네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 내게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말, 내밀고 싶은데 내밀지 못하는 손, 모두 다 보고 있었으니까. 자네는 그저 내게 고백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물론 나는 아무 것도 몰랐던 것처럼 놀란 척, 수줍은 척, 주저하는 척 할 생각이었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자네는 내게 고백하지 않았네. 그러기는커녕 내 대신 프리츠를 선택하더군. 대체 왜 그랬나? 내가, 나라는 진실한 사랑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는데, 대체 왜 프리츠라는 대용품을 선택한 건가?
거짓말! 거짓말하지 말게. 자네는 프리츠를 사랑하지 않아! 자네가 사랑하는 건 나야!!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더 이상 속이려 들지 말게. 나를 화나게 하지 말게! 나는 이미 충분히 참았어.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더 이상 나를 화나게 하면 용서하지 않겠어!!
두려운가? 자네가 그런 눈으로 나를 보다니 놀랍군. 전장에서 누구보다도 용맹한 전사였던 자네가, 겨우 몇 대 맞았다고 나에게 사죄하는 건가? 나를 두려워하는 건가? 아아, 그렇군. 맞아, 그래. 내가 자네의 사랑을 거절할까봐 두려운 거군? 그래서 내가 아니라 나와 똑같이 생긴 프리츠를 선택한 거군? 맙소사, 자네가 이토록 바보인 줄은 미처 몰랐군. 후후후...아니야, 아치볼드. 울지 말게. 떨지 말게. 나는 자네를 비웃는 게 아니야. 자네의 사랑을 거절하려는 게 아니야. 그저 자네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는 것뿐이네.
하지만 벌은 받아야 해. 내가 자네를 사랑하는 것과 자네가 나를 선택하지 않은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 자네는 나를 선택했어야 했어. 내게 사랑을 고백하고 나를 사랑했어야 했어. 하지만 나 대신 프리츠를 선택했지. 내 앞에서 나와 똑같이 생긴 내 동생을 끌어안고 입맞췄지. 자네들이 짐승처럼 흘레붙던 밤, 나는 잠들 수가 없었네. 자네를 안는 건 나여야 했었는데, 자네의 교성을 엿들으며 자위하는 건 프리츠여야 했었는데, 자네의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모든 게 뒤바뀌었어. 엉망진창이 되었지. 나는 그때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어.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프고 손이 떨려 내 자신조차 만족시킬 수 없었지. 자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진실마저 의심할 뻔했어. 나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니, 자네는 그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뤄야 하네.
손을 내밀게.
남자의 손이군. 싸우는 남자의 손이야. 나는 늘 이 손에 입맞추고 싶었다네. 여기에, 또 여기에...이 흉터는 급하게 총을 쏘다 데인 거지...이 상처는 이형생물의 발톱에 긁힌 거고...이 손가락에 반지의 자국이 남아 있지 않아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아는가? 여기에, 그래...심장과 가장 가까운 이 손가락에 내가 반지를 끼울 걸세. 나와 같은 반지를, 그래서 처음으로 하얗게 자국을 남길 거야...자네 새끼손가락은 참 앙증맞고 귀엽지...오른손잡이라 왼손보다 더 상처가 많군...손목에 하는 키스가 욕정을 의미한다는 걸 알고 있나? 후후, 농담일세...이 상처, 내 가시나무에 긁힌 상처...자네 손을 볼 떄마다 여기에 입맞추고 싶었네. 여기에...여기에...자네가 이토록 다소곳이 손을 내밀어 주다니, 나는 정말로 꿈을 꾸는 것 같군...
난 자네 손이 총을 꺼내는 광경을, 방아쇠를 당겨 목표를 맞추는 모습을 수천 수백 번 넘게 보았네. 이 손이 어떻게 담배를 꺼내 입술로 가져가는지, 어떻게 불을 붙이고 피우는지, 어떻게 꽁초를 비벼끄고 내던지는지 눈을 감고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지. 그리고 이 손이 어떻게 프리츠에게 닿았는데, 어떻게 그의 뺨을 만졌는지, 허리를 감고, 옷을 벗기고, 어루만지고...
이런! 미안하네. 손가락을 꺾을 생각은 아니었어. 많이 아픈가? 정말 미안하네. 그렇게 입술 깨물지 말게. 피가 나지 않는가. 자, 괜찮아. 고개 돌리지 말게. 나를 봐. 나를 보라니까! 아니, 아니야. 때리려는 게 아니야. 피를 닦아주려는 것뿐이야. 착하군. 잘 했네. 이제 입술을 깨물지 말게. 차라리 비명을 지르게. 난 그쪽이 더 좋아.
자, 손을 내밀게. 손목을 자를 거니까.
왜 이러지? 마치 이형생물처럼 발작하는군! 싫다고? 지금 제정신인가? 어떻게 감히 싫다는 말을 할 수가 있나? 자네는 내게 큰 잘못을 저질렀지 않은가! 내 사랑을 무시하고 나를 괴롭힌 대가를 치루도록 해주겠다는데, 왜 반항하는 건가? 나는 미치지 않았어! 미친 건 자네야! 자네와 프리츠야!! 자네를 사랑하는 나를 두고, 내 대용품에 지나지 않는 프리츠를 사랑하다니, 자네가 미친 거야. 자네를 홀린 프리츠가 나쁜 거야!
혹시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 건가? 참괴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어서, 내 손길이 닿는 것도 괴로워하고 있는 건가? 후후후, 자네는 정말 사랑스럽군. 괜찮아, 아치볼드. 나는 관대한 사람이야, 알고 있지 않은가? 자네는 그저 순순히 내게 사과하면 되는 거네. 자네가 잘못을 뉘우치고 속죄한다면, 나는 너그러이 용서하고 안아주겠네. 내 품안에서 자네는 영원히 평화롭게 안식을 취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두 번 다시 자네가 한눈을 팔 수 없도록, 누구에게도 내밀 수 없도록, 누구의 옷도 벗길 수 없도록, 그 손을 잘라버릴 걸세. 괜찮아. 나는 자네가 내게 손을 내밀지 않아도 이해하니까. 내가 자네 몫만큼 손을 내밀고, 어루만지고, 벗기고, 닦이고, 쓰다듬고, 사랑하고, 상처입히고, 보호할 걸세.
반항은 그만 두게, 아치볼드. 보이지 않는가? 프리츠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저 애가 숨을 거두기 전에, 나는 저 애와 자네가 내게 그랬듯 저 애 앞에서 자네와 사랑을 나눌 거야. 그러니 그만 반항하게. 손을 내밀게, 이리. 내가 입맞출 수 있도록, 내가 자네의 죄를 사하여 내 사랑을 받기에 모자람 없이 만들어줄 수 있도록...
괜찮아, 아치볼드. 울지 말게. 손 따위가 없어도, 나는 자네를 사랑하니까. 보게, 내가 자네의 손에 입맞추고 있지 않은가. 내가 얼마나 이러고 싶어했는지, 자네는 모를 거야. 정말로, 절대로, 아무 것도, 모를 거야. 내가 얼마나 자네를 사랑하는지, 얼마나 자네를 사랑하고 싶은지. 내 평생 자네만큼 사랑한 사람은 프리츠밖에 없어. 하지만 난 자네를 그 애와 나눌 수는 없었네. 자네는 온전히 내 것이어야 했어. 그래서 난 프리츠를 사랑하고, 또 증오하고, 자네를 탐했던 그 애의 손과 발을 자르고, 울면서 입맞췄지. 그 애도 울고 있었다네. 우리가 나눈 한 모금 녹색 피가 얼마나 씁쓸했는지, 얼마나 달콤했는지, 자네는 모르겠지.
아...그렇군. 아까 내 혀를 깨물었을 때 자네도 맛보았군. 그렇다면 더더욱 고통은 없을 거야. 그러니 울지 말게, 아치볼드. 왜냐고 묻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눈을 감게. 심호흡을 하고, 그 녹색 핏방울이 심장에 닿기를 기다리게. 내가 한 걸음 먼저 가서 기다리겠네.
...가 버렸나? 맙소사...
이번에도 나를 두고 둘만 가버렸군.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두고 보지 않겠네. 곧 따라갈 거야. 다시는 프리츠를 위해 자네를 포기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게, 아치볼드. 자네가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그래서 프리츠에게 현혹되지 않고 나를 선택했더라면, 내 사랑을 받았더라면, 조금 덜 고통스럽고 덜 고통스럽고 덜 고통스럽고...
이건 무슨 소리지? 발소리? 프리츠? 어째서? 네 다리는 내가 잘라냈는데, 나를 짓밟으려 걸어오고 있는 거지? 이상하군. 내 목에 닿은 건 자네의 손인가, 아치볼드? 숨을 거둔 채 나를 노려보고 있군. 아아, 그렇게 목을 조르지 말게. 그렇게나 내가 보고 싶은 건가? 귀여운 사람...그러지 말게, 아치볼드...그렇게 재촉할 것 없이...난, 어차피 곧...숨이...숨...이...
-END.
2013/05/20
-리즈와 베른하르트의 경우.
"까페? 웬일로?"
"여기 카라멜 마끼아또가 맛있다더라고."
"단 건 별로..."
"에이, 그러지 말고. 자자, 마셔."
"선배는?"
"난 커피 싫어하잖아. 얼른!"
"흠..."
"잠깐만! 왜 후후 불어?"
"거품이 달아서...선배? 왜 좌절하지?"
-아치볼드와 프리드리히의 경우.
"..."
"뭘 보고 있나? 입술에 거품 묻었네."
"안 닦아줘?"
"뭔소리야? 갑자기 안 어울리게 까페 들어오더니, 빨리 마시고 가자고. 여기 금연이란 말일세."
세상은 두 가지 색깔로 이루어져 있다. 검정과 빨강. 총구를 가득 메운 검정. 심장에서 샘솟는 빨강. 검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고, 빨갛지 않은 것은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서 빨간 머리의 소녀는 검은 옷의 남자를 믿었고, 검은 머리의 남자는 빨간 눈의 소녀를 사랑했다. 유치한 연극이 전부 끝나기 전까지, 그들에게 아무런 사명도 주지 못했던 세계가 스러지기 전까지.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내려다보는 보라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며 바르작거리는 소녀의 - 자신의 코트로 감싼 - 어깨를 도닥이며,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흑자색 머리칼의 청년은 상냥하게 속삭였다.
"졸리면 더 자도 괜찮아요."
"아니...이제 졸리지 않아. 그보다 밖이..."
"시끄럽죠?"
마르세우스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스테이시아도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창문을 틀어막은 나무판자가 부서진 틈으로 새어 들어온 몇 가닥의 날카로운 빛줄기가 네모난 공간을 가득 채운 새까만 어둠을 제멋대로 난도질하고 있었다. 깨진 샹들리에, 너덜너덜한 커튼, 빛바랜 실크벽지, 부서진 액자, 허물어진 굴뚝, 먼지투성이 마룻바닥에 쓰러진 소파의 쿠션이 찢어져 솜과 스프링이 내장처럼 흘러나온 광경이 지나치게 밝은 빛과 지나치게 짙은 어둠 속에서 신기루의 파편처럼 뒤틀린 채 어른거리는 낯선 공간에서, 그녀는 벽에 기대앉은 마르세우스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지나치게 밝은 빛과 지나치게 짙은 어둠, 그리고,
-마르세우스! 그만 포기하고 투항해라! 마르세우스! 미스 스테이시아를 무사히 돌려보낸다면 선처하겠다! 현명하게 생각해라! 카스토드는 이제 너밖에 남지 않았다! 마르세우스!!
"...결국 쫓아왔네."
"그러게요. 좀 더 멀리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죄송..."
출렁- 선명한 자수정색 머리카락이 피로 얼룩진 검은 옷자락 위에서 물결쳤다. 손가락을 들어올려 청년의 고운 입술을 가로막은 스테이시아가, 자신의 과감한 행동에 내심 두려워하며 나지막히 속삭였다.
"사과하지 마. 당신은 이렇게 될 거라고 경고했잖아. 그래도 괜찮다고 내가 졸랐던 거니까, 미안하다고 하지 마."
"...그렇군요. 정말 그랬습니다만, 그래도 좀 더 신중하게 당신을 설득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후회가 됩니다."
"정말이지, 마르세우스는 너무 진지하다니까."
소녀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애써 삐죽였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않아 창백한 뺨에 긴장과 두려움으로 엷고 성긴 홍조가 떠올라 흩어졌다. 그런 괴물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마르세우스는 다친 상처의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스테이시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깜짝 놀라 커다랗게 떠졌던 금색 눈동자가 이윽고 희미한 미소에 잠겼다.
"있잖아, 마르세우스. 우리, 얼마나 더 여기 있을 수 있어?"
"원하시는 만큼, 마이 레이디."
"그럼...노래해 줘."
"..."
마르세우스는 호흡을 멈추고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언제나 두르고 있던 검은 코트에 감싸진 스테이시아는 참으로 작고, 여리고, 창백하고, 망가진 인형처럼 가냘팠다. 이 아이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문득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의문이 청년의 강인하고 예리한 자의식 위로 떠올랐다. 햇살 가득한 정원에서 처음 마주쳤던 눈동자는, 정말로 금색이었을까? 지나치게 밝은 빛에 신기루를 본 것은 아니었을까?
"응? 노래해 줘, 마르세우스. 언제나 날 재워주던 그 노래를, 한 번 더 듣고 싶어."
"...알겠습니다."
그랬을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지. 그게 이제 와서 어떻단 말인가. 안다 한들,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마르세우스는 자조했다.
You say the road is calling your name
Life at home with me is much too tame
While you roam
I'm here all alone
I hope you find what you're looking for
스테이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엄격한 아버지와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항상 바닥에 쓸리던,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아버지의 오른팔인 남자를 뒤따르던 금색 눈동자가 파들파들 떨리는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I hope you find what you're looking for
And fate is kind to you in your search for more
While you roam
I'm here all alone
I hope you find what you're looking for
마르세우스의 무릎에 얹힌 스테이시아의 몸이, 보이지 않는 손이 잡고 비트는 것처럼 기묘한 방향으로 뒤틀렸다. 만약 스테이시아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면, 마르세우스는 조직을 배반하지 않았을까?
In time you drop me a line
Just a little more time away and you'll be fine
All this time gone
I'm still holding on
I hope you find what you're looking for
마르세우스가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 아래에서, 스테이시아의 자수정색 머리카락이 핏물에 잠긴 듯 선명한 빨강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만약 스테이시아가 괴물이 아니었다면, 마르세우스는 그녀를 외면했을까?
You say you'll come back a better man than before
Don't you know that I loved the man who left a year ago
All this time gone
Are you ever coming home
I hope you find what you're looking for
삐걱- 삐걱- 삐걱- 점점 더 격하게 뒤틀리던 스테이시아의 몸이, 어느 순간 단말마의 경련과 함께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잠잠해졌다. 만약 스테이시아가 그를 원하지 않았다면, 마르세우스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I wish I was what you're looking for
Right here under your nose, how could you want more
All this time gone
And I'm still hanging on
I hope you find what you're looking for
"그만해. 언제 들어도 멍청한 노래라니까."
신음과 비명을 억눌러 참느라 꺼끌꺼끌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녹슨 가위처럼 노랫소리를 끊었다. 마르세우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코트를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는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여어, 텟샤."
"여어 좋아하네. 피 냄새 나니까 닥치고 있어."
짜증스럽게 내뱉은 소녀가 붉은 얼룩이 묻어나는 검은 케이프를 벗었다. 보랏빛 프릴이 달린 검은 실크 블라우스마저 벗자, 흠집 하나 없이 매끄럽고 새하얀 몸이 드러났다. 발목을 덮는 스커트 자락을 찢어 검은 스타킹을 훤히 드러낸 텟샤가,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낭창낭창한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폈다.
"아, 시원하다. 그깟 영감탱이가 죽었다고 상복이라니, 꽉 막힌 기집애 같으니. 좀 더 빨리 불러내지 않고 뭐 했어?"
"언제 들어도 멍청한 노래라면서?"
"하. 그 노래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내 지랄맞은 운명에 불만 있어?"
고양이과 짐승이 기지개를 펴듯 유연하게 팔다리를 뻗어 가볍게 몸을 푼 텟샤는, 벗어던진 블라우스를 집어들어 쭉쭉 찢으며 마르세우스의 엉덩이를 발끝으로 툭툭 찼다. 청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조끼 단추를 풀었고, 셔츠와 조끼 사이에 흥건히 고인 채 굳어가던 핏덩어리가 찢어진 살갗에 달라붙는 바람에 모양좋은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드러난 상처를 본 텟샤의 얼굴이 언뜻 굳었지만,
"혀 깨물지 마."
"으윽!"
느닷없이 씨익 웃으며 한 손을 그 상처에 쑤셔넣었다. 그럴 거라고 예상했고, 처음 겪는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섯 개의 손가락이 상처를 헤집어 심은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상처를 봉합하는 고통이 감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마르세우스는 고통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고 고개를 젖혔다. 기다렸던 것처럼, 한쪽은 피묻고 한쪽은 깨끗한 한 쌍의 손이 그의 얼굴을 감싸고 일그러진 입술에 메마른 제 입술을 부볐다. 덜컥이는 무릎 위에 앉아, 고통에 전율하는 몸을 끌어안고, 자신이 심은 씨앗이 발아하는 약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텟샤는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고장난 시계처럼 불완전한 박자로 째깍거리며, 커다랗게 벌어진 눈꼬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마르세우스의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더럽힐 때까지 웃고 또 웃었다.
*****
"깼어?"
"...텟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소녀는 뒤집어진 채 쓰러진 소파 위에 소롯이 앉아 있었다. 아까와는 각도가 달라진 빛의 칼날이 교묘하게 그녀를 비껴나가, 검은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허리와 길쭉한 팔다리가 밤바다에서 끌어올려진 인어 같았다. 그러나 그 인어는 지느러미 대신 레이피어 만큼이나 길고 날카로운 시계바늘을 두 개 가지고 있었다. 느른하게 시계바늘를 놀려 빛과 어둠을 가르며 텟샤가 중얼거렸다.
"심심해서, 나 혼자라도 죽이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아아...미안하다. 얼마나 지났지?"
"한 시간쯤. 그럼 이제 얼/마/나/ 남/았/어/?"
마르세우스는 피에 젖은 채 말라붙어 뻣뻣한 조끼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아까 총에 맞을 때 뚜껑이 망가졌지만 다행히 태엽은 망가지지 않은 채 움직이고 있었다.
"네 시간...아니, 세 시간...남았군."
"겨우?"
그래, 겨우. 마르세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총에 맞아 죽어가던 순간이 악몽인 것처럼 어디도 아프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이제는 움직이는데 방해가 될 뿐인 조끼를 벗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할버드를 집어드는 손놀림은 가볍고 침착했다. 남은 생명이 겨우 세 시간이라는 사실은 마르세우스에게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했던 것이다.
텟샤의 '씨앗'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시간을 억지로 정지시키는 기술이었다. 상처를 입은 순간부터 씨앗이 심겨지는 순간까지 흘렀던 만큼의 시간이 다시 흐르면 씨앗은 말라죽고, 억지로 봉합했던 상처는 다시 터져 피를 흘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전에는 심은 씨앗이 말라죽기 전 병원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마피아의 배신자로 처형명단 꼭대기에 오른 처지였고, 조직원과 민간인, 경찰을 몇 명이나 죽인 마르세우스를 사살하기 위해 진압을 기다리는 무장경찰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번에 씨앗이 말라죽을 때는 마르세우스도 죽는다. 그것은 이미 마르세우스와 텟샤에게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 '진실'이었다.
"그럼 서둘러야겠네."
텟샤가 훌쩍 뛰어내렸다. 낡아빠진 마룻바닥은 조용했고 먼지 한 톨 흐트러지지 않았다. 춤을 추듯 발랄한 걸음걸이로 마룻바닥을 가로지르는 그녀는 마치 장난감 상자에서 튀어나온 뿔 달린 광대 같았다.
"다 죽이고 나면 어떻게 할지는 네가 생각해. 난 죽이기만 할 거니까...어?"
자신의 목덜미에 디밀어진 할버드의 칼날에도 텟샤는 긴장하지 않았다. 단지 마르세우스를 향해 빙글 돌려진 눈동자가, 핏물을 담은 유리구슬처럼 사납게 반짝이기 시작했을 뿐.
"이거 지금 뭐하자는 거야? 우리끼리 먼저 놀자고? 죽기 전에 꼭 그래보고 싶었어?"
"스테이시아."
"..."
처음으로 텟샤 - 스테이시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데드마스크처럼 딱딱하게 굳은 소녀의 옆얼굴을 향해, 마르세우스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너는 이대로 달아나. 죽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하니까."
"..."
"약속했었지? 너만은 꼭 자유롭게 살게 해주겠다고, 그러니..."
"...풋..."
"스테이시아?"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데드마스크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폭소를 터뜨린 텟샤가 배를 끌어안고 허리를 젖혔다. 핏방울처럼 불그스름한 눈물이 너무 크게 뜬 나머지 찢어질 것 같은 눈꼬리에 걸렸다. 소녀의 작은 몸을 내부에서 잡아 찢을 듯 격렬한 광소에 눈을 홀렸던 마르세우스는 다급히 할버드를 거두며 몸을 뒤로 젖혔다. 두 개의 시계바늘이 빛보다도 날카롭게 어둠을 가르고 출렁인 검은 머리채의 끄트머리를 베어냈다.
"살라고? 너를 죽이고 나는 살라고?"
"텟샤...텟샤!"
"굉장해, 마르세우스! 너한테 어릿광대의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네!"
"텟샤..."
"그렇게 죽고 싶다면! 내가 죽여줄게! 지금! 여기서!!"
챙! 카챵! 챙!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어둠이 찢어지고 빛이 끊어졌다. 진심으로 살의를 품고 공격하는 텟샤에 비해 방어밖에 할 수 없는 마르세우스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하마터면 그의 목을 찢을 뻔한 시곗바늘이 할버드의 날에 부딪혀 벽에 꽂힌 순간, 마르세우스 역시 등이 벽에 부딪혔다.
"그러지 말고, 마르세우스..."
흐트러진 붉은 머리칼에 감싸인 하얀 얼굴이 마르세우스의 턱 아래 바싹 들이밀어졌다.
"같이 죽어보지 않을래?"
"텟샤..."
"네가 죽으면 끝, 끝이야. 전부 끝. 네가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끝까지 말하지 못한 텟샤의 입술은 스테이시아의 것처럼 보드랍고 따스했다. 끌어안은 몸은 참으로 작고도 가늘었다. 아아, 텟샤, 텟샤. 마르세우스는 한숨으로 키스를 끊고 소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텟샤, 죽는 게 무섭지 않아?"
"바보야?"
가볍게 마르세우스를 떠밀어 그의 품에서 벗어난 텟샤가 피식 웃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는 것도 몰랐을 거야.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죽은 채로 살고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야. 무섭냐고? 죽는 게?"
그때, 핏물에 잠긴 금공처럼 오묘하게 빛나는 소녀의 눈빛이 마르세우스의 눈꺼풀 뒤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나 혼자, 산 채로 죽어 있는 게 더 무서워."
이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건 너뿐이니까.
이 세상에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당신뿐이니까.
"...스테이시아."
"유치한 연극이었어. 하지만 재미있었지. 그거면 됐어."
"...그래, 텟샤. 재미있다면, 그걸로 됐지."
마르세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심장에서 피어난 세 갈래의 진홍색 이파리 중 하나가 시들어 떨어지며, 소녀에게 다가가는 청년의 발에 짓밟혀 가루가 되어 날렸다.
"갈까?"
"가자."
두 사람은 서로의 무기를 두 손에 쥐었다. 나란히 설 필요도 손을 맞잡을 필요도 시선을 마주칠 필요도 없었다. 그런 것 따위, 함께 죽이고 같이 죽는 사이에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세상은 두 가지 색깔로 이루어져 있다. 검정과 빨강, 마르세우스와 스테이시아.
-END.
***2013/05/09
BGM : 'What You're Looking For' (song by Stacia Petrie)
트위터에서 @jan*님의 리퀘를 받아 쓴 글입니다. [텟말텟써주세여 /느와르 대사 "무섭지 않아?"] 로 주셨었죠.
느와르...넵, 느와르. 곰이 아는 느와르라면 <첩혈쌍웅>이라든가 <언터쳐블>이 있습니다만, 어쩐지 결과물은 <바카노!> 1권에 가깝게 되었네요. 이게 다 곰이 텟샤와 말세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캐붕이 있었을 겁니다. 분명히...하지만 상냥상냥한 ㅁㅅㅇ님은 받아주실 거에요. 믿습니다! (하지만 달아나는 곰ㅌㅌㅌ)
4월 한 달 동안 트위터에 끄적였던 글 모음입니다. 전체적으로 수위가 좀 있네요. 유의하시길.
2013/04/01
두 사람이 사라졌다는 소식은 오래지 않아 레지먼트 - 고대의 언어로 '지키는 자'라는 뜻이다 - 왕국 전역에 퍼졌다. 위로는 수도 판데모니움의 귀족들부터 아래로는 황야의 스톰라이더에 이르기까지, 모이기만 하면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팔초八梢의 우보스'라지요?"
"거참, 라고모르파 레포리즈Lagomorpha Leporids 일족에게서 구출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러게요. 너무 영험해서 곤란하다니까요."
"왕세제王世弟 전하도 참 심려가 크시겠어."
"이번에도 쫓아가셨을라나?"
"그렇겠죠? 그러니까 두 분이 동시에 사라지셨겠죠."
"무사히 돌아오시겠지?"
"그렇겠죠? 언제나 그랬듯이."
"그나저나 미리안 폐하의 심려가 크시겠군."
"-랍니다, 백성들은."
"으음..."
레지먼트 국왕 - 왕성에서 가장 바른 말을 잘 하는 아무개에 따르면, 선왕 스털링 대제 임종시에 왕자라고 낳아 놓은 다섯 중에 넷씩이나 형제간에 눈치 보며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관 받으라 관 받으소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관 되었소이다 싫소이다 이 몸에 어울리지 아니하오 이래저래 떠넘길 적에, 형님들 아우님 의향이 그리하다니 못난 몸이나마 부왕 유지를 받자오리다 삼배 삼배 구배하야 왕좌를 받았더라 얼쑤~ 한 가락 뽑고도 남을 정도로 우직하고 단순하며 또한 정직하고 신실한 - 미리안이 큼직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침음했다. 신하들과 시종을 모두 물린 접견실에는 그와 왕비, 단 둘뿐이었다.
"이야, 전례가 있어 다행이야. 다들 또 그거려니, 전혀 의심을 안하더란 말이지."
"전례라니. 고작해야 네 번이다."
"네 번이 고작이야?"
수수한 녹색 로브 위로 두른 허름한 케이프의 후드를 벗은 왕비가 피식 웃었다. 선명한 붉은 단발이 보였더라면 그 복잡한 월요일 아침의 시장통에서 왕비의 정체가 탄로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옥좌 팔걸이에 걸터앉자, 습관처럼 미리안의 거무스레하고 두툼한 팔이 그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왕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로쏘는 달래는 것인지 위로하는 것인지 재미있어 하는 것인지 알기 어려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왕급 마수에게 납치되었다가 구출되기를 네 번이야. '고작'이라고 말하기 민망하지 않아?"
말꼬리를 떨었다. 웃음을 참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미리안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어찌 이리 제대로 된 놈이 없냐그래.
"실례야."
그의 혼잣말을 들은 로쏘가 삐진 척 입술을 삐죽이며 굵은 목에 팔을 감았다.
"나만큼 제대로 된 사람이 레지먼트 내의 어디에 있다는 거야?"
"...그 말, 베른하르트와 눈을 마주치면서 할 수 있나?"
"못할 건 뭐람."
"진심이냐? 다음 번에 리즈와 베른하르트가 돌아오면 시킨다?"
"그러시든가요, 폐하. 설마 베른하르트가 날 해방검으로 썰어 죽이는 걸 그냥 보고 있지는 않으시겠죠?"
"네 구업口業을 왜 내가 막아줘야 하나."
"대가를 지불하고 있으니까."
마치 '선불이에요'라고 말하듯, 부드럽게 시작하여 농밀하게 끝난 키스 끝에, 로쏘가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당신 동생이 태어나서 30년 동안 한 번도 마수에게 납치되지 않은 채 지낼 수 있었던 게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해?"
"협조에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나와 결혼을...음."
"...뭐, 무녀가 네 번이나 납치된 건 자업자득이고, 알다시피. 왕세제에게 구출되는 휫수가 늘어날 때마다 리즈가 열받아 한 걸 생각하면, 이번에 한 번 실력 발휘를 하게 해주는 것도 좋겠지."
"리즈는 그렇다 치더라도, 베른하르트가..."
"진짜, 내가 앞에 있는데 자꾸 딴 생각 할 거야?"
로쏘가 미리안의 목을 다시 한 번 끌어안았다. 논리나 화술이 아닌 방법으로 대화를 끊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안다면, 미리안은 당장에 떨치고 일어나 팔초의 우보스가 지배하는 흑호반黑湖畔까지 한달음에 달려갈 게 틀림없었으니까. 미안해, 베른하르트 도련님. 미리안의 어깨 너머로, 로쏘가 씨익- 사람나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데이터가 나오지 않는단 말야. 데이터가 나와야 당신 약도 만들지. 어차피 리즈가 늦지 않게 구해줄 거야. 적당히 당하고 돌아와서 새로운 데이터 내놓으면 또 새 약 지어줄게. 그래서 나도 재미있고 당신도 오래 살고 리즈도 행복하고 미리안도 안심하고 너윈나윈우리윈윈하자구, OK?
물론, 그 일방적이고 제멋대로인 제의는 우보스의 둥지에서 깨어난 베른하르트에게도, 지금껏 자신의 몸을 바쳐 지켜온 연인의 정조가 위험에 빠지기 전에 찾으려고 훅호반을 이잡듯이 뒤지고 있는 리즈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쏘가 알 바는 아니었지만.
-....계속?;
2013/04/06
친구가 적은 것에 불만은 없었다. 탐정이라는 직업상 아는 사람은 많지만, 그건 '지인'이었다. 안면을 트고 지내다가 가끔 필요에 의해 대가를 지불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대상. '친구'는 그런 편리한 게 아니었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예정도 없는 시간을 빼앗아 가고, 마치 그럴 권리가 있는 것처럼 남의 일을 시시콜콜 캐묻고, 마치 이쪽이 어린애나 되는 것처럼 판단을 의심하거나 결정을 부정하고, 마치 자기가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식사나 수면, 치료와 휴식을 강요한다. 그 모든 행위에 뭔가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우린 친구잖아."라는 한 마디 말로 치받아 버리는 뻔뻔스러운 종자들이 바로 '친구'라는 것들이었다. 있을 때는 참으로 지긋지긋하여 어서 빨리 황야나 연구소, 가게나 저택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그들이,
"아...죽겠다..."
이렇게 애타게 그리울 때가 오다니, 과연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브라우닝은 족쇄라도 달린 것처럼 무거운 팔을 힘들게 들어올렸다. 절그렁- 정정. 정말 족쇄가 달려 있었다. 그의 오른쪽 손목에 단단히 물린 두툼하고 널찍한 쇠띠에 이어진 쇠사슬은 움직일 때마다 절그렁 절그렁 묵직한 소리를 냈다. 아까 어떻게든 풀어 보려고, 최소한 사슬을 끊고 탈출하려고 시도했을 때, 그 요란한 소리 때문에 문밖에 서 있던 보초에게 들켜 호되게 보디블로를 당했다. 얼굴을 치지 않은 것은, 허락도 없이 손을 댄 것을 언더보스에게 들키면 제놈이 먼저 죽을 줄을 알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침대에 누워 있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 하긴, 이제 다른 걸 할 기력도 없지만.
브라우닝은 한숨을 쉬었다. 이거야 원,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도 유분수지. 이런 짓은 네가 새장에 넣어 기른다는 마녀에게나 하란 말이다. 나는 네 애완동물도 아니고, 부하도, 소유물도, 적도 아니잖나. 친구는 더더구나 아닌, 그저 질긴 악연으로 어쩌다 얼굴이나 마주하는 지인일뿐인데.
브라우닝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고, 협착될 정도로 부어오른 기도가 아파 이맛살을 찌푸리다가, 그렇지 않아도 지끈거리던 편두통이 심해져 그나마 자유로운 왼손을 들어올렸다가, 노련한 암살자의 비수처럼 관절 사이를 찔러드는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가, 협착될 정도로 부어오른 기도가 아파...이하생략.
미치겠군. 가까스로 순환하는 고통에서 벗어난 브라우닝이 조심스럽게 몸을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고작 감기가 아닌가. 물론 흠씬 얻어터진 다음 장대비에 쫄딱 맞아 돌아온 사무실에서 난방을 켜는 것도 잊고 기절하듯 잠이 든 끝에 걸린 감기인 만큼 독감이라도 불러도 좋겠지만, 그래도 감기는 감기다. 죽을병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고통스럽다니, 게다가...
-살아 있나? 허락도 없이 돌아가다니 무례했어.
-...그건 달아났...다고 하는 걸세...
-돌아가든 달아나든 해도 좋다고 허락한 적 없어...그런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내 목소리...가 어때서...쿨럭...
-기침도 하고 있잖아. 설마 어제 그 비를 맞은 거야?
-아, 자네...사무실에 우산...없더라고...
-빌어먹을. 거기 꼼짝 말고 그대로 있어. 또 달아나면 죽여버린다.
-그 말...요즘 참 자주...듣는군...
-듣기 싫으니까 닥치고...
뜨거운 물이나 마시고 있어. 말린 오징어만도 못한 새끼 - 라고 말했던 것 같다. 제정신으로 들었다면 네가 이계의 어류를 부리면 부렸지 왜 사람을 어류 취급하느냐고 항의한 끝에 오징어는 어류가 아니라 두족류다 병시나 소리를 들으며 얻어맞았겠지. 하지만 브라우닝은 통화가 끝나기도 전에 기절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지붕까지 달린 호화로운 침대에, 오른손은 침대 기둥에 묶인 쇠사슬로 연결되어, 탈출을 시도하면 패지는 말고 말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제입으로 지껄이는 어리석)은 보초가 문밖에 버티고 선 방에 갇혀,
"깼다고?"
벌컥! 쾅! 난폭하게 문을 연 코브가, 그보다 더 난폭하게 문을 닫으며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왔다.
"조용히...머리 울려..."
"너나 조용히 해, 멍청아. 목 나을 때까지 닥치고 있어. 끽끽대는 소리 듣기 싫으니까."
"싫으면, 돌아가게...윽!"
"닥치랬지."
코브가 침대 가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체중과 중력의 힘을 빌려 브라우닝의 입을 한 손으로 짓눌렀다. 환자한테 무슨 짓이야! 브라우닝은 그야말로 뭍에 끌려나온 물고기처럼 퍼득거 - 리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아팠다. 온몸이, 안팎으로, 어디 한 군데 빠지지 않고, 아팠다.
"...울긴 왜 우냐."
한손으로 브라우닝의 입을 막은 채 다른 손으로 상의 주머니를 뒤지던 코브가 흠칫 놀라더니,
"씨발, 그렇게 아프면 병원에 갔어야지...아, 인형의사는 출장 갔댔지."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필이면 수틀리면 자신을 불러들여 흠씬 두들겨 패기를 그저께처럼 하는 망나니 앞에서 아프다고 눈물을 보인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제 대체 뭘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럼 다른 병원이라도 가든가, 누구 불러서 약이라도 사오라고 했어야지. 병신 같이 혼자 앓고 있냐. 친구도 없는 모자란 놈."
아마 걱정이 공포로 발전하지 않는 것은, 코브의 난폭하고 천박한 어조에 어린 감정 때문일 것이다. 마치 자신만은 이 강하고도 여린 탐정을 해치지 않을 것처럼, 브라우닝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부드럽게 턱 아래로 쓸어내린 코브가,
"자업자득이야."
"무...슨....읍..."
주머니에서 꺼낸 유리병에 든 액체를 단숨에 마시더니, 그대로 브라우닝에게 입을 맞췄다. 고열로 거끌거끌해진 입술을 가르고 파고든 혀가, 머금고 있던 액체를 그대로 브라우닝의 부어오른 식도로 흘려넣었다.
"먹고 나면 졸릴 거랬어. 자라."
"...딸기...맛이군..."
"쓴 거 못 먹잖아. 커피도 아메리카노 못 마시는 주제에 잘난 척은."
털썩. 코브가 그대로 브라우닝 옆에 누웠다. 절그렁. 매트리스가 흔들리며 쇠사슬이 맑은 소리로 울었다.
"뭐...하는..."
"닥치랬잖아. 듣기 싫다고."
제법 위협적인 목소리로 으르렁거린 코브가 브라우닝의 몸에 팔을 둘렀다.
"그 진통제, 먹고 나면 졸릴 거랬어. 나도 좀 먹었으니까, 한잠 자고 갈 거다. 저번처럼 허락도 없이 돌아갈 생각하지 마."
그건 도망친 거였다니까. 말하지 않은 것은 닥치라는 위협 때문이 아니라 순식간에 퍼지는 졸음 때문이었다. 약효 죽이는군. 브라우닝은 자신쪽으로 기운 코브의 이마에 마주 이마를 댔다. 한잠 자고 나면 정말로 감기가 나아서...달아날 수 있으면...좋겠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브라우닝의 몸을, 코브의 팔이 다시 한 번 고쳐 안았다. 웃기지 마. 돌아가는 것도 달아나는 것도 아니야. 내가 잠깐 풀어주는 거다. 그러니까 아프지 말라고, 내 것인 주제에, 내 허락도 없이.
-하하, 아저씨는 이미 어른이라서 더 크지 않는단다. 질문을 많이하면 키가 큰다고 그러니?
-응, 엄마가. 옛날에는 내가 막 물어보면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는데, 요새는 시끄럽다고 화를 내요.
-저런...그래서 집에 안 가고 여기 있는 거니?
-아니. 나 엄마가 나한테 화내는 건 괜찮아요. 근데 아빠랑 싸우면 엄마가 울어서 싫어.
-...엄마랑 아빠가 자주 싸우니?
-요즘. 아빠가 뭔가 잘못했대요. 근데 엄마한테 숨겼대. 그래서 엄마가 화냈어요. 아빠는 바보야. 엄마는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하면 다 용서해 주는데, 엄마한테 비밀로 하고 거짓말하고 화내고 그래...
-흠...프리드리히, 이거 쓰렴.
-나 안...울어요...
-그래그래, 콧물이라도 닦아. 추운데 오래 있어서 감기 걸린 것 같구나.
-안 추운데...고마워요, 아저씨.
-음...날이 추운데, 집에 안 갈 거니?
-엄마랑 아빠가 아직 싸우고 있을 거에요.
-그렇구나...프리드리히, 이리 오겠니?
-아저씨 무릎 위에 앉으라구요? 나 애기 아닌데.
-춥잖니? 아저씨도 코트를 벗어주면 추울 거 같으니까, 잠깐 안겨 있으렴.
-...코트 벗으면 진짜 팔이 보여서 그래요?
-내 팔은 지금 네가 보는 이건데? 왜 내 진짜 팔이 있다고 생각하니?
-아저씨 얼굴 하나도 안 보여요.
-...그러니?
-슬랜더맨은요, 얼굴이 안 보이고 팔이 엄청 긴 남자에요. 혼자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잡아간댔어.
-그럼 무서운 괴물이잖니? 왜 나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지 않았지?
-내가 잡혀가면, 엄마랑 아빠가 반성하고 안 싸울지도 모르잖아요. 우리가 싸워서 프리츠가 사라졌어, 그러니까 싸우지 말자, 하고.
-...
-어? 이상하다? 아저씨, 얼굴이 보여요.
-그러니...
-응. 근데 이상하다? 아저씨, 나 알아요?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우리 아빠 친구예요?
-아니...그렇지는 않단다.
-근데 왜 어디서 본 거 같지? 꼭...어...아빠? 아니다...어...나? 내 얼굴인가?
-프리츠...
-이상하다...근데 아저씨, 울지 마요. 아저씨가 우니까 꼭 내가 우는 거 같잖아...울지 마요. 내가 안아줄게요.
-...고맙구나...
-...아저씨 지금 등에 붙인 거 문어예요? 그거 팔 아니고 촉수?
-인사하렴. 우보스라고 한단다.
-우와. 눈이 여덟 개나 되네? 짱짱 신기하다. 그럼 아저씨 진짜 슬랜더맨 아니구나?
-글쎄...어쩌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에이, 그게 뭐야...하암...
-졸리니? 잠깐 눈 좀 붙이거라. 깨어날 때까지,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같이 있어 줄게.
-응...깨어날 때까지...있어 줘야 해요...약속...
-그래, 약속...
-어기면 안돼...쫓아가셔....딱콩...해줄 거야...
"...라고 했는데 약속을 어겼단 말이지."
프리드리히는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은 이마를 가볍게 쓸어올렸다. 어린 날의 추억이 서린 놀이터는 얼마 전 폭격으로 움푹 파인 크레이터가 되어 있었다. 공습과 폭격으로 엉망진창이 된 거리에 더없이 어울리는 모습이었고, 이 거리에서만 30년 가까이 살아온 프리드리히는 아주 잠깐,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의 유년기를 위해 묵념했다.
자, 그러면 슬슬 가 보실까. 발치에 놓았던 배낭을 등에 메고, 철컥- 전자라이플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아무리 소강상태라지만, 언제 적의 습격이 있을지 모르니 조심, 또 조심.
방향은, 마지막으로 슬랜더맨의 소문이 들려온 북쪽으로 정했다.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다시 만날 때까지 찾아다니면 그만이다. 이 프리드리히, 한 번 한다고 했으면 하는 상남자라는 걸 보여줄 테니까. 세상 어디 있든지 반드시 찾아내고 말 거야. 이마 씻고 기다려요, 베른하르트!
-END.
2013/04/11
동굴곰은 망원동(望遠洞)에 살았다. 곧장 한강(漢江) 북변에 닿으면, 창가에 오래된 PC가 놓여 있고, PC를 향해 두 개의 키보드와 마우스를 벌렸는데, 키보드들이 밤낮없는 연성과 게임에 성할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동굴곰은 레지조만 좋아하고, 그의 아바타가 근근이 다른 조를 돌려 인벤에 젬칠을 했다.
하루는 그 아바타가 매우 빈곤하여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베른하드, 프리드리히, 리즈로 덱을 짜니, 닼룸은 돌려 무엇합니까?"
동굴곰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그들의 스킬과 이벤트 카드를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그럼 루카라도 데려가지 않으시나요?"
"특카가 나오면 리즈에게 주어 겁화연옥을 써야 하지 않겠소?
"그럼 C.C.라도 데려가지 않으시나요?"
"첫 턴은 베른하드를 세워 기지를 써야 하지 않겠소?"
아바타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밤낮으로 다크룸을 돌리더니 기껏 '하지 않겠소?' 소리만 배웠단 말씀이오? 팔엽도 못 쓴다, 안티셉틱.F도 못 쓴다면, 코브라도 데려가 배거즈 뱅큇이라도 못 여시나요?"
동굴곰은 쓰던 연성을 멈추고 일어나면서,
"아깝다. 내가 당초 베른하드 구첩액자를 기약하기를, 이제 육첩인 걸..."
하고 휙 로그아웃해 버렸다.
-계속 없음.
2013/04/18
모월 모일.
오늘도 바인더의 여자애들은 - 지사자 포함! - 시끄럽다. 한 번만 안아 보자느니 볼이 포동포동하다느니 촉수랑 코뽀를 했다느니 먹을 거 줘도 되냐느니 꺄악 나한테 윙크했어! 너무 귀여워 어쩌면 좋아!! 라느니...흠흠. 도대체 그 조그만 문어가 뭐 그리 예쁘다는 건지 모르겠다. 정작 우보스는 아직 코빼기도 못 봤잖아. 자기네 루드 전용무기 취향 나쁘다는 이웃집 따님 성토에 동의하는 것도 봤는데.
뭐 아무튼, 베른하르트 녀석만 꽃밭의 망아지 마냥 곤란한 얼굴로 우보찡 끌어안고 바인더 거실에 포위되어 있는 것도 눈꼴시니까, 나도 한 마리 데려와야겠다. 같은 문어는 너무 속보이고, 비실체는 다루기 어려울 것 같고, 인간형이나 생물형이 좋겠지? 지시자가 오늘은 어디로 퀘스트를 가려나.
모월 모일.
토끼를 주웠다. 백강도 아니고 버섯도 아니고 처음 보는 까맣고 조그만 토끼다. 지시자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귀여우니 키워도 된다고 했다. 이름은 알토깽이라 부르기로 했다. 바인더의 여자아이들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귀엽다며 서로 안아보자고 난리다. 베른하르트와 우보찡은 겨우 자기네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큭큭큭. 내가 이겼다.
추가.
토끼는 채식동물이다. 종이는 풀이요 연필은 나무로다.
모월 모일.
알토깽이가 크레니히의 책을 죄다 쏠아놓았다. 화가 난 심연이 먹어치우겠다고 쫓아다니는 바람에 서재가 엉망이 됐다. 베른하르트가 우보찡을 심연에 집어던져 배탈이 나게 한 덕분에 살았다. 지시자가 서재를 다 치울 때까지는 저녁밥을 안 주겠다고 했다.
배고프다. 토끼라도 구워먹을까.
모월 모일.
이 자식은 토끼가 아니다. 돼지다. 귀가 길고 털이 북실하고 앞니가 발달한 돼지가 틀림없다.
모월 모일.
야생의 루드가, 한 번만 더 정원에 들어와서 꽃을 먹어치우면 토끼가 아니라 토끼 할아버지라도 뼈가 드러날 때까지 나인캣테일로 후려치겠다고 선언했다가, 따님에게 남의 집 사랑스러운 네발모피동물을 괴롭힐 시간이 있으면 야생의 탐정이라도 잡으러 가지 그러냐는 비아냥을 들었다. 우리집 바인더에 루드가 없어 따님은 야생의 루드에게 자비가 없다.
기왕이면 독당근이나 여우장갑이라도 먹고 배탈이 나면 좋았을 것을. 한 번 혼쭐이 나야 다시는 안 그럴 건데.
모월 모일.
알토깽이가 아프다! 주는 밥도 안 먹고 뛰어다니지도 않고 빈입만 오물오물하고 있다. 우보찡이 옆구리를 찔렀는데 촉수를 물리지 않았다!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없다. 의사한테 보여야겠다!
추가.
돌팔이 워켄놈이 자기는 인형 전문이라고 알토깽이를 인형으로 만들면 봐주겠다고 했다. 한 대 칠랬더니 그집 딸래미들이 하나는 내 다리를 걸고 하나는 내 머리를 치려고 했다. 맥스가 카운터가드를 걸어줘서 살았다. 저놈의 스킬은 아무리 봐도 방어가 아니라 정신공격이다.
아참, 이럴 때가 아니지. 의사! 우리 알토깽이 의사!!!!
모월 모일.
알토깽이가 건강해졌다! 다 나가 있으래서 문틈으로 보느라 잘 안 보였지만, 따님이랑 다른 따님들이 둘러싸고 왼쪽오른쪽왼쪽오른쪽메이저마이너리버스드림데레데레츤데얀데떡떡떡 같이 들리는 주문을 외우더니 곧 알토깽이가 밥달라 떡떡대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따님은 굉장하다. 성녀님의 권능인가?!
추가.
따님이, 토끼한테 자꾸 사약을 주지 말란다. 소화불량 걸린다고.
뭐야, 너무 쳐묵쳐묵해서 소화불량 걸렸던 건가?
사람 걱정하게 하고 있어. 이 잘 때만 사랑스러운 모피동물이...
모월 모일.
알토깽이는 이형생물이다. 케이오시움으로 위장에 블랙홀을 박고 이빨에 장미칼을 장착한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못 먹는 게 없을 리가 없다.
모월 모일.
더는 종이와 연필이 없어 쓸 수가 없다. 옷자락에 피로 적어야 하나?
범인은 알토...
(일기장의 다음 페이지는 뭉툭한 이빨로 갉아먹은 듯한 흔적만 남아 있다.)
2013/04/20
"베른! 이거 스티커 사진이라는 거래. 신기하지! 신기하지!"
"그 나이 먹도록 애 같은 네가 더 신기하다만."
"에이, 노친네처럼 그러지 말고~"
"..."
"어어, 칼 집어넣으시고. 지시자가 찍는 법 가르쳐 줬어. 우리도 찍자, 응?"
"이런 걸 찍어서 뭐하게."
"뭐하긴, 기념이잖아. 베른 하나, 나 하나. 아니다, 칼집에 붙일 거니까 난 두 개."
"그런 걸 왜 칼집에 붙이나. 보기 숭하게."
"그래야, 또 죽어서 다시 만나도 이번에는 우리가 쌍둥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 수 있잖아."
"..."
"응? 베른, 찍자~"
"...매달리지 마라. 무겁다."
"베에르은~"
"안 귀여우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고...알았다. 어떻게 하면 되나?"
"역시 들어줄 줄 알았어! 자, 그럼 여기 서서, 저쪽 보고, 손, 그 손은 이쪽. 나 노려보지 말고 저쪽 보라니까."
"꼭 이 포즈로 찍어야 하나?"
"응! 거울에 비친 것 같아서 쌍둥이라는 게 확실하잖아!"
"...알았다."
"자, 찍습니다. 웃어, 베른. 웃으라구!"
"무리한 요구 하지 마라."
나는 너처럼 강하지 못하니까, 너를 다시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앞에서 웃을 수 없다. 그러니 프리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하련다. 지금 잡은 이 손을 놓지 않겠다. 두 번 다시, 절대로.
-End.
2013/04/29
-길을 잃었다면 하늘을 올려다보며 7개의 이름을 불러요 너는 혼자가 아니야~
본방은 아니지만 드레스 리허설이라 그런지 무대 위의 소년들은 본방이나 다름없이 진지하게 빛났다. 노래했다, 춤췄다, 공연했다, 상황에 맞는 그 어떤 동사보다도 이 순간의 소년들에게는 '빛났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이야, 다들 반짝반짝하네."
그 느낌은 베른하르트 혼자만 받은 것이 아닌지, 등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른하르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또 늦었냐."
"쏘리쏘리~ 그래도 본방 전에 왔잖아. 우린 오늘 리허설 안한다며."
"그러게, 무슨 생각인지."
베른하르트는 내심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무대 건너편을 보았다. 루카 사장이 나이를 이유로 은퇴를 선언한 뒤, 성유기획의 차기 사장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각자 전담하는 유닛의 이번 시즌 성과를 봐서 세 명의 치프 프로듀서 중 한 명이 될 거라는 추측이 대세였지만, 어쩌면 사장의 양녀인 파르모나 그녀의 약혼자인 아수라, 혹은 최대주주인 볼랜드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들이나 리즈, 마르세우스, CC 등 차기사장으로 손꼽히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개성이 강하다 보니, 다들 누가 사장이 되어 운영방침이 어떻게 바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할 필요 있나? 우린 그냥 열심히 노래하기만 하면 되잖아."
"그건 그렇다만..."
"저놈들도 오늘 1위 확실하다고 하고 하니까 말야."
쌍둥이 동생 프리드리히가 무대 위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소년들을 가리켰다. Regiment Boys는 최근 한창 떠오르는 아이돌 그룹으로, 베른하르트와 프리드리히가 속한 U-boss - 10년 넘게 꾸준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3인 밴드였다 - 와 같이 리즈가 프로듀싱하는 스타 유닛이었다. 이대로 RB의 인기가 유지되면 리즈가 차기 사장이 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라는 게 기획사 안팎의 중론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 리즈는 U-boss의 리허설 예정을 알려주지 않았고, 무대 저편에서 밴드 멤버인 아치볼드와 둘이서 뭔가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그게 딱히 이상한 건 아니지만, 계속 이쪽을 흘끗흘끗 보길래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나? 그쪽으로 갈까?' 손짓으로 물어보았지만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도 자기네들끼리 키득키득 웃는 모양새가 심히 수상하고도 불길한 것이다.
"베른."
"왜, 프리츠."
"쟤네 또 무슨 꿍꿍이야?"
역시 쌍둥이라 그럴까. 똑같은 것을 느낀 듯 프리드리히가 의심스럽게 무대 저편을 노려보았다. 그런 동생의 공감이 고맙기는 하나,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인지라 베른하르트는 그저 한숨을 쉴 따름이었다.
"나도 궁금하다."
"저놈들이, 이 중요한 시기에...어라? 저쪽 오라는데? 가도 괜찮은 건가?"
"그러니까 나도 궁금하다고."
그동안 발상이 어디로 튕지 모르는 재기발랄한 연하의 프로듀서와 행동력의 탁월함과 상식의 박약함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x친구 멤버 사이에서 치이고 갈린 생존본능은 가지 말라고, 차라리 이 자리에서 배를 잡고 쓰러지며 "배가! 아기! 우리 아기가 나올 것 같아요!"라도 외치라고 강요하고 있었지만 - 뭔가 이상하다면, 저 두 사람에게 물든 거다. 틀림없다. 의심하지 마라 - 프리드리히가 벌써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떤 지옥도가 펼쳐지더라도 동생 혼자 보낼 생각은 결코 없는 베른하르트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 무대 뒤쪽을 가로질렀다.
-들리나요? 봐요, 가슴의 소리 두근두근 설렌다구요!
RB의 최근 히트곡 한 소절이 마치 지금 기분 같아서, 베른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저 녀석들, 참. 처음 리즈가 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을 데려왔을 때는 저 놈 저게 드디어 미쳤구나 싶을 정도로 사고뭉치 비행소년들이었다. 그러던 아이들이 진심이 담긴 보살핌과 철저한 훈련을 거쳐 저만큼 빛나는 보석들로 연마된 것이다. 금의환향한 조카를 보는 삼촌의 심정이 이럴까.
"...지금 뭐라고?"
그러니까 그 삼촌에게, 아무리 조카들이 이쁘고 사랑스럽고 기특해도,
"설마 노래 모르는 거 아니지? 맨날 같이 연습했잖아."
리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그 가락을 맞춰 아치볼드가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인가.
"난 제드 파트라면 완벽하게 소화 가능. 프리드리히, 저번에 아이작 파트 할 수 있다고 했었지?"
"미쳤냐? 회식 뒷풀이 가면 한댔지 누가 저 지랄맞게 복잡한 스텝을 무대에서 밟아? 그것도 본방에? 니네 단체로 약빨았어?"
"프리츠. 말 조심해라."
"에이씨, 베른. 지금 꼰대질 할 때야? 이 자식들이 우리더러 RB 춤을 추라잖아!"
"나도 출 건데?"
"닥쳐, 아치볼드. 확 마이크를 후장에..."
"리리."
"아오~ 미치겠네, 진짜."
형이 엄숙한 목소리로 제일 싫어하는 별명을 부를 때는 절대 거역하면 안된다는 가르침이 뼛속까지 스며든 프리드리히가 짧게 깎은 코코아색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을 냈다.
"하여간 난 안 해, 못 해. 베른도 못한다고 해!"
"좀 진정해라, 프리츠."
"진정할 일이 따로 있지! 베른, 설마 에바리스트 파트가 제일 쉽다고 안심하고 있는 거 아니지?"
"아니다. 대체 언제부터 내가 그 파트를 한다고 정한 거냐?"
"지금 프리드리히가 정했네."
리즈가 싱글싱글 웃으며 얄밉게 톡 끼어들었다.
"이야, 과연 우리 기획사 최고참들. 7명 스텝을 셋이서 밟는데 딱 맞게 포지션 나눠주네."
"리즈."
베른하르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연하의, 그리고 그보다 8cm 작은 프로듀서를 노려보았다. 평소 근엄하고 중후한 성품인 만큼 이런 식으로 반감을 표시할 때는 리즈는 물론 CC나 마르세우스, 루카 사장마저도 그에게 한 수 접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 베른."
하지만 리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때 '무대를 불사르는'이라고 묘사되던 환한 웃음을 떠올리며 조금 높은 곳의 마른 어깨를 두드렸다.
"약속했지? 뭐든지 원하는 거 들어준다고."
"..."
"베른? 너도 같이 약빨았어? 이 미친놈한테 뭘 믿고 그런 약속을 해?!"
"진정하라니까, 프리츠. 리즈, 그건..."
"들어줄 거지?"
"..."
베른하르트는 다시 한 번, 자기가 대체 왜 이 제멋대로에 안하무인에 저돌적이고 기분파에다 뒤끝 쩔어주는, 한 마디로 천재적인 락커에다 천재적인 기획력만 아니었다면 애저녁에 연예계에서 매장되고도 남았을 연하의 남자와 사귀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세상에 어떤 프로듀서가, 사장 자리를 거머쥘 신박한 이벤트 기획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영감을 얻게 해줘, 나의 여신, 응? 어려운 거 아니야, 롤플레잉 알지? 그래, 역할극. 신선한 상황이 필요하다고. 일단 내가 의사할께 자기가 환자, 싫어? 그럼 내가 경찰할께 자기가 소매치기, 그것도 싫어? 아, 진짜 협조할 생각 있긴 한 거야? 나 사랑하기는 하냐고! 따위 말도 안되는 강짜를 부린 끝에 '대신 뭐든지 들어준다'는 약속을 얻어내는가 말이다.
"오, RB 끝났다. 다다음이 U-boss 순서니까 빨리 준비해."
"옷부터 갈아입자, 베른하르트, 프리드리히."
"뭐? 의상수배도 끝났단 말야? 야, 이 자식들 완전 고의범이네? 안되겠다, 베른하르트. 우리 확 때려치고..."
"쫄리냐?"
"뭐? 아치볼드 너 지금 뭐랬어?"
"쫄리면 뒈지시든가. 오늘 무대 실황, 방글동에서 페이지뷰 백만, 좋아요 50만 넘는다는데 내 비장의 생떼밀리옹 프로미에 그랑 크뤼 건다. 어때?"
"오호, 해보자고? 좋아, 그 내기 받아들이지!"
포기가 빠른 건지, 분위기를 잘 타는 건지, 프리드리히는 어느새 아치볼드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침퉤퉤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군, 베른하르트는 다시 한 번 결심했다. 헤어지자. 이젠 지쳤다. 이 제멋대로인 어린 놈에게 휘둘리는 건 이제 그만...
"잘해, 베른하르트. 당신만 믿어."
리즈가 해맑게 웃으며, 뻣뻣하게 서 있는 베른하르트의 팔을 끌어당겨 피팅룸쪽으로 밀어냈다. 잘하면 상으로, 어제 해달라던 거 해줄게. 환청 같은 속삭임이 귓가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가 고막으로 녹아내렸다. 베른하르트는 한숨을 쉬며 뭔가 하얗고 반짝반짝하고 무서운 것이 기다리고 있는 피팅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헤어질 테다, 진짜로, 절대로 - 일단 오늘밤 말고 내일.
"그리고 너 바보냐? 아치볼드가 지 혼자 살겠다고 다 죽어가는 레온 두고 튄 거 기억 안 나? 애인은 뭔놈의 애인이야."
"아니요, 그게 보스...그놈은 좀 특별해서....아치볼드가 끼고 산다고...아마 알 거라고..."
"육갑한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한 시간 내로 아치볼드 놈 있는 데를 알아와. 못 알아오면 네놈부터 물고기밥이다."
"히이익- 아, 알았습니다!!!"
프라임원에서 '물고기밥'이라고 하면 수장시킨다는 은어가 아니다. 말 그대로, 언더보스가 기르는 이계의 물고기에게 던져준다는 뜻이다. 코브의 심기를 심하게 거스른 부하가 허공에서 나타난 기괴한 존재의 예리한 이빨에 바스라지는 걸 본 적 있는 부하는 새파랗게 질려, 아픈 다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코브의 거실을 뛰쳐나갔다.
"멍청한 놈."
코브는 시가를 깊이 빨아들인 뒤 가죽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앞으로 한 시간이라고 말은 했지만, 이 시가만 다 피우고 나면 내려가 볼 생각이었다. 그가 아는 아치볼드는 아무도 믿지 않는 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애인이라는 계집 - 아니, 놈이랬지, 참 - 이 정말로 특별했다면 데리고 사라졌거나 이쪽에서 찾지 못하게 잘 숨겼겠지. 저 멍청한 부하놈이 잡아왔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놈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증거인 것이다. 남자 하나 잘못 만난 죄밖에 없는 애꿎은 민간인이 물고기밥으로나 써먹을 부하놈들 손에 만신창이가 되기 전에 적당히 살려서 내보내야...
"지금 가 보는 게 좋을 걸."
"뭐?!"
코브는 그로써는 드물게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가 앉은 커다란 소파의 등받이 너머, 푹신한 방석과 큼직한 쿠션을 잔뜩 놓아 만든 둥지처럼 아늑한 자리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마른풀색의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고, 포도주빛 망토 자락 사이로 붕대를 감은 여위고 창백한 팔다리가 내보인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은 흡사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 같았다.
"그거 나한테 한 말이냐?"
"응."
마치 복화술사의 인형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담담하게 말하는 소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하긴, 어차피 본다 해도 초첨이 흐린 호박색 눈동자로 코브에게, 그리고 그녀 자신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것을 응시하고 있겠지만.
세간의 소문과 달리, 프라임원의 언더보스는 마녀를 기르고 있지 않았다. 코브와 이블린의 관계는 주군과 부하, 주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그 어느 것과도 달랐다. 묻는 사람도 없었지만, 만약 누군가에게 굳이 대답을 해줘야 한다면 무심한 집주인과 뻔뻔한 길냥이 같은 관계, 라고 코브는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이 진기한 생물이 라이벌의 손에 들어가 자신을 겨누는 화살촉이 되는 것이나, 멍청한 호사가의 손에 들어가 그 가냘픈 아름다움이 훼손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블린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강제하거나, 혹은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았다. 코브의 거처에 눌러앉은 것이 이블린이 머물기를 선택한 결과인지, 떠나기를 선택하지 않은 결과인지 궁금해한 적도 없었다. 그저 고양이처럼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인간에게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존재에게 그의 사적인 공간과 시간을 나누어 주었을 뿐.
"무슨 또 재수없는 소리를 하려고?"
"늦었어."
"뭐?"
코브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블린이 먼저 그에게 말을 건네는 일은 참으로 드물었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이해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결과적으로 어긋난 적도 한 번도 없었다. 그야말로 불길하기 이를 데 없는 마녀의 예언.
"서둘러. 아니면 후회할 거야."
"빌어먹을."
대체 아래에서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코브는 피우던 시가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 - 불이라도 났을 때 저 생물이 살기 위해 불길을 잡으려고 노력하리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 벌떡 일어났다. 다급히 뛰쳐나가는 언더보스의 뒤에서, 쾅! 거세게 닫힌 문이 부서져라 비명을 질렀다. 그 삐걱거리는 신음에 맞춰, 마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Ask her to do me this courtesy,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And ask for a like favour from me,
And then she'll be a true love of mine.
"야, 혀 깨문다! 잡아!!"
"뭐라도 물려! 씨발, 이 새끼 이대로 죽으면 우린 물고기밥이라고!"
"아얏! 날 물었어! 썅!!"
"야! 얌마! 진짜로 치면 어떻게 하냐! 기절했잖아!"
멍청한 놈들은 끝까지 멍청해서, 아래층의 창고 겸 감옥 겸 고문실의 문이 칠칠맞지 못하게도 반쯤 열려 있었다. 아, 그래. 시가 한 대 피우고 내려왔으면 벌써 늦었겠군. 고작 이런 일로 후회할 거라는 둥 겁줘서 보냈단 말이지? 두고 보자, 마녀야. 코브는 내심 짜증을 내며, 뛰어오던 걸음을 늦춰 천천히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씨발, 야, 물통에 쳐넣어! 시간 없으니까 빨랑 깨워서...으악! 보, 보스!"
"보스?!"
아까 보고하러 왔던 부하가 문간에 선 코브를 발견하고 사색이 되었다. 한 남자의 어깨와 발을 각각 잡고 들어올리던 부하 둘도 화들짝 놀라 손을 놓았고, 덕분에 바닥에 내팽겨쳐진 남자가 엎어진 채 희미하게 신음했다. 여윈 몸에 걸린 채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셔츠와 그 아래 하얀 피부에 더욱 두드러지는 붉은 채찍 자국, 그리고 반쯤 벗겨진 바지와 찢어진 브리프.
"너네 지금 뭐 하냐?"
"예? 아, 그, 아치볼드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려고..."
"저놈 바지를 벗겨서?"
문간에 삐딱하게 기대 선 코브가 느긋한 어조로 물었다. 그가 세 층 위의 거처에서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 내려왔다는 건 알지 못했지만, 부하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육식동물이나 다름없는 단순하고도 굵직한 본능이 위험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 그게, 보스, 보스가 한 시간 주신다고 해서..."
"해서?"
"이놈이 하도 독하게 버티길래, 그, 아치볼드 놈 깔이랬으니까, 그, 저..."
"돌림빵이라도 해보려고 하셨다?"
"아, 아뇨, 그게, 즐기려고 한 게 아니고, 저, 거...저..."
"비켜."
부하들이 인기척을 느낀 갯강구처럼 후다닥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코브는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알전구 아래에서는 남자의 머리색을 알 수 없었다. 여위고 창백할 정도로 하얀 몸이 책상물림인가 생각했는데,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의외로 장신에 뼈대가 바르고 근육이 잘 발달해 있었다. 나이도 그리 어리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껏 아치볼드가 사귀었던 남자들은 대개 겨우 소년티를 벗은 젊고 낭창낭창한 청년들 - 저 레온처럼 - 이었기 때문에, 가벼운 호기심을 느낀 코브는 남자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들어올렸다. 어디, 얼굴 좀 볼...
"...야."
"예, 예? 보스?"
"아치볼드 애인이라고? 확실해?"
"예? 화, 확실합니다...야, 맞지?"
"어, 맞아...맞습니다. 아치볼드가 이놈 집에 머무는 걸 본 놈들이...보스?!"
부하들은 깜짝 놀랐다. 코브가 남자를 안아올린 것이다. 마치 걷지 못하는 마녀를 대할 때처럼 두 팔로 소중히 안고,
"으읏...아..."
"쉬이...괜찮아. 괜찮으니까, 조금만 참아...그래, 착하지..."
그 바람에 상처가 쓸린 듯 신음하는 남자를 부드럽게 달래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저 냉혹하고 비정한 Deviant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에 얼이 빠진 부하들을 내버려둔 채, 코브는 그대로 창고를 나가버렸다.
"저, 보...보스?"
"아참."
아니, 문지방을 넘어선 직후에 걸음을 멈추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마치 침을 뱉듯 한 마디 내뱉기는 했다.
"배거즈 뱅큇."
"-----!!!!!!"
영창이 끝나자마자 창고 안은 갈라진 시공의 틈새에서 쏟아진 무수한 이빨투성이의 물고기들로 가득찼다. 멍청하고도 멍청한 부하들이 산채로 아귀아귀 먹히는 소리를 뒤로 하고, 코브는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뛰어올라갔다. 지나가는 부하에게 주치의를 불러오라고 지시하고 자신의 거처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 그의 귓가에, 마녀의 희미한 노랫소리가 압생트처럼 쓰라리게 스며들었다.
When he has done and finished his work,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Ask him to come for his cambric shirt,
For then he'll be a true love of mine.
-To Be Continued...
***2013/04/24
트위터 이웃 @archbernriri님께 드리는 콥베른입니다. 키워드는 '감금된 베른', '손목에 키스'.
앞부분 썰계에 풀어놓고 뒷부분은 수위라서 블로그로 가겠다고 했는데, 양치기 소년이 되어 죄송합니다. 곰은 양을 좋아해요. 맛있습니다. 특히 일품각의 양꼬치라든가 보라달에서 먹는 양구이...넵, 뻘소리.
쓰다 보니 꽤 길어지게 되어, 나머지 반절은 차후 올리겠습니다. 수위 맞아요. 열심히 부지런히 크고 아름다운 떡을 빚고 있습니다, 이 곰 믿어주세요...(ㅌㅌㅌ)
병신새끼. 그러니까 내가 저자식들이랑 덱 짜기 싫다고 싫댔잖아. 리즈는 쯧-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침이라도 뱉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따님 - 빌어먹을 지시자 인형 - 이 질색팔색을 하며 벌을 주기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거 침 좀 뱉으면 어때서. 어차피 현실도 아닌 세계에,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원령인데.
"...리...히..."
그러니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원령이라고. 씨발, 골렘 돌주먹에 머리통 좀 부서졌다고 뭐 문젠데? 어차피 바인더로 돌아가면 멀쩡하게 살아날 거잖아. 그건 그놈 시체도 아냐. 그냥 흔적이라고! 부서지다 만 찌꺼기!!
"아오, 썅! 언제까지 청승 떨고 있을 거야? 야! 베른하르트!!!"
"선배..."
썩은 압생트처럼 흐릿한 눈깔이 리즈를 한 번 보고, 지시자를 한 번 보고,
"선배...리...리...프리...드리히...가..."
다시 자기 품에 안긴 프리드리히 - 였던 것을 본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이 당장이라도 숨넘어갈 것 같다. 지랄한다. 어차피 듀얼에서 지는 거 아니면 지시자 허락 없이 죽지도 못하는 주제에.
"야, 저거 좀 어떻게 해봐."
"..."
인형이 무표정한 머리를 살래살래 흔든다. 지 편리할 때만 벙어리 흉내야, 씨발년. 아오, 프리드리히 개새끼야. 그러니까 니 형하고 같은 덱일 때는 죽지 말라 그랬지. 망할 것. 빌어먹을. 젠장. 씨발.
리즈는 알 고 있는 - 사실 얼마 되지도 않는 - 욕을 수없이 되풀이하며, 부주의하게 쌍둥이 형의 눈앞에서 죽은 프리드리히를, 동생의 죽음을 몇 번이나 목격했으면서도 마치 처음 보는 듯 충격을 받은 베른하르트를, 그런 두 놈을 기어코 같은 덱에 넣어온 지시자를 부정하고 모욕하고 저주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리즈가 모욕하고 저주하는 것은 바로 자신자신이었다. 지금 그의 쑥색 눈동자는 온전히 지시자의 안와에 들어찬 유리구슬과 똑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마치 자식의 죽음 앞에서 비탄에 잠긴 모습 그대로 젖빛 돌이 되어 영원히 전해지게 되었다는 어머니처럼, 자신의 실수로 멸망한 고국 앞에서 울다 지쳐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공주처럼, 혈관에 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창백하게 바랜 베른하르트는 아름다우리만치 처연했다. 지시자가 보기를 바랐던 바로 그 모습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자기자신을, 리즈는 거듭 모욕하고 저주할 망정, 부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오, 썅.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다음부터는 차라리 내가 제일 먼저 죽어야지. 그래야 저 꼴을 안 보지. 그래야 베른이...
-널 위해서 울지는 않을 거야.
마치 리즈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인형이 말했다. 아니, 읽었을지도 모른다. 읽었을 것이다. Firestarter의 오른손이 불꽃을 일으키고, 칼자루를 움켜쥐고, 도약할 것처럼 무릎에 힘을 주고,
-날 위해서도 울지 않겠지.
"...빌어먹을."
입술을 깨물고, 불꽃을 꺼뜨리고, 몸에서 힘을 풀었다. 털썩, 리즈가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을, 마치 눈이 커다란 새처럼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각도까지 고개를 돌린 인형이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맞닿은 시선 너머에서, 베른하르트의 품에 안긴 프리드리히의 잔해가 서서히 재로 변하고 있었다.
-END.
"쉐리,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어요. 친한 척 이름 부르지 말아요."
매몰찬 대답에도 당신은 웃는다. 눈가에 자글자글한 잔주름은 당신이 얼마나 잘 웃는지를 말해준다. 인형은 아무리 웃어도 그런 주름이 생기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당신은, 인형은 아무리 부/서/져/도/ 곧 수/리/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부서진 인형의 팔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자기 목숨을 소중히 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해하지 말라는 설교 같은 거 듣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미소가 얼어붙는다. 말간 눈동자에 비친 보랏빛 드레스의 여자아이는, 어째서인지 울 것 같은 얼굴이다. 당신이 멋쩍게 웃으며 내민 손은 매섭게 내쳐졌다. 또 미움을 받았나. 당신이 중얼거린다. 또? 아니다. 당신은 언제나 미움을 받고 있다. 생명을 가진 자가 그 생명을 소중히 하지 않는데, 생명을 가지지 못한 인형이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닥터한테 해달라고 할 거에요. 참견쟁이 탐정 같으니!"
애써 감았던 붕대가 거칠게 뜯겨, 아직도 녹색 체액이 엉겨 붙은 파/손/부/위/가 드러나는 것을 당신은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당신은 어른이다. 짐짓 허리에 손을 얹고 메~ 혀를 내미는 어리고 유치하고 어설픈 사과를, 당신은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당신은 정말 바보다.
-END.
2013/03/21
그날 아침 레지먼트의 아침 반찬은 피클도 아니고 정말 닭인지 의심스러운 조류의 고기를 튀긴 강정도 아니고 동방의 매운 양념으로 절인 라이스 바통 케이크도 아니었어. 식당에 모인 대원들은 대부분 숟가락으로 뜬 스프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한눈을 팔며 수다를 떨고 있었지. 그들이 주목한 것은, 언제나 중대장급의 간부들이 앉아 식사하는 상석이었고, 그 가운데 입을 꾹 다물고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남자였어.
"굉장하다."
"박력이 넘치는데."
"난 중대장님 다시 봤어."
"보기 좋은데, 가끔 입으시지."
"그보다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렇게 차려입으신 거지?"
마지막 질문을 누가 했는지는 몰라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던 건 확실히. 할 수가 없었지.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레지먼트 제복도 대충 벗고 다니던 - "갑갑하다고." - 미리안이, 그의 옷장에 그런 옷도 있었나 모두가 놀랄 정도로 - 눈썰미가 좋은 몇몇은 새옷이라든가 그의 남다른 거구에 맞춘 수제라는 걸 알아보았지만 - 산뜻한 수트 차림으로 나타난 거야. 검정에 가까운 잉크색 수트는 자켓의 라펠이 다소 넓은 클래시컬한 디자인이었고, 그에 어울리는 새하얀 드레스 셔츠에 금사로 물결무늬를 넣은 조붓한 타이를 싱글노트로 매고, 심지어 소맷단 아래 드러난 커프스에는 푸른돌을 박은 커프스단추까지 꽂혀 있었어. 바짓단이 살짝 덮인 구두도 깨끗한 검은색이었지. 한 마디로 요란하게 멋을 내지는 않았지만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신사였어. 크고 작은, 새롭고 오래된 상처가 잔뜩 난 커다란 손과 박박 깎은 잉크색 머리칼, 그리고 얼굴을 1/3쯤 가린 선글라스만 아니었다면 좀 더 완벽했겠지만.
"식사 안 하십니까?"
말을 건 것은 - 역시나, 랄까 - 베른하르트였어. 다른 사람들은 미리안이 말없이 피워올리는 살기에 질리거나, 아무래도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그 살기에 찔려 죽을 거 같아서 다가가기를 포기하거나, 혹은 이것은 해로운 상황이다- 라고 판단하고 이 또한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었거든.
"음."
미리안이 목을 울렸어. 대답하기 싫다는 투가 역력했지만, 베른하르트는 포기하지 않았지. 가까이에서 보니까, 중대장의 짙은 피부에 붉은기운이 도는 게 보였거든. 목덜미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구. 도대체 미리안이 왜 이런 고난을 사서 겪는 건지, 그에게 심정적으로 마음의 빚을 늘 품고 있는 베른하르트는 심하게 신경이 쓰였지.
"앉아도 되겠습니까."
"으음."
"감사합니다."
내가 안된다고 말한 거 알아들었으면서! 미리안이 베른하르트를 노려보았어 - 아마도. 선글라스를 썼으니 시선이 보이지 않았거든. 베른하르트는 여윈 뺨을 풀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어.
"그런 옷도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음."
"오늘 비번이신 줄 알았습니다만, 어디 외출이라도 하십니까?"
"으음."
"아까부터 아무 것도 드시지 않고 계신 것 같은데..."
"어, 미안. 내가 좀 늦었지?"
갑자기 등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베른하르트는 깜짝 놀라 뒤돌아봤어. 그리고 로쏘의 - '너 지금 이 다음 대답은 음일까 으음일까 궁금하다고 생각했지?'라고 말하는 것 같은 - 환한 미소와 마주쳤지.
"로쏘 기관?"
"미안하지만 좀 비켜주겠나, 베른하르트? 미리안은 지금부터 나랑 아침 먹을 거야."
"아, 그런가?"
모든 의문이 풀렸다! 베른하르트는 계시를 받은 기분이었어. 그러면 그렇지, 로쏘야. 이 정도 고급 수트 일습이라면 판데모니움에서 조달이 가능하겠지. 그리고 레지먼트 내에서 미리안에게 하기 싫은 일을 시킬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되지만, 그 중에서도 이런 장관을 공들여 연출할 사람이라면 역시 로쏘뿐이지.
"자아, 미리안. 오래 기다렸지?"
로쏘는 두 손으로 정성껏 받쳐들고 온 쟁반을 미리안 앞에 내려놓았어. 제법 큰 쟁반에는 뚜껑을 덮은 푼주가 하나, 역시 뚜껑이 덮인 접시가 하나, 뚜껑이 덮인 머그컵이 하나 놓여 있었지. 뭐가 들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베른하르트는 냄새로 대충 짐작할 수 있었어.
"중대장님?"
베른하르트가 의아한 듯 미리안을 바라보았어.
"토마토, 싫어하시지 않았던가요?"
토마토 스프에, 토마토 샐러드, 토마토 주스. 베른하르트는 팔짱을 낀 미리안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았어. 로쏘가 미리안 맞은편에 앉아, 졸라짱쎈투명고양이처럼 웃는 얼굴을 깍지낀 손 위에 얹는 것도 보았지. 아아. 베른하르트는 조용히 일어났어. 그리고 아닌 척 이쪽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대원들에게 근엄하게 명령했지.
"다들, 식사 끝난 것 같으니 임무로 돌아가라."
"예, 옙!"
그리고 베른하르트는 마지막 대원을 따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나갔어. 미리안은 그때만큼 베른하르트가 예뻐 보인 적이 없었다지.
"식겠다, 어서 먹어. 식으면 '더' 맛없을 걸."
로쏘가 참 상냥하게도 뚱겨줬어. 식었든 뜨겁든 이 시뻘건 악마의 열매가 맛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내기는 내기였으니까, 사나이 체면에 벌칙을 피할 수는 없지. 미리안은 참으로 결연한 의지를 품고, 그의 혀와 위를 공략하기 위해 로쏘가 정성들여 제조한 식단을 내려다 보았어. 빌어먹을, 어디서 이상한 테크닉을 배워와서는...다음 번에는 절대로 지지 않겠다!
한참이 지나서야 남자가 한 마디 한다. 무릎 위로 엎어진 채 한참을 미동도 않기에 잠든 줄 알았던 마녀는, 어이가 없달까 우습달까 한심하달까 화가 난달까,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되어 남자의 뒤통수를 노려본다. 어릴 적 스승님의 서가에서 자주 보았던 바랜 양피지 색깔의 머리가 천천히 돌아가며, 푸른 문신이 새겨진 뺨을 드러낸다.
-뭘해도 안되는 날은 안돼. 진짜 기력 빠진다. 한 대 맞아 찌그러진 찐빵이 된 기분이야.
-...
마녀는 어이가 없는 것도 우스운 것도 한심한 것도 화가 나는 것도 아니다. 마녀는 당황한다. 이 남자는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이 남자는 나에게 뭘 바라는 걸까. 이 남자는 왜 한숨을 쉬는 걸까. 이 남자는 왜 이리도 지쳐 보이는 걸까. 그리고 대체...
-너, 찐빵이 뭔지는 알아?
찐빵이라는 건 뭘까. 마녀는 고개를 젓는다. 마녀 쪽을 보고 있었어도 몰랐을 미미한 움직임. 하지만 남자는 늘어뜨린 손끝에 닿은 마른풀색 머리칼이 떨리는 것으로 마녀의 대답을 알아듣는다.
-동방에서 굽는 빵이야. 하얗고, 몽실몽실하고, 안에 단팥이 들었지. 뜨거울 때 먹으면 아주 맛있어.
-...
그래서 뭐 어쩌라고. 마녀는 곤란하다. 이 남자는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먹고 싶지 않냐? 나는 말만 해도 먹고 싶어지는데. 아참, 뭔지도 모르니까 얼마나 맛있는지도 모르겠군.
-...
문득, 마녀는 변덕스러운 기분이 된다. 어쩌면 당장이라도 죽일 듯, 혹은 죽을 듯한 얼굴로 문을 박차고 들어와, 다짜고짜 무릎을 빼앗은 남자에게 사소한 복수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먹고 싶어.
-그게 얼마나 맛있냐면 말이지...뭐?
-먹고 싶어. 찐빵.
-...
갑자기 남자가 벌떡 일어난다. 마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나타났을 때처럼 난폭하게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하지만 마녀는 걱정하지 않는다. 남자는 곧 돌아올 것이다.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다고 했으니까, 서둘러 돌아올 것이다.
예감이 나빴다. 지독하게 나빴다. 로키는 서재 문을 열기 전부터 이 너머에 뭔가 나쁜 일, 지독하게 나쁜 일, 엄청나게 나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예감했다. 틀림없이 잠가 두고 나갔던 문이 심지어 닫혀 있지도 않다는 사실이 그 예감을 보증했다. 로키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한 손으로 짧지만 강력한 반격 - 방어가 아니라는 점이 참으로 로키다웠다 - 마법진을 준비하며, 다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맙소사."
눈에 보인 광경은 각오했던 것보다 더 나빴다. 쓰러진 책장이나 실험대, 바닥에 마구잡이로 쏟아진 책이나 부서진 실험도구는 괜찮았다. 언제나 남을 골탕 먹이는 마법을 연구하는 로키의 서재가 시련을 겪는 일은 드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토르?"
"꾸, 꾸엉..."
서재 한가운데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토르가 마치 달아날 기회를 놓쳤다는 듯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달아날 기회라니, 그에게는 그런 것 따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의. 토르에게는 그랬다.
"꾸엉..."
"닥치고 잠깐만 기다려 봐."
"꾸..."
토르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로키는 마법진을 그리려던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차피 일어난 일이라면 재빨리 수습해야 한다. 다행히 로키의 서재에는, 꼭 와야 하는 용건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 꼭 와야 하는 용건이 있더라도 문밖에 방해하지 말라는 팻말을 걸어 둔 이상 먼저 노크를 할 것이다. 아참, 팻말을 걸어야지. 어디 있더라...없었지. 그럼 만들어야겠군.
간단한 문구가 써진 팻말을 만드는 마법은 아스가르드 제일의 마법사에게는 손가락을 튀기는 것처럼 손쉬운 일이었다. 시전자의 심기를 그대로 반영한 <건드리면 뭅니다>라는 경고가 유려한 룬 문자로 써진 팻말을 문밖에 걸고 문을 잠근 로키는,
"아무 거나 손대지 마!!!"
돌아서자마자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꾸엉?!!!"
땅에 떨어진 플라스크를 어설프게 집어 들던 토르가 화들짝 놀랐다. 플라스크는 바닥에 떨어졌고, 쨍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고, 안에 들어 있던 겨울의 정수가 사방으로 튀었고, 얼음 알갱이처럼 차디찬 파편에 놀란 토르가 주저앉았고, 그의 엉덩이 아래에서 어떻게 들어도 방귀로 착각할 수 없는 꽈직!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깐 기다리랬잖아, 이 미련곰퉁이야!"
"꾸어? 쿼허허..."
그 목울림은 폭소가 틀림없었다. 어떻게 이런 때에 웃을 수가 있지? 하긴 곰을 미련곰퉁이라고 불렀으니 웃기기도 하겠다. 그 대책 없는 낙천주의는 곰.이.되.어.서.도. 여전하군, 마이 브라더.
"형은 정말 골칫거리야, 토르."
"꾸엉..."
토르는, 놀랍도록 평소와 똑같이 푸르른 눈동자를 꿈뻑꿈뻑하더니, 멋쩍은 듯 굵은 목을 좌우로 돌렸다. 로키도 그리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지금의 토르는 평소보다 두 배 정도 높고 세 배 정도 넓었다. 고개를 한껏 젖히고 올려다봐야 할 만큼 높은 곳에서 커다란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창문으로 비껴드는 햇살에 이 거대한 곰의 전신을 감싼 금색 터럭이 번쩍번쩍 빛났다.
"내 짐작이 맞다면, 지금 형이 깔아뭉갠 건 실험대 위에 있던 시험관이야. 아냐, 일어나지 마. 유리 파편으로 그 두툼한 가죽에 흠집 하나 날 것 같아? 형은 지금 절망에 주저앉아 있는 게 맞아. 그 시험관에는 오늘 아침 완성한 해독제가 들어 있었단 말이야."
"꾸어엉?"
"친애하는 토르, 나는 뱀의 혀가 없다 보니 곰소리는 못 알아들어. 하지만 지금 그 소리가 '뭐?'였다고 보고, 기쁘게 대답해 줄게. 모습을 바꾸는 독의 해독제야. 형이 내 허락도 없이 널름 집어먹은 - 틀림없이 그랬을 거라고 난 확신해 - 황금사과에 주입해 두었던 거."
"꾸어...어어어어?!"
큼직한 앞발을 조붓한 주둥이 앞에 대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 사람 얼굴만큼 큰 앞발에 날카로운 네 개의 발톱이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포근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바람에 로키는 새삼 치를 떨었다 - 곰이 깜짝 놀라 주둥이를 커다랗게 벌렸다. 로키의 목을 단숨에 물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예리한 송곳니가 곰 전용 치약 - 이라는 것이 있다면 - 광고를 찍는 것처럼 하얗게 반짝반짝 빛났다.
"그래, 이제 형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알겠어?"
"꾸웅..."
토르 - 였던 거대한 금색 곰은 푸른 눈을 꿈뻑거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꼬시다. 로키는 곤란하고 화가 나는 와중에도 한 가닥 희열을 맛보았다. 어차피 독과 해독제가 모두 완성되면 토르에게 먹이려고 했었지만 - 그렇다, 로키는 벌써 몇 번이나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토르를 골탕 먹이겠다는 야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 이렇게 어설픈 형태여서는 안되었다. 독과 해독제를 만들어낸 이상으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시간과 장소를 정할 생각이었다. 그게 언제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 여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똑똑.
"로키, 아직 멀었어?"
경쾌한 노크 소리와 함께 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할.
"마법서 하나 찾는데 얼마나 걸리는 거야? 올파더가 서두르라셔."
그렇다. 로키는 지금 오딘 올파더에게 겨울의 정령에 관련된 마법서를 가져다 드려야 한다. 그리고 그 마법서는 저 미련곰퉁이가 푸짐한 엉덩이로 깔고 앉은 무수한 책더미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게다가,
"혹시 오면서 토르 못 봤어? 올파더가 기왕이면 토르도 불러 오라셨어. 누가 아까 이쪽으로 가는 걸 봤다던데."
운명은 로키의 편이 아니었다, 늘 그랬듯이. 로키는 얆다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로키? 문 열어줘. 아니면 내가 열어도 돼? 내가 문 열어도 물 거야?"
"잠깐만, 시프."
로키는 재빨리 마음을 정했다. 그리 자주 쓴 적은 없지만 익숙하게 암기하고 있는 주문을 외우며, 간단해 보이지만 실로 정교하고 복잡한 손길로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잘 가, 마이 브라더. 언젠가 다시 만나자구."
"꾸엉? 꾸엉? 꾸어어어어?!"
"로키? 이게 무슨 소리야?"
문이 덜컥 열렸다. 아니, 자물쇠가 잠긴 채로 여신의 손에 부서졌다. 뒤틀린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민 시프는,
"우와, 이게 다 무슨 난장판이야?"
쓰러진 책장이나 실험대, 바닥에 마구잡이로 쏟아진 책이나 부서진 실험도구, 그 위로 소복하게 흩날리는 금빛 먼지와 몇 가닥의 금색 터럭,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는 로키를 보았다.
"시프, 나야말로 토르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
로키가 무흠한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를 내리깔고 서글프게 말을 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내 서재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물어봐야 하거든."
"뭐? 토르가 이랬어? 왜 그랬지?"
그거야 갑자기 거대한 곰으로 변신했기 때문이지.
"일단 올파더가 말씀하신 책부터 찾자. 나머지는 나중에 정리하는 거 도와줄게."
선량한 시프, 언제나 다정하고 올곧은 여신이 성큼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군화발 아래,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시험관이 철퍽, 로키의 눈처럼 선명한 녹색 액체를 퍼뜨렸다.
"으악! 이거 뭐야? 내가 깬 거 아니지?"
"아니야, 시프. 신경 쓰지 마. 나중에 다시 만들면 되는 거니까."
그래, 토르에게 먹일 해독제 따위 나중에 다시 만들면 돼. 일단 미드가르드로 가서, 곰의 모습 그대로 날려간 토르가 어떤 꼴로 지내는지 충분히 비웃어 준 다음에 말이야.
*****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처음에는 화전민들이 긴가민가 주고받는 객쩍은 소리였다. 점차 목격자가 늘어났다. 야수나 넘어지는 나무, 낙석, 홍수로 불어난 계곡 등에서 목숨을 구원 받았다는 간증도 이어졌다.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는 아이들의 주장은 쉽게 무시되었지만. 소문은 산자락을 타고 내려와 저잣거리에 풀리고, 도시에 전해지고, 상인과 영주와 사제와 왕들의 귀에 들어갔다.
곰이었다, 일단 모양새는. 놀랍도록 거대하고, 인간의 말을 이해하며, 더없이 선량하고 호의적인 데다, 이교도의 옛 전설에나 나올 법한 황금색 모피를 지녔다고 했다. 그렇다면 평범한 짐승일 리 없다. 문제는 그것이 신의 사자인가? 아니면 악마의 화신인가.
왕들은 그것이 자신의 권위를 축복하기 위해 신이 보낸 사자이기를 바랐다. 사제들은 그것이 퇴치하여 자신들이 모시는 신의 위엄을 보일 수 있는 악마의 화신이기를 바랐다. 상인들은 그것이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희귀한 보물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사냥꾼들은 그것이 정말로 인간의 말을 이해하는 선량하고 호의적인 영물이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꾸어어어어엉!"
"놔라, 이 괴물!!!"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곰에게 붙들린 사냥꾼이 하나뿐인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갈고리 같은 손톱을 허리띠에 걸어 실팍한 장정을 가볍게 들어 올린 곰이, 그대로 패대기를 치려다 말고 움찔 멈췄다.
"자극하지 마세요, 삼촌! 그러다 돌아가시면 병상에 계신 숙모님은 어떻게 해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잡이가 소리쳤다. 이미 다른 사냥꾼들은 무기를 집어던지고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난 뒤였지만, 처음 한 대의 화살을 곰의 어깨에 박아 넣은 - 잘 구운 생선을 덥석 물었다가 생선 가시에 입천장을 찔리는 만큼도 아프지 않았지만 - 매처럼 예리한 눈에 팔뚝이 두툼한 젊은이 하나는 끝까지 남아 있었다. 보아하니 이 외눈의 칼잡이 사냥꾼의 조카인 모양이다.
"꾸어..."
잠깐 고민하던 곰이, 가까운 나무 위에 사냥꾼을 올려놓았다. 좀 더 정확히는, 손톱에 걸린 거스러미를 떼어내듯 긁었다. 사냥꾼은 나뭇가지에 덥석 매달려 재빨리 제일 높은 곳까지 기어올라 갔다.
"지금 약값이 문제냐? 그놈의 빈티지인지 뭔지 종이 쪼가리가 왜 그렇게 비싼지...어?!"
"꾸어."
그 커다란 덩치가 어쩌면 이리도 날렵한지. 어느새 지척에 다가와 있는 금색 곰을 본 사냥꾼 숙질이 바짝 긴장했다. 겨우 화살이 닿을 정도로 멀찍히 떨어져서 보았을 때와는 박력이 달랐다. 소나기가 내린 뒤 비구름 사이로 비끼는 햇살처럼 밝은 금색 터럭이 풍성하고, 비구름이 개이면 나타나는 하늘처럼 선명한 파란색 눈은 이성과 지성이 깃들었다고 믿을 만한 이채異彩를 띄고 있었다.
"어, 어...서, 설마 우, 우리를 죽이려고..."
"아닌 거 같은데요, 삼촌. 저기...그렇죠? 저기...곰 씨?"
"꾸허허..."
뭐라 불러야할지 난감해 하는 젊은이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곰이 다시 한 번 목을 울렸다. 그리고는 앞발을 들어 사냥꾼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가볍다고는 하지만 인간이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그 손길 - 발길? - 에 담긴 명백한 의도에, 사냥꾼은 머뭇머뭇 바닥에 앉았다. 잘했다는 듯 끄덕끄덕 고개를 흔든 곰이 어슬렁어슬렁 자리를 뜬다. 사냥꾼이 살며시 일어나려고 하자,
"꾸어!"
"삼촌, 앉아 있으라는 거 같은데요."
"나도 알아들어, 임마."
"꾸허허허허..."
숲 속으로 들어간 곰의 웃음소리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돌아온 곰은 입에 물고 있던 덩어리를 툭, 사냥꾼의 무릎 위로 던졌다. 맵싸한 냄새를 물씬 풍기는 식물이었다. 젊은이 팔뚝만큼 크고 굵직한 뿌리는 네 개의 길고 짧은 가지가 나 있어 어설프게 만든 인형 같았다. 뿌리 위쪽에 가느다란 줄기를 따라 장상掌狀 복엽複葉, 실례, 손바닥 모양의 이파리가 서너 쌍 나 있는 사이로 새빨간 구슬 같은 열매가 달려 있었다.
"이건 뭐지? 처음 보는 풀인데..."
"꾸어, 꾸어, 꾸어? 꾸어..."
"어...뭐라는 건지 모르겠는데..."
"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거 아니구요?"
"얌마, 아무리 그래도 영물인데 그럴 리가...있나?"
"꾸어어~ 꾸어, 꾸어..."
"음, 잘은 모르겠지만 몸에 좋은 거니까 숙모한테 먹이라는 거 같아요."
"꿯허허허허..."
곰이 호탕하게 웃으며 - 도저히 그 포효에 어울리는 다른 묘사가 없었다 - 젊은이의 듬직한 어깨를 앞발로 두드렸다. 공격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힘찬 두드림에 젊은이가 휘청거리며 켁켁 기침을 했지만, 곰은 유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사냥꾼을 향해 앞발을 들었다. 사냥꾼은 재빨리 약초를 품에 넣고 두 걸음 물러났다.
"고맙수다, 곰 양반. 저기, 그...공격해서 미안했수."
"꾸어어~"
"우린 이만 가볼 테니까, 잘 지내슈. 거 어지간하면 사람 눈에 띄이지 말고."
"그래요. 신의 사자라는둥 악마의 화신이라는둥 금색 곰을 잡으면 형편 핀다는둥 소문이 짜하다구요."
"꾸어! 꾸어어!!"
"네네, 당신은 신의 사자도 악마의 화신도 아니고, 그냥 곰이라구요?"
"꾸어어-"
"곰도 아니라구요? 에이, 그게 뭐야."
제법 친해졌다고, 젊은이가 - 치약 광고를 찍어도 좋을 만큼 -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외눈의 삼촌과 활잡이 조카가 연신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것을, 금색 곰은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다. 그들이 숲 너머로 사라진 다음에야, 한숨과 흡사한 큰 호흡을 뱉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아 앞발을 들여다본다. 어느덧 익숙해진 굵직한 금색 앞발과 두툼하고 거칠거칠한 발바닥. 로키가 변했던 고양이에 비하면 턱없이 크고 거친 야수.
어차피 변할 거라면 로키처럼 작은 동물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변신한 몸에 익숙하지 않다고 책장을 넘어뜨리지도 않았을 거고, 넘어뜨린 실험대를 깔고 앉지도 않았을 거고, 해독제를 깨뜨리지도 않았을 거고, 화가 난 로키가 - 토르는 로키가 젠체하는 주제에 객기 넘치고 덤벙대는 귀여운 동생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 미드가르드로 날려버리지도 않았을 거고, 그리고...
"정말 멍청하다니까. 그건 산삼이 아니라 만드라고라였다고. 틀림없이 무식하게 잡아 뽑아서 끽 소리도 못하고 기절했겠지."
"꾸어?!"
토르가 금색 머리를 후딱 들었다. 멀지 않은 나무 우듬지 위에 청록색과 금색 갑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우아하게 휜 두 가닥 뿔이 달린 투구 아래, 단아한 하얀 얼굴이 일그러진 미소를 띄고 곰을 내려다보았다.
"굉장한 생존력이네. 난 벌써 어딘가 궁정의 벽난로 깔개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기다려, 이 미련곰퉁이야!"
"꾸어! 꾸어어- 꾸어!!"
하지만 토르는, 곰이 아니었더라도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벌떡 일어난 거대한 금색 덩어리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재빠르게 몸을 날려 달려드는 데에, 아무리 수령樹齡 기십 년의 아름드리 고목이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휘청한 그대로 끼이이이- 등 터진 새우 같은 비명을 지르며 넘어가는 나무 우듬지에서, 로키가 날렵하게 몸을 날려 땅에 내려섰다.
"나참, 머릿속까지 곰이 되어버린 거야? 좀 차분하게..."
"꾸어어어어~"
"곰이 사람을 습격한다!!!"
"응?"
무시무시한 기세로 홱 방향을 바꾸어 다시 달려들려는 토르에게 내심 긴장했던 로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외침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떨어진 산등성이를 타고 바람서리 불변할 철갑을 두른 일단의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영주님! 금색 곰입니다!"
"오오! 사람을 습격하다니, 듣던 바와는 달리 흉폭한 놈이로군!"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은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장년의 남자였다. 붉은색과 금색으로 화려하게 채색된 갑옷의 흉갑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커다란 보석이 박혀 있었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저 금색 모피를 윈터펠의 중앙홀 난로 앞에 깔 것이다!"
"뭐야, 저 인간은..."
예감이 나빴다. 지독하게 나빴다. 로키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망할, 이번에도 운명은 로키의 편이 아니었다.
"토니 스타크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명심하라! 겨울이 오고 있...으아악! 자비스!!"
기세등등하게 외치던 영주는 갑자기 말이 앞다리를 높이 들고 절규하는 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거대한 금색 동체가 단숨에 거리를 좁혀 병사들 가운데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로키는 저 높은 발할라를 향해 소리 없이 절규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난 기만의 신이야! 내 본분을 다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노르넨은, 성질 고약한 운명의 여신들은 언제나 그렇듯 대답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이야기의 씨실과 날실이 어긋나는 소리만이 꺄르르르 들려올 뿐이었다.
*****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묻지 않겠다, 아들아...아들들아."
"..."
"..."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없는 토르는 물론, 신의 언어를 할 수 있는 로키조차 할 말이 없었다. 다급하게 시전하기는 했지만, 로키의 마법은 언제나 완벽했다. 그러니 둘은 로키의 서재에 나타났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타난 곳은 발할라의 중앙홀, 옥좌에 좌정한 오딘과 그 곁에 선 프리가의 앞이었다. 시프와 판드랄, 볼스태그, 호건을 비롯한 제신諸神들이, 안색이 창백해진 로키와 거대한 금색 곰 - 이 조합이라면 곰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할 신족은 아무도 없었다 - 을 바라보며 수군수군 키들키들 떠들어 대는 소리가 로키의 복장을 박박 긁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알고 있겠지? 로키."
빌어먹을. 로키는 다시 한 번 입술을 짓깨물었다. 자신의 이동 마법에 관여했을 정도면, 올파더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전 자신이 소녀나 고양이가 되었을 때도 원래대로 되돌려 주지 않았던가. 지금 저 무거운 손을 잠깐 흔들어 토르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를 의미했다.
꼬시다, 이놈아.
"제가 책임지고 토르를 원래대로 돌려놓겠습니다."
"그래. 그때까지 토르는 너의 서재에서 기르..."
"여보."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기묘한 표정으로 - 곰토르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으신 거겠죠, 어머니 - 프리가가 끼어들었다.
"흠흠, 함께 지내도록 하여라."
"..."
"알겠느냐, 로키?"
"...예, 올파더."
이번만큼은 - 로키의 쓸데없이 짱짱한 자존심은 '이번에도'라는 말을 무의식 레벨에서 거절했다 -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걸 깨달은 로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엄격한 표정을 거둔 오딘이 흐뭇하게 웃으며 토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키의 서재로 가기 전에, 나와 함께 산책이나 하지 않겠느냐, 아들아?"
"어머나, 여보. 그 전에 토르를 목욕시켜야 해요. 빗질이 끝나면 오늘밤은 저와 함께 잘 거랍니다."
"앗, 프리가님. 그렇다면 이 시프도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목욕하기 전에 우리 셋과 레슬링 한 판 어떻소!"
기다렸다는 듯, 둘러싸고 있던 신들이 우- 몰려들었다. 여자들은 토르의 푹신한 털을 쓰다듬으며 거대한 곰돌이라고 좋아했고, 남자들은 두툼한 근육을 두드리며 한 판 붙어보자고 난리였다. 인파에서 밀려난 로키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움켜쥐었다. 두고 보자, 토르. 언젠가는 반드시 골탕 먹이고 말 거야!
"꾸어~"
인파 한가운데에서, 즐거운지 곤란한지 알 수 없는 금색 곰의 포효가 들려왔다.
-END.
***2013/02/11
황금숲토끼(@lokithorloki)님의 개인지 <Amnesia>에 축전으로 드린 글입니다. 허락 하에 공개합니다.
올려다본 하늘은 참으로 맑았다. 흩뿌려진 은사 같은 별무리는 금새라도 시조 한수나 노래 한 가락, 춤 한 사위가 흘러나올 것처럼 아름다웠다.
아름다웠으나,
"저희 섬에서는 아이들에게 이런 밤이면 발밑을 조심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림자가 엷어지면 그 안에서 꽁꽁 싸매 두었던 귀신이 뛰쳐나오기 쉬우니까요."
참말로 애들에게나 먹힐 법한 소리가, 星宵의 한 조각처럼 희고 단려한 옆얼굴이 진지하게 읊어대면 또 그럴 듯하게 들리는 것이 신묘하다. 깊어가는 밤이 아름답고, 이지러진 달이 아름답고, 소슬결에 밤하늘이 부서지는 蓮塘이 아름답고, 갸름한 손에 쥐어진 술병이 아름답고, 술병을 쥐고 곁에 다가앉은 청년이 아름답다. 켜켜이 아름답고 아름다워 하 기괴하고 어그러인 月夜를 讚하지 못할 바에야, 잘 갈린 칼날에 달빛을 휘감듯 한 잔 미주로 세 치 혀를 축임이 옳으리라.
"사람의 그림자 속에 귀신이 산단 말입니까?"
"아니오."
내민 술잔에 마지막 술병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따른 청년이 해사하게 웃는다. 가늘게 휘어진 눈초리가 초승달 같고, 冷然히 내치는 손짓이 그믐달 같다. 칼날 같은 시선에 맑은 달빛이 바스라진다.
맑은 달빛이 바스라지는 칼날 같은 시선.
"귀신은 사람의 마음 속에 삽니다."
휘어 바람을 가르는 죽엽. 새하얀 도포자락이 녹음에 눈부시다. 부서지는 海表. 찢어진 치마폭에 삼라히 맺힌 붉은 눈물. 천상을 갈구하는 마지막 숨결이 깨진 나각의 가두리에 걸려 흩날린다. 하나, 둘, 셋, 넷, 다섯...여섯. 보이지 않아도 들리고 들리지 않아도 만져지고 만질 수 없어도 품을 수 있는 것이라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고개를 돌리고 마룻장 아래 웅크려 앉은 목덜미를 잡아채는 손끝도 차갑지만은 않으리라. 통곡은 바닷바람이 되고 오열은 파도소리가 되어 버려진 처마 밑을 맴돈다. 피비린내 물씬한 우물에서 건져낸 옷자락이 새벽구름처럼 흰데, 조각조각 찢어지는 네 살결이 어찌 이리도 함함할까...
"나으리?"
눈꺼풀을 여닫는 永遠 사이로 스러지는, 마지막 밤의 가장 짧은 惡夢.
-END.
***2005/05/24 작성, 2013/03/24 수정.
하드를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쪽글입니다. 그러니까 8년 전에 썼던...와, <혈의 누>가 나온 지 8년이나 됐어! (...응?;)
공포영화는 고사하고 스릴러도 잘 못 보는 곰이지만, 원규(차승원 扮)와 인권(박용우 扮)의 투샷이 너무 예뻐서 얼굴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봤다는 거 아닙니까...지금이라면 다시 볼 수 있을지? 조만간 시도해봐야겠네요.
8년 전에 쓴 글을 이제 와서 (아무리 가필했다고는 해도!) 올리다니 셀프능욕도 정도껏이란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ㅎㅎOTL 지금이라면 절대로 이런 글을 쓸 수는 없을 거니까요. 기념 삼아 발굴해서 올려 봅니다 :3
해거름에 잠긴 로젠베르크의 거리는 스산했다. 야귀가 출몰하는 밤이 오기 전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인파에 묻혀, 탐정은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고 조용히 걸음을 재촉했다. 차갑게 식은 바람에 흐트러진 겨자색 머플러를 끌어당겨 구부정하게 기운 목에 감았다. 벗겨질 것 같은 중절모를 눌러 쓰는 손에는 아직 피딱지가 마르지 않은 생채기가 드문드문 나 있었다.
상점에 들러 붕대와 약, 무엇보다도 저녁거리를 사야 했다. 하지만 이 시간까지 여는 상점은 루드의 가게뿐이었고, 루드는 틀림없이 비아냥 한 마디를 빼놓지 않을 것이다. 평소라면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받아넘기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브라우닝은 묵묵히 걸었다. 붕대와 약은 그렇더라도 먹을 것은 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을 때였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 와서 걸음을 돌려 나가기에는 귀찮았다. 무의미했다. 브라우닝은 웃었다, 지치고 허기진 육신을, 외로운 마음을 비웃었다.
사흘에 걸쳐 완수한 의뢰였다. 유괴된 아이는 상처 하나 없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고, 탐정은 비록 그 아이 대신 다소의 상처는 입었지만 약속했던 보수 이상의 대가와 솔직한 감사를 받았다. 흐뭇하게 돌아서야 마땅했건만, 그럴 수 없었다. 아이가 돌아온 것으로 마지막 조각이 맞춰진 퍼즐처럼 완벽한 가족의 그림이, 그가 오래 전 마음의 선반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고 잊어버렸던 무언가를 끌어내려 머리 위로 떨어뜨린 것 같았다. 그것은 지독한 허기와도 흡사했지만, 어떤 산해진미로도 채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듣더라도,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지울 수 없을 거라는 확신마저 들었다.
그래서 브라우닝은 어디에도 들리지 않고, 누구도 만나지 않고,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이 넓은 마도에서 오직 한 곳, 그의 보금자리이자 피난처, 둥지이자 무덤인 탐정사무소로 돌아왔다.
"...응?"
부주의했다. 사무실의 문을 닫아 잠그고 돌아선 다음에야, 브라우닝은 자신이 문을 열 때 열쇠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 그가 잠그고 갔던 문을 열어둔 것이다. 블라인드가 내려진 사무실은 낮에도 어두컴컴했고, 해가 진 지금은 완벽하게 어두웠다. 그 네모난 어둠 속에, 누군가 있었다.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자 자신의 것이 아닌 호흡이 들려왔다. 낮고 고른, 깊이 잠든 숨소리.
"읏!"
브라우닝이 조용히 팔을 뻗어 전등을 켰다. 누군가 외마디 신음과 함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건가, 닥터."
"아, 이제야 왔군."
"왔군이 아니라..."
"보면 모르나? 자네를 기다렸다 잠들었어."
워켄이 흐트러진 잉크색 머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투가 사실은 쑥스러워 그런다는 걸, 브라우닝은 알았다.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그는 워켄이라는 의사를 알고 있었다.
"기다리다니, 나를? 왜?"
"의뢰할 게 있어서."
하지만 워켄은 몰랐다. 그는 자신이 브라우닝이라는 탐정을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점한 시간과 공간이 브라우닝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워켄은 알지 못했다.
"의뢰? 아아, 그래. 의뢰..."
"응, 내가 일전에...잠깐만, 브라우닝."
"응? 어...어?!"
워켄이 갑자기 말을 끊고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의사를 바라보던 브라우닝은, 잉크색 장갑을 낀 가느다란 손가락이 자신의 손목을 잡았을 때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탕! 탐정의 등이 문에 부딪혀 가볍게 울렸다.
"왜 그러나?"
"아, 아니...괜찮아. 내가 하겠네. 별로 큰 상처도 아니고, 처음 다치는 것도 아니고, 아, 그러니까..."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어 곤란했다. 너무 잘 알 것 같아 부끄러웠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브라우닝을 눈썹을 찌푸리고 바라보던 워켄이 냅다 팔을 뻗었다. 갑자기 양쪽 어깨를 움켜쥐는 바람에, 탐정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다 혀를 깨물 뻔했다.
"머리도 다쳤군? 아픈가?"
"응? 아, 아니...괜찮아. 그냥 총알이 스친 거..."
"괜찮지 않잖아!"
워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움찔 놀란 브라우닝은, 이맛살을 찌푸린 의사의 얼굴이 다가오는 바람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인상 쓰지 마. 상처가 당겨지잖나. 왜 이렇게 애처럼 구나. 우리 애들도 안 이러겠네."
"...그 아가씨들은 여전히 씩씩한가 보군."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하기 위해서는 짧은 침묵이 필요했다. 다행히 그 침묵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아내지 못한 워켄은 흥, 코웃음을 치며 브라우닝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놓고,
"애들하고 비교 당하는 걸 부끄러워해야지."
"그야...아?!"
탐정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질질 끌려간 브라우닝은 가볍게 떠밀려 소파에 주저앉았다. 조금 전까지 워켄이 누워 있던 소파에는 아직도 희미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언제나 차갑고 어둡게, 그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던 공간이,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구급상자 어딨나?"
워켄의 존재로 브라우닝을 휘둘렀다.
"브라우닝? 브라우닝...자네, 지금 우는 건가?"
"응? 어?"
눈앞이 흐려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액체에 당황한 브라우닝이 황급히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고,
"아얏..."
"손 내려!"
날카로운 워켄의 질타에 화들짝 놀라 상처가 짜디짠 물에 젖어 쓰라린 손을 떨어뜨렸다.
"애도 아니고, 정말이지....구급상자 어딨냐니까?"
"어? 어...거기, 지금 자네가 들고 있는데..."
"..."
아마, '애도 아니고'를 연거푸 말하는 게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때 구급상자였던 빈 상자를 내려놓은 워켄은 잘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작은 필통 같은 상자와 손수건을 꺼내고, 재단하듯 브라우닝을 훑어본 뒤,
"쯧."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머리보다 조금 밝은 청람색의 머플러를 풀었다.
"워켄?"
"자네에게 맞추려니 나까지 원시적이 되잖나."
겨우 들릴락 말락 목소리는, 기묘하게도 소년의 투정 같았다. 워켄은 상자를 열어 약솜과 투명한 액체가 든 앰풀을 꺼냈다. 앰풀을 따자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 내밀게."
"어? 어, 응..."
브라우닝은 어정쩡하게 손을 내밀었다. 명백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태도로, 그의 손목을 낚아챈 워켄이,
"읏, 따거..."
"좀 참게. 애도 아니고."
결국 했던 말을 다시 하며 소독약에 적신 약솜으로 브라우닝의 손에 난 상처를 닦았다. 거즈 대신 손수건으로 손을 감싸고, 머플러를 길게 접어 붕대 대신 감아 묶었다.
"임시방편이네. 꼭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응? 어, 응..."
"나 좀 보게, 브라우닝."
"어, 어?"
"쯧."
줄곧 제대로 된 말보다는 흐리멍덩한 대꾸밖에 하지 않는 브라우닝을 아예 애 취급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워켄은 더 이상 브라우닝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탐정의 모자를 휙 벗겨 던진 다음 턱을 잡고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이제야 학습이 된 브라우닝은, 소독약이 상처에 닿는 동안 입술을 깨물고 신음을 참았다.
"이건 어쩔 도리가 없군. 제대로 치료를 받기 전까지는 손대지 말게."
"...아, 응...고맙네."
"울지 말라니까."
아마 또 '애도 아니고'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라우닝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워켄이 뻗은 손은 잠깐 시야를 가렸을 뿐이지만, 뺨에 닿은 손끝은 마치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술을 꿰맨 것처럼, 모든 감각을 송두리째 그 희미한 감촉에 끌어들였다.
"울 정도로 아팠으면 알아서 병원에 갔어야지."
워켄의 손과 브라우닝의 뺨 사이에 걸린 얇은 천이 무구하게 탐정의 눈물을 빨아들였다. 브라우닝은 눈을 깜빡거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고, 절실했다. 그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을 때,
꼬르륵.
"...저녁 안 먹었나?"
잠시 후, 워켄이 허탈한 어조로 물었다. 브라우닝은 노력했다.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참으로 얼빠진 듯 웃을 수 있었다.
"음, 바빠서."
"물을 필요도 없는 것 같지만, 여기 먹을 건 있나?"
"그거 정말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군."
"하!"
외마디와 함께 워켄이 훌쩍 떠나갔다.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책상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든다. 그가 빠르게 말을 잇는 것을 흘려들으며, 브라우닝은 심호흡을 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체취와 체온으로 데워진 공기가 폐부를 채우고 명치를 치며 목구멍으로 차올랐다.
"비켜 주게."
"어?"
"...나도 앉게 옆으로 좀 비켜 달라고."
다행히 워켄은 브라우닝의 어리석은 반응을 부상과 공복 때문으로 여긴 것 같았다. 놀랍도록 부드러운 그의 어조에, 브라우닝은 황급히 옆으로 옮겨 앉았다. 2인용 소파의 언제나 비어 있던 절반을 워켄이 채웠다.
"애들에게 먹을 걸 좀 가져오라고 했으니 잠깐만 기다리게."
"어...어?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내 딸들이야."
워켄의 짧은 대답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자부심이 드러났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만든 두 개의 오토마타를 딸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순간 브라우닝은 격렬한 감정을 느꼈고, 곧 워켄의 '딸들' 역시 자신에게 그와 유사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불공평하다고, 그건..."
"응? 뭐라고?"
"아니야, 아무...것도..."
말하던 중 묵직한 무게를 잔등에 느낀 브라우닝이 말을 더듬었다.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워켄이 희미한 중얼거림을 더 잘 들으려고 몸을 기울인 것이다.
"구급상자도 가져오라고 했으니 제대로 치료해주지. 그때까지, 잠깐만 기다리게..."
브라우닝의 어깨에 체중을 실은 워켄의 목소리가 느리게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고 했다. 조심스럽게 곁눈질하자, 단아한 얼굴이 창백하고 눈 밑에 거뭇한 그늘이 보였다.
"피곤하면 전화하지 그랬나. 아니면 아가씨들을 보내던가."
"아니야, 내가 직접 이야기하고 싶었어...그 김에 오랜만에 자네도 만나고..."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새 잠이 들다니, 정말 피곤한 것 같았다. 새근새근- 낮고 고른 숨소리가, 마치 처음 사무실에 들려왔을 때처럼, 그러나 놀랍도록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마법은 풀리지 않은 채, 너무나 따스하고 안온하게 그를 감싸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저주였다. 차라리 망각을 갈구할 정도로 잔혹한 저주였다.
브라우닝은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와 워켄의 접촉이, 혹시라도 자신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브라우닝은 무방비하게 기대어 잠든 워켄의 체온이, 무게가, 존재가, 자신의 은밀하고 절실한 소망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되었다.
"하하..."
탐정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헛헛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뺨을 따라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워켄이 이해할 수도 없고, 닦아줄 수도 없는 눈물이었다.
-END.
***2013/02/15
Y님의 "서로 외로워하는데 탐정은 사무쳐서 모른 척 감추려 애쓰고 닥터는 정말 모르고 있었으면 좋겠다. 갈급한데 채울 줄 모르는 사람 둘이 만나서, 채우는 것보다 흘리는 게 더 많았으면 좋겠다. 근데 뭐 다른 관계여도 좋고 남이 연성한 게 보고싶 읍읍" 이라는 트윗을 보고 찰싹이 와서 써보았습니다. 브라우닝은 정말 울리는 기쁨이 있는 남자...읍읍...
그가 이토록 곤란한 지경에 처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하급 사서라는 신분보다는 판데모니엄의 수장 레드그레이브의 심복이라는 입장에서, 아무리 사소한 실수라도 주군에게 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언제나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예측하고 대비하여, 어떤 돌발 상황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다시 말해, 지금과 같은 예상외의 곤경에 처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거의'라고 여지를 두는 것은 레드그레이브 때문이다. 살가드의 주군은, 때때로 돌발적인 언행을 하고서는 거기에 놀라고 당황하는 심복의 반응을 즐기는 짓궂은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지금처럼.
살가드는 한숨을 - 무릎 위에 얹힌 머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 내쉬었다. 자그마한 초콜릿색 귀가 쫑긋 흔들렸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고르게 호흡하고 있지만 잠든 것은 아니다.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자는 척 하고서, 무릎 위에 누운 자신 때문에 일어나지 못해 곤란해 하는 살가드의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았다.
"너는...어쩌면 이리 하는 짓이 꼭 레드그레이브님 같으냐."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하고, 살가드는 제풀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여기는 판데모니엄에서 존재마저 지워진 장소였으니까. 오랫동안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던 이 장소에 지금 있는 것은 오직 살가드와, 그의 무릎에 올라앉은 작고 부드러운 온기뿐이었다.
*****
오늘은 하급 사서에게 주어지는 정기휴일이다. 그리고 오래 전 은폐된 어떤 사건에 대한 자료를 찾아오라는 레드그레이브의 명령을 수행하는 날이기도 했다. 수십 년 전의 기밀문서를 소장한 채 폐기된 문헌보관실의 소재를 찾고, 이목을 피해 잠긴 문을 따고 들어오는 일은 쉬웠다. 오히려 어려운 것은, 정리되지 않은 방대한 문건 속에서 레드그레이브가 원하는 자료를 찾는 쪽이었다.
물론, 레드그레이브가 한 번 명령을 내린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고 말 터였지만.
냐-
놀랄만한 집중력으로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작파하고 있던 살가드는, 그래서 처음에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냐아-냐아-냐아오옹-
이게 무슨 소리지? 몇 번이나 거듭 들려온 다음에야, 살가드는 그 작고 가느다란 소리를 인식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물론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분명히 들려오고 있었다. 창틀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팽팽하게 당긴 현을 울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가 조르는 소리 같기도 한, 생전처음 듣는 낯선 소리였다. 언제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거지? 어디에서 들리는 거지? 왜 들려오는 거지?
냐아-냐-!!
마치 그 의문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소리는 점점 더 크고 분명하고 날카롭게 울렸다. 이제 살가드는 그 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창이라고는 하지만, 판데모니엄의 외곽에 위치한 인적 드문 건물, 그 가장 바깥쪽, 그 가장 낮은 지층에 위치한 문헌보관실의 벽이 갈라진 것이나 다름없는 틈새였다. 부서진 창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옆 건물의 뒷벽, 판데모니엄의 장벽을 이루는 무수한 시설들이 시작되는 방벽,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채 버려진 손바닥만 한 땅뙈기뿐이었다. 물론 살가드는 여기에 들어오자마자, 그 창문으로는 오랫동안 바람과 먼지 외에는 드나든 것이 없으며, 누군가 엿보거나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가능성은 없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확인했다.
하지만 소리는 분명 그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살가드는 바짝 경계하여, 왼손에 감은 와이어를 오른손 손끝으로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갔다. 잠깐 기척을 읽은 뒤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보았고,
냐!
왜 이제야 내다보느냐는 듯 매서운 소리를 낸 상대를 본 순간,
"...어?"
참으로 그답지 않게도, 멍청하게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냐웅!
명령하는 듯한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몸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가 물러나 생긴 공간으로, 창밖에 있던 존재가 창틀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살가드는 자신과 눈높이가 비슷해진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연기를 뭉친 듯 길고 보들보들한 은회색 털이 풍성하게 난 몸은 아주 크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작지도 않았다. 세모난 귀가 쫑긋 솟은 둥글넓적한 머리에서 목덜미, 등을 지나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곡선은 부드럽고 우아하며, 단정하게 모아 앉은 네 개의 발을, 역시 털이 복실하게 난 긴 꼬리가 휘감고 있었다. 귀와 코끝, 발끝은 진하게 끓인 초콜릿 같은 갈색이었다. 살가드의 멍한 시선을 마주보는 동공은 마수의 것처럼 세로로 길었지만, 해질녘의 동쪽 하늘처럼 고운 청보라색 눈동자는 마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영롱했다. 그리고 어쩐지 낯설지 않았는데...
"...고양이?"
냐아.
멍하니 바라보며 밀려오는 기시감을 애써 분석하던 살가드가, 드디어 박물학 서적에서 본 삽화를 떠올렸다. 코웃음 같기도 하고 한숨 같기도 한 부드러운 대꾸에, 정답을 말했다는 걸 알았다. 그렇구나, 너는 고양이구나. 그런데 고양이? 고양이라고? 살가드는 자신이 낸 결론에 자신이 당황했다. 모든 것이 통제되고 제어되는 판데모니엄에 야생동물이 있을 리 없다. 하물며 오래 전 멸종해 박물학 서적에나 등장하는 생물이 아닌가. 혹시 어떤 생물학자가 연구를 위해 재생하거나 비슷한 외형으로 창조한 실험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녀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혹시 실험실에서 도망친 것이라면, 지금쯤 누군가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누군가가 여기까지 온다면, 그래서 이 문헌보관실의 소재가 알려지게 된다면...
냐아...
거듭되는 불길한 예측에 혼란스러워진 살가드를 부르기라도 하듯, 고양이가 낮은 목소리로 울었다. 불렀다고? 나를? 잠깐만, 이 생물의 지능은 어느 정도지?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있나? 아까부터 나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살가드는 자신이 고양이에 대해, 그것이 고양이라고 불린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삼 경계했다. 아니, 경계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냐아?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고양이가, 정말로 자그마하고, 부드럽고, 복슬복슬하고, 우아하고, 새침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살가드는 이런 생물이 자신에게 악의나 적의를 품고 위해를 가하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물론 세상에는 보기와 다른 생물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살가드의 주군 레드그레이브가 그러했다.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녀의 몸은 인간이 아닌 인형, 오토마타였다. 인형의 몸을 하고 있지만 그녀의 두뇌는 인간,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여성이었다. 예리한 지성과 냉철한 판단력, 심지가 굳고 인내심이 강하며, 때로는 상냥하며 때로는 비정한 판데모니엄의 수장. 바로 살가드가 주군으로 충성을 맹세한 단 한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라는 생물은 예리한 발톱과 이빨을 숨긴 채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다고 책에 적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저 갓 구운 빵처럼 말랑말랑하고 몽실몽실한 발에 예리한 발톱이 달려 있다고? 살가드는 고양이가 단정하게 모은 네발을 미심쩍은 듯 바라보았다. 만져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그래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고양이가 화내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이 고양이는 왜 여기에 온 걸까? 무슨 목적으로, 뭘 원해서?
냐!
마치 레드그레이브가 코웃음을 칠 때 같은 어조로, 고양이는 다시 한 번 살가드를 한 걸음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치 체중이 없거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우아한 동작으로 창틀에서 바닥으로 내려섰다. 참으로 유연하고 부드럽게 사지를 쭉 뻗어 기지개를 편 고양이는 오만하게 코끝을 들어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고,
"어? 자, 잠깐만!"
조금 전까지 살가드가 앉아 있었던 책상을 향해 서슴없이 걸어갔다. 여왕의 행진처럼 위풍당당한 걸음걸이였다. 책상 옆에 놓인 작은 바구니 앞에 선 고양이는 코끝을 바구니에 대고 잠깐 냄새를 맡은 뒤, 허둥지둥 따라온 살가드를 올려다보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냐, 냐.
"...너, 혹시 배고프니?"
그것은 살가드의 도시락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은 어느덧 점심때를 지나고 있었고, 시간을 깨닫자마자 허기가 물밀듯 밀려왔다. 무릎을 꿇고 바구니를 집어 드는 살가드를 바라보는 고양이의 눈이 초승달처럼 곱게 휘었다.
*****
"앗, 이봐! 지금 뭐하는 거야!!"
식사를 마친 뒤 - 속이 빈약한 샌드위치와 과일주스였지만, 고양이는 제법 맛있게 먹어주었다 - , 부스러기를 모아 바구니를 치우느라 잠깐 자리를 비웠던 살가드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역시나 하는 사달로 입증된 현장을 목격하고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책상 가운데 올라앉아 잔뜩 쌓인 서류를 마치 읽는 것처럼 앞발로 툭툭 치고 있던 고양이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고, 기다란 꼬리에 휩쓸린 서류 더미 하나가 와르르 무너졌다.
"너, 이게 대체 무슨 짓...!"
냐아오오-!!!
"...이야...아?"
버럭 언성을 높이던 살가드는 흠칫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고양이가 잘못한 것인데, 오히려 저쪽이 더 앙칼지게 소리를 지른다. 활처럼 휜 등의 털을 빳빳하게 곤두세우고, 부드럽게 펼쳐져 있던 수염을 전극이라도 맞은 것처럼 삐죽삐죽 뻗치며, 가늘던 동공이 커다랗게 확대되고, 작은 입에서는 새하얀 송곳니마저 드러났다.
왜 갑자기 큰소리를 내는 것이냐! 깜짝 놀랐지 않느냐!!
레드그레이브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화를 냈을 것이다. 번쩍번쩍 빛나는 청보라색 눈동자는, 비록 동공의 모양은 달랐지만 어쩐지 그녀의 커다란 자수정색 눈동자와 비슷한 것도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살가드는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길게 한숨을 쉬고, 흩어진 서류를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예민한 감각은 고양이가 훌쩍 책상에서 뛰어내려, 방 저편에 앵돌아앉아 앞발이며 등을 핥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그래, 너는 잘못한 게 없다 이거지. 헛웃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낯설지 않다. 그러모은 서류를 책상 위에 올리고 의자에 앉아 바싹 당기려는데,
"...너..."
소리 없이 다가온 고양이가 슬그머니 무릎 위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마치 그가 의자의 일부나 되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등을 돌리고 자세를 가다듬는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좀 더 묵직한 부피가 인간보다 좀 더 높은 온도를 품고 얹혔다.
"혹시, 사과하는 거니?"
이야웅-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는 심드렁한 대답. 하지만 대답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살가드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저도 모르게 고양이의 등에 손을 얹었다. 흠칫. 닿은 순간 놀란 것은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고양이는 소리를 지르거나 달아나지 않았다. 풍성한 털은 생각대로 보들보들하고, 그 안에 묻힌 몸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살가드는 조심스럽게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목덜미를 지나 쫑긋 선 귀 뒤를 긁어주자, 고양이는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감고 고륵고륵- 귀여운 소리를 냈다. 아마 제 나름으로 사과하는 것이리라 짐작한 살가드는 기꺼이 고양이에게 무릎을 내주고, 한 손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모피의 감촉을 음미하며 다른 손으로 서류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
살가드가, 고양이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생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의 일이었다.
*****
"저기, 음...고양이야? 내가...음, 좀 일어났으면 하는데..."
살가드는 곤란했다. 그가 이토록 곤란한 지경에 처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이하생략.
처음 한동안은 괜찮았다. 하지만 아무리 단련된 몸이라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은 자세를 유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책상 위의 서류를 모두 분류했으니 다른 서류 더미를 가져와야 했고, 쥐가 날 것 같은 다리를 펴고 싶었고, 목도 살짝 말랐다. 그리고 고양이는 그의 무릎 위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리인 것처럼, 동그마니 몸을 말고 고른 숨소리를 냈다. 잠이 든 것 같았다. 자는 척 하는지도 몰랐다. 수염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잠투정인지 키득거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밀어내면 될 일이었다. 깨지 앉도록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어딘가 안전한 장소에 내려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살가드는 차마 고양이의 낮잠을 깨울지도 모르는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마치 격무에 지친 레드그레이브가 충직한 심복 외에는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서 꼬박꼬박 조는 것을 발견했을 때처럼, 한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에라, 모르겠다.
살가드는 포기했다. 자신답지 않은 결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좌절하거나 우울해지기는커녕, 잔잔한 미소가 단정한 입가에 떠올랐다.
레드그레이브님께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시면, 이 녀석을 보여드리자. 어디서 온 녀석이든, 레드그레이브님께 맡기면 잘 처리해 주시겠지. 절대 해를 입거나 곤란하지 않도록 해주실 거야...어쩌면 마음에 들어 곁에 두실지도 모르지...이렇게나...꼭 닮았으니...레드그레이브님과...고양...이...
따스한 체온과 부드러운 감촉, 고르게 울리는 생명의 박자에 홀려, 살가드는 눈을 감았다. 상아색 머리카락이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청보라색 눈을 가늘게 뜨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남자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느긋하게 펼쳐진 수염이 바람에 일렁이는 잔물결처럼 웃었다.
*****
고맙다, 살가드여.
다정한 목소리가 아늑하게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대는 참으로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심복이로다. 잘 쉬다 가느니라.
*****
깨어났을 때, 살가드는 홀로 남은 자신을 발견했다. 고양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꿈을 꾸었는가 생각했지만, 무릎 위에 희미하게 남은 온기도, 옷에 묻은 몇 가닥의 은회색 기다락 터럭도, 그리고 어깨를 덮은 어디서 본 것도 같은 모포도 모두가 현실이었다. 살가드는 멍하니, 고양이처럼 부드럽고 두툼한 모포를 어루만졌다. 어디서 보았는가 하면, 레드그레이브의 집무실에 딸린 개인 거실이다.
어떤 놀람이나 동요, 의문도 없었다. 오직 평온하고 안온하게,
"레드그레이브님..."
주군의 이름을 부른다.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는 따스한 잔등을 쓸어내리듯 부드러운 어조였다. 하급 사서의 짙고 해사한 얼굴 위로 초콜릿이 녹아내리듯 부드러운 미소가 짙게 번졌다.
신지는 어깨를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겨울을 맞아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을씨년스럽게 둘러선 공원 한켠, 보기만 해도 얼어붙을 것 같은 아이스 블루로 도색된 벤치에 앉은 소년의 조붓한 몸은 모직코트 한 벌을 걸쳤을 뿐, 목도리도 장갑도 없었다.
"추워..."
신지는 맨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벌써 몇 번째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지 모른다.
"하아..."
하지만 새어나오는 한숨은 보일듯 말듯 엷었다. 소년의 드러난 귓불이며 뺨도 그리 빨갛지 않았다. 사실 그리 추운 날씨는 아니었던 것이다. 며칠째 계속되던 한파 끝에 찾아온 겨울 치고는 따스한 날씨에다 주말이었다. 거리에는 모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외출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무작정 거리로 뛰쳐나온 신지를 혼란시켜 이 외진 공원 한켠까지 몰아붙일 정도로, 모두가 즐겁고 행복하고 기뻐 보였다. 모두 동행이 있거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나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가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갈 곳도, 기다리는 사람도, 기다려 줄 사람도.
"카오루군..."
신지는 자기가 부른 이름에 자기가 흠칫 놀랐다. 누가 들었을까봐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거리의 인파 속을 헤맬 때에도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아무도 이 소년이 제3신동경시의, 인류의, 세계의 구세주라는 걸 몰랐다. 그저 단정하고 반듯하고 숫기 없어 보이는 중학생 남자아이로 볼 뿐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랬다.
에바에 타지 않은, 플러그 수트를 입지 않은, 어른들과 함께 있지 않은 이카리 신지는 그저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자신에게 모두가 주목하고, 기대하고, 성과를 요구한다. 힘들었다. 괴로웠다. 무서웠다. 그래서 도망쳤다. 갈 곳도 없는데 달아났다. 그리고 이 넓은 세상에서 자신만이 홀로 외톨이라는 걸 깨닫기 전, 한 사람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우리집에 갈래? 누추하고 대접도 변변찮지만,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괜찮아.
"카오루군..."
신지는 두 손을 입가에 모아 언 손을 녹이는 척, 한숨을 쉬는 척, 그의 이름을 작게 불러보았다. 나기사 카오루. 자신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묻지 않고, 강요하지 않는 오직 한 사람. 같은 나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럽고, 다정하고, 아름다운 소년.
'카오루군...지금쯤 어쩌고 있을까...'
며칠째 집에만 있던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을까? 찾아다니고 있을까?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남기지 않고 돌아갔다고 생각할까? 뭐 이런 무례한 녀석이 있냐고 화를 냈을까? 섭섭하다고 원망했을까? 혹시 경멸한 건 아닐까? 다시는 초대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어떻게 하지?
상상하면 할수록, 신지 안의 카오루는 웃음을 그치고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하게 돌아섰다. 멀어졌다. 싸늘한 바람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추웠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추웠다.
"추워..."
신지는 고개를 떨궜다. 카오루는 나쁘지 않았다. 상냥하고 친절했다. 나쁜 건 자신이다. 달아났다. 매번 달아나면 안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결국은 또 달아났다. 아버지에게서, 에바에게서, 사도에게서, 제3신동경시에게서, 네르프에게서 달아났던 것처럼, 카오루에게서도 달아나고 말았다.
차라리 나 자신에게서 달아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자살 같은 거창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어리숙하고 무능하고 무력한 스스로가 지긋지긋했다. 좀 더 영리했더라면, 좀 더 용감했더라면, 좀 더 분별력이 있었더라면, 좀 더 의지와 인내력이 있어서,
"좋아...하는데..."
깨닫는 순간 포기할 수 있었더라면.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마음속에서 뭉클뭉클 자라나는 감정을 짓밟고 억누를 수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쯤 이렇게 창백한 겨울 햇살 아래 외로이 홀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코타츠 아래에서 가끔 발을 부딪히고 귤을 까먹으며 시시한 TV프로와 잡지를 화제 삼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을 텐데.
"카오루군..."
"응? 신지군."
"어?!"
깜짝 놀라 고개를 드는 것보다 먼저, 두툼하고 폭신한 무게가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목도리도 안 하고 나갔던 거야? 아무리 날이 풀렸어도 겨울이야. 감기 걸려."
"카, 카오루군..."
"응?"
대꾸하는 목소리는 목도리를 둘러주는 손길 만큼이나 따스했다. 멍하니 바라보는 신지의 시선을 상냥하게 받아주는 무구한 붉은 눈동자.
"점점 바람이 차가워지네. 이만 집에 가자."
"카오루군, 나..."
해사한 얼굴이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모든 것을 아는 듯, 아무 것도 모르는 듯, 신지의 두 손을 맞잡았다.
"장갑도 없이, 이 손 차가운 것 좀 봐. 집에 가자."
"...카오루군..."
손을 감싼 온기가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흘러들어간다. 가진 바 없는 분별력과 의지와 용기를 받은 것처럼, 심장이 두근두근 울리기 시작했다. 신지는 눈을 깜빡거렸고,
"신지군?"
"응, 미안."
웃었다. 겨울 햇살처럼 창백하고 눈부신 미소. 이번에는 카오루가 눈을 깜빡거릴 차례였다.
"집에 가자, 카오루군."
"...그래."
신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잠깐 서로를 마주 보았고, 멋쩍게 혹은 수줍게 웃었고,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두 사람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처럼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END
***2013/01/14
트위터에서 대선 투표율 RT 이벤트로 받은 리퀘입니다.
은렌님의 카오루x신지 커플링인데요. 미성년이셔서 수위가 없으므로 그냥 신지로 표기했습니다^^;
수업시간의 학교는 조용하다. 물론 각 교실마다 수업하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쉬는 시간에 천여 명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와글와글 떠들던 것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희미하고 따분한 소음이었다. 그 파도처럼 희미한 울림들을 자장가 삼아 잠들었던 살가드는 몸을 휘감는 한기에 눈을 떴다. 작고 하얀 알갱이들이 흐릿한 시야를 얼룩덜룩하게 물들였다. 잠이 덜 깼나 싶어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자 차가운 습기가 묻어난다.
"...눈?"
그러고 보니 아침에 우산을 가져가라는 아버지 부인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강설예보라도 있었나? 어쩐지 운동장에 체육수업 하나 안 보이더라니. 짜증나네. 살가드는 급수탱크 위에서 일어났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곳을 찾아 여기까지 올라오긴 했지만, 아침의 초겨울답지 않게 따뜻하던 햇살은 간데없이 잔뜩 찌푸린 잿빛 하늘과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낮잠을 잘 수는 없었으니까.
흘끗, 교사 정문의 시계탑에 시선을 던졌다. 보아하니 곧 오후 첫 번째 수업이 끝날 시각이다. 설렁설렁 교실로 돌아가면 종이 치겠지. 따뜻한 교실에서 10분쯤 자고, 그 다음 수업이 뭐더라? 봐서 만만한 선생이면 계속 자고, 아니면 양호실에 가서 아프다고 좀 누워 있다 수업 끝나면 집에 가야지. 이사장인 아버지는 결석만 하지 않는다면 수업 시간 동안 교내 어디서 뭘 하며 시간을 때우든지 참견하지 않앗다. 체면 때문이겠지,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아들이라는 - 빌어먹을.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바람에 기분이 나빠졌다. 살가드는 교실로 돌아가는 걸 관두고 바로 양호실로 향했다. 평소 지나갈 일이 없는 2학년 교실이 늘어선 복도와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는데,
"내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고?"
난처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고막에 꽂혔다.
*****
"...오늘은 여기까지. 황혼의 시대는 기말시험에 나오니까 복습 꼭 해."
시험이라는 말에 투덜투덜 웅성거리기 시작한 아이들의 머리 위로, 레드그레이브는 벽에 걸린 시계에 시선을 던졌다. 수업이 끝나려면 17분이나 남았다. 종이 울리자마자 나가야 한다. 10분 내로 넓은 교정 어딘가에 - 물론 그 공주가 아닌 바보가 있을 곳은 대략 짐작이 가지만 - 숨어 있는 살가드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오전 내내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니 점심은 먹었을까? 안 먹었으면 일단 밥부터 먹여야 하나? 지금 시간에 그 애 밥을 먹일만한 데가...아니지, 일단 찾아낸 다음 고민해도 늦지 않아. 이런 저런 생각으로 초조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교탁 위의 수업자료를 추스리는데,
"눈이다!"
"어? 진짜! 첫눈이다!!"
학생들이 일제히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서 오후에 비 또는 진눈깨비가 내릴 거라더니, 흩날리는 것은 제법 그럴듯한 가루눈이었다. 마침 수업도 끝났겠다, 저마다 재잘재잘 떠들며 창가를 바라보며 또 일어나 창가로 가려는 것을 본 레드그레이브가 손바닥으로 교탁을 쳤다.
"자자, 앉아. 수업시간 아직 남았으니까 조용히 자습해라."
"에이~"
학생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올해 처음 부임한, 자그마하고 앳되고 예쁘장한 여선생이라면 천둥벌거숭이 같은 고등학생들에게 만만하게 보이기 딱 좋다. 하지만 레드그레이브에게는 어떤 역경에도 주장을 관철하는 불굴의 의지, 수백수천 명의 남녀학생들이 번갈아 질러대는 기상천외한 말썽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담대함, 무엇보다도 철근도 떡볶이처럼 씹어먹으며 밟아도 꺾이지 않는 천혜의 체력을 지닌 10대들조차 두려워할 만큼 강건하고 매서운 손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어리어리한 여선생을 우습게 보고 들어댔던 불량학생들은 물론, 소위 '일진 짱'까지 그녀의 '사랑의 매'에 굴복한 뒤부터는 아무도 그녀에게 반항하지 못했다.
"선생님!"
"뭐니, 프리드리히."
"첫사랑 이야기 해주세요!"
물론 이런 건 반항 축에도 들지 않는다. 타고난 너스레와 미워할 수 없는 웃음 덕분에 입학 이래 2년 연속 전교 오락부장을 역임하고 있는 옅은 석간주색 머리칼의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외쳤다.
"뭐?"
"수업 끝났잖아요. 첫눈도 내리는 우리 어여쁘신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와아-"
오오, 맞다! 바로 그거다! 굿쟙! 과연 리리! 아이들이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반장이자 프리드리히의 쌍둥이 형인 베른하르트가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빅웨이브를 타기 시작한 급우들을 말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내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고?"
레드그레이브는 난감했다. 오늘 진도는 다 나갔고, 10분이라는 애매한 시간이 남아 있고, 그녀에게도 첫사랑은 있었다. 문제는 그 첫사랑이라는 것이 아이들이 상상하듯 첫눈처럼 정결하고 풋풋하지 않았다는 사실...
콰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교실 앞문이 난폭하게 열렸다. 와글와글 시끄럽던 교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온 장본인을 알아본 순간 의아함과 당혹감, 호기심이 잔물결처럼 소근소근 퍼졌다.
"살가드?"
곧 찾아 나서려던 상대가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당황한 레드그레이브가 눈을 깜빡였다. 제비꽃 색깔의 커다란 눈동자에,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어두운 피부의 소년이 또렷하게 비쳤다.
"너 지금까지 어디 있었...살가드?!"
다짜고짜 손을 내밀어 레드그레이브의 손목을 낚아챈 살가드가 그대로 몸을 돌려 교실을 나갔다. 영문을 모르고 얼떨결에 따라가던 레드그레이브가 뭔가 말하려 했을 때, 마치 그 말이 이미 들리기라도 한 듯 우뚝 걸음을 멈춘 살가드가 어깨 너머로 교실 안을 훑어보았다.
"니네, 어디 가서 선생님 이야기 떠들면 다 죽여버린다."
"살가드! 선배님들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
"농담 아니니까 알아서들 잘 해, 가요, 선생님."
"살가드? 잠깐만, 살가드..."
콰당!
아까보다는 조금 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교실 앞문이 닫혔다. 비록 레드그레이브에게 - 패배자의 진영에서는 '정정당당한 일기토에 석패했다'고 주장했지만 - 무참하게 얻어은 끝에 교내에서는 얌전한 강아지가 되긴 했지만, 입학 후 2주만에 학교뿐 아니라 학군 내의 '일진 짱'으로 등극한 무시무시한 1학년의 경고였다. 학생들은 레드그레이브가 그랬듯 눈만 깜빡이며, 살가드의 거친 발소리와 레드그레이브의 당황한 잰걸음이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것을 듣고만 있었다.
살가드의 손을 뿌리친 레드그레이브가 말했다. 질문처럼 들리지만 말꼬리가 내려간 것은 그만큼 화가 났다는 증거이다. 태연한 얼굴로 학습자료실의 문을 잠그고 돌아서긴 했지만, 살가드는 내심 바짝 긴장했다. 수업시간에는 쓰이지 않는 학교 구석의 학습자료실까지 끌려오는 동안 레드그레이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큰소리를 내서 다른 교실의 수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것도 있지만, 굳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이 상황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리라. 그것은 오만이 아니라 올바른 판단이었고, 그래서 이미 그녀에게 '결투'에서 패배한 적 있는 살가드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이야기하기 싫으셨잖아요."
"뭐?"
"첫사랑 이야기, 하기 싫으셨잖아요."
"오지랖이 넓구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레드그레이브가 팔짱을 단단히 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자수정처럼 싸늘하게 빛나던 눈동자가 누그러진 것을 확인한 살가드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뇨. 선생님은 거짓말 못하잖아요. 거절해서 분위기를 깨든, 이야기를 해서 분위기를 깨든, 아무튼 그 자리 안 좋게 끝났을 거에요. 그렇다고 리리 자식을 패서 닥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대신 선생님을 데리고 나온 거에요. 내가 잘못했어요?"
"제가."
"아, 예. 그러니까 제가 잘못했어요?"
"살가드."
"형 이야기하는 거 싫어하잖아요, 레드그레이브...누나."
"..."
레드그레이브는 뭔가 말하려던 입술을 앙다물었다. 살가드는 그 입술이 함박꽃처럼 환하게 웃던 때를 똑똑히 기억했다. 어린 소년의 눈에, 어느 날 나타난 영특하고 지혜로운 연상의 소녀는 마치 여신처럼 비쳤다. 그리고 그녀는, 소년이 또한 영웅으로 숭배하던 형을 볼 때 가장 아름답게 웃었더랜다.
"...나참."
이윽고 표정을 추스린 레드그레이브가 웃었다. 그 허허롭지만 밝은 미소에 잠깐 방심한 나머지 그녀가 팔짱을 푸는 것에 주목하지 못한 살가드는,
"학교에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랬지?"
딱!!
작은 주먹이지만 눈물이 찔끔 나도록 매서운 딱밤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아야야..."
"도와주려고 한 건 알겠다. 하지만 나한테 참견할 생각 말고 네 앞가림부터 해. 학생이 수업을 제대로 들어야지."
"누...선생님 수업은 제대로 듣잖아요."
"다른 수업도."
"재미없어요."
"그래도 들어. 아버님이 너한테 많이 기대하고 계시잖니."
살가드는 입을 다물었다. 레드그레이브는 모른다.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장남을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정하게 내버린 남자가, 다루기 어렵다는 이유로 투명인간 취급하던 차남을 후계자로 임명한 이유를. 어째서 장남의 약혼녀였던 원로 영애를 차남이 다니고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학교에 배속되도록 손을 썼는지,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다. 살가드도 굳이 자신과 죽은 형과 부친 사이에 질척하게 고인 심연을, 이 결곡한 여성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오늘, 첫눈이, 형이 죽던 날처럼, 내리고, 바로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그녀를 보기 전까지는.
딩동-딩동-
"이런, 교재를 다 두고 왔잖아. 나 이만 가볼 테니까, 너도 교실로 돌아가. 이 다음 수업부터는 착실히 듣고..."
눈앞에서 등을 돌려 멀어지려는 레드그레이브를 향해, 살가드는 손을 뻗었다. 어느새 자신보다 낮아진 조붓한 어깨를 붙들고, 돌려세워,
"무..."
레드그레이브의 입술은 상상했던 것처럼 보드랍고,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차가웠다. 그것은 참으로 독신瀆神과도 같은 충동이어서, 살가드는 차마 자신의 온기로 그녀의 입술을 녹이지도 못하고, 재빨리 얼굴을 들어올렸다. 레드그레이브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가드, 너..."
"레그."
하려던 말도, 하려던 행동도, 그 한 마디에 얼어붙었다. 그녀가 부모님과 할아버지를 제외한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한 애칭은, 그 한 사람이 자신 외에 사랑했던 또 단 한 명의 목소리를 빌어 참으로 감미롭게 내렸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아이였고, 숨을 거둔 약혼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았을 때는 소년이었던 그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어느새 남자의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좋아해요."
"...살가드."
"좋아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계속."
"..."
레드그레이브는 대답 대신, 자신을 끌어안은 살가드를 밀어냈다. 저항을 거부하고 난폭하게 굴 수도 있지만, 상대는 레드그레이브였다. 그럴 이유도 없거니와 그럴 수도 없다. 살가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고백의 대가를 지금 바로 치르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눈을 감아야 하나? 하지만 살가드는 눈을 감지 않았다. 레드그레이브가 그랬듯,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손을 똑바로 지켜보았다.
"언제, 이만큼 커서는."
각오와 달리 레드그레이브는 그를 때리지 않았다.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뺨을 어루만졌을 뿐.
"아직은 한참 더 동생으로 있어줄 줄 알았는데."
"레그..."
"학교에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잖니."
물기 어린 목소리가 낮게 흘러내렸다. 살가드는 뺨 위에서 떨리는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레드그레이브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조용히 자신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기는 살가드를 똑바로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좋아해요."
'..."
대답 대신, 그녀는 눈을 감았다. 살가드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두 번째 입맞춤은 좀 더 길었다. 두 사람의 맞닿은 뺨 사이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미안해요.
레드그레이브와 살가드는 같은 사람을 향해, 똑같은 말을 떠올렸다.
미안해요. 하지만 나 이 사람을 좋아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좋아했어요. 미안해요...
커튼이 반쯤 걷힌 유리창 너머로, 어느덧 굵어진 눈발이 세상의 모든 소리와 모든 색깔을 하얗게 물들이며 쏟아졌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소리가 되지 못한 투명한 목소리가 거듭 얽히며, 서로의 등을 끌어안은 손이 알 수 없는 미래의 한기에 바르르 떨렸다. 눈이, 그날처럼, 그들이 서로의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렸던 날처럼, 그들을 감싼 세상에 계속 내리고 있었다.
-END.
***2012/12/30
BGM 'Powder Snow' by Rina Ogata
트위터에서 대선 투표율 RT 이벤트로 받은 리퀘입니다.
레아님의 "학원물로 선생님인 레드그레이브와 학생인 살가드" 리퀘인데요...제가 학교를 졸업하고도 강산이 한 번 변하는 바람에...학원물은 정말 감이 안 잡히더랍니다OTL 일단 한국인답게 학원물은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이 연애하는 드라마! 라고 써보긴 했습니다만,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갑자기 무릎 위에 올라앉은 보드라운 한기에 노인은 눈을 떴다. 방금까지 밖에 있었는지, 어린 손녀의 코트는 온통 눈투성이였고 볼은 사과처럼 새빨갰다. 노인은 담요 아래에서 손을 꺼내 손녀의 얼굴을 감쌌다. 띠뜻하게 데워진 커다란 손 안에서 자그마한 얼굴이 꺄르르 웃었다.
"우와! 따뜻해~"
"마리! 할아버지 주무시는데 방해하면 안된다고 했잖니!”
"그치만 엄마아~ 할아버지는 맨날 주무시잖아~"
거실 문간에 버티고 선 어머니가 앞치마를 두른 허리에 손을 얹고 케이크 반죽이 묻은 국자를 휘둘렀다. 하지만 손녀는 할아버지의 품이 도피성逃避城이라는 걸 알고 있어, 어리광을 섞어 칭얼거리며 할아버지의 가슴팍에 차갑게 식은 머리를 묻었다. 노인이 허허 웃으며 담요자락으로 손녀를 감쌌다. 아이가 함빡 휘감고 온 바깥공기는 눈내음이 배어 차갑고도 상쾌했다.
"할아버지, 응, 마리가 눈사람, 이마-안큼 커다란 거 만들었는데, 폴 오빠가 부숴버렸어요. 빵- 하고 차버렸어요. 그래도 마리 안 울었어요. 착하죠? 응? 마리 착하죠?"
"그래요, 우리 공주님. 장하기도 하지."
"눈사람 또 만들 거에요. 할아버지두 같이 가면 안되어요?"
"나도?"
"응! 할아버지도 같이 가요!"
"허허...그러자꾸나."
겨울이 시작된 뒤로는 때로 교회도 갈 수 없을 정도로 자리보전을 했다. 하지만 오늘은 함박눈이 내려서인지 한겨울 같지 않게 포근하여, 불을 세게 돋운 거실 벽난로 앞에 담요를 두르고 앉아 있으려니 조금 더울 정도였다. 딸 부부의 정성어린 보살핌 속에서 휴식을 취한 덕분일까. 근래 기억에 없을 정도로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다. 잠깐 정도라면 괜찮겠지.
딸랑-딸랑-
노인은 팔꿈치 옆의 테이블에 얹힌 종을 집어들어 울렸다. 언제나 그의 시중을 들던 늙은 하인이 휴가를 받아 집에 갔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은, 딸의 모습이 다시 거실 문간에 나타난 다음이었다.
"부르셨어요, 아버지?"
"으음, 바쁜 데 미안하구나, 얘야. 잠깐 밖에 나가보려는데..."
"밖에요? 추우실 텐데요."
"좀 껴입으면 괜찮지 않겠니? 너무 오래 집안에만 있었더니 갑갑하구나."
"하지만..."
딸은 고민했다. 아버지는 남달리 강건한 사람이었지만 나이를 이기지는 못했다. 한 손으로 자신을 안아들고 다른 손으로 생존과 평안을 찾아 절벽을 기어올라가던 아버지는 얼마나 늠름하고 믿음직했던가! 세월의 흐름을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이만큼 안정을 찾아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게 된 지금, 그때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랬듯 자신 역시 아버지의 바람은 모두 들어드리고 싶은 것이 딸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오늘은 바람도 없고 해도 높으니까 잠깐이라면 괜찮겠네요. 그이를 불러올게요."
마침내 결심한 딸은 지금쯤 왕진에서 돌아왔을 남편을 부르러 갔다. 신나서 들까부는 아이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와 그녀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
밤새 내리던 눈은 아침나절에 그치고, 두터운 눈이불을 덮은 세상을 네려다보는 하늘은 손을 대면 부서질 것처럼 투명한 유리색이었다. 나뭇가지에 앉은 눈을 떨어내는 짓궂은 겨울바람도 사람 키만큼 높고 두텁게 다듬은 사철나무 울타리가 미로처럼 얼기설기 엮인 정원 안쪽까지는 들어오지 못했다. 정원의 중심이 되는 분수는 얼어붙어 물소리도 물을 마시는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원을 장악한 것은 눈이불을 소리없이 밟으며 겨울을 춤추는 정적뿐이었다.
담요를 깐 벤치에 두터운 겉옷과 스툴을 겹겹이 두른 노인을 앉히고, 발치와 벤치 양쪽 끝에 벌겋게 달아오른 숯화로까지 놓은 다음에야 딸과 사위는 물러갔다. 모처럼 난롯가를 벗어난 할아버지와 놀겠노라 칭얼대던 손녀는 결국 제 아버지 어깨 위에서 통곡하며 실려갔다. 그렇게 노인은 자신 외에는 살아 움직이는 것 하나 없는 정원에 홀로 남게 되었다.
아니, 이토록 혹독하고 모진 겨울에도 자연은 살아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딸이 두고 간 바구니의 반쯤 열린 뚜껑 사이로 소담스런 갈색 털뭉치가 보인다. 노인이 부지불식간에 팔을 뻗자 화다닥 놀라 달아났던 다람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심스럽게 눈더미 사이에서 머리를 내밀었고, 노인이 던져준 머핀을 좋아라 물고 갔다. 한겨울답지 않게 따스한 날씨에 동면중이던 작은 생물들이 깨어난 걸까. 빵 부스러기를 보고 내려앉는 새들이 있어, 노인은 바구니에 담겨 있던 빵과 과자를 모두 뿌려주었다. 한 번 연구에 몰두하면 환자가 오는 소리도 듣지 못하는 사위는 물론, 만찬 준비에 정신없이 바쁜 딸은 앞으로 한동안은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되었건 자신은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두 번 다시 굶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아아, 그렇구나.
노인은 탄식하고, 딸의 사랑처럼 따스하고 보드랍게 감싸는 직물들 속에서 편안하게 어깨의 힘을 뺐다. 깨달음은 갑작스러우나 놀랍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낭보나 되는 양,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아아, 그렇구나.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로구나.
이제야 다시...
떨구어진 시선 속에 떠올랐던 손은 고개를 들어올리는 동안 사라졌다. 노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 거칠거칠한 손의 임자를 찾았다. 그리고 그 대신, 낯익은 얼굴들을 보았다.
드디어 끝났구나, 기중기!
끈질긴 놈, 오래도 살았다!
행복했냐? 어? 행복했냐고!!
브르베, 슈닐디외, 코슈파유. 배운 바 없고 가진 바 없던 저속하고 천박한 무리. 오래 전에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고통스러울 뿐인 보잘것없는 삶을 마쳤을 죄수들은, 아아, 그간 얼마나 깊은 사랑 속에서 얼마만큼의 위로를 받고 얼마만큼의 참회의 눈물을 흘렸을까. 빈정대고 비웃을망정 그 면면에서는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친우들을 만난 듯한 반가움에 노인은 손을 내밀었다. 비쩍 마른 손끝에 어딘가의 문이 열린 것처럼 희미한 바람이 느껴졌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지. 죽지 못해 살고 있었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밤을 보낼 수 있었던 침대에 감사하고 그 침대에서 다시 오늘밤을 보내기를 기도했었지!
아아, 고마워라. 당신이 우리에게 일용할 빵을 주었지요. 우리가 일할 수 있게 해주었지요. 고마워라. 감사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던가요?
당신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겠지만, 그것이 당신이 우리에게 베풀 수 있었던 최고의 자비. 그러니까 감사하겠소, 시장님, 당신은 좋은 사람이었어.
정말로 자신은 아무 것도 몰랐다. 단지 그 순간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행했을 뿐. 설사 그것이 위선이고 사회를 속이는 짓이었을지라도, 그 행위로 인해 누군가는 빵을 얻었고 누군가는 옷가지를 얻었고 누군가는 또 하루를 영위할 수 있었다. 잘한 일이었기를, 저 유복하고 만족스러워 보이는 낯선 이들이 그때에는 힘든 일상에 찌들려 썩어가던 몽트뢰유 쉬르 메르의 직공들이기를 바랄 뿐.
용서할게요, 아저씨.
검댕으로 시꺼멓게 굳은 폐를 주체하지 못해 숨을 거두었던 소년은, 마치 기념으로 남겨두었다는 듯 간간이 검은 얼룩이 내비치는 얼굴에 밝은 미소를 떠올리며 재잘댔다.
용서할게요. 봐요, 아저씨는 내게 이만큼이나 많은 40수를 주었잖아요?
노인을 향해 내민 검댕으로 더럽혀진 작은 손바닥 위에는 불에 타 겨우 은전이었던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눈부시게 반짝이는 새 은화가 한 닢, 또 한 닢, 바라보는 동안 노인이 수많은 프티 제르베들에게 쥐어주었던 40수 은화가 손바닥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소복이 쌓인 은화가 무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손바닥을 뒤집어 은빛 폭우를 노인의 무릎 위로 쏟아 부은 소년이, 그 소리만큼이나 밝게 부서지는 웃음을 터뜨리며 내달려 가버렸다.
아니, 쏟아진 것은 한낮의 햇살에 반짝이는 눈송이였다. 크고 보드랍고 서늘한,
평안하시기를.
다정하게 닿아 축복을 내리는 생플리스 수녀의 손처럼 새하얀 눈송이가 노인의 머리와 어깨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제가 당신을 위해 한 거짓말이 그랬듯이, 당신이 지금까지 저질렀던 모든 과오와 죄악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저 높은 곳에서 헤아려지기를.
그는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에 노인은 화들짝 놀랐다. 돌아보고 싶었으나 돌아볼 용기가 없었다. 닿을 리 없는 손길이 어깨에 닿아 느껴질 리 없는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2천여 년 전 존귀하고 성스러우신 분께서 그러하셨을 것처럼 자비롭고 온화한 목소리가 그를 위해 저 높은 곳을 향해 탄원했다.
이 사람은 저와 한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여섯 벌의 은식기와 은스푼 하나, 은촛대 두 개는 그의 영혼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대가였습니다. 그는 연민을 알았고 자비를 배웠으며 사랑과 용서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저와 한 약속을 지켰습니다.
눈보라를 예고하는 바람처럼, 선량한 늙은 성직자의 손이 노인의 머리와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노인이 주름진 눈꺼풀을 깜빡이자, 흐려진 눈에 맺혀 있던 습기가 방울졌다. 피처럼 뜨거운 물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혁명을!
바람조차 없던 정원 가득 피어오르기 시작한 폭연爆煙. 부서진 포도鋪道 위로 쏟아지는 총탄과 포탄. 흩날리는 삼색기. 덧없이 스러졌던 젊고 찬란한 생명들은, 그러나 과연 덧없는 것이었을까? 사회는 변했을지도 모르고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원하던 방향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르고 바뀌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노랫소리는 누군가에게 들렸을지도 모르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변화와 개선과 혁명을 위해 스스로를 아낌없이 내던진 젊은이들의 노랫소리를 한 사람이라도 귀담아 들었다면, 한 사람이라도 기억하고 있다면, 시대의 지표는 그들의 피가 프랑스의 들판을 물들이기 전과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그 순수한 열정들이 바라던 바는 그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었을 터!
동지여! 공화국은 그대에게 감사드립니다.
어떤 때에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던 금빛 고수머리와 흰 얼굴의 젊은이는 천상의 빛 속에서 더욱 아름답고 성결해 보였다. 선량하나 현명하기보다는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젊은이들의 행진이 사철나무 미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펄럭이는 삼색기가 종연終演의 막처럼 내려진 뒤,
감사드립니다, 무슈.
아니, 당신은 나에게 감사할 것이 없소. 나는 당신을 구하지 못했소.
아닙니다. 당신의 정원에서 가장 아름답게 핀 장미를 꺾으려던 염치없는 도둑을 구하기 위해 파리의 지하 미궁을 헤메고 다니셨지요. 당신의 등에서 숨을 거둘 때 저는 조금도 괴롭거나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베풀어주신 자비와 용서, 사랑과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멀리 손녀를 부르는 딸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젊은이는 해사하게 미소지으며 사랑했고, 사랑하며 또한 사랑할 여인을 축복했다.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따님이,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어머니, 한 가정의 안주인이 되어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것에...
뒤돌아 사라지는 젊은이를, 몸에 맞지 않는 큼직한 신사용 코트를 걸친 처녀가 따라간다. 겅둥겅둥 깨금발로 뛰는 어깨 너머로 돌아보는 얼굴이 마치 처음 보았던 어렸을 때처럼 다복스레 환히 웃으며,
오세요, 할아버지. 여기 엄청 좋아요. 얼른 오세요!
자아, 함께 가요.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타고났을 아름다움을 되찾아, 새하얀 옷자락 위로 금빛 머리타래를 늘어뜨린 여인의 모습은 마치 성화聖畵의 천사 같았다.
제 딸을 사랑으로 길러주셨지요. 당신에게 무한한 영광과 평안이 있기를! 함께 가요. 당신을 기다리는 곳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의 곁으로.
가요. 네? 가요!
이제야 맞으러 왔어요. 같이 가요.
어서 가요, 삼촌!
풍성한 치맛자락 뒤에서 하나둘씩 고개를 내미는 어린아이들. 수더분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또 한 사람의 천사. 처음 보았던 바로 그 거칠고 메말라 갈라진 손이, 내밀어져 바라보는 동안 보드랍게 차올라 윤기가 흐른다. 아무리 오래도록 생각해 보아도 얼굴도 목소리도 떠오르지 않았던,
누님...
가자꾸나. 오래도록 기다렸단다. 나는 좀 더 기다리고 싶었지만...
시간이 되었다.
난데없이 거세게 불기 시작한 바람은 굵은 눈발과 함께 한 남자의 모습을 부려놓았다. 노인은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단장短杖과 그것을 쥔 장갑 낀 손을 보았다.
주어진 시간이 다 했으니, 일어나라. 나와 함께 가자.
...
왜 웃는 거지?
참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를 데려가기에, 나 이상으로 어울리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그가 웃었다. 사람의 탈을 쓰고 태어난 번견番犬처럼 평생 법과 사회와 정의의 주구 노릇을 하면서도 순수함과 정직함과 솔직함을 잃지 않았던 그가, 살아서는 땅의 법을 따랐던 것처럼 죽어서는 하늘의 법을 따르게 되어, 저 높은 곳에서 내려주신 간명하면서도 위대하고 숭고한 그 법을 따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내 손을 잡아라, 24601호. 너를 기다리는 곳으로 가자.
가요.
그래요, 이제는 가요.
저마다 내밀어주는 손들이 다정하고 따스하여, 노인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맞이하러 온 사람들을 따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디뎠다. 그토록 무겁고 둔중하던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 아아, 몇 걸음 걷지 않아 정말로 날고 있는 것만 같지 않은가!
“할아버지! 할아버지!! 엄마, 할아버지가 눈을 안 떠!!”
어깨 너머로 돌아본 광경 속에, 흐뭇하게 미소지은 얼굴을 살짝 기울인 채 눈을 감은 자신에게 매달린 손녀와 놀라 달려오는 딸이 있었다. 아아, 울지 말아라, 코제트. 네 미소를 보기 위해 나는 콧노래를 부르고 인형을 고르고 네 손을 잡아주지 않았더냐. 나 없이 살아갈 시간이 아무리 길다 해도, 언젠가 너를 맞이하러 올 내 손을 잡고 뒤돌아 보면 그리 길지 않은 여정일 터.
문득, 노인은 처음으로 그와 나란히 걷고 있는 잉크빛 제복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당신에게는 말해본 적 없군요.
나에게? 무엇을?
Joyeux Noël.
...
Joyeux Noël, Monsieur Javert.
...Joyeux Noël, Jean Valjean.
*****
1840년 12월 24일, 영국 요크셔의 한 병원 후원에서 윌팀 포슐르방 - 태어나서 25년 간 장 발장이라고 불렸으며 이후 19년을 24601, 이후 8년 간 마들렌이라 불렸던 사내가 죽었다. 향년 71세. 1832년 시가전으로 혼란스러운 파리를 탈출하여 요크셔에 자리를 잡은 뒤 외동딸을 지역 유지 출신의 저명한 의사와 결혼시키고, ‘무슈’라는 호칭과 함께 마을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을 한 몸에 받았던 자애로운 노인이었다.
Good tidings we bring to you and your kin
Good tidings for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END
***2004/12/25 작성, 2012/12/25 수정.
Joyeux Noël (English: Merry Christmas)
뮤지컬 <레미제라블> 10주년 기념 콘서트에 빠져 있던 8년 전 크리스마스를 맞아 썼던 글을, 뮤지컬이 영화화된 2012년 크리스마스에 다시 수정하려 올려봅니다. 원작과 달리 발장이 코제트의 결혼식 날 죽지 않고, 마리우스가 죽은 뒤 예정대로 코제트와 영국으로 떠나 천수를 누렸다는 패러렐입니다. 당시 <레미제라블> 완역본을 읽은 다음이라 뮤지컬에 없던 설정도 다수 포함되어 있네요. 물론 발장은 콤 윌킨슨, 자베르는 필립 콰스트 이미지입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제 안의 발장과 자베르는 저 두 분의 이미지로 남을 듯 합니다. 미안해요, 휴 잭맨. 러셀 크로에게는 별로 미안하지 않...
따님이 찻잔을 입술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었다. 단단하고 매끄러우며 '인형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작고 아름다운 얼굴이 갸웃거렸다. 티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레드그레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이 열매의 달 30일이잖아요. 축제는 내일부터 시작이지만, 벌써부터 들떠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에요."
"무슨 축제?"
"그거야 페리아름이죠."
"페리아름?"
따님은 마치 처음 듣는 단어라는 듯 되물었다. 내가 발음을 잘못 했나? 레드그레이브는 내심 당황하여 재빨리 말을 이었다.
"네, 페리아름. 한 해의 끝에 닷새 동안 열리는 미덕과 행운, 성실과 평화, 희망의 축제 말이에요."
"한 해의 끝이라니? 아직 가을이잖아?"
"곧 추분이니까요. 한 해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는..."
"아니, 그러니까 왜 가을에 한 해가 끝나는 건데?"
"왜라뇨..."
레드그레이브는 말문이 탁 막혔다. 따님의 진지한 어조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들의 지시자는 농담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 침실 밖에서는. 그러므로 따님이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아 묻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문제는 '왜 가을에 한 해가 끝나느냐'는 질문이 '왜 사람에게는 손가락이 다섯 개 달린 손이 두 개 있느냐'라든가 '왜 닭은 병아리가 아니라 달걀을 낳느냐'와 같은 수위에 있다는 점이었다. 즉, 너무 당연한 나머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설명할 수는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저, 주제넘은 말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레드그레이브는 저도 모르게 안도하며 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살가드가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따님께서 절기節氣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신 게 아닐까요?"
"아! 그럴 수도 있..."
"난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았어."
칼날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반색하는 목소리를 내리쳤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보석처럼 다채로운 경질硬質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살가드가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찔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어머니 성녀님의 딸들은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아. 너희들과는 다르다구."
성녀님의 이름이 레드그레이브와 살가드의 영혼 깊숙이 새겨진 계명誡命을 울렸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인형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소녀는 화염의 성녀께서 친히 성유계에 세우신 당신의 따님이었다. 평행세계의 연옥에서 끌어올려진 전사를 현세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성녀님의 계명으로 묶인 전사들은 결코 따님을 거역할 수 없었다. 게다가 레드그레이브와 살가드가 속한 '덱'이 섬기는 따님은 평소 자상하고 상냥한 만큼 분노는 과격하고 처벌은 혹독했기에, 두 사람은 더 이상 따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난 기억을 잃지 않았어. 한 해는 가을에 끝나지 않는다고. 한 해는..."
고집스럽게 중얼거리면서도, 따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찻잔을 든 가늘고 단단한 손가락이 달달 떨릴 때마다 울리는 소리가 얄궂도록 영롱했다.
"둘 다 나가. 당장."
다행히 따님에게는 걷잡을 수 없이 기분이 나빠지기 전에, 아직 아무런 실수도 저지르지 않은 자신의 전사들을 물러가게 할 분별력이 남아 있었다. 덕분에 레드그레이브와 살가드는 어떤 상처나 고통, 눈물과 수치심 없이 따님의 거처를 나올 수 있었다. 그날의 티타임은 그렇게 끝났다.
그럴 터였다.
"저...잠깐, 시간 괜찮아?"
*****
처음에는 잘못 본 것인가 했다. 해거름에 젖어 어둑어둑한 마도에 인적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봐도 요마가 아닌 사람이었고, 주의깊게 보는 동안 그 실루엣이 낯익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치볼드는 걸음을 멈추고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짐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함께 걷고 있던 동료 역시 걸음을 멈췄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이 정도 일에 일일이 소리내어 의사를 전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갈색 머리칼의 어콜라이트가 경계하며 바라보는 가운데, 방랑자는 황야에서 마수를 추적할 때처럼 소리없이 걸음을 옮겼다. 목표는 거리 저편, 외딴 골목 언저리에서 어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였다.
"브라우닝?"
"흑!"
어깨를 잡힌 탐정이 소스라치게 놀라 목이 메이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런 목소리가 어떨 때 나오는지 알고 있는 아치볼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브라우닝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남자치고 작은 편은 아니지만 자신에 비하면 호리호리하고 아담한 몸이 어이없을 만치 간단히 휘돌렸다.
"브라우닝, 자네 얼굴이..."
"아파, 아치볼드. 놔줘."
"아, 미안하군."
아치볼드는 황급히 잡은 손을 놓았다. 브라우닝은 입술을 깨물고 잡혔던 어깨를 다른쪽 손으로 감싸쥐었다. 평소 바르게 뻗어 있던 등의 선이 굽은 것이 눈에 거슬렸다.
"뭐야, 브라우닝이었어요?"
브라우닝도 익히 알고 있는 밝은 음성이, 벌써 깔리기 시작한 밤안개 너머에서 들려왔다.
"오랜만이네요. 이쪽으로 올래요?"
"아, 메렌, 나는..."
"난 지금 움직일 수 없으니까, 이쪽으로 와요."
카드 매지션의 목소리는 명랑했지만, 주장을 관철시키는데 익숙한 어콜라이트 특유의 고집이 배어 있었다. 아치볼드는 어깨를 으쓱하고, 목소리가 들린 쪽을 가리켰다. 브라우닝은 잠깐 머뭇거린 다음 메렌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걸음이 그리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 것 역시 눈에 거슬려, 아치볼드는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오랜만이네요, 브라우닝."
"오랜만...그건 다 뭐야?"
마침내 서로가 보일 정도로 다가선 브라우닝이 놀란 어조로 물었다. 밤에 다니는 사람이 없는 만큼 형식적으로 밝혀진 가로등 아래 메렌이 서 있었다. 크고 작은 상자를 너댓 개 겹쳐 두 손으로 받쳐들고, 발치에도 비슷한 상자가 든 종이가방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혼자 다 들 수 없는 분량이었으니, 잠시나마 길바닥에 내려놓고 아치볼드를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귀중한 물건일 것이다.
"아, 저희 따님 심부름이에요. 사오라고 하신대로 사다 보니 이렇게 많아졌지 뭐예요."
"심부름..."
희미해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불빛 때문에 얼굴을 완전히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얼굴을 부서져라 응시하는 회갈색 눈동자가 시각이 아니라 촉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 브라우닝은 몇 번 눈을 깜빡인 끝에 제법 그럴듯하게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군."
"뭘요, 이제 다 왔는 걸. 그보다 브라우닝은 이런 시간에 혼자 밖에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밤의 마도는 위험할 텐데."
"응? 아아, 나도 심부름을...흡!"
불쑥 뻗어나온 손이 턱을 잡아채는 바람에 브라우닝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거칠게 젖혀진 머리에서 중절모가 굴러떨어져, 가로등 불빛 아래 탐정의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너무하네요, 아치볼드. 기껏 사람이 모르는 척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건가, 이 얼굴은."
아치볼드는 브라우닝의 허세를 무시했던 것처럼 메렌의 불평 역시 무시했다. 브라우닝의 단정한 얼굴은 보랏빛 멍과 붉은 생채기로 무참하게 얼룩져 있었다. 젖혀진 목에 휘감긴 밧줄무늬가 셔츠 칼라 아래로 기어들어가, 굳이 보지 않아도 그 아래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놔줘...아치볼드."
"어떻게 된 건가."
"아치볼드..."
"어떻게 된 거냐고 묻고 있다."
"뻔한 거 묻지 말고 놔줘요, 아치볼드. 정말 아파 보이니까."
메렌의 뾰족한 목소리에 찔린 다음에야 아치볼드는 손을 놓았다. 브라우닝은 억지로 젖혀졌던 어깨를 감싸쥐고 고개를 숙었다. 들고 있던 상자를 조심해서 내려놓은 메렌이 굴러떨어진 중절모를 집어들었다. 탐정의 머리에 모자를 올려놓으며 해사한 얼굴이 굳어졌던 것도 잠시, 곧 밝게 웃으며 명랑한 목소리를 던졌다.
"그래서, 어떻게 따님에게서 도망쳤어요?"
"메렌!"
놀란 것은 브라우닝만이 아니었다. 깜짝 놀라는 방랑자를 향해, 성녀님의 어콜라이트이자 당신 따님의 '덱'에 속한 청년이 쓴웃음을 보냈다.
"뭘 그렇게 놀라요, 아치볼드."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따님에게서 도망치다니."
"왜요? 코브나 로쏘는 자주 달아나잖아요."
"그리고 항상 '불려' 오지. 따님에게 계약한 전사를 언제 어디서나 불러올 수 있는 권능이 있는 이상, 달아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가혹한 소리를 하는 건가."
"가혹한가요?"
메렌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브라우닝이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어콜라이트의 차분한 목소리는 그가 사용하는 카드처럼 예리하게 탐정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따님께서 그러는 게 재미있으시다면..."
"메렌!"
퍽! 난폭한 소리에 브라우닝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상체를 휘청이며 한 걸음 물러서는 메렌과 뻗은 주먹을 휘둘러 다시 후려치려는 아치볼드. 생각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그만둬, 아치볼드...윽!"
"브라우닝!!"
아치볼드의 팔을 잡고 말리려던 브라우닝이 제풀에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꺾고 비틀거렸다. 깜짝 놀란 아치볼드가 그를 부축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에요, 브라우닝."
그 사이 몸을 바로잡은 메렌이 재빨리 다가와 휘청이는 탐정을 살폈다.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창백한 얼굴, 호흡은 거칠고 짙은 색깔의 수트에서는 희미하게 피냄새가 흘러나온다. 메렌은 쯧, 혀를 차고 아치볼드를 돌아보았다.
"내가 여기서 짐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브라우닝을 데리고 집으로 가세요. 가서 누구든 보내줘요."
"혼자 있어도 괜찮겠나?"
"안 괜찮다고 하면, 피냄새 풀풀 풍기는 브라우닝을 데리고 여기 있어줄 건가요?"
메렌이 피식 웃으면서 품에서 한 뭉치의 카드를 꺼냈다. 밤의 마도는 아무리 숙련된 전사라도 혼자 있기에는 위험한 곳이다. 하지만 메렌은 자신이 브라우닝과 함께 돌아가겠다는 말도, 따님이 요구한 물건들 대신 브라우닝을 포기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브라우닝의 안위를 온전히 아치볼드에게 맡기고 자신이 위험을 자초할 뿐. 그것이 방금 구사한 언어폭력에 대한 사죄라는 것을, 아치볼드는 물론 서서히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브라우닝도 알 수 있었다.
"아수라와 맥스를 보내도록 하지. 잠깐만 기다려라."
그래서 아치볼드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의 품에 안긴 브라우닝이 희미한 신음과 함께 메렌의 이름을 불렀다. 불렀나? 착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라우닝이 정신을 잃으며 마지막으로 불러준 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생각만으로도 메렌은 웃을 수 있었다.
짓궂게 굴어 미안해요, 브라우닝. 당신이 당신의 따님에게 얼마나 사랑받는지 알 때마다, 당신과 다른 따님을 모시게 된 내 '이번 생'을 용서할 수가 없게 되지 뭐에요. 이런 나를, 아마 성녀님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시겠죠?
첫 번째 야귀의 목이, 메렌이 날린 하트의 6에 깔끔하게 베어 체액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날아갔다.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감각은 시각이 아니라 통각이었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처럼 아팠다. 고통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따님의 사랑은 언제나 처음 느끼는 고통으로 그를 물들였다. 이번만큼은 죽는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잃고, 마치 새로 태어난 듯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떠 고통과 수치심에 울며 몸부림 치던 과거의 자신을 배신했다.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복종할 수 없었다. 굴복하지 못해 반항하면 하는 만큼, 견디다 못해 도망치면 도망치는 만큼, 따님은 그를 사랑하셨다. 가장 재미있는 장난감으로 소중히 여겨주셨다. 그래서 브라우닝은 언제나 죽고, 언제나 다시 태어나고, 언제나 울고, 언제나 희망을 품고, 언제나 믿고, 언제나 배신 당하고, 언제나 좌절하고, 언제나 죽었다.
"...으윽..."
"깨어났나?"
두 번쩨 감각은 청각, 그리고 촉각. 눈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눈 위에 얹힌 보드랍고 촉촉한 물수건 때문이었다. 몇 걸음 밖에서 시작된 목소리가 한 마디만에 곁으로 다가오고, 수건이 살그머니 사라졌다. 눈을 깜빡이자, 낯선 천정과 어둑한 방안,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 보는 구릿빛 얼굴이 보였다. 희미하게, 흐릿하게, 흔들리며.
"아치...볼드..."
"아직 아플 거야. 치료하지 못했으니까. 무리해서 말하지 말게. 조금 더 누워 있어도 괜찮아."
"여기는..."
"우리 따님의 집이야. 자네가 정신을 잃는 바람에 이리 데려올 수밖에 없었어."
그 말에, 브라우닝은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던 때를 기억해냈다. 처음으로 따님의 발치가 아닌 곳에서 정신을 잃었다. 따님에게 쫓겨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따님은 '심부름을 보낸다'고 하셨지만, 그 이룰 수 없는 명령은 완곡한 추방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아이자크에게 떠밀려 나온 뒤 정처없이 걷던 중 밤이 되었고, 자신을 발견한 아치볼드와 메렌이,
메렌이,
"메렌! 아치볼드, 메렌은...!"
"아아, 자네가 자기를 걱정하더라고 전해주겠네. 기뻐할 거야."
"무사하...한가?"
"다른 병실에서 마르그리드가 돌보고 있네."
"아...다행..."
브라우닝은 눈을 감았다. 눈꼬리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아치볼드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어 더욱 안타까운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고, 따스한 물방울은 방랑자의 거친 손끝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아치볼드는 조심스럽게, 그렇지 않아도 안팎으로 상처 입은 얼굴에 한 조각의 통증이라도 더할까 주의하며, 브라우닝의 뺨에 손끝을 대었다.
"아치볼드..."
"어째서 자네는, 브라우닝, 자네는 항상 이렇게..."
"브라우닝은 깨어났어?"
문이 열리는 소리, 묵직한 발소리, 낭랑한 목소리. 아치볼드의 목소리와 손끝이 사라졌다. 브라우닝은 힘겹게 고개를 젖혀 소리가 들린 문쪽을 바라보았고, 당황하여 몸을 일으키다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아읏...!"
"아, 무리해서 일어나지 마. 비명도 당신의 따님을 위해서 아껴두고."
노래하듯 리드미컬한 목소리가 높은 곳에서 흘러내렸다. 성녀님의 따님들은 서로 비슷한 듯 하면서도 이목구비와 표정, 머리 모양과 색깔, 옷과 장신구가 모두 다르다. 호두색 머리를 소년처럼 짧게 자르고 눈매가 영롱한 브라우닝의 지시자와 달리, 아치볼드들의 지시자는 바다색 곱슬머리를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졸린 듯 나른한 표정으로 워켄의 품에 마치 인형처럼 - 진짜 인형처럼 - 안겨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다른 '덱'의 전사를 줍다니 재미있네. 덕분에 우리 메렌이 많이 다쳤어."
"죄송...죄송합니다..."
"뭐, 괜찮아. 덕분에 그 아이가 아파하는 걸 오랜만에 봤거든. 재미있었어. 괜찮아."
따님이 느긋하게 웃으며 워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각진 마디를 가진 자그마한 손이 의사의 옷깃 위로 드러난 목덜미를 아프게 움켜쥐었고, 손톱 끝은 금새 붉게 물들었다. 감히 성녀님의 따님 앞에 누워 있다는 황망한 상황과 자신의 것이 아닌 피냄새에 당황한 브라우닝이 몸둘 바를 몰라 하자, 아치볼드는 한숨을 쉬고 탐정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따님, 이대로 돌려보내겠다고 결정하셨다면 너무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
"어머나, 나는 워켄을 괴롭히고 있는 걸. 왜 브라우닝을 걱정하지?"
눈꼬리가 낮게 깔린 따님의 시선이 브라우닝을 휘돌아 아치볼드를 향했다. 자신의 따님이 그러하듯 와이번의 발톱처럼 매섭게 내려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시선은 충분히 서펜트의 사냥에 비견할 만큼 육중하고 위협적이었다. 브라우닝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고, 아치볼드의 손이 떨림을 숨기기라도 하듯 탐정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제가 왜 브라우닝을 걱정하는지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사자에게 자기 입으로 들려주는 걸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브라우닝은 치료가 필요합니다. 다른 '덱'의 전사가 이 집에서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브라우닝이 듣기에 따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벨벳처럼 부드럽고 나른했다. 하지만 그와 맞닿은 아치볼드의 손이 움찔 경련했고, 방랑자는 그대로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머리를 숙였다.
"자비를, 따님, 부디 자비를."
"벌써? 재미없게. 좀 더 버틸 줄 알았다구~"
따님의 실망한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때까지 손톱으로 후벼파고 있던 목덜미를 놓은 손이 의사의 입술을 살짝 건드렸다. 워켄은 고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깨물고 있던 입술을 벌려, 자신의 피로 젖은 손끝을 핥았다. 따님이 간지러운 듯 키득키득 웃었다.
"있잖아, 브라우닝. 워켄은 내 허락도 없이 너를 치료하려다 나한테 벌을 받고 있어. 아치볼드는 너를 너의 따님께 돌려보내 달라고 나한테 간청하고 있고. 내 '덱'에서 제일 자존심이 강한 두 사람이 이렇게 쉽게 굴복하다니, 당신 정말 재미있어. 내 '덱'에 두고 싶을 정도야."
"...원하시는대로...될지도 모릅니다."
"어?"
그 의외의 대답에, 따님이 놀란 듯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브라우닝을 바라보았다. 탐정은 조금도 치료가 되지 않아 여전히 만신창이인 몸을 힘겹게 일으켜, 침대 위에 앉는 것까지 간신히 성공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저의 따님께서는...불가능한 심부름을...이룰 때까지 돌아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추방 당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니..."
"무슨 소리야. 그렇게 시시하게 자기 전사를 포기하는 자매는 없어."
"예?"
"수수께끼라니 재미있네. 얘기해 봐. 무슨 심부름이었어?"
"아..."
"말해 보라니까. 어딘지 모르는 곳에 가서 무엇인지 모르는 거라도 가져오라고 했어?"
"에? 그, 그걸 어떻게?!"
브라우닝은 말 그대로 소스라치게 놀라 따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토록 느긋하고 여유롭던 따님 역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것에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어, 그러네...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을까...어떻게..."
따님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이제는 핏방울 하나 남지 않은 손을 볼에 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들의 지시자를, 아치볼드와 워켄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그들의 태도에서, 이 따님에게는 드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수라. 그거 가져와."
문득 고개를 든 따님이 뜬금없이 말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잠시 후 상자 하나가 브라우닝이 앉은 침대 발치에 나타났다. 옆면에 멋들어진 숙녀용 모자와 작은 새가 그려지고, 거미줄처럼 섬세한 레이스를 겹겹이 접은 하얀 리본으로 포장된 직사각형 상자였다. 두 뼘 폭에 세 뼘 길이, 한 뼘 높이. 시트 위에 놓인 모양새로 보아 가볍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무거운 것도 아니어 보였다.
"아치볼드. 저거랑 브라우닝을 가져가."
"예?"
"아니지. 브라우닝을 데려다 주고, 가는 김에 저것도 갖다 줘."
"알겠습니다."
"저...따님...?"
"브라우닝."
아치볼드들의 지시자가 브라우닝을 바라보았다.
"너의 따님에게 전해줘. 저거하고, 나의 인사..."
그리고 또 따님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그렇지. 평화를 담아, Holy Advent- 라고."
단단하고 매끄러우며 '인형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작고 아름다운 얼굴이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
"내게, 이것을...?"
따님이 중얼거렸다. 두툼한 카펫 위에 방금 쌓은 넝마더미처럼 구깃구깃하게 쓰러진 브라우닝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의 손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아치볼드의 안장 앞에 앉아 안기다시피 기계마를 타고 온 브라우닝은 이번에야말로 따님의 발치에서 정신을 잃었다.
"자매가 내게 이것을, 평화를 담아..."
그것은 레드그레이브나 쉐리, 리즈, 에바리스트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은색 금속을 세공해, 길쭉한 육각형에 끄트머리가 가시처럼 뾰죽한 이파리가 어우러져 월계관처럼 원형 테를 이루었다. 원형의 사방에는 촛대의 받침과 흡사한 가시가 솟은 원형 돌기가 네 개 묻혀 있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네 개의 초를 꽂을 수 있는, 가시면류관 형태의 촛대였다.
"저, 따님. 초가 같이 들어 있습니다."
레드그레이브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언제나 그녀의 등 뒤를 지키던 살가드는 보이지 않았다. 브라우닝이 '심부름'을 간 뒤 따님의 침실로 불려간 그는 밤새도록 비명을 질렀고, '손을 떨지 않고 찻잔에 홍차를 따를 수 있을 때까지'라는 단서와 함께 자신의 거처에서 근신 중이었다.
"초?"
"예. 네 개인데요."
따님의 시선이 촛대에서 브라우닝을 지나 레드그레이브가 손에 든 초에 멈췄다. 피처럼 붉은 색깔의 길고 가느다란 초가 네 개. 따님은 눈을 깜빡였다. 깜빡, 깜빡. 시야 끄트머리에 비친 창 밖으로 낙엽이 흩날려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본디 하얀 파편이 흩날리며, 더 춥고, 더 다망하고, 모든 것을 마감하고 또다시 시작하는, 어제와 오늘이 실은 다르지 아니하나 의미를 부여하여 같지 아니하게 보내는 특별한 한때.
"초를 꽂아...아니, 이리 줘."
"네? 아, 네..."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레드그레이브는 따님에게 초를 건넸다. 따님의 손은 그 초 뭉치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로 작고 가냘팠지만, 그래도 떨어뜨리거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은으로 조각한 호랑가시나무 화환 모양의 촛대에 네 개의 초를 꽂을 수 있었다.
"리즈, 불을."
"네."
레지먼트 제복이 피부처럼 잘 어울리는 청년이 손끝을 튕겨 한 개의 초에 불을 붙였다. 두 번째 초에 불을 붙이기 전에 따님을 바라본 것은 오랜 세월 전장에서 살아남은 에이스의 직감이었다. 과연 따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흔들어 그를 물러나게 했다. 네 개의 초, 한 개의 불꽃, 세 개의 기다림.
"나중에 붙일 거야. 일주일 뒤에 하나. 또 일주일 뒤에 하나 더, 그리고 또 일주일 뒤에 마지막 하나. 그러고 나면..."
한 해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지.
따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와 계약한 전사들의 영혼 깊숙이 새겨진 계명을 울렸다. 높은 탑에 매달린 크고 작은 종들처럼, 영롱하고 조화롭게, 딩-댕-동.
함박눈이 내리고, 하얀 입김을 벙어리장갑으로 녹이고, 거리에는 알록달록한 불빛과 노랫소리, 새파란 나무와 빠르게 달리는 사슴, 예쁘게 포장된 상자와 졸리지만 잠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이들. 산산이 부서진 기억의 파편이 이어지고 끊어지고 부서지고 흩어져, 따님의 뺨에 투명한 얼룩을 남겼다.
"고마워, 브라우닝. 사랑해. 이제...편히 쉬어."
브라우닝이 숨을 거두었다. 따님은 언제고 부르기만 하면 그녀 곁으로 돌아올 가장 사랑하는 전사의 육신이 재로 돌아가는 것을, 애처롭고도 정다운 미소를 띄고 지켜보았다.
강림절의 첫 번째 불꽃이 파르르 떨렸다.
-END
***2012/12/18
원래는 때도 때인 만큼 따뜻하고 훈훈한 연말연시 풍경을 써보려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진도가 안 나가더라구요. 하룻밤이면 될 줄 알았던 글을 일주일 동안 잡고 끙끙댄 결과 깨달았습니다. 훈훈은 개뿔=ㅅ= 여기는 피와 살과 눈물과 체액과 배신과 음모가 난무하는 세계였던 거예요! 그래서 이성을 버리고 본능이 흐르는대로 썼습니다. 후후후, 이게 나의 따님이야! 나의 언라이트라고!! 연말이니까 내가 나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다 덤벼, 내가 이 구역의 따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