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이 나빴다. 지독하게 나빴다. 로키는 서재 문을 열기 전부터 이 너머에 뭔가 나쁜 일, 지독하게 나쁜 일, 엄청나게 나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예감했다. 틀림없이 잠가 두고 나갔던 문이 심지어 닫혀 있지도 않다는 사실이 그 예감을 보증했다. 로키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한 손으로 짧지만 강력한 반격 - 방어가 아니라는 점이 참으로 로키다웠다 - 마법진을 준비하며, 다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맙소사."
눈에 보인 광경은 각오했던 것보다 더 나빴다. 쓰러진 책장이나 실험대, 바닥에 마구잡이로 쏟아진 책이나 부서진 실험도구는 괜찮았다. 언제나 남을 골탕 먹이는 마법을 연구하는 로키의 서재가 시련을 겪는 일은 드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토르?"
"꾸, 꾸엉..."
서재 한가운데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토르가 마치 달아날 기회를 놓쳤다는 듯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달아날 기회라니, 그에게는 그런 것 따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의. 토르에게는 그랬다.
"꾸엉..."
"닥치고 잠깐만 기다려 봐."
"꾸..."
토르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로키는 마법진을 그리려던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차피 일어난 일이라면 재빨리 수습해야 한다. 다행히 로키의 서재에는, 꼭 와야 하는 용건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 꼭 와야 하는 용건이 있더라도 문밖에 방해하지 말라는 팻말을 걸어 둔 이상 먼저 노크를 할 것이다. 아참, 팻말을 걸어야지. 어디 있더라...없었지. 그럼 만들어야겠군.
간단한 문구가 써진 팻말을 만드는 마법은 아스가르드 제일의 마법사에게는 손가락을 튀기는 것처럼 손쉬운 일이었다. 시전자의 심기를 그대로 반영한 <건드리면 뭅니다>라는 경고가 유려한 룬 문자로 써진 팻말을 문밖에 걸고 문을 잠근 로키는,
"아무 거나 손대지 마!!!"
돌아서자마자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꾸엉?!!!"
땅에 떨어진 플라스크를 어설프게 집어 들던 토르가 화들짝 놀랐다. 플라스크는 바닥에 떨어졌고, 쨍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고, 안에 들어 있던 겨울의 정수가 사방으로 튀었고, 얼음 알갱이처럼 차디찬 파편에 놀란 토르가 주저앉았고, 그의 엉덩이 아래에서 어떻게 들어도 방귀로 착각할 수 없는 꽈직!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깐 기다리랬잖아, 이 미련곰퉁이야!"
"꾸어? 쿼허허..."
그 목울림은 폭소가 틀림없었다. 어떻게 이런 때에 웃을 수가 있지? 하긴 곰을 미련곰퉁이라고 불렀으니 웃기기도 하겠다. 그 대책 없는 낙천주의는 곰.이.되.어.서.도. 여전하군, 마이 브라더.
"형은 정말 골칫거리야, 토르."
"꾸엉..."
토르는, 놀랍도록 평소와 똑같이 푸르른 눈동자를 꿈뻑꿈뻑하더니, 멋쩍은 듯 굵은 목을 좌우로 돌렸다. 로키도 그리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지금의 토르는 평소보다 두 배 정도 높고 세 배 정도 넓었다. 고개를 한껏 젖히고 올려다봐야 할 만큼 높은 곳에서 커다란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창문으로 비껴드는 햇살에 이 거대한 곰의 전신을 감싼 금색 터럭이 번쩍번쩍 빛났다.
"내 짐작이 맞다면, 지금 형이 깔아뭉갠 건 실험대 위에 있던 시험관이야. 아냐, 일어나지 마. 유리 파편으로 그 두툼한 가죽에 흠집 하나 날 것 같아? 형은 지금 절망에 주저앉아 있는 게 맞아. 그 시험관에는 오늘 아침 완성한 해독제가 들어 있었단 말이야."
"꾸어엉?"
"친애하는 토르, 나는 뱀의 혀가 없다 보니 곰소리는 못 알아들어. 하지만 지금 그 소리가 '뭐?'였다고 보고, 기쁘게 대답해 줄게. 모습을 바꾸는 독의 해독제야. 형이 내 허락도 없이 널름 집어먹은 - 틀림없이 그랬을 거라고 난 확신해 - 황금사과에 주입해 두었던 거."
"꾸어...어어어어?!"
큼직한 앞발을 조붓한 주둥이 앞에 대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 사람 얼굴만큼 큰 앞발에 날카로운 네 개의 발톱이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포근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바람에 로키는 새삼 치를 떨었다 - 곰이 깜짝 놀라 주둥이를 커다랗게 벌렸다. 로키의 목을 단숨에 물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예리한 송곳니가 곰 전용 치약 - 이라는 것이 있다면 - 광고를 찍는 것처럼 하얗게 반짝반짝 빛났다.
"그래, 이제 형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알겠어?"
"꾸웅..."
토르 - 였던 거대한 금색 곰은 푸른 눈을 꿈뻑거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꼬시다. 로키는 곤란하고 화가 나는 와중에도 한 가닥 희열을 맛보았다. 어차피 독과 해독제가 모두 완성되면 토르에게 먹이려고 했었지만 - 그렇다, 로키는 벌써 몇 번이나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토르를 골탕 먹이겠다는 야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 이렇게 어설픈 형태여서는 안되었다. 독과 해독제를 만들어낸 이상으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시간과 장소를 정할 생각이었다. 그게 언제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 여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똑똑.
"로키, 아직 멀었어?"
경쾌한 노크 소리와 함께 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할.
"마법서 하나 찾는데 얼마나 걸리는 거야? 올파더가 서두르라셔."
그렇다. 로키는 지금 오딘 올파더에게 겨울의 정령에 관련된 마법서를 가져다 드려야 한다. 그리고 그 마법서는 저 미련곰퉁이가 푸짐한 엉덩이로 깔고 앉은 무수한 책더미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게다가,
"혹시 오면서 토르 못 봤어? 올파더가 기왕이면 토르도 불러 오라셨어. 누가 아까 이쪽으로 가는 걸 봤다던데."
운명은 로키의 편이 아니었다, 늘 그랬듯이. 로키는 얆다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로키? 문 열어줘. 아니면 내가 열어도 돼? 내가 문 열어도 물 거야?"
"잠깐만, 시프."
로키는 재빨리 마음을 정했다. 그리 자주 쓴 적은 없지만 익숙하게 암기하고 있는 주문을 외우며, 간단해 보이지만 실로 정교하고 복잡한 손길로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잘 가, 마이 브라더. 언젠가 다시 만나자구."
"꾸엉? 꾸엉? 꾸어어어어?!"
"로키? 이게 무슨 소리야?"
문이 덜컥 열렸다. 아니, 자물쇠가 잠긴 채로 여신의 손에 부서졌다. 뒤틀린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민 시프는,
"우와, 이게 다 무슨 난장판이야?"
쓰러진 책장이나 실험대, 바닥에 마구잡이로 쏟아진 책이나 부서진 실험도구, 그 위로 소복하게 흩날리는 금빛 먼지와 몇 가닥의 금색 터럭,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는 로키를 보았다.
"시프, 나야말로 토르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
로키가 무흠한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를 내리깔고 서글프게 말을 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내 서재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물어봐야 하거든."
"뭐? 토르가 이랬어? 왜 그랬지?"
그거야 갑자기 거대한 곰으로 변신했기 때문이지.
"일단 올파더가 말씀하신 책부터 찾자. 나머지는 나중에 정리하는 거 도와줄게."
선량한 시프, 언제나 다정하고 올곧은 여신이 성큼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군화발 아래,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시험관이 철퍽, 로키의 눈처럼 선명한 녹색 액체를 퍼뜨렸다.
"으악! 이거 뭐야? 내가 깬 거 아니지?"
"아니야, 시프. 신경 쓰지 마. 나중에 다시 만들면 되는 거니까."
그래, 토르에게 먹일 해독제 따위 나중에 다시 만들면 돼. 일단 미드가르드로 가서, 곰의 모습 그대로 날려간 토르가 어떤 꼴로 지내는지 충분히 비웃어 준 다음에 말이야.
*****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처음에는 화전민들이 긴가민가 주고받는 객쩍은 소리였다. 점차 목격자가 늘어났다. 야수나 넘어지는 나무, 낙석, 홍수로 불어난 계곡 등에서 목숨을 구원 받았다는 간증도 이어졌다.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는 아이들의 주장은 쉽게 무시되었지만. 소문은 산자락을 타고 내려와 저잣거리에 풀리고, 도시에 전해지고, 상인과 영주와 사제와 왕들의 귀에 들어갔다.
곰이었다, 일단 모양새는. 놀랍도록 거대하고, 인간의 말을 이해하며, 더없이 선량하고 호의적인 데다, 이교도의 옛 전설에나 나올 법한 황금색 모피를 지녔다고 했다. 그렇다면 평범한 짐승일 리 없다. 문제는 그것이 신의 사자인가? 아니면 악마의 화신인가.
왕들은 그것이 자신의 권위를 축복하기 위해 신이 보낸 사자이기를 바랐다. 사제들은 그것이 퇴치하여 자신들이 모시는 신의 위엄을 보일 수 있는 악마의 화신이기를 바랐다. 상인들은 그것이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희귀한 보물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사냥꾼들은 그것이 정말로 인간의 말을 이해하는 선량하고 호의적인 영물이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꾸어어어어엉!"
"놔라, 이 괴물!!!"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곰에게 붙들린 사냥꾼이 하나뿐인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갈고리 같은 손톱을 허리띠에 걸어 실팍한 장정을 가볍게 들어 올린 곰이, 그대로 패대기를 치려다 말고 움찔 멈췄다.
"자극하지 마세요, 삼촌! 그러다 돌아가시면 병상에 계신 숙모님은 어떻게 해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잡이가 소리쳤다. 이미 다른 사냥꾼들은 무기를 집어던지고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난 뒤였지만, 처음 한 대의 화살을 곰의 어깨에 박아 넣은 - 잘 구운 생선을 덥석 물었다가 생선 가시에 입천장을 찔리는 만큼도 아프지 않았지만 - 매처럼 예리한 눈에 팔뚝이 두툼한 젊은이 하나는 끝까지 남아 있었다. 보아하니 이 외눈의 칼잡이 사냥꾼의 조카인 모양이다.
"꾸어..."
잠깐 고민하던 곰이, 가까운 나무 위에 사냥꾼을 올려놓았다. 좀 더 정확히는, 손톱에 걸린 거스러미를 떼어내듯 긁었다. 사냥꾼은 나뭇가지에 덥석 매달려 재빨리 제일 높은 곳까지 기어올라 갔다.
"삼촌, 괜찮아요?"
"그래! 무슨 놈의 곰이 이렇게 괴물이야!"
"꾸어!"
"다 알아듣는 거 같으니까 말조심해요, 삼촌! 그러니까 관두자고 했잖아요! 신의 사자라니까!!"
"꾸어!!"
"신의 사자 아니라는데?"
"곰이 뭐라는지 삼촌이 어떻게 알아요?"
"꾸어어~ 꾸어어~"
"알아! 내 말이 맞다잖아!"
"아는데, 그러니까 곰이 뭐라는지 삼촌이 어떻게 아냐구요!"
나뭇가지에 매달린 삼촌과 땅바닥의 조카가 목청을 높여 주고받는 대화를 듣다 말고,
"꾸어허허허허..."
금색 곰이 철푸덕 주저앉더니 배를 잡고 걸걸하게 목을 울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아도 그것은 폭소하는 자세였다.
"...우리 하는 소리가 웃기다...고 하는군요."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젊은이가 머쓱한 듯 말하며, 그때까지도 꼬나들고 있던 활과 화살을 등뒤로 갈무리했다. 조심스럽게 나무에서 내려온 사냥꾼이 조카 곁으로 다가오며 한숨을 쉬었다.
"거 참, 김 빠지네. 가자."
"포기하려요?"
"별 수 있냐?"
"꾸어?"
"그러게 저쪽 얼음골에서 순록이나 잡자니까. 그거 한 마리면 당분간 숙모 약값은 걱정 없잖아요."
"지금 약값이 문제냐? 그놈의 빈티지인지 뭔지 종이 쪼가리가 왜 그렇게 비싼지...어?!"
"꾸어."
그 커다란 덩치가 어쩌면 이리도 날렵한지. 어느새 지척에 다가와 있는 금색 곰을 본 사냥꾼 숙질이 바짝 긴장했다. 겨우 화살이 닿을 정도로 멀찍히 떨어져서 보았을 때와는 박력이 달랐다. 소나기가 내린 뒤 비구름 사이로 비끼는 햇살처럼 밝은 금색 터럭이 풍성하고, 비구름이 개이면 나타나는 하늘처럼 선명한 파란색 눈은 이성과 지성이 깃들었다고 믿을 만한 이채異彩를 띄고 있었다.
"어, 어...서, 설마 우, 우리를 죽이려고..."
"아닌 거 같은데요, 삼촌. 저기...그렇죠? 저기...곰 씨?"
"꾸허허..."
뭐라 불러야할지 난감해 하는 젊은이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곰이 다시 한 번 목을 울렸다. 그리고는 앞발을 들어 사냥꾼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가볍다고는 하지만 인간이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그 손길 - 발길? - 에 담긴 명백한 의도에, 사냥꾼은 머뭇머뭇 바닥에 앉았다. 잘했다는 듯 끄덕끄덕 고개를 흔든 곰이 어슬렁어슬렁 자리를 뜬다. 사냥꾼이 살며시 일어나려고 하자,
"꾸어!"
"삼촌, 앉아 있으라는 거 같은데요."
"나도 알아들어, 임마."
"꾸허허허허..."
숲 속으로 들어간 곰의 웃음소리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돌아온 곰은 입에 물고 있던 덩어리를 툭, 사냥꾼의 무릎 위로 던졌다. 맵싸한 냄새를 물씬 풍기는 식물이었다. 젊은이 팔뚝만큼 크고 굵직한 뿌리는 네 개의 길고 짧은 가지가 나 있어 어설프게 만든 인형 같았다. 뿌리 위쪽에 가느다란 줄기를 따라 장상掌狀 복엽複葉, 실례, 손바닥 모양의 이파리가 서너 쌍 나 있는 사이로 새빨간 구슬 같은 열매가 달려 있었다.
"이건 뭐지? 처음 보는 풀인데..."
"꾸어, 꾸어, 꾸어? 꾸어..."
"어...뭐라는 건지 모르겠는데..."
"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거 아니구요?"
"얌마, 아무리 그래도 영물인데 그럴 리가...있나?"
"꾸어어~ 꾸어, 꾸어..."
"음, 잘은 모르겠지만 몸에 좋은 거니까 숙모한테 먹이라는 거 같아요."
"꿯허허허허..."
곰이 호탕하게 웃으며 - 도저히 그 포효에 어울리는 다른 묘사가 없었다 - 젊은이의 듬직한 어깨를 앞발로 두드렸다. 공격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힘찬 두드림에 젊은이가 휘청거리며 켁켁 기침을 했지만, 곰은 유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사냥꾼을 향해 앞발을 들었다. 사냥꾼은 재빨리 약초를 품에 넣고 두 걸음 물러났다.
"고맙수다, 곰 양반. 저기, 그...공격해서 미안했수."
"꾸어어~"
"우린 이만 가볼 테니까, 잘 지내슈. 거 어지간하면 사람 눈에 띄이지 말고."
"그래요. 신의 사자라는둥 악마의 화신이라는둥 금색 곰을 잡으면 형편 핀다는둥 소문이 짜하다구요."
"꾸어! 꾸어어!!"
"네네, 당신은 신의 사자도 악마의 화신도 아니고, 그냥 곰이라구요?"
"꾸어어-"
"곰도 아니라구요? 에이, 그게 뭐야."
제법 친해졌다고, 젊은이가 - 치약 광고를 찍어도 좋을 만큼 -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외눈의 삼촌과 활잡이 조카가 연신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것을, 금색 곰은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다. 그들이 숲 너머로 사라진 다음에야, 한숨과 흡사한 큰 호흡을 뱉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아 앞발을 들여다본다. 어느덧 익숙해진 굵직한 금색 앞발과 두툼하고 거칠거칠한 발바닥. 로키가 변했던 고양이에 비하면 턱없이 크고 거친 야수.
어차피 변할 거라면 로키처럼 작은 동물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변신한 몸에 익숙하지 않다고 책장을 넘어뜨리지도 않았을 거고, 넘어뜨린 실험대를 깔고 앉지도 않았을 거고, 해독제를 깨뜨리지도 않았을 거고, 화가 난 로키가 - 토르는 로키가 젠체하는 주제에 객기 넘치고 덤벙대는 귀여운 동생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 미드가르드로 날려버리지도 않았을 거고, 그리고...
"정말 멍청하다니까. 그건 산삼이 아니라 만드라고라였다고. 틀림없이 무식하게 잡아 뽑아서 끽 소리도 못하고 기절했겠지."
"꾸어?!"
토르가 금색 머리를 후딱 들었다. 멀지 않은 나무 우듬지 위에 청록색과 금색 갑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우아하게 휜 두 가닥 뿔이 달린 투구 아래, 단아한 하얀 얼굴이 일그러진 미소를 띄고 곰을 내려다보았다.
"굉장한 생존력이네. 난 벌써 어딘가 궁정의 벽난로 깔개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기다려, 이 미련곰퉁이야!"
"꾸어! 꾸어어- 꾸어!!"
하지만 토르는, 곰이 아니었더라도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벌떡 일어난 거대한 금색 덩어리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재빠르게 몸을 날려 달려드는 데에, 아무리 수령樹齡 기십 년의 아름드리 고목이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휘청한 그대로 끼이이이- 등 터진 새우 같은 비명을 지르며 넘어가는 나무 우듬지에서, 로키가 날렵하게 몸을 날려 땅에 내려섰다.
"나참, 머릿속까지 곰이 되어버린 거야? 좀 차분하게..."
"꾸어어어어~"
"곰이 사람을 습격한다!!!"
"응?"
무시무시한 기세로 홱 방향을 바꾸어 다시 달려들려는 토르에게 내심 긴장했던 로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외침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떨어진 산등성이를 타고 바람서리 불변할 철갑을 두른 일단의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영주님! 금색 곰입니다!"
"오오! 사람을 습격하다니, 듣던 바와는 달리 흉폭한 놈이로군!"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은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장년의 남자였다. 붉은색과 금색으로 화려하게 채색된 갑옷의 흉갑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커다란 보석이 박혀 있었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저 금색 모피를 윈터펠의 중앙홀 난로 앞에 깔 것이다!"
"뭐야, 저 인간은..."
예감이 나빴다. 지독하게 나빴다. 로키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망할, 이번에도 운명은 로키의 편이 아니었다.
"토니 스타크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명심하라! 겨울이 오고 있...으아악! 자비스!!"
기세등등하게 외치던 영주는 갑자기 말이 앞다리를 높이 들고 절규하는 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거대한 금색 동체가 단숨에 거리를 좁혀 병사들 가운데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로키는 저 높은 발할라를 향해 소리 없이 절규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난 기만의 신이야! 내 본분을 다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노르넨은, 성질 고약한 운명의 여신들은 언제나 그렇듯 대답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이야기의 씨실과 날실이 어긋나는 소리만이 꺄르르르 들려올 뿐이었다.
*****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묻지 않겠다, 아들아...아들들아."
"..."
"..."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없는 토르는 물론, 신의 언어를 할 수 있는 로키조차 할 말이 없었다. 다급하게 시전하기는 했지만, 로키의 마법은 언제나 완벽했다. 그러니 둘은 로키의 서재에 나타났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타난 곳은 발할라의 중앙홀, 옥좌에 좌정한 오딘과 그 곁에 선 프리가의 앞이었다. 시프와 판드랄, 볼스태그, 호건을 비롯한 제신諸神들이, 안색이 창백해진 로키와 거대한 금색 곰 - 이 조합이라면 곰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할 신족은 아무도 없었다 - 을 바라보며 수군수군 키들키들 떠들어 대는 소리가 로키의 복장을 박박 긁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알고 있겠지? 로키."
빌어먹을. 로키는 다시 한 번 입술을 짓깨물었다. 자신의 이동 마법에 관여했을 정도면, 올파더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전 자신이 소녀나 고양이가 되었을 때도 원래대로 되돌려 주지 않았던가. 지금 저 무거운 손을 잠깐 흔들어 토르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를 의미했다.
꼬시다, 이놈아.
"제가 책임지고 토르를 원래대로 돌려놓겠습니다."
"그래. 그때까지 토르는 너의 서재에서 기르..."
"여보."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기묘한 표정으로 - 곰토르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으신 거겠죠, 어머니 - 프리가가 끼어들었다.
"흠흠, 함께 지내도록 하여라."
"..."
"알겠느냐, 로키?"
"...예, 올파더."
이번만큼은 - 로키의 쓸데없이 짱짱한 자존심은 '이번에도'라는 말을 무의식 레벨에서 거절했다 -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걸 깨달은 로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엄격한 표정을 거둔 오딘이 흐뭇하게 웃으며 토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키의 서재로 가기 전에, 나와 함께 산책이나 하지 않겠느냐, 아들아?"
"어머나, 여보. 그 전에 토르를 목욕시켜야 해요. 빗질이 끝나면 오늘밤은 저와 함께 잘 거랍니다."
"앗, 프리가님. 그렇다면 이 시프도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목욕하기 전에 우리 셋과 레슬링 한 판 어떻소!"
기다렸다는 듯, 둘러싸고 있던 신들이 우- 몰려들었다. 여자들은 토르의 푹신한 털을 쓰다듬으며 거대한 곰돌이라고 좋아했고, 남자들은 두툼한 근육을 두드리며 한 판 붙어보자고 난리였다. 인파에서 밀려난 로키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움켜쥐었다. 두고 보자, 토르. 언젠가는 반드시 골탕 먹이고 말 거야!
"꾸어~"
인파 한가운데에서, 즐거운지 곤란한지 알 수 없는 금색 곰의 포효가 들려왔다.
-END.
***2013/02/11
황금숲토끼(@lokithorloki)님의 개인지 <Amnesia>에 축전으로 드린 글입니다. 허락 하에 공개합니다.
곰은 좋아요. 언제나 정의롭지요. 특히 크고 폭신하고 순한 곰은...(꺄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