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옷을 벗겨버릴 테다. 회청색 날렵한 오더메이드 수트를 두르고 연구동 복도를 성큼성큼 걷는 007의 모습은 누가 봐도 자신감이 넘치는 민완요원이었다. 유명 남성복 브랜드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슈트케이스도 남들이 들면 촌스럽겠지만 그의 손에서는 더없이 잘 어울렸다. 하지만 누가 읽을 수 있었겠는가. 그는 오직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놈의 옷을 벗겨버려야 해.
"아, 본..."
마침 복도 끄트머리에서 그를 발견한 태너가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단음절의 이름을 채 발음하기도 전에, 태너의 오랜 세월 단련된 위기감각은 그 손을 끌어내리고 뒤로 돌게 만들었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저렇게 단단히 작정하고 가누. 아이고, 두야...그나저나 브랜드를 바꿨나? 우리 나이대에는 너무 젊은 브랜드 아니야?
*****
물론 007이 저지르는 각종 사건사고에 적응한 태너도 그 슈트케이스 안에 007이 입기에는 다소 캐주얼하고, 어깨품이 좁고 길이가 짧은 새 양복이 들어 있다는 것까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옷을 짓기 위해 대영제국 최고의 정보요원의 눈썰미로 신체 치수를 재단 당한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다.
"뭡니까? 지난 번 지급한 총을 반납하러 온 거라면 거기 두고 가세요."
"그건 잃어버렸다고 보고했잖아."
"아, 네. 탄창이 떨어져서 버리고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죠."
아버지뻘은 못 되도 삼촌뻘은 족한 대선배를 앞에 두고도 따박따박 마지막 한 마디를 낚아채는 저 버르장머리도 어떻게 벗겨낼 수 없나. 007은 기왕지사 벌이는 일, 확실히 잡도리를 할 요량을 품었다.
"007?"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모니터에 흘러가는 수열을 보고 있던 Q가 등뒤로 다가서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래서 내근은 안된다. 돌아보고 묻는 5초. 007에게는 그 5초면 충분했던 것이다. Q는 등뒤로 돌려진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손목에 느껴지는 묵직한 구속감은 아마도 가죽이나 인조섬유를 감은 금속제 수갑. 손을 비틀어서 구속구의 정체를 피부로 확인한 Q가 당혹스러운 듯 007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자네 옷을 벗길 거야."
"네?"
Q의 그렇지 않아도 햇빛을 적게 받아 뽀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잠깐만, 지금 이 수행한 작전의 수만큼 여자를 갈아치웠다는 전설의 요원이 뭐라고 하는 거야? 그러고 보니 지난 번 살바와 첫대면했을 때 처음이 어쩌고 하는 요상한 발언을 했다고 염색체만 여자인 줄 알았던 동료들이 꺄꺄거리는 걸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설마가 사람을 잡나?!
"걱정 마. 속옷까지는 벗기지 않을 테...니까..."
"자, 잠깐만요! 우리 이성적으로 대화부터 하죠!"
"대화?"
007은 자기가 그렇게 묶은 주제에,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Q를 내려다보았다. 중얼거리는 입매가 '이거 곤란한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곤란하다니, 대체 뭐가 곤란하다는 겁니까? 나야말로 정말로 곤란하거든요?!
"좋아."
마음을 정한 듯, 007이 무릎을 굽히고 Q와 눈높이를 맞췄다.
"날 걷어차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다리는 묶지 않겠어. 다리까지 묶으면 정말 곤란하니까."
"그러니까 대체 뭐가 곤란하다는 거냐고요!"
"당연히 옷을 벗기는 거지. 그럼 이 상황에 다른 뭐가 있겠나?"
007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Q는 너무나도 기가 막힌 나머지, 아직까지는 자유로운 다리로 007을 걷어차고 말았다. 비록 연구직 내근이지만 그래도 호신술 필수교육을 받은 보람이 있어, 모직양말 위에 슬리퍼를 걸친 발은 제법 그럴듯하게 007의 무릎을 걷어차 - 는 듯 했다.
"그러니까 이러지 말라고."
하지만 상대는 MI6가 자랑하는 00넘버였다. Q의 반항을 실로 간단하게 제압한 007이 어이없다는 듯 따졌다.
"무슨 짓인가? 대화로 하자며?"
"지금 이 상황에 대화를 하게 생겼어요? 소리지를 겁니다!"
"질러도 상관없어. 여기 방음시설 잘 되어 있잖아."
"국가예산으로 만든 시설이라고요!"
"나도 알아. 그게 뭐?"
"당신이 남자랑 놀아나라고 만든 시설 아니란 말입니다!"
"...뭐?"
Q의 목덜미로 손을 뻗던 007이 굳었다. 말 그대로 얼어붙은 남자의 겨울하늘 같은 눈동자에 경악이, 의혹이, 분노가, 이윽고 미소가,
"푸하하하!"
"뭐가 우스워요!"
"자네, 그러니까 내가 자네를...그, 그...푸하하!"
007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선대 M - 성모여 그녀에게 안식을 내리소서 - 이 있었다면, 조용히 태너를 시켜 영국 제일의 안과의 - 그녀가 평생 저어했던 노안경을 맞추기 위해 - 와 세계 제일의 정신과의 - 007이 제정신인지 알아보기 위해 - 를 불러들였을 것이다. 태너가 있었다면, 물론 아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뒷걸음질 쳐서 멀어졌으리라. 하지만 Q는 M도 태너도 아니었기 때문에, 007의 이 박장대소가 가지는 의미도, 가치도, 가능성도 알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내가 그렇게 우습냐'는 치기어린 말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007은 키득키득 웃으며 잠깐 멈췄던 손을 다시 뻗었다. 흠칫- 이번에는 Q가 굳을 차례혔다. 목덜미에 닿은 손끝은 예상외로 따스하고 부드럽게,
"'놀아난다'라, 자네 그 말 뜻은 알고 있나?"
"지금 날 바보 취급...힉!"
오랫동안 다리지 않아 흐늘흐늘하게 늘어진 셔츠 목깃을 따라 목 뒤쪽으로 천천히 미끄러지며, 가느다란 입술 한쪽 끝만 끌어올려 미소를 그린 007의 얼굴이 천천하 다가왔다. Q는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뒷목을 잡은 손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죽여버릴 거야. Q는 무력감에 달아오르는 눈을 질끈 감고 이 남녀적아를 가리지 않는 카사노바를 저주했다. 이거 풀기만 하면 죽여버릴 거야!
"그건 불가능해."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불을 간지럽혀, Q는 저도 모르게 히익- 낮은 비명을 질렀다. 그는 어느새 남자의 품에 갇히듯, 그의 탄탄한 어깨에 이마를 기댄 자세였다. 007의 한쪽 손이 뒷목을, 다른 손이 등뒤에서 양쪽 손목을 쥐고 있었다.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 수갑은 풀렸지만, 여전히 구속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풀어준다고 해서 자네가 날 죽일 수는 없어. 그리고 그런 말을 들었는데 풀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쿡쿡, 목을 울리는 웃음소리가 맞닿은 피부를 통해 Q의 성미를 건드렸다.
"과학자란 자기가 확실히 아는 것만 말하는 종족인 줄 알았는데."
"아니까 하지 말란 말이에요!"
"아니, 자네는 몰라."
서걱. 그 단언은 마치 예리하게 갈린 칼날처럼 Q 안의 뭔가를 베어냈다. 후둑. 묵직하게 베어나간 덩어리가 Q의 명치에 틀어박혔다.
"자네는 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
"알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갑자기 추적을 멈추고 돌아서는 늑대의 꼬리를 잡아당기며 정말로 사냥을 그만둘 건지 확인하는 토끼 같은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 그래?"
007은 Q에게 후회할 틈 같은 건 주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머리가 인식한 것은 뒤얽힌 혀 사이로 몇 번이나 호흡이 오간 다음이었다. 그의 호흡은 새벽 강바람처럼 서늘했고, 고급 수트를 두른 그의 품은 낙엽처럼 버스럭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Q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우습게도 애용하는 SNS의 UI 삽입문구였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젊은 천재는 난생처음 패닉에 빠졌다 - 그때 007 역시 같은 자문을 하고 있는 걸 알았어도 큰 도움은 되지 않았겠지만.
*****
겹쳐진 상체 사이로 안주머니에 넣어둔 앰플의 희미한 윤곽이 느껴쳤다. 처음부터 이걸 쓸 것을 그랬다. 괜히 목소리를 듣고, 올려다보는 호박색 눈을 마주하고, 서늘하게 식은 피부에 닿았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에 오래 후회하는 것은 생사와 분초를 다투는 다급한 상황에서 무수히 살아남은 민완요원의 생존본능에 어긋났다. 007은 Q의 손을 놓아주었고 - 떨리는 한 쌍의 여윈 손이 마법의 콩나무처럼 그의 목덜미에 감겨들었다 - 그렇게 해서 빈 손을 품에 넣어 앰플을 꺼냈다.
아마도 난생처음일 - 그것도 남녀적아를 가리지 않는 카사노바의 명성에 걸맞는 능숙하기 그지없는 - 프렌치키스에 눈을 감고 매달리는 소년 - 맙소사, 무방비상태의 Q는 정말로 어리고 연약해 보였다! - 에게 앰플을 꽂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먼저 입술을 떼어야 했다. 007은 오만할망정 어리석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열락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직시하고 있었다. 맙소사,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아...하..."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가쁜 숨결이 흘러 떨어졌다. 살포시 번진 달큰한 홍조 위로 이성이 수치심이라는 검붉은 피를 흘리기 전, 007은 재빨리 Q의 떨리는 목덜미에 앰플을 꽂았다. MI6 의학팀이 다양한 용도로 - 물론 이런 용도는 예상하지 않았겠지만 - 사용하기 위해 고안한 웰빙천연유기농 비습관성 마취제가 훌륭하게 작용하여, Q는 그대로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물론 마취제에 기억제거 기능은 없기 때문에 깨어난 뒤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하겠지만 - 그건 그때의 일이다. 007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를 잠시 반추하고, 뱃전에 표시를 하려던 마음의 칼날을 비웃어 떨치며,
내처 내버려져 있던 슈트케이스에 손을 가져갔다. 결국 손을 묶는 바람에 상의를 벗기기 위해서 찢어야 하는 사태는 피한 거지. 끝이 좋으면 다 좋다니까. 뻔뻔스럽게도 그렇게 중얼거리며 007은 원래 목적대로 Q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
"007? 자네가 좀 늦었군. 그는 막 작전 수행을 위해 떠났다네. 지금 단계에서는 유럽 동쪽으로 갔다는 정도만 말해줄 수 있겠군."
M은 평소 보여주는 일이 드문 환한 미소를 지으며 눈앞에 선 젊은 연구직 내근요원을 바라보았다. 공사구분이 철저한 그에게 상급자의 취향을 하급자에게 강요하면 안된다는 자각이 있어 하지 않던 일이었다. 하지만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었기에, 비록 타인에 의해 강제된 것일망정 이루어진 이 광경은 참으로 흐뭇한 것이어서...
"그럼 저도...아니지, 언제 돌아오는...대체 왜 그렇게 보시는 건데요!"
너무 만족스러워했던 모양이다. Q가 상급자에 대한 예의도 잊고 발끈한 것이다. M은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정말로 노력한 끝에, 하고 싶은 말을 딱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있었다.
"그 옷, 정말 잘 어울리는군."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범죄라고요!"
"아, 좀 강행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 범죄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지. 안 그런가, 태너?"
"그럼요. 본드 그 친구 참, 눈썰미가 좋...흠흠."
엉겁결에 맞장구를 치던 태너가 Q의 찔러죽일 듯한 시선에 헛기침으로 말꼬리를 묻었다.
"어머어머, 엄청나게 잘 어울리는데 뭘 그래요? 처음에는 어디 왕자님인가 하고 못 알아봤다구요!"
하지만 여자는 강했다. 불쑥 끼어든 이브 머니페니는 심지어 Q를 두 바퀴 돌리기까지 했다!
"앞으로도 쭉 이러고 다녀요. 내가 같이 쇼핑 가줄까요? 국장님, 우리 비번 날짜 맞춰서 주세요!"
"아, 그럴까? 자네라면 믿고 맡길 수 있..."
"국장님!!!"
Q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그때 국장실은 물론, 열린 문 너머로 기웃거리는 직원들 사이에도 Q를 편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생각해 보라. 평소의 Q는 언제나 부스스하게 뒤엉킨 더벅머리에 촌스러운 안경, 다리지도 않은 셔츠며 대충 맨 구겨진 타이, 늘어진 스웨터 차림이었다. 지금의 Q는 어떠한가. 단정하게 빗어넘긴 결 좋은 고수머리, 가녀리면서도 반듯한 몸의 선을 깔끔하게 드러내도록 정교하게 재단된 감청색 수트, 원버튼이 열린 상의자락이 펄럭일 때마다 조붓한 허리에 착 달라붙은 바지허리와 멜빵이 감질나게 드러난다. 아무리 사람의 취향이 제각각이라지만, 이번만큼은 007의 취향이 정의였다.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게.
"다들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죠..."
Q가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순간 어린아이처럼 발을 구르며 화를 낸 것은, 어쩌면 그 입술에 처음으로 닿았던 타인의 체온을 되살린 탓일지도 모른다.
"아, 몰라요! 정말이지, 모두 망해버렷!"
마치 언젠가 잉글랜드의 불운한 왕이 그랬던 것처럼, 실로 국가에 불경한 소리를 거침없이 내뱉은 Q는 자신만의 - 비록 침범 당한 기억과 체온이 아직도 생생하지만 - 성역을 향해 달려가고 말았다. 그의 등뒤로 국장실 문이 쾅! 요란하게 닫히자, M은 그예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창가에 한 아름 모여 있던 커튼이 같은 리듬으로 흔들렸다.
"시말서는 쓸 거지?"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만."
"의학부에 말도 없이 앰플 썼잖아. 멋대로 굴지 말라고, 007."
그 앰플로 Q를 잠재우고 옷을 갈아입힌 일은요? 태너와 머니페니가 시선을 마주쳤다. 이미 충분히 멋대로 굴게 하고 계신 거 같은데요, M.
"알겠습니다."
007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시말서를 다 쓰기도 전에 어디선가 그를 필요로 하는 사건이 일어나, M은 지령을 내리고 Q는 무기를 전해줄 것이다. 그리고 007은 00넘버를 원하는 만큼 위험한 임무를 태연한 얼굴로 수행하리라. 왜냐햐면 그는 그늘 속에서 묵묵히 대영제국을 수호하는 국가의 공복 중의 공복, 결코 살인면허를 잃어버리지 않을 007, 제임스 본드였으니까.
-END.
*** 2012/11/08
트위터 이웃 L님의 리퀘로 쓴 00Q입니다. 키워드는 '결박'이었는데 어째 '탈의'가 주제가 된 듯?ㅋ
<007 스카이폴> 보세요. 두 번 보세요. 전 두 번 봤어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