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2002년 동굴곰은 한일월드컵의 붉은 열기에도 아랑곳없이 파리 오페라극장 지하의 어둠에 묻혀 살았다. '한 번은 필수 두 번은 선택 세 번은 열광 네 번 이후는 광란'의 버닝로드를 착실히 밟아, R석에서만 6번, 실로 마음은 풍요롭고 몸은 빈곤한 시절이었지(먼눈) 당시 일상이 좀 더 여유로왔다면 그대로 뮤지컬 매니아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졌겠지만 행이랄까 불행이랄까 한 사람몫을 해내기에도 버겁던 터라 조용히 묻혀 있던 그 불꽃을 다시 지핀 것이 바로 이 공연, <지킬&하이드> 되시겠습니다 (빠바바밤-)
04년 7월, 피폐하기 그지없던 정신세계에 단비라도 내려줄까 본 공연에서 크리티컬 히트를 맞았다. 두들겨 맞은 강도는 <오페라의 유령> 때보다 덜했지만, 원작과 OLC 시디와 몇 종의 관계없는 영화밖에 구할 수 없었던 당시와 달리, <지킬&하이드>는 국내 공연 실황중계 동영상, OST, 브로드웨이 공연 실황 DVD, 원작, 해외 앨범 세 장 등등 가볼 수 있는 곁길에는 다 곰발자국을 찍었다 싶을 정도로 깊이 넓이 빠졌다(무려 팬픽까지 썼다니까 /걀걀). 그렇게 넘쳐 흐른 노도는 <레 미제라블>의 폭포를 넘어 조용하고도 깊이 흐르는 동굴의 지하수가 되어 있으나,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나는 이 공연을 세 번 봤다. 솔직히 말해, <지킬&하이드> 국내 공연에 제 돈 내고 세 번이나 볼 가치가 있냐고 묻는다면, 곤란한 질문을 한 사람에게 빅풋펀치를 날린 다음 도망가겠다는 게 본심이다(진짜다). 그런데도 왜 세 번이나 봤냐면, 처음에야 뭐 그냥 관람이었지. 그랬다가 J씨한테 다트가 꽂혀버리는 바람에 동영상과 CD로는 못 참아 수원까지 쫓아갔던 게 두 번째인데, 같은 하늘 같은 시내에서 살아 숨쉬는 '공인'을 좋아했을 때 있을 수 있는 재수없음 중 하나에 데이는 바람에 팬을 관두기로 해버렸고, 그 무렵 이미 <레 미제라블>과 CW씨와 PQ씨에게 빠져 있었다.
게다가 이번 공연은 2차 오픈 앙콜 공연이라 1차 때와 캐스트가 변했다. 무려 내가 <지킬&하이드>에 몰입하게 만들었던 J씨가 안 나오신 거다. 게다가 집에 긴다리 아저씨(爆)의 DVD도 있다. 그런데도 세 번째 관람을 했던 건, 이전에 봤던 지킬/하이드가 모두 류정한씨였던 탓이다. 그러니까 보고 싶었던 거다 - '조왕자'를.
개인적으로 <지킬&하이드>가 사회적 이슈가 될 정도로 인기몰이를 하는데에는 '조승우'라는 아이콘이 꽤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뭐냐면, 지금까지 뮤지컬 자체가 문화적 마이너이기도 했지만, 저만큼 웃으면 귀엽고 진지해지면 더 귀엽고 화내면 아주 깨물어주고 싶도록 귀여운 남자가 주역으로 나온 적은 없었던 거 같거든 (그래 나 남자 취향 안 좋다-_-)
'왕자'라고 불렀던 건 <지킬&하이드>를 본 사우들 사이에서나 통한 농담이었지만, 실제로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는 걸 보고 난 뒤에는 정말 말 그대로라고 생각된다. 왕자님, 부디 그 외모 삭기 전에 득음해주세요(...)
근 5개월 동안 빅4를 비롯한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 물좋은 호주(...) 음반들을 아구아구 집어삼킨 탓인지, 귀가 굉장히 고급스러워졌다. 그건
한 번 보고 만 게 아닌 이상 첫 번째 관람의 세부사항은 두 번째 세 번째에 묻혀 사라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두 번째 공연은 수원 경기예술회관인가 어디였기 때문에 오디토리움 관람은 두 번째이자 처음이었는데 - 과연, 왜 그렇게나 평이 나쁜지 알겠더라.
조왕자 공연을 보려고 예매를 좀 무리하게 했더니, '무대시야가 가려질 수 있습니다'라는 F-006열 좌석을 잡았다. 지정좌석제라서 예매할 때 지정한 내 잘못이라고는 해도, 설마 S석인데 가리면 얼마나 가리겠나 싶었더니 아주 1/3은 가려지더라. 약혼파티 때 무대 뒤쪽에서 춤추는 서너쌍 중 제일 오른쪽 아가씨밖에 안 보였다면 본 사람은 무슨 소리인지 알리라. 이딴 시야가 반편인 좌석도 앞에서 10줄 이내라고 S석 가격을 매긴단 말인가. 언어도단이다. 내가 수양이 좀 덜되고 좀 더 부지런했다면(...) 오디컴퍼니와 공식홈피와 인터파크에 테러를 가했을 게다 (크르렁)
게다가 이 국제회의장, 무대가 좀 밝은 장면에서는 조명이 무대뿐 아니라 객석 앞쪽 절반까지 비춰주더라. 내 앞에 앉은 사람들의 뒤통수가 너무 세세하게 보여서 무대를 보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그런데도 어두워서 무대가 안 보일까봐 "Lost in the Darkness" 때 객석 한중앙에서 (제일 비싸고 빨리 예매되었을 그 자리에서!!) 플래쉬까지 터뜨려줬다는 거 아닙니까, 빌어먹을.
말이 나온 김에 그날 관객 수준에 대해서는 진짜 불평하고 싶은 것이, 플래쉬 한 번에 핸드폰 벨이 서너 번, 내 몇줄 뒤의 아저씨는 2막 들어가니까 코를 골며 졸더라. 게다가 연일매진이라면서 공석은 어찌 그리 많았는지, 그것도 꼭 R석 한가운데 명당지가 비어서 염장을 지른다는 머피의 법칙 성립-_- 뭐, 바로 옆 R석 블럭에 서너 줄이나 비어준 덕분에 어둠 속에서 S석 블럭의 관객들이 대거 이동, <지킬&하이드>를 처음 접한 내 일행들이 그 흐름에 합류해 무대를 한눈에 보며 관람하게 된 건 다행이지만 (안 그랬으면 진짜 미안해 죽었을 거다, 이 곰...)
악평이 높았던 음향은, 덕분에 보정을 했는지, 아니면 대형 스피커 앞에 앉은 덕분인지, 오히려 곰귀가 듣기에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배우들의 목소리쪽이었지, 응 (먼눈)
<지킬&하이드>에서 가장 먼저 관객과 만나는 것은 지킬의 변호사 어터슨과 예비 장인 댄버스 경이다. 댄버스 경 역의 이석씨는 그대로였는데 어터슨 역이 바뀌었다. 들어가기 전 훌훌 넘겨본 팸플릿에는 낯선 얼굴과 이름이 있었을 뿐이었는데...변호사의 첫 대사가 끝나기도 전에 "푸헉!"하고 쓰러져버렸다. 그러니까 J씨가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봤던 모 10년 묵은 공연에서 코끼리 무늬의 쇼킹핑크 슬립을 입고 무대를 질주하시던 바로 그 분이셨다...아이고 동현아!!!
이 놀라운 발견은 이후, 내가 진지하게 공연을 볼 수 없게 해주었다. 안 그래도 달달 외울 정도로 보고 들은 공연이었는데다, 그나마 라이브액션을 기대하던 배역마저 미스매치가 되어버렸으니 어찌 집중을 할 수 있었으랴...(노파심에 말하자면, 최철민씨의 연기에 책을 잡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단지, 이전의 여리여리한 화이트칼라와 하이드도 단장으로 후드려 패잡을 수 있을 것 같은 터프가이 사이의 갭에 빠진 곰이 저 혼자 허우적댔을 뿐...임프린팅에 약하면 여러모로 손해라는 거다 orz)
언젠가 어딘가의 기사에서, 오디컴퍼니가 <지킬&하이드>로 억단위 벌었는데 <크레이지포유>로 다 날려먹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2차 오픈을 한 거라면 이해는 합니다만, 그래도 뽀작난 금고 바닥에 드레스 새로 지을 금화 몇 푼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놀랐다. 세상에, 어느 아가씨의 드레스도 이불호청이나 커튼이 아니었다! 특히 엠마의 철지난 개나리 노랑 이불호청은 어디로 가고, 시대에도 맞지 않는 빨강머리 앤의 소망도 사라지고, 어정쩡하나마 버슬 실루엣의 드레스마다 비즈와 레이스...는 아니군; 앙상블의 드레스마다 걸친 숄의 술장식은 아무리 봐도 피아노 덮개였다. 에비!
캐스트가 확실히 바뀌어서, 변호사 외에도 성 주드 병원 이사회 임원 중 적어도 세 명, 스트라이더, 스파이더, 풀은 확실히 바뀌었고, 비셋...도 바뀌었나(갸웃) 바뀐 캐스트 중에 불만이었던 건 풀.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의 남자가 늙은 척 하려고 노력하는 건 진짜 보기 민구스럽더라. 게다가 영국 상류층 가정의 집사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휘청휘청- 그나마 등장씬이 적었다는 게 다행이랄까, 응, 다행이었어...
저번
그리고 조왕자 - 내가 그 날 그 자리에 있게 만들었던 사람. 언론의 극찬대로, 비평가들의 호평대로, 팬들의 환호대로, 내가 당신에게 만족하고 감탄하고 반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당신에게 실망했답니다. 당신의 연기는 과연 '겸 영화배우'라는 수식어가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사실 내가 당신을 처음 본 건 <후아유>에서였고, 이름을 찾아보고 필모그래피를 보고 '언젠가 다시'라고 헛되나마 기약할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호의를 느꼈었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때 느꼈던 호의는 뮤지컬 액터에 대한 것이 아닌 영화배우에 대한 것이었다는 걸 굳이 이런 식으로 깨닫고 싶지는 않았다는 거죠 (후...)
내가 지금까지 보거나 들었던 지킬/하이드는 류정한씨, 조승우씨, 콤 윌킨슨, 로버트 쿠치올리, 데이비드 핫셀호프를 굳이 분류하자면 '강아지인 척 하는 늑대'와 '늑대인 척 하는 강아지'로 나눌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분류는, 조승우씨가 후자 그룹의 유일한 구성원이기에 비로소 성립한다(...) EBS 예술의 광장 동영상에서 봤을 때는 '늑대혼혈 사냥개' 정도였는데, 실제로 본 조승우씨의 하이드는, 뭐랄까, 야수라면 야수인데, 그 야수라는 게 길들여지지 않았다기보다는 반항한다는 의미의 짐승. 늑대라기보다는 하이에나, 흉폭하다기보다는 야비하고, 강대하다기보다는 교활하고, 공포에 질리게 하기보다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아니, 어떤 의미로는 훌륭한 자의적 해석이고, 그만큼의 연기력이 받쳐준다면야 전혀 불만도 반발도 없습니다...만.
지킬의 첫 노래, "Lost in the Darkness". 나는 뮤지컬이나 음악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고, 사실 글쓰는 것 외에는 전혀 알지 못하는 120% 아마추어로, 제멋대로 팬이라고 자처할 뿐이다. 하지만 뮤지컬 배우의 노래는 곧 대사가 아니었던가? 뮤지컬에 익숙해지면 '이야기'가 담긴 노래를 부르는 가수쪽이 어색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뮤지컬 배우는 '누군가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는 거다. 게다가 <지킬&하이드>가 남성 뮤지컬 배우들에게 꿈의 배역인 것은 한 사람이 연기로 또 노래로 원초적인 선/악에 비견되는 두 사람을 연기해야하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런 역을 연기하는 사람이 대사는 대사대로, 노래는 노래대로, 연기와 노래가 따로 놀아서야 어찌 잘된 뮤지컬 배우라고 할까. 어찌 당신이 '바로 그' 조승우인 건가.
"This is the Monment"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 곡을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잘 부르는 연기자가 라이브로 '잘' 부르는 걸 들었다는 걸로 만족했다 - 그렇게만 기억하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조왕자가 연기를 못한다든가 노래를 못 한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다. 단지 그 연기와 노래 사이의 갭이, 기대치에 비해 너무 컸다는 거지...)
개인적으로야 좋아하든 말든 <지킬&하이드>의 클라이맥스, 백미, 베스트 넘버인 "The Confrontation"...실망했다. 최악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름대로 굉장한 열연이었고 멋진 노래였다. 하지만 내 기대치만큼은 아니었던 것을 어찌하나. 2막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도록 계속되어 온 조왕자의 애드립이 절정에 달했다는 느낌으로, 어떻게 그 장면에서 조명과 액션의 핀트가 안 맞을 수가 있단 말인가! 연기자와 조명기사 어느쪽의 문제이든지 매달아 놓고 매우 쳐주고 싶을 정도로 분하다. 우습게도 실제로 볼 당시에는, 그때까지 쌓이고 쌓인 실망과 조소가 포기로 넘쳐흘러 그다지 분하지도 않았지만-_-
게다가 조왕자는 1막때는 괜찮았는데 2막 중반 이후로 목소리가 확실히 맛이 가 있더라. 감기라도 걸렸나 싶은 코맹맹이 소리. 하지만 확실하게 감기에 걸렸다고 들었던 수원 공연 때의 류정한씨도 그 정도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된다.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와 시선을 한몸에 모으는 사람의 자세라는 게 있다. 여기서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너그럽게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역시 실망했기 때문이다.
기대치가 너무 높으면 그만큼 실망도 깊다는 건 알지만, 그러니까 가능한 기대도 사전정보도 없이 가는 게 좋다는 것도 자알 알지만 말야 - 무려 '그' 조승우였다고. 게다가 동영상도 질리도록 돌려봤었다고. 조금쯤은 기대해도 되는 거 아니었어? 이만큼이나 실망하고, 뮤지컬이라고는 디즈니 애니를 접한 게 전부인 일행들에게 "저 사람이 정말 그 극찬의 조승우냐?"라는 질문마저 들어도 좋은 거였냐고...
매체에 기록된 것이 아닌 라이브였고, 한 번 보았으니 비교할 근거가 확실하고, 그만큼 다른 공연들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는 것 외에 무슨 보람이 있는 관람이었느냐고 한다면 - 역시, 이번에도 건진 건 변호사 양반이라고 할까. 그래, 넘어져도 맨손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중요하지.
최철민씨에 체크용 다트를 꽂는 걸로 <지킬&하이드> 국내 공연 관람에 안녕을 고할까나 '~'
ps. 이 감상, 조왕자 팬들에게 들키면 최소한 돌무덤이군 (웃음)
pps. 하지만 조왕자 덕분에, 수원에서는 그렇게나 쉬웠던 분장실 잠입(...)이 불가능해졌던 것도 마이너스 요인. 나, 최철민씨 싸인 받고 싶었다고-_-
ppps. 새삼 궁금해진 건, 저 포스터의 지킬은 누굴까? 조왕자 일족(爆)은 절대 아닐 테고, 편집해서인지 제대로 본 공연의 지킬이어서 그런지 핫셀호프 같은데...으음;
pppps. 근데 공식홈피 bgm으로 깔린 "This is the Moment"이 본공도 아닌 컨셉앨범의 왈로우씨 버전인 이유는 뭐냐;;;
ppppps. 여기까지 감평을 해놓고, 저 어터슨에 다른 지킬에 다른 루시(김선영씨!)를 보고 싶어지면 대략 난강이오 골렘이요 골룸이...지만; 저 엠마에 저 풀인 이상 그럴 걱정은 없겠군...(핫핫)
ps. 확실히, 저 무렵의 나는 아직 순진하고 무지했다 (먼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