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끄적끄적2010. 12. 26. 00:56


아침, 크리스마스 특집 TR을 하러 외출 준비를 하다가 손을 베었다. 난 눈썹칼이 부주의와 결합하면 그렇게 무서운 흉기가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왼쪽 검지 첫마디 살점을 길고 깊게 베어서, 아무리 눌러도 피가 멈추지를 않는 것이다. 그나마 옷 입고 가방 꾸리고  머리만 빗으면 나갈 수 있게 준비가 끝난 상태라 다행이었지. 하필 크리스마스의 토요일이라, 응급의료정보센터(1339번)에 전화하고서야 겨우 멀지 않은 곳에서 진료중인 병원을 찾을 수 있었다.
처음 가본 병원은 오래된 동네의원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는 오래된 주택가라 그런지 그런 병원이나 약국이 제법 남아 있다. 잿빛 돌바닥에 장식 판자를 댄 벽과 천정, 낮게 뻗은 대들보, 커다란 할아버지 시계, 노랗게 빛바랜 자격증과 감사패, 액자와 분재, 화분, 구식 진료기계와 그만큼 나이든 의사 선생님, 할머니라기에는 젊지만 아주머니라기에는 나이든, '숙모님'이라고 부르면 딱 어울릴 뻘의 간호사 한 분.
피와 티슈 조각이 엉겨붙은 손을 닦고, 다행히 혈압은 정상이고, 하지만 피가 멎지 않아 꿰매기로 했다. 상처를 소독할 때 엄청나게 쓰라렸고, 마취주사는 다칠 때보다 - 사실 다칠 때는 그냥 서걱한 느낌이었지 딱히 앞프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피가 많이, 멈추지 않을 줄을 몰랐지; - 훨씬 아팠다. 게다가 그 작은 손마디에 무슨 마취주사를 세 대나 놓는담! 눈물이 찔끔 나고 비명을 지를 거 같았는데, 아픈 건 거기까지. 그 뒤로 아무 느낌도 없는 손에 뭔가 스치는 느낌밖에. 애써 목을 뻗어 바라보니 피투성이로 길게 갈라진 살을 낚시바늘 같은 바늘이 들어가고 나오는데, 정말로 아무런 느낌도 없어 신기했다. 간호사님은 자기 몸 수술하는 걸 굳이 보겠다는 내가 더 신기하다 했지만.
몸에 난 상처를 꿰맨 건 이번이 처음이다(치과에서 마취하고 꿰맨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리고 유치하던 시절 치기로 손목을 그었을 때조차 꿰맬 정도로 깊은 상처는 나지 않았다 - 물론 흉터는 남아 있지만. 그때는 메스를 썼었는데,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 알았으면 일찌감치 눈썹칼을 쓸 걸, 하긴 면도칼도 흔히 쓰는 흉기지만, 그랬다면 나는 영원히 나이들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뭐, 지금 이 정도가 적당할지도.
찬찬히 싸매어진 손끝은 마취가 풀린 뒤로 줄곧 우리하게 아프다. 내일 병원에서 오라고 한 걸 핑계로 내일 치기로 한 토익 시험을 자체 취소하고, 붕대를 감은 손이 들어가지 않아 곰돌이가 그려진 벙어리장갑을 새로 샀다. 일주일은 물을 묻히지 말라 했으니 청소도 빨래도 설겆이도 임시휴업 - 지난 달손님이 막 끝나서 손빨래 거리가 몰린 건 어쩌면 좋담. 그렇지 않아도 께느른해진 삶에 욱신욱신한 동통이 발목을 잡아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눈 좀 붙이고, 좀 쉬고, 좀 늘어지고, 좀 뒹군 다음에 생각하자. 괜찮겠지, 환자니까.
Posted by 동굴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