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읽기2007. 8. 28. 18:47
<릴리안의 알약>
작가 : 슈테피 폰 볼프(Steffi von Wolff)
번역 : 이수영
출판 : 한스미디어
출판일 : 2007년 6월
가격 : 9,500원

내 멋대로 레벨링 : ★★★☆☆ (읽긴 잘 읽었는데 나 이거 왜 샀더라?)
내 멋대로 20자평 : 유럽인에 의한 유럽인을 위한 유럽 역사 동인질


가끔 지름신이 내릴 때가 있다. 그래서 어느 날 등 따진 택배 상자를 앞에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거다. "내가 이걸 왜 질렀더라?"
솔직히 내가 이 책을 왜 샀는지 모르겠다. 역사소설은 언제나 취향이었지만 요즘처럼 출판물들이 쁘띠 트리아농 뒷뜰에서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하드커버로 담장을 쌓고 휑한 여백에 사과나무를 심어 떨어진 사과알 마냥 큼직큼직한 활자에 잡초가 돋다 못해 옥수수가 자랄 것 같은 널찍한 행간에 핀 알록달록한 꽃으로 없어도 될 삽화나 그려넣고 생뚱맞은 역각주가 길잃은 어린양처럼 배회하는 그런 목가적인 풍경에 반내려도 네 자리 넘어가는 가격 매겨 팔아치우는 시절에 단지 그런 이유로 나오는 족족 책을 사들일 정도로 여유롭지 않은데, 정말 무슨 생각이었담.

딱히 책이 별로였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독일 시골처녀 릴리안의 일인칭으로 서술되는 중세 유럽은 끔찍할 터인 본래의 일상에 쓰디쓴 블랙유머를 듬뿍 뿌려, 폭소까지는 아니더라도 피식피식 웃으며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단지 이 책은 역사소설이 아니라 역사를 소재로 한 코미디였으니, 완성도를 떠나 굳이 이 남의 나라 역사 코미디를 우리네 역사에 비교하자면 영화 <천군>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애초에 피임약이 독일에 소개된 건 1961년이라고 책 뒤에 써 있는 것을, 1534년에 피임약을 개발한 릴리안과 체칠리에 - 그러니까 내 독일어 실력이 미천해 원제가 뭔뜻인지 모르겠지만 절대 한국어 제목이 직역은 아닐 게다 - 는 뻔뻔스럽게도 그 시대 그 장소에 있었을 리 없는 사람들과 사건과 발명과 발견을 거듭하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수염은 검지만 아내를 여럿 잡아먹은 왕의 나라까지 흘러간다. 애초에 이 책에서 <에이트>의 치밀한 역사미스테리를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지. 초반에 에스트로겐 운운할 때 이미 기대는 버렸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웃으라는 데서 웃어줬다. 응, 그러니까 시간은 잘 가고 책장도 잘 넘어가더라. 릴리안이 존경스럽다. 잘도 그런 캐릭터들을 거느렸구나. 아니, 잘도 그 이상의 머저리들 속에서 늙어가셨던 릴리안의 할머님이 더 존경스럽다. 독일계보다는 비독일계 캐릭터들이 압도적으로 귀엽더라. 방화예정자 마르틴 루터...는 독일인인가; 사실 제일 귀여운 건 고래라든가 암소였지만(爆)

애초에 독일인이 쓴 독일인을 위한 역사 코미디라는 걸 감안할 때 번역은 심하게 불친절하다. 배배 꼬이다 못해 끊어진 파편이 흐트러진 책장을 헤치고 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외국인을 위해서 간략하게나마 설명해줬어야하는 단어나 사건 상황이 좀 더 많았을 텐데.

...나는 그의 긴 이름을 외울 수가 없어서 말을 더듬었다.
"상태가 좋지 않은가요?"
"나한테 물으신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겠습니다."
긴 이름의 약제사가 대답했다.
"그래도 온 힘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완전한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두 분도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은 그저 나를 파라켈수스라고 부릅니다."...
Posted by 동굴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