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딴 이야기를 좀 하자면, 맞벌이 하시는 부모님 슬하에서 대학생을 가장한 백수 라이프를 영위할 무렵, 토요일마다 집안일을 돌봐주러 오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말수가 좀 많아서 그렇지 좋은 분이셨지만 단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셔서 영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 오시면 일단 TV를 볼륨도 드높고 켜놓은 다음 일을 시작하시는 거다. 그것도 항상 아침 드라마를!! 이 풍진 세상, 한 커플이 연애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부모와 자식과 형제와 자매와 시댁과 친정과 며느리와 사위와 친구와 연적과 상사와 부하직원이 싸워줘야 하는지 수면학습으로 몇년 간 습득하고 났으니, 내가 연애에 핑크빛 환상을 품을 리도 없고 한국 드라마가 입맛에 맞을 리가 없다. 그렇다, 나는 트렌디 드라마가 싫다, 상당히, 아주, 매우, 전적으로!!
<클로저 댄 에버>는 류정한 씨가 나온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이 보러 갔는데, 정작 나한테 보러 가자고 추천한 P양도 예매 사이트에 평이 좋더라는 것 외에는 별 사전 지식이 없더란다. 덕분에 막이 내릴 때까지 나와 P양, K양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멜로디에 가사 붙여 부르는 건 딱 번안곡 느낌인데, 캐릭터들이 너무너무너무 국산 트렌디 드라마다?"
일일이 타이핑하기도 구찮고 스포일러를 피하느라 갖은 태그 부릴 기력도 없고 하니,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위에 링크한 공식 홈 안내를 찾아가 보시길. BGM으로 깔린 곡이 오프닝인데 (아마도;) 들어보면 대략 내 취향에는 맞다. 난 음악이 꽤나 귀에 달라붙길래 <아이러브유>나 <더 씽 어바웃 맨> 작곡자(이름도 기억 못한다;) 작품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토요일 밤의 열기> - 이건 들어본 적 없는데, 그만큼 파퓰러하다는 의미인가. 아무튼 음악은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았는데, 나오면서 흥얼거릴 만한 인상적인 뮤지컬 넘버가 있는 건 아니고 (이건 좀 치명적이지 않나;) 오프닝과 엔딩을 같은 넘버로 해서 각인하려는 시도가 혹시라도 있었다면 엔딩 때의 그 충격적인 가사 (이건 좀 많이 용서가 안된다) 때문에 전혀 효과가 없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어떻게 된 뮤지컬이 6명 나오는 소극장 규모인 주제에 독창만 되면 축축 늘어지냐. 특히 2막 초반에 진희랑 영만이 번갈아 땅 파댈 때는 진짜 그 판 데다 둘 다 묻어버리고 걍 일어나고 싶어지더라.
배우들에게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다들 연기 잘 했다. 특히 나는 처음 소극장 무대에서 보는 류정한씨는 어깨에 힘을 빼고 천연덕스럽게 만년 소년을 연기했고, 특히 츤데레 노처녀(웃음) 숙희 역의 김영주와 (유나영과 공동으로) 캐스팅 최단신인 '천상 요즘 애' 새롬 역의 성준서는 브라보를 날려줬어야한다 싶게 멋졌다. 김영주 다리 잘 빠졌더라~ 성준서 귀엽더라~ 특히 남의 소포 갖고 기자 놀이할 때 후, 나도 그런 9살 연하의 밤일 잘 하는 삼돌이 주워다 기르면 사는 재미가 나려나?
게다가 번안인 걸 알고 보니, 나름 한국어로만 가능한 개그도 꽤 많이 들어 있고, 이게 번안이면 동사무소 공익은 대체 원작에서 뭐였을지 궁금 가사도 받아 적어놔도 말이 될 정도더라? 한 곡 내내 '저'라고 해야할 걸 죄다 '나'라고 한다든가, 반말하던 애가 뜬금없이 존댓말로 노래한다든가, 그놈의 '했죠오~'라든가, 거슬리는 부분이야 많았지만, 대극장 규모만 거하게 풀어놓는 주제에 가사 번안은 발로 했는지 그보다 더한 새겨 들으면 저런 게 한국어라는 게 낯부끄러워지는 캐삽질도 태연히 해내는 메이저 기획사들보담이야 낫지 뭘 =ㅅ=
그러니까 짜증이 나서 정말정말정말 매 순간마다 "27천원 27천원 괜찮아 음악은 좋잖아 연기들은 잘 하잖아 졸랭 짜증나는 캐릭터를 너무 잘 연기해서 미치겠지만 27천원 27천원 아악 왜 쟤 아직도 노래하는 거야 이 막은 언제 끝나는 거야아아아아아!!!!" 포효하게 만들었던 건, 오로지 캐릭터와 대본이었다. 평일 아침이나 저녁에 TV 돌리다 보면 지뢰 밟듯 화면 가득 얼굴 들이밀고 울든가 화내든가 짜증내든가 셋 중 하나, 혹은 그 셋을 동시에 하려다 실패해서 멀리 스탭이 들어올린 거인국 사이즈 국어책이나 더듬더듬 읽어나가는 '생김새 착한' 선남선녀들이 45분 내내 대화하든가 싸우든가 차를 타고 있든가 밥을 먹고 있든가 길을 걷고 있든가 어디 앉아 있든가 대화하고 있는, 그 엉덩이 붙이고 수다 떨 시간에 뭔가 건설적인 행동을 취한다면 16부작 드라마가 4부작으로 압축될 수 있을!! 그런 트렌디 드라마를 채널 돌리다가 얼핏, 도 아니고 - 실시간 라이브로 2시간 동안 한 자리 앉아서 보는데 내가 돈을 냈다. 아, 분하다. 아, 억울하다.
도대체가 마음에 드는 캐릭터라고는 숙희와 새롬 커플밖에 없는데, 그건 오직 얘네가 19금 성인 개그 담당이라 둘이 수다만 떠는 것보다 뭔가 액션을 취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극의 흐름으로 보나 캐스팅 비중으로 보나 메인 커플은 준희와 경신인데, 준희는 걍 사반나 표범한테 몸바쳐 먹히는 게 세계평화에 이로울 거 같고, 경신은 내가 더는 참을 수 없으니 아무리 돈 아까워서 1막 중간에서 포기하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악 쓰는 걸 멈췄다. 걔네가 사귀었던 건 이해한다. 헤어진 것도 이해한다. 근데 헤어진 다음에 왜 그리 지지부진하는 거냐. 120분 극에서 싸운 건 시작 10분만인데 커플 깨지는 건 40분 째에, 완전히 재결합 불능이라는 건 80분째에, 남자가 포기하는 건 110분째에 나온다. 그것도 오.로.지. 전화 통화 내지 직접 대화를 통해. 아씨, 이래서야 전화 걸기 전에 15분 고민하고, 5분 통화를 과거 회상 섞어서 15분으로 늘려서 보여주고, 전화 끊은 다음 15분 번뇌하는 선남선녀 커플로 오늘 하루도 땜빵하는 16부작 트렌디 드라마란 대체 뭐가 틀리냐고. 게다가 남친한테 프로포즈 받기도 전에 자기 아버지 퇴직금에 같이 부은 적금 탈탈 털어서 같이 개업할 병원 계약한 경신씨? 그게 댁 혼자 적금 통장 돌려주면 끝날 정도로 사소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덕분에 나는 얘네만 나오면 (메인 커플이라 나오기는 또 엄청 자주 나와요!) 괴로워 죽는 줄 알았다.
거기다 더 진을 빼놓는 건 진희랑 영만. 난 진짜 걔네 애들이 불쌍하다. 나이 서른셋에,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덜컥 결혼해서 애 낳아서, 멍청하게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이혼하고 혼자 애 키우느라 휘는 뼛골 바로 잡느라 일부러 난폭하고 천박하게 세상을 향해 凸을 날려대는 '안 팔리는' 영화감독 진희는, 차라리 한국 정서에서는 더욱 이해가 간다. 그래, 여자가 일찍 결혼하고 물정 모를 때 애 딸린 채 이혼녀 되어서 지금껏 10년 넘게 살았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에 비하면 영만은, 아무리 고영빈이 잘 생겼고 키도 크고 목소리도 좋고 노래도 잘 하고 연기도 잘 하고 춤도 잘 춘다지만! 진짜 내 동생이었으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놓고 싶을 정도로 한심하다. 부인이 교통사고로 죽을 때에도 절간에서 시나리오를 썼다면서, 3년간 썼다는 그 시나리오를 크랭크인 직후 투자자가 손 떼서 프로젝트 깨졌다고 곱게 찢어서 쓰레기통 버리고, 그제서야 제 마누라 무덤 앞에서 나 외롭다 같이 있어줄 사랑 찾아가도 되겠냐 넋두리나 해댄다. 이보세요, 요즘은 순수소설 작가도 그런 알량한 창작 마인드로는 밥 못 벌어먹습니다. 시나리오란 그거 하나로는 한강변에서 고구마나 구워먹을까 (그것도 출력했을 때 이야기고) 반드시 '팔아서' 다른 매체로 되살려야 쓸모가 있는 물건이거늘, 이미 팔린 시나리오로 영화 찍는 감독에게 바락바락 대들면서 제작에 관여하는 시나리오 작가라는 존재 자체가 가당키나 한가. 보통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서 소설사나 시나리오 라이터 등등은 각본가의 자기 투사가 어느 정도 들어가는 법인데 (만화에서는 만화가) 대체 이 작품 각본가가 뭔 생각으로 이런 캐릭터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번안가냐? 문제는 번안가냐? 아니면 1989년에는 다 이러고 살았냐???
지금까지 상당히 혹평을 늘어놓은 거 같은데, 사실 공연 직후에 그 느낌 그대로 감상을 썼다면 이보다 훨씬 질 나쁜 악평이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이만큼 순화해서 이야기하는 건 어디까지나 이 뮤지컬이 1989년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1989년, 무려 17년 전, 내가 교복 입고 학교 간다는 것에 겨우 익숙해질 무렵이다. 그때 30대의 '젊은' 어른들은 저러고 살았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그보다 20년 가까이, 강산이 넉넉히 두 번은 변한 뒤에야 그 나이대가 된 내가 그들의 사고방식에 가타부타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뭐, 그땐 그랬나부다 해야지-ㅅ-
하지만 좋고 싫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 뮤지컬에 나오는 그 어떤 캐릭터도 나는 스스로를 몰입하거나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숙희와 새롬조차도 그들의 모자람이 나로써는 용납할 수 없는 부분에 어떤 '어른스럽지 못함'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처져 있었다.
다행히 지금 나는 이 뮤지컬에 나오는 이들보다 아직 어리기에,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나는 그들처럼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들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도 않을 것이며, 절대로 그들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2막 내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고, 무례하게 굴고,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상처 입히기까지 하면서도 변변하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던 - 그리고 그 누구도 제대로 마음을 담아 감사하거나 칭찬하거나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던 그들처럼은.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숙희와 새롬을 '이쪽' 경계까지 끌어낸다. 그러니까 난 그 커플이 마음에 들었다고...)
ps. 이 뮤지컬, 왜 제목이 <Closer than Ever>인 걸까? 결말을 보고 난 뒤 어떤 경우의 수를 상정해 보아도 "지금, 그 언제보다 더 가까이에" 있는 게 대체 누구에게 해당되는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는데...
pps. 이래서 늦게 출발하는 쪽이 손해라는 거다. 2006년에 남의 나라 1989년 청춘남녀상열지사번뇌담을 보고 있으려니 납득이 안가는 것도 당연지사. 들여오고 들여오다 이런 구닥다리 유물까지 먼지 떨어 전시하지 말고, 같은 버핏(풉)에 같은 규모면 창작을 좀 하지...어차피 트렌디 드라마더구만 (중얼중얼)
ppps. 근데 원작이 궁금하긴 하다...(먼눈)
pppps. K양 덧글에 생각난 김에 덧붙임. 그나마 라스트 스탠딩에 호응해서 같이 어우러져 주고 있는 곰을 딱 굳힌 다음 "씨바 지금이라도 때려치고 나가버릴까" 분노케 했던 최악의 커튼콜이었다. 그렇게 공연하기 싫으면 애초에 무대에 올리지 말란 말야 (버럭)
ppppps. 갑자기 심각하게 <더씽어바웃맨>이나 <틱틱붐>이 듣고 싶어졌다. 흑흑 날아간 내 데이터 하드야 대체 언제 돌아오니 (mp3 코딩하기가 귀찮을 정도로 번거롭단 말이다아아아)
덧. 왜 "가운데 앉아서 보라"는 말이 흘러다니는지 알겠다. 그 뒤에 따라붙는 "배우들이 가운데만 보고 연기한다"는 헛소문이었지만, 중앙 구역 제일 앞줄 한가운데가 VIP석인 건 확실하다(여러가지 의미에서...) 좌우측 구역 제일 앞줄 한가운데도 마찬가지이고, 그 자리들을 중심으로 좌우와 뒤의 3석 정도만 되어도 보러 간 보람은 있겠다. 아니면 구역 사이 통로측 좌석에 앉아줘도. 배우들이 상당히 자주 무대 뒤가 아니라 관객석 뒤쪽으로 퇴장한다(...)
덧덧. 후문 폐쇄했으면 그쪽 건물에 걸어둔 간판은 철거해야할 것 아니냐. 덕분에 그 블록 한바꾸 돌았다. 잊지 안케따, 씨어터일-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