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 영원의 나무와 세계의 열매 -01 (끝)
개?
응, 생일선물로 받고 싶어!
...당신.
엄마가 내 뒤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아빠를 노려보았다. 그럴 때의 엄마는 정말 무섭다.
아닙니다, 전 한 마디도 안 했어요.
그치만 아빠가 웃으면서 말해서 안심했다. 엄마는 나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아빠 말은 다 들어준다. 그리고 아빠는 틀림없이 내 편을 들어줄 거다. 아빠가 개를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가 엄마한테 맞는 걸 몰래 봤으니까.
아빠가 시킨 거 아냐, 아샤가 가지고 싶어, 개!
말은 잘 한다. 너 개가 뭔지는 알아?
응!
짜잔! 하고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스케치북을 보였다. 개 그림이 실린 책은 너무 두꺼워서 무겁고, 또 난 원래 엄마 서재에 마음대로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에 베껴 그렸다.
아빠 같은 거!
...어디가?
까맣고 복실복실한 털에 금색 눈에 팔다리도 길쭉길쭉하잖아! 또 개는 착하고, 영리하고, 성실하고...음....신...신...
신뢰,
스케치북 뒤에 쓴 글자가 너무 어려워서 못 읽으니까 아빠가 뚱겨줬다.
신뢰할 수 있대. 아빠 같은 거 맞지, 엄마?
....너 말이야. 보호관리종 생물은 반입허가 받는 것부터 엄청나게 귀찮거든?
그치만 엄마아-
스케치북을 내던지고 엄마한테 달려들었다. 엄마는 깜짝 놀라면서도 날 안아주었다. 화낼 때는 정말 무섭고, 맨날 귀찮다고 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아빠 다음으로 날 좋아한다.
아샤 생일이잖아! 생일 선물! 생일 선물로 개 줘!
생일이 무슨 벼슬이니? 때 지나면 어련히 알아서 오는 걸 가지고!
이잉~ 엄마아아아아아~
얘가 정말, 볼 비비지 마! 또 긁히려고!
엄마 옷에는 번쩍거리는 금속 장식도 많이 달려 있고 뻣뻣하다. 그치만 나는 이 옷을 입은 엄마가 제일 멋지다. 언제나 옷자락에 배어 있는 매캐한 냄새도 싫지 않다.
아샤가 이렇게 바라는데, 어떻게 안될까요? 저도 삼가 부탁 드립니다.
당신까지 왜 이래요, 진짜...꺗!
엄마는 왈칵 짜증을 냈다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아빠가 나랑 엄마랑 한꺼번에 끌어안으니까 비명을 질렀다. 아빠가 엄마랑 나랑 꼭 끌어안고 막 뺨을 부볐다. 아빠한테서는 갓 구운 빵 냄새가 난다. 따뜻하고 보들보들하고 고소한 냄새가 난다.
네? 이제 아샤도 일곱 살이니까.
정말이지 이 부녀는...
엄마도 나랑 아빠를 끌어안았다. 엄마는 정말 아빠를 좋아한다. 아빠는 정말 엄마를 좋아한다. 엄마는 내가 아빠랑 똑같다고 하고, 아빠는 날 보면 엄마가 생각난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날 좋아한다. 나도 엄마랑 아빠를 좋아한다. 좋아했다. 누가 더 좋으냐고 물어보면 울어버릴 것처럼 좋아했다. 셋이 함께 있어서 행복했다. 엄격하지만 자상한 엄마랑, 다정하고 상냥한 아빠랑, 그냥 안기고 싶은 품에 안기고, 업히고 싶은 등에 업히고, 뽀뽀하고 싶은 뺨에 뽀뽀하면서, 하루하루가 늘 꼭 그렇게 즐겁고 행복할 줄 알았다. 언제까지나 행복할 줄 알았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고, 엄마는 약속대로 개를 선물로 주겠다고 했고, 근사한 저녁을 먹고 데리러 가자고 했고, 차를 타고, 계속 가고, 또 계속 가고, 전화가 오고, 비가 내리고, 엄마가 화를 내고, 아빠가 화를 내고, 내가 울고, 하지만 비는 그치지 않고, 차를 타고 가고, 계속 가고, 계속, 그리고,
아샤!!!
번쩍 뜬 눈이 부서진 거울처럼 일그러진 세상을 비춘다. 깨진 알 껍질처럼, 낯선 눈동자를 비춘다. 젖은 눈꺼풀을 깜빡이던 아샤가 누군가 저를 내려다 보는 낯설도록 오랜만의 경험에 깜짝 놀라 일어나려고 하는데, 두툼한 앞발이 쇄골 어림을 살짝 눌렀다. 살짝, 딱 거기만.
“어...개야? 네가 깨워준 거야?”
끄응. 강아지가 코끝으로 아샤의 뺨을 찌른다. 아샤가 눈꺼풀을 깜빡이자 아직도 남아 있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손등으로 눈가를 닦고, 뺨을 닦는다.
“괜찮아.”
조금도 괜찮지 않잖아. 엄격한 눈빛으로 아샤와 시선을 맞췄던 강아지가, 뒤늦게 제 눈높이를 깨달았는지 몸을 돌리고, 머뭇거리더니, 아샤의 젖은 손등을 핥는 척, 정말로 핥는다.
“간지러워- 위로해주는 거니? 착하구나...카이.”
강아지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목덜미의 털이 살짝 일어선다.
“카이. 그래, 널 카이라고 부를 거야. 어때? 좋은 이름이지?”
강아지는 대답하지 않는다 –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아샤가 내민 손을 피하지 않았다. 악몽에 몸부림치느라 떨리는 손이다.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느라 쉰 목소리다. 피할 도리도 달아날 길도 없다. 카이라고 불리게 된 강아지는 한숨처럼 목을 울리고, 아샤가 끌어안는 대로 그녀의 품에 순순히 몸을 맡긴다.
“잘자, 카이.”
아샤는 아직도 축축한 뺨을 크고 따뜻하고 포근한 생물의 목덜미에 묻고 잠을 청한다. 오래 전에 잃어버린 아빠의 이름을 붙인 생물은, 그래, 아샤, 정말로 아빠 같구나.
1화 '아샤' 끝.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