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 영원의 나무와 세계의 열매 -01 (2)
"436년 베스티아의 서령총독은 청매(靑梅)라는 여자였어. 그녀는 매의 아니무(수인獸人)였지. 아니무가 뭔지 아는 사람?"
"나! 나!"
"저요, 하고 조용히 손 들랬지, 에시리?"
"저요!"
"짐승으로 변할 수 있는 베스티아 사람!!"
"악, 내가 대답할 거였는데!"
"메롱이다~"
"오리카 언니!!"
"선생님이라고 부르랬지!
수업이 시작된 지 30분, 공부방 안은 아수라장 직전의 혼란이었다. 여섯 살에서 열세 살까지의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열세 명을 한 방에 넣고 한꺼번에 가르친다는 건 무모한 도전이다. 그런 도전을, 해야한다는 이유만으로 감행했다는 사실에서 오리카 무닐린의 용기를 칭찬할 요량이 있다. 심지어 그녀는 제법 잘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지금 같은 상황이 비일비재하기는 하지만.
"에시리도 알고 있었겠지만, 토튼 말대로 아니무는 짐승으로 변할 수 있는 베스티아 사람을 말하는 거야."
"근데 베스티아 사람은 누구든지 짐승으로 변할 수 있다면서?"
"어? 그럼 베스티아에는 짐승밖에 안 살아?"
"바보야, 짐승으로 변할 수 있는 사람이 산다니까?"
"그럼 그게 사람이야 짐승이야?"
"짐승 아냐?"
"베스티아 사람도 우리랑 똑같이 생겼다던데?"
이놉과 도미나토가 똑같이 생긴 것처럼. 아샤가 중얼거렸다.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소리에 묻혀서, 아마 어지간히 큰소리로 외치지 않은 이상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일 나이가 많은 고아의 특권으로, 아샤는 공부방의 제일 뒷자리에 혼자 앉았다. 사실 오리카의 수업 수준은 제일 손이 많이 가는 아이들, 즉 여섯 살의 에시리부터 아홉 살의 토튼까지 여섯 명의 원아에게 맞춰져 있다. 초등학교 수준이라는 이야기다. 가끔 아샤가 어린애들과 '놀아 주는' 동안 오리카가 나머지 여섯 명의 좀 더 나이가 많은 애들에게 초등교육 교과를 가르치는 일도 있지만, 아샤의 지식은 오리카가 가르쳐준 것보다 혼자 책을 읽어 습득한 것이 더 많았다. 제3고아원에는 그 흔한 라디오도 없었기 때문에 아샤는 일주일에 한 번씩 지구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자자, 다들 조용! 베스티아 사람들은 누구나 짐승으로 변할 수 있고, 그래서 그 사람들을 아니무라고 불러. 도미나토의 능력 중에도 변신 능력이 있지만 흔하지 않고, 변신하더라도 아니무하고는 다르다고 해. 나도 변신 능력의 도미나토를 만나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래."
겨우 상황을 수습한 오리카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무튼 청매는 매로 변할 수 있었다고 해. 엄청 커다란 매."
"얼마나 커?"
"어디 보자..."
오리카가 무릎 위에 펼쳐둔 역사서 - 이 경우 참고서라기보다는 컨닝 페이퍼에 가깝다 - 를 들여다 보았다.
"머리 높이가 3m, 날개를 활짝 펴면 끝에서 끝까지 10m...굉장하구나. 아마 이 방에 들어오지도 못했겠는데."
"그렇게 커?"
"응, 엄청나게 큰 매였대. 그래서 청매는 자기 혼자 우리 미라빌리스 군대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었나봐."
오리카는 436년, 즉 21년 전의 제3차 성산聖山 전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미라빌리스 공화국은 설산맥雪山脈의 성지를 경유하는 불경을 감행한 결과, 300년 넘게 계속된 베스티아 제국과의 국경전에서 승리하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근데 못 이겼지?"
"그래, 다들 알고 있지? 청매는 과연 무시무시한 맹수였지만 혼자서 최신예 장비로 무장한 미라빌리스 군대를 당해내지 못했어."
청매의 단독행동은 그녀 자신의 어리석음보다는 당시 베스티아 제국 황족들 사이 - 청매는 지금 황제의 종고모다 - 에서 일어난 정쟁의 결과로 보는 편이 옳겠지만, 아이들에게 재미없는 이야기겠지. 사실 아동용으로 각색된 역사서에서 청매는 '어리석은 매 공주님'으로 제법 자주 언급되는 소재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 미라빌리스 공화국은 드디어 베스티아 제국과 오랜 전투에서 승리했단다. 이제 베스티아를 점령하려고 했을 때...무슨 일이 일어났게?"
"총령이 돌아가셨어!"
과연 유명한 이야기라서 아이들은 그 결말도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다들 아는 이야기라서 더 산만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총령의 죽음에는 청매의 그것 못지 않게 얽히고 설킨 우여곡절이 많지만, 그 역시 아이들에게 제대로 알려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래, 아쉽게도 성산의 여신께서는 총령의 간곡한 기원을 듣지 않으셨어. 무정하게도 성산을 침범한 죄를 물려 총령에게 죽음을 내리셨지. 그래서 총령은 돌아가셨단다."
그리고 300년만에 얻은 승리는 더욱 뼈아픈 패배로 돌아갔다. 21년 전, 미라빌리스 공화국은 절대권력자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아 평정을 잃고 혼란에 빠진 댓가로 굴욕적이라고 해도 좋을 휴전협정을 맺고 설산맥 이서以西로 완전히 철수해야 했으니까.
쿵! 쿵!
굉음이 희미하게 들려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아샤가 문득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손에 힘을 주어 귀를 막으면 고막에 직접 전해지듯 울리는 심장고동처럼, 그 둔중한 폭음은 멀리서 희미하게 계속 이어졌다. 아샤가 가장 먼저 알아차리긴 했지만 다른 아이들도 곧 그 소리를 들었다.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관리되는 캐피탈에서 낯선 소리나 돌발사태는 흔하지 않다. 아이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소리가 나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2주 전 요란하게 싸운 끝에 공부방 유리창을 화려하게 깨뜨린 열한 살배기 쌍둥이 사내애들이 아직 유리를 끼우지 않아 훤하니 드러난 창턱으로 달려가 붙었다.
"플레올! 시디올! 너희 뭐하는 거니, 어서 돌아와 앉아!"
"비 와!"
"뭐?!"
"오리카 누나, 비 와! 비!!"
그때만큼은 아이들도 어른만큼이나 놀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방금 캐피탈에서는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관리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미라빌리스의 기계심장의 하늘은 기상관리국의 관리하에 있었다. 매일 적절한 일조량과 습도를 제공하고 송풍량을 조절하고, 강우일을 정해 공표하고 필요한 만큼 비를 내리는 것이 기상관리국의 업무였다. 기상관리국이 강우예정을 어긴 일은 지난 5년 동안 한 번도 없었다. 10세 안팎의 어린애들에게는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상상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5년 전의 그날을 기억하는 아이는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면.
"아시엘린? 어디 가니!"
의자를 거칠게 밀어 젖히고 벌떡 일어난 아샤가 공부방을 뛰쳐나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정숙! 실내에서 뛰어다니지 말라고 했지!!"
와글와글 떠들던 아이들이 뚝 그치고 조용해졌다. 어느새 로베일라가 공부방 문간에 서 있었다. 30대 후반 독신녀인 로베일라 찰레트는 딱히 무섭게 생긴 외모도 아니고 동화에 나오는 다른 원장들처럼 - 그런 허접쓰레기를 동화랍시고 애들에게 읽히다니! - 기댈 데 없는 이놉 고아들에게 폭력이나 학대를 베풀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들의 원장을 무서워했다. 심지어 치유 능력의 도미나토여서 아이들이 다치거나 병들 때마다 치유해주는 사람인데도 그러했다.
"무닐린 선생, 나가서 빨래 걷어요. 비 오니까."
"네? 아, 아악! 빨래!!"
오리카가 비명을 지르며, 조금 전의 아시엘린 못지 않은 기세로 공부방을 박차고 나갔다. 실내에서는 정숙하라니까. 혀를 찬 로베일라가 시선을 아이들에게로 돌렸다. 공부방 안은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훤히 열린 창문으로 들이치는 빗소리가 선명하게 조용했다.
"창고에서 비닐 꺼내다가 유리창 막아라. 내일 당장 업자 불러서 유리 끼워 넣을 테니까. 아니, 아시엘린 너는 기다려."
제3고아원에서 아이들의 행동 순서는 나이순이었다. 즉, 원장이 내린 명령을 수행하는 순서는 언제나 아샤부터였던 것이다. 하지만 로베일리가 아샤를 잡았기 때문에, 그 다음 손위인 열한 살짜리 쌍둥이가 눈치를 보고 창고로 뛰어갔다.
"아시엘린, 도서관에서 전화 왔다."
"예?"
"대출한 책을 찾는 상급시민이 있으니 반납하란다.”
"지금요?"
로베일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시엘린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에우리빛은 일렁거리지 않고 차분하게 안정되어 있었지만, 그건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D레벨의 치유 능력자이기 때문에 오리카처럼 불안정하지 않아서였다.
"혈압이 좀 높군. 호흡도 불안정하고. 열은 없는데, 어디 아프니?"
"아뇨."
"그럼 당장 갔다 와."
미라빌리스 공화국의 모든 대민對民 서비스의 이용 순위는 도미나토가 이놉에 우선한다. 공공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는 것조차 예약한 순서 전에 보유한 능력의 등급이 좌우하는 것이다. 계급사회의 최하층인 이놉의 삶에 익숙한 아샤는 말없이 책을 가지러 갔다.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아이의 특권으로, 아샤는 3층 창고 옆 골방을 혼자 쓰고 있었다. 넓거나 쾌적한 공간은 아니었다. 더러운 천창天窓으로는 하늘도 내다볼 수 없고, 지금처럼 비가 내릴 때는 유리창과 지붕에 내리꽂히는 빗소리가 시끄러웠다. 가끔 들고양이의 발소리가 잠들지 못하는 밤의 적막을 깨뜨릴 때도 있었다. 그래도 침대와 옷장, 책상으로 꽉 차는 그 좁은 공간은 한 소녀에게 주어진 온전한 성이었다.
아샤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비에 젖지 않도록 잘 꾸려 넣은 가방을 어깨에 맸다. 방을 나서는 모습이 한쪽 벽에 세워진 전신거울에 비쳤다. 어디서 주워왔는지 아래쪽이 크게 깨진 거울은 오랫동안 닦지 않아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렸고, 영양상태가 고르지 않아 가늘고 자그마한 몸에 핏줄이 도드라진 여위고 창백한 피부 위로 부스스한 갈색 머리를 총총히 땋아 내린 소녀는 금새 사라질 유령 같았다. 한때 저 뺨은 탐스러운 분홍색이었다. 호박색 눈동자는 천진난만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네가 다시 소리 내어 웃는 것을 들을 수만 있다면.
아샤의 등뒤로 다락방의 문이 닫혔다.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을 통해, 힘들게 널었던 빨래를 아직도 걷고 있는 오리카의 모습이 보였다. 우산을 쓴 아샤가 그 곁을 지나간다. 오리카는 등을 돌린 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 곁을 지나가는 아샤처럼 피가 나도록 힘껏 깨물고 있었다. 자기방어가 되지 않는 어설픈 감응 능력은 이럴 때 결코 오리카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5년 전, 캐피탈에 예고되지 않은 비가 내렸다. 마치 오늘처럼. 그날 아시엘린은 고아가 되었다. 빗길에 미끄러진 자동차가 건물을 들이받았다. 아빠에게 안기고 또 엄마에게 채 살아 있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종잇장처럼 구겨진 차체와 그녀 부모의 일부를 잘라내야 했다. 그때 아샤는 눈을 뜨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그저 빗물과 핏물로 젖은 뺨을 또다시 눈물로 적시며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