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ian/미션2] 곰, 쇼콜라 맨션을 나오다.
그날 아침, 지안 공설 여행자 전용 기숙사 제4동 - 통칭 쇼콜라 맨션의 사감인 마리 셰르파는 매우 기분이 나빴다. 세계 전체가 하나의 수도원처럼 거대한 미덕을 방패로 더욱 거대한 악덕과 끝나지 않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래리어트 출신인 만큼, 그녀가 지닌 풍부한 미덕에는 애교점처럼 사소한 악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꼭두새벽부터 날 깨웠단 말이군요."
사위는 환하고 아침이 빠른 가정에서는 벌써 아침 식탁을 치울 무렵이니 딱히 꼭두새벽이랄 것은 없었지만, 셰르파 사감이 지닌 가장 강력한 악덕은 다름 아닌 '아침잠'이었다. 아침에 약할 뿐 아니라, 그녀가 판단하기에 '매우' '확실하게' '긴급하고도' '타당한' 이유 없이 깨우는 자에게는 응당 받아 마땅한 천벌을 내릴 정도로 아침에 깨어나기 전의 시간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 셰르파의 2m가 넘는 건장한 체구가 낮잠을 자기 전에는 꺼지지 않을 분노의 불길에 휩싸여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그래요. 어떻게 좀 해주십쇼. 가능한 빨리."
다행스럽게도 - 혹은 불행하게도, 그 분노에 불을 지폈고 또한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알레르망이었다. 셰르파 사감과 나란히 서도 뒤지지 않은 건장한 근육질 체구를 지닌 쇼콜라 맨션의 주방장은 잘도 그 자세가 가능하구나 감탄할 정도로 굵직한 팔을 두툼한 가슴 앞에 나란히 얹으며 - 그의 고향 행성에서는 그것이 '팔짱'이라 불리는 자세였다 -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 놈들 때문에 오늘도 아침식사 준비가 한 시간이나 늦어졌어요. 매번 이런 식이면 저 일 못합니다."
"그리고 매번 내 아침잠을 깨우러 올 거고 말이죠."
"이 기숙사의 평화를 책임지는 사람은 사감님이잖습니까."
"그렇단 말이죠..."
셰르파의 말꼬리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에 지글지글 일그러졌다. 알레르망의 청보라색 얼굴은 얼음처럼 차갑게 분노하고 있었다.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의 약속이나 한 듯 홱- 같은 방향을 향해 돌아갔다.
갸우우...
꾸웅?
불행하게도 - 혹은 다행스럽게도, 보통 사람이라면 오금이 저려 덜덜 떨었을 그 무시무시한 두 쌍의 시선을 받아친 것은 두 마리 강아지였다. 어딘가의 차원에서 여신의 사자로 성스럽게 여겨지는 환수, 이미 성견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지만 굵직한 앞발로 미루어 아직 한참은 더 클 것 같은 검은색의 카푸슈나가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자, 그보다 더 크고 더 활발하고 더 먹성 좋은 금색 카푸슈나는 더 안 먹고 뭐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금 물어뜯은 냉동 라크 다리를 꿀꺽 삼키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검은색 카푸슈나가 머뭇거리며 앞발 사이에 끼고 있던 빵덩어리를 우물우물 뜯어먹었다. 힘들게 구한 히켕 열매를 다져 넣은 비장의 야식이 순식간에 '쳐묵' 당하는 것을 본 알레르망이 굵은 목을 울리며 팔뚝 만큼이나 굵직한 꼬리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하지만 몸집과 행동력, 파괴력과 먹성이야 어떻든 쿠바카와 야무키는 아직 어린애였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아 먹는다는 실로 본능에 충실한 아이들의 저지레에 직접적으로 화낼 정도로 어설픈 어른이 아니었다, 셰르파와 알레르망은.
잡도리를 하려면 이 금수들의 보호자에게 해야지. 아주 철저하게.
"...모하임."
-예, 마담 셰르파.
재깍 돌아온 대답이 바짝 얼어 있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쇼콜라 맨션의 유일한 '전뇌종족' 직원은 그만큼의 상황판단과 감정표현이 가능한 슈퍼 컴퓨터였으니까.
"어디 있죠?"
-3102호입니다.
같은 이유로, 모하임은 '누구 말입니까?' 따위 불똥이 튈지도 모르는 멍청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아, 그렇지. 3102호. 자기 방에 있겠지. 거기가 아니면 어디 있겠어. 셰르파가 상어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두 겹 어금니를 빠드득- 갈았다.
"자고 있나?"
-예, 무슈 알레르망.
뿌둑. 알레르망이 그토록 섬세한 요리를 만들어낸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굵게 마디진 손가락 관절을 소리나게 꺾었다.
"사감님, 제가 잠깐 3102호에 들어갔다 와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내가 같이 갈 거니까."
꾸웅? 꾸웅!
갸우...우...
셰르파가 기세등등하게 돌아섰을 때 쿠바카가 햇님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크고 복실복실한 머리를 번쩍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무키는 한숨을 쉬며 까마귀 날개처럼 축 늘어진 윤기나는 검은 귀를 떨었다.
-이 사람들, 지금 우리 엄마랑 놀러가는 거야? 그럼 나도 갈래!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언니...그치만 나도 갈래...
에아르스 최초의 슈퍼 컴퓨터는 두 마리 카푸슈나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들었지만, 굳이 셰르파와 알레르망에게 번역해줄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옳았다, 언제나 그렇듯.
***
"그래서?"
"어떻게 좀 해줘요."
"내가 왜?"
대답 대신, 메리디아나는 그녀의 입국신청서 사본을 흔들었다. 유려한 서체로 휘갈긴 그녀의 서명 아래, 꼭 저처럼 울퉁불퉁하니 다른 사람은 절대 흉내낼 수 없을 것 같은 기발한 필체로 카스발 이즈나블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야, 내가 너희 보증인인 건 맞지만, 그건 의례적인 거거든? 일단 기숙사 들어갔으면 거기서 자립할 생각을 해야지."
"곰으로 변하지 말라잖아, 공공장소에서."
"그런 규칙도 있었나?"
"생겼어요, 오늘 아침에."
내가 식당에서 곰으로 변하고, 셰르파 사감이 날 식당 벽에 메다꽂은 다음에. 메리디아나는 한숨을 쉬며 왼쪽 눈가를 누르고 있던 두툼한 습포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대야의 차가운 물로 습포를 적시는 동안, 예쁘게 보라색으로 물든 광대뼈를 본 카스발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거참 잘코사니다, 이 곰탱이야.
"지금 깨소금이라고 했겠다?"
"응? 그걸 어떻게...아, 아니...흠, 흠."
메리디아나의 둥글둥글한 감청색 눈매가 뾰족하게 날이 섰다가.
꾸웅? 꾸웅? 꾸웅!!
"앉아, 쿠바카. 노는 거 아냐."
갸우우...
"고마워, 우리 작은 아가씨. 엄마 이제 안 아프니까 걱정 말아요."
철딱서니 없이 신나서 머리를 들까부는 쿠바카와 조심스레 품에 파고들어 턱을 핥는 야무키의 재롱에 스르르 풀어졌다. 어이구, 제법 애엄마 같으시네. 카스발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좀 마실래?"
"뭐 있는데요?"
"노리아 화주花酒?"
"그거 주스 같아서 싫다더니, 웬일?"
"나 아직 일하는 중이거든?"
"그리고 난 민원을 넣으러 온 거주민이구요. 한 잔 줘요."
기집애가 따박따박 한 마디도 안 진다니까. 투덜거리며, 카스발은 집무실 한켠의 벽장에서 노르스름한 액체가 담긴 디캔터를 꺼내 유리잔 두 개에 똑같이 따랐다. 한 잔을 책상 건너편에 앉은 메리디아나 앞에 놓고,
"그나저나 너 고향에서 공무원이었다면서? 잘도 안 잘리고 버텼다?"
"헐. 아, 이거 맛있네. 어디서 샀어요?"
"<노란 단풍잎>. 다음부터는 네 돈 내고 사 마셔."
"쪼잔하긴. 암튼, 어떻게 안 잘리고 버텼냐고요?"
단숨에 잔을 비운 메리디아나가 눈을 깜빡였다. 아련한 눈빛이 보이지 않는 것을 헤아리는 동안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럴 때의 메리디아나는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겨우 애티를 벗은 계집애 같이 생겨먹은 주제에, 올올이 쇳내가 밴 기도氣度를 세모시 수의壽衣처럼 느긋하게 걸치고 있는 것이다.
"여자애를 하나 구했지."
"겨우?"
"뭐, 내 고향 제국의 황제가 됐지만."
풉. 카스발이 막 머금었던 한 모금을 도로 뱉았다. 지금 뭐라고 한 거냐며 노려보자, 장난을 성공한 어린애처럼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잇는다.
"선황 폐하가 엄청 근사한 미중년이셨거든요? 연배는 당신 비슷했을 거야, 그치만 비교도 안돼. 그런 남자 다시 없을 거야."
"어이구, 예예, 그러셨어요?"
"응, 그 분이 승하하실 때 내 손을 잡고..."
메리디아나는 시선을 들어올렸다. 벌써 수십 년이 지난 일이건만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율리아나를 부탁한다. 이제 믿을 사람은 너뿐이구나...마나. 처음으로 나를 그리 불러주셨지. 그래서 거부할 수가 없었어. 폐하를, 폐하의 심장을, 이 손으로...
꾸웅...
갸우우...
"야, 야!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
메리디아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 안되지, 안되지. 또 곰이 되어서 도/망/갈/ 뻔했잖아.
"잘 거면 기숙사 돌아가서 자! 나 일해야 한다고!!"
"...이제 못 돌아간다니까."
"왜."
"사람 말을 뭘로 들었어요. 곰으로 변하지 말라는 규칙이 생겼다니까. 나 이제 거기서 못 살아."
"남들은 잘만 지내는데, 왜."
"애 키워 봤어요?"
"...응?"
카스발이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어쩌면 그것은 밟으면 안되는 금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메리디아나의 축생 같은 직감은 카스발이 거기에 금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애도 안 키워본 남자가 육아 스트레스에 대해 알 리가 있나."
사과하지 않았다.
"육아 스트레스? 니가 애엄마냐?"
"쿠바카? 야무키?"
꾸웅!
...갸우.
두 마리 카푸슈나가 제 어미를 보호하듯 양쪽에 갈라앉아 부르는 대로 대답한다. 아, 그러세요. 카스발은 이마를 짚었다. 내가 어쩌다 이 곰탱이 모녀를 처음 만나서...
"그러니까 어떻게 좀 해줘요."
"그러니까 내가 왜...아, 알았다, 알았어."
하는 수 없지. 카스발은 한숨을 쉬며 서랍에서 개인 서한용 편지지를 꺼냈다. 그 다른 사람은 절대 흉내낼 수 없을 것 같은 기발한 필체로 괴발개발 휘갈긴 편지지를 두 장, 대충 접어 넣은 봉투를 내민다.
"자."
"뭐예요, 이건?"
"누스 지구 북쪽에 있는 내 집 기억 나냐?"
"우리가 처음 나타났던 거기? 당신이 필리스 꼬시다 실패한..."
"1절만 해라. 거기 집문서다. 빌려줄 테니까, 거기서 살아."
"우와, 그거 고마워요...근데 거기 완전히 폐가잖아. 침대 말고는 아무 것도 없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네 신용 보증한다는 증명서도 썼다. 샤푸리코 영감한테 가져가."
"베인 지구에서 유명한 레프리컨 고리대금업자?"
"내가 예전에 신세 봐준 게 있으니까, 아마 이자 헐하게 쳐서 빌려줄 거다."
"그 돈으로 수리해서 살라고?"
"니가 다 갚아. 떼먹고 달아나면 8128개의 차원 저편이라도 쫓아가서 목을 졸라버릴 거다."
"흐응..."
메리디아나는 카스발이 내민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은 결코 알 수 없을 감정이 그녀의 감청색 눈동자 표면에 배어나왔다가,
꾸웅! 꾸웅!!!
갸우우!
"알았어, 알았어. 해줄게."
신나게 꼬리를 흔드는 쿠바카와 어쩐 일로 목청을 높이는 야무키의 더블어택에 사그라졌다.
"뭐라냐?"
"놀이터 만들어 달라네요."
"집이다? 우리 아니다?"
"그거, 지안의 무수한 사족보행 거주민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거 알아요?"
"웃..."
"아무튼 호의는 감사히 받을게요, 카스발. 고마워요."
"..."
카스발은 공무원의 본분에 이어 스스럼없는 솔직한 인사에 연달아 얻어맞고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메리디아나는 후훗, 얄밉게 웃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
그날 저녁,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와 쿠바카, 야무키는 쇼콜라 맨션을 퇴소했다. 그 털북숭이 모녀의 퇴소를 가장 기뻐한 것이 아침잠을 소중히 여기는 세르파 사감인지, 시도 때도 없이 퍼질러 자는 엄마 대신 알아서 밥을 챙겨먹는 착한 딸래미들에게 일터의 평온과 안녕을 위협받아 온 알레르망인지, 아니면 메리디아나 본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일 화를 낸 사람이 누군지는 확실했다.
"얌마, 아무리 내가 보증을 섰다지만 이렇게 많이 빌려서 어떻게 갚을려고 그래? 너 튀면 진짜 죽여버린다?!"
"할 수 있으면 해보시든가요. 확 곰변한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