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라이트/카렌우닝] Inanity
―현명한 사람은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선택한다.
에우리피데스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결코 현명한 사람이 아니다. 은하계 변두리의 고유명사조차 없이 코드명으로 불리는 식민위성에서 태어난 것도, 유전자 결함으로 지니게 된 능력도, 부모님의 사고도, 탐정이 된 것도, 심지어 로젠부르크에 정착한 일조차도 어느 하나 자신이 선택하여 결정한 결과가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브라우닝은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 좀 현명하지 못하면 어때서. 필사적으로 추구할 원대한 야망도, 아득바득 기를 써서 성취할 목표도 없다. 제 한 몸 편히 누일 소파와 향긋한 커피 한 잔의 여유 정도는 다른 탐정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을 하찮은 의뢰를 설렁설렁 해치워 버는 푼돈으로 충분했다. 양지바른 공터에서 께느른하게 낮잠을 즐기는 늙은 길고양이처럼 나태하고 무의미한 삶. 브라우닝은 그런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며 마도 로젠부르크 10계층의 탁한 구정물 속에서 길고 가늘게 호흡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게, 대체…"
브라우닝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고 심지어 비벼 보기도 했다. 조작법을 알았다면 메인 디스플레이를 껐다 켠다던가 서브 디스플레이에 뜬 데이터를 다시 검색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뭘 해도 눈에 보이는 광경은 달라지지 않았고, 우주선의 조작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빌어먹을.]
등 뒤의 통신 스크린에서, 프라임원의 언더보스가 내뱉은 욕설이 몇십 광년을 격하여 들려왔다. 브라우닝이 본 것을 그도 보았다는 의미였다.
서브 디스플레이어가 띄운 데이터에 따르면, 지금 데비안트 호가 다다른 좌표에는 몇백만 년 동안 착실하게 수축하며 항성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원시성이 있 ― 어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 메인 디스플레이에 비치는 것은 무수한 무기질의 파편뿐이었다. 마치 거대한 손이 그 어린 별을 움켜쥐고 부서뜨린 다음 멋대로 휘저어 이쪽에는 소용돌이를 그리고 저쪽에 호선과 직선을 긋던 끝에 어설픈 것인지 고의적으로 뒤튼 것인지 알 수 없는 점묘화를 만들다 만 것 같은, 천문학도 물리학도 양자역학도 상식도 이성도 비겁한 자기보호본능마저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비현실적인 광경이…
"…맙소사."
원격으로 조종되는 브릿지의 함장석 끄트머리에 어설프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던 브라우닝은 하마터면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별을 살해한 손은 잠시 쉬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마치 데비안트 호를 환영하기라도 하듯 물결치는 흐름이 이쪽 파편을 밀어내고 저쪽 파편을 긁어온다. 잠시 그 거대한 손짓을 멍하니 바라보던 브라우닝이 입술을 깨물어 욕설인지 비명인지 노호怒號인지 모를 격한 숨을 되삼켰고,
[오타는 애교라 이건가? 제법 재치가 넘치는 악마님이군.]
코브가 안도의 한숨을 얼버무리듯 비아냥거렸다. 농담을 할 여유를 찾은 것을 보면, 드디어 이블린이 지독하게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두통에서 벗어난 모양이었다. 그 가엾은 어린 마녀에게 암흑공간의 침묵이 영원히 함께하기를. 입술을 짓깨물어 피를 보기 전에, 브라우닝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격렬한 적의도, 쓰디쓴 패배감도, 에일 듯한 좌절감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가장 낮은 시궁창의 구정물처럼 고여 썩어가는 인생에는 그런 화려한 감정이 불탈 여지가 없었다.
"이블린은 어떤가?"
[잠들었다. 평안해 보여. 정말 그 악마 때문이었나.]
"음…"
브라우닝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그 악마 때문이라네. 나한테 필요도 없는 선물을 잔뜩 안겨 주고, 소중한 사람은 생기는 족족 빼앗아 가고, 저 좋을대로 내 삶을 휘저어 놓는 변태 바이올리니스트 때문이지.
그리고,
―미안해요, 브라우닝. 내가 석류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발푸르기스에서 춤을 추는 바람에, 그 악마의 바이올린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미안해요, 브라우닝, 나 때문에, 당신이, 그 악마가, 당신을 찾아내서, 당신을…
피를 토할 것처럼, 발작하듯 흐느끼며 내게 사죄하던 자네의 작은 마녀 때문이라네. 나는 한 번도 현명하거나 부유하거나 유능하거나 위대하기를 바란 적이 없었어. 그저 없는 듯 숨죽여 살다가 없었던 듯 사라지고 싶었어. 저 변덕스러운 악마의 총애를 받는 삶을 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비겁하고 치사할 수 있었지.
자네의 작은 마녀가 울지만 않았어도.
"가야겠군. 여기까지 태워줘서 고맙네, 코브. 데비안트 호가 무사히 돌아가면 좋겠군."
[원격조작이니까 신경 쓰지 마라. 그보다 돌아올 때는 어쩔 건데?]
"글쎄."
돌아가게 해줄까? 그 악마가. 브라우닝은 웃었다.
D, A, V, i, d, B, R, o, W, n, n, i, g.
죽음의 선율을 연주하는 악마가, 자신이 살해한 별의 시체로 짜맞춘 어설픈 현수막 앞에서.
"그동안 신세 졌네, 코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자, 자, 감동적인 이별은 거기까지. 깜빡, 깜빡. 브릿지의 조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브라우닝의 이름을 부르던 통신 스크린이 꺼졌다. 존재했고 존재할 리 없는 데이터를 토해내던 서브 디스플레이가 꺼졌다. 단두대에 목이 잘린 귀족으로 만든 마리오네트처럼 수욕受辱의 춤을 추기 시작하는 별의 사체를 비추던 메인 디스플레이가 꺼졌다. 한 줌 미지근한 공기를 품은 금속상자에 갇힌 채 공기도 온도도 중력도 빛도 소리도 없는 암흑공간에 홀로 내던져진 브라우닝이, 이윽고 한숨을 쉬었다.
"그만큼 오래 살았으면서 내 이름 스펠링도 틀리는 거냐. 내가 다 부끄럽다."
"내가 어릴 때는 습자習字 수업이 없었거든."
카렌베르크의 손가락은 대리석으로 깎은 천사의 그것처럼 희고, 아름답고, 차가웠다. 그 손가락은 아무리 오래 져지를 연주해도, 방금 끓인 찻잔을 쥐어도, 브라우닝이 턱이 아플 정도로 머금어도, 뻣뻣한 몸이 녹아내리며 비명을 지를 때까지 브라우닝의 안을 유린해도 결코 데워진 적이 없었다. 그 선뜩한 열 개의 손끝이 브라우닝의 목덜미를 지판指板처럼 짚고,
"드디어 돌아왔구나. 어서와, 데이비."
"…죽어버려라, 망할 악마야."
후후후― 유쾌한 악마의 웃음소리를 도입부로 죽은 별에게 바치는 진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즉흥적으로, 현란하게, 한 박자 쉬고, 단조를 장조로 바꾸어, 춤추듯 발랄한 당김음을 건너뛰어, 죽어가는 탐정에게 바치는 광시곡이 데비안트 호도, 별의 시체도, 빛도, 체온도, 소리도, 카렌베르크와 브라우닝이 아닌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END.
***2013/09/21
브라우닝 오른쪽 합작(링크)에 참여했던 글입니다.
주최자 분의 허락을 받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