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라이트] 5월 조각글 모음
5월 한 달 동안 트위터에 끄적였던 글 모음입니다. 이번에는 별로 없네요 :d
2013/05/04
오늘 케이크 스퀘어에서 날조된 '베른쪽을 사랑하는 소녀들의 모임(곰이 멋대로 붙임)'에서 남의살을 흡입하려 아x백에 갔을 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가지고 곰이 그 자리에서 끄적거린 글입니다. 모든 것은 @cld*이 리리베른 책을 내시는 그날까지! 지크베른!!
"나 오늘 피곤하니까 건드리지 마라."
그건 방금 저녁식사를 마치고 휴게실로 이동하면서 쌍둥이 동생에게 하기에는 좀 이상한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식사하는 내내 테이블 아래에서 발끝으로 종아리를 집적거리다 결국 걷어차인 프리드리히에게는,
"에이~ 평소에도 못 건드리게 하면서~"
씨알도 안 먹혔다. 베른하르트는 깊이 한숨을 푹 쉬면서, 최근 스킨쉽이 쓸데없이 심해진 동생이 목덜미를 감는 척 하면서 가슴으로 미끄러뜨리는 손을 매섭게 쳐냈다.
"베에르은~"
냉정하다는 둥 매정하다는 둥 궁시렁거리면서도 프리드리히는 베른하르트 뒤를 쫄랑쫄랑 따라갔다. 그렇게 피곤하면 식후커피는 생략하고 일찍 자도 좋으련만, 습관이라는 게 뭔지 굳이 짐승 같은 놈들이 바글바글 기다리는 휴게실로 가는 것이다. 정말이지 베른은 내가 왜 화내는지도 모르고...에휴.
"여, 베른하르트."
나타났구나, 짐승 1호. 베른하르트의 어깨 너머에서 소리없이 갈기를 세우는 프리드리히를 상큼하게 무시하고,
"커피? 마침 내린 게 있는데."
"감사하지만, 직접 내리겠습니다."
"쳇, 연습 많이 했는데."
리즈가 투덜거리며 들고 있던 머그잔에 가득 담긴 액체를 원샷하더니 뜨겁다는 둥 쓰다는 둥 난리다. 베른이 미쳤다고 니가 만든 커피향 나는 물을 마시냐. 커피 스탠드로 다가가는 베른하르트를 따라가며 프리드리히가 빼- 혀를 내밀었고, 이번에는 리즈가 캿- 갈기를 세웠다.
"피곤하다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베른하르트만, 커피를 내리는 내내 옆에 붙어서 어깨를 주무른다 허리를 끌어안는다 부산을 떠는 프리드리히를 밀어냈다. 안 그래도 레지먼트 상급장교 전용 휴게실 분위기가 별로 좋은 편이 아닌데 네 녀석까지 왜 이러냐고.
"베른, 피곤하면 숙소 돌아갈까?"
"음, 이것만 마시고."
그거야 베른이 뺨 위로 속눈썹 그늘 내리깔리게 눈 반쯤 감고 커피 한 모금 머금고 혀끝으로 굴리면서 흐뭇한 미소를 은은히 머금을 때마다 다른 놈들이 안 보는 척 안 홀린 척 쳐다보고 있으니까! 도저히 베른하르트에게 할 수 없는 말을 머리 위로 뭉개뭉개 피워올리며, 프리드리히는 으르릉크르릉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베른이야! 쳐다보지 마! 다가오지 마! 말 걸지 마!!
"베른하르트, 여기 있었군. 할 말이 있어서 찾아다녔는데."
하지만 마치 그 지나친 경계심이 불러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아직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술 끝에 걸친 아치볼드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찾아다니기는 뭘 찾아다녀, 어차피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나 하면서 은근슬쩍 손을 겹친다든가 어깨를 잡는다든가 음흉하게 쳐다본다든가 할 거면서. 프리드리히는 저 베른하르트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짐승 2호를 어떻게 쫓아낼까 고민하다가,
"으아, 나 다리 아프다!"
"읏, 프리츠!"
베른하르트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황급히 소파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프리드리히가 보란 듯이 그의 무릎 위에 앉아버린 것이다.
"무슨 짓이냐, 애도 아니고."
"가끔은 좋잖아. 어릴 때는 자주 무릎에 앉혀 줬으면서."
아늑하고 좋네. 나 안 무겁지. 괜찮지? 정말 어린애처럼 어깨에 머리까지 기대면서 어리광을 부리는 프리드리히의 짧게 깎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베른하르트가 쓰게 웃었다. 어휴, 이 아무리 커도 애 같은 녀석...
"오, 의자 놀이냐? 나도!"
긁어 부스럼이라던가. 마침 휴게실에 들어오던 리즈가 그 미소를 보고만 것이다. 단 걸음에 쌍둥이를 향해 달려든 리즈가 덥석! 프리드리히의 무릎 위에 앉아버렸다.
"무슨 짓이야, 선배! 저리가!!"
"흥, 네놈만 베른하르트 무릎의자에 앉겠다고?"
"선배쯤 되면 이미 내 무릎이거든?"
"쌍둥이니까 눈 감으면 똑같다고 말한 게 어디의 누구..."
"으아아아! 야 다들 붙어! 붙어!!"
프리드리히가 두고두고 후회하며 겁화연옥에 타오를 말을 하기 전, 리즈가 포효하듯 소리질렀다. 은근슬쩍 베른하르트를 둘러싼 실랑이를 부럽게 바라보던 레지먼트 동기들이 - 물론 아치볼드가 제일 먼저 - 신나게 리즈 위로 무릎의자를 겹겹이 쌓기 시작했다. 흥, 그래봤자 베른 위에 앉은 건 나뿐이지! 니네들은 전부 내 위에 앉은 거지! 그러니까 베른은 내 밑에 있는 거지! 베른은 내 거지!! 프리드리히는 되지도 않는 베른부심을 부리며 손을 뒤로 내밀어 자기 허리를 잡고 밀어내려다 어정쩡하게 붙은 베른의 손을 잡았다. 메마른 손이, 마치 쓴웃음을 전해주듯, 쌍둥이 동생의 손을 꼬옥 붙들었다가,
"해방검."
아, 베른. 기술 영창하는 목소리도 좋아. 내 고막을 생각해서 속삭여준 거 고마워. 꿈에도 잊지 못할 거 같아...다른 레지먼트 대원들과 소파와 커튼과 유리창과 벽, 천정, 다시 말해 휴게실을 구성하던 일부와 함께 날려가며 프리드리히가 몽롱한 미소를 지었다. 저 자식 대체 언제 철이 드나. 셉터를 갈무리하며 베른하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깊이, 아주 깊이.
-END.
2013/05/05
딩동-딩동-딩동- 초인종이 스타카토로 울렸다. 아치볼드가 고개를 슬쩍 젖혀, 프리드리히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이...누가 왔는데?"
"니가 나가. 난 손끝 하나 까딱 못하겠다."
"나고 나가고 싶긴 한데, 니가 내 아들놈을 놔 줘야 일어나지."
"미친놈. 그냥 니가 빼면...읏...!"
"봐라, 아직 엄청 조이잖아. 좋았나보다?"
"씨발, 처음인데 좋기는 개뿔..."
리리리- 리리리-
"니 전화다."
"몰라. 안 받아. 나 내일 오프. 다 쨀 거야."
"스튜디오 녹음 쨀 거라고? 리즈가 문 따고 들어올 걸?"
"몰라...아흐읏..."
"소리 죽이는구만....후..."
"너, 너 지금 또 뭐하는...거, 거기...흣!"
"옳지, 옳지. 너무 조여서 안 빠지잖아. 좀 풀어서..."
"흐아...아...아파, 아프다고!"
"아파? 살살할까?"
"씨발, 거기 말고..."
"음? 그럼 여기?"
"아흑! 아...아으...좋...좋긴 한데...등! 등 배겨서 아프다고! 자리 옮겨서..."
삑삑삑삑삑-
"프리츠? 안에 있는 것 같은데 왜 문을 안 열어주고..."
덜컹. 현관문이 열렸다. 젠장할, 체인 안 걸었네. 이게 다 아치 자식이 신발도 벗기 전에 그럼 어디 죽여 보라고 달려들었기 때문이잖아!!
"여어, 베른."
"너희들 지금 대체 뭘...아니, 대답하지 마라. 궁금하지 않으니까."
베른하르트는 한숨을 푹 내쉬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려는 아치볼드의 입을 막았다. 아무리 금욕적인 성품이라고 해도 성인 남성이다. 신체 건장한 두 남자가 웃옷은 목덜미에, 바지와 속옷은 발목에 걸친 채로 현관 매트 위에 겹쳐서 누워 있는 꼴을 보고도, '아, 자네들 새로운 취미로 아테네식 레슬링을 시작했나 보군. 아니라고? 그럼 스파르타식인가?' 할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두 남자의 신체가 아직도 결합된 상태라는 것을, 비록 아치의 탱탱한 엉덩이와 튼실한 허벅지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르지 않을 정도로 보고 듣고 겪은(!) 바가 충분했던 것이다.
"무슨 일이야, 베른? 오늘밤은 리즈가 오는 거 아니었어?"
"아, 그랬는데...사정이 좀 생겼다. 여기서 자고 가도 될까? 물론 두 사람을 방해하지는 않겠다."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방해인데. 아니면 차라리 셋이서...아얏!"
"닥쳐, 이 변태에로드러머 영감탱이야."
"나 너희보다 두 살 어리거든?"
"그럼 형님 대접을 하던가. 젊다고 자랑하냐? 그만 세우고 빨랑 빼."
"베른하르트가 보는 앞에서?"
"씨발, 그럼 계속 넣고 있겠다고?!"
"그만, 됐다. 내가 잘못 생각했군."
대체 누가 더 변태에로 영감탱이인지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만담을 보다 못한 베른하르트가 선언했다.
"가까운 모텔에 방 잡을 거니까, 내일 아침에 스튜디오 나갈 때 전화해라."
"어? 어."
"그럼 이만."
뻔뻔스럽게도 홍조 하나 없는 살색이 어우러진 풍경을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매정하게 등을 돌린 베른하르트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이 활짝 열리기도 전에 멈칫하더니,
"아니다, 역시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야겠다."
쾅! 현관문을 요란하게 닫는다. 썩어도 준치라고, 제법 예리한 프리드리히와 아치볼드의 귀는 그 틈에 흘러들어온 귀에 익은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어이, 나갔어? 베른하르트? 대체 어딜 간거야?
"저기, 지금 들린 거 리즈 목소리야?"
"아니다."
삑삑삑- 철컥. 재빠른 손길로 번호키에 안전장치를 걸고 체인을 지른다.
"리즈가 베른하르트를 부르는 목소리 같던데..."
"아니라니까."
그대로 철문에 이마를 기댄 베른하르트가 한숨을 푹 쉬었다.
"등 돌리고 있을 테니까, 그거 좀 빨리 어떻게 해라."
"그거?"
"아치."
야, 베른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닌 거 같아.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근데 왜 저래? 리즈는 기껏해야 메이드복이랬는데...
"너희들, 알고 있었던 거냐."
"어? 아, 아니. 어, 프리드리히? 우리 그만 일어나자. 나 뺄테니까..."
"야, 안돼! 갑자기 그러면, 안에...으앗! 으아앙! 자, 잠깐만...!"
베른하르트는 눈을 꾹 감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기껏해야 메이드복? 그게 메이드복이면 내가 평소 입고 자는 파자마는 스리피스 모닝코트 정장이겠다! 낮의 RB 의상도 그렇고, 대체 어디서 그렇게 내 몸에 꼭 맞는...그만, 생각하지 말자. 깊이 생각하지 말고, 더 숭한 꼴 보기 전에 헤어지자. 까짓 거 계약 파기하겠다면 하라지. 안돼, 난 더 이상 못 해.
쭈뿌? 마치 마음 속의 외침에 대꾸하는 듯한 메세지 착신음. 베른하르트는 뒤를 돌아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 그거 빼는 게 뭐 그렇게 오래 걸려! 이런 상황에서 즐기지 말라고!! - 핸드폰을 들여다 보았다.
-베른하르트? 진짜 어디 간 거야? 화났어? 역시 코르셋은 좀 너무했나? 가터벨트도 싫으면 관둘게. 혹시 메이드복이 싫은 거면 바니걸도...
탁. 베른하르트는 메시지를 끝까지 읽기도 전에 핸드폰을 닫았다. 이 관계, 이제 끝이야!
-END.
2013/05/14
듀얼 100패를 기념하며.
"아저씨, 정줄 놨지?"
쬐끄만 기집애가 나오자마자 어른한테 하는 말본새 좀 봐라. 하지만 한 마디 타이를 호흡도 아까워, 베른하르트는 대꾸하지 않고 오른손 손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붉은 땀을 닦았다. 셉터를 쥔 손으로 하기에는 힘겨운 동작이었지만, 아까 금발의 소년이 부리는 오토마타에 얻어맞은 왼팔이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팔뿐 아니라, 랜드마인에 몇 번이나 얻어맞은 다리도 무거웠다. Ex기지는커녕 기지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애새끼라고 봐주니까 그 꼬라지가 되는 거야. 듀얼 처음 해?"
찰칵찰칵. 곱다란 손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크고 예리한 가위가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마도의 밤하늘을 갈랐다.
"여자애가..."
베른하르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리 멀리서 따님이 노려보는 시선에 등짝이 뚫릴 지경이라도, 폐가 바스라지는 한이 있어도, 어른 된 입장에서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런 험한 말 하는 게 아니다."
"여자애가! 와, 말했어! 정말로 말했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여자애가! 여자애가래!!"
분홍색 머리에 커다란 리본을 토끼귀처럼 앙증맞에 맨 여자애가 핏빛 가윗날에 매달려, 진짜 토끼처럼 팔짝팔짝 뛰었다. 짧은 플레어 스커트 아래 쭉 뻗은 다리가 율동하는 광경은 참으로 보기 흐뭇한 것이었지만, 그 순간은 베른하르트에게 호흡을 고를 소중한 휴식일뿐이었다. 애초에 여자 다리가 홀랑 드러났다고 시선을 주는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지금 팔짱을 끼고 말없이 그를 노려보고 있을 따님의 발치에는 랜드마인에 타죽은 리즈 - "불꽃남자 주제에 타죽다니, 바인더에 돌아가서 두고 봐!" - 와 오토마타에 맞아죽은 프리드리히 - "내가 여자랑 애라고 봐주랬어, 봐주지 말랬어?" - 가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이다.
"아저씨, 숨 다 골랐어? 이제 슬슬 간다?"
여자아이가 가위를 치켜들고 금색 눈을 번득이며 소리쳤다. 알고 있었던 건가? 이것 참, 여자아이의 자비에 기대다니 이 나도 체면이 말이 아니군. 베른하르트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아아, 잘 부탁한다."
겨우 가다듬은 소중한 호흡 한 마디를 써서 듀얼 상대에게 예의를 갖췄다. 이길 자신은 없다. 그렇다면 최소한 제대로 져야 했다. 그것이 제 잘난 맛에 살지만 의리 하나는 확실한 선배와 덤벙대지만 사람 좋은 동생을, 꼴사나운 패배에 조용히 분노하고 있는 지시자에게서 지켜낼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의 지시자는 시시한 승리보다 재미있는 패배를 선호하지 않았던가.
"얏!"
"읏!!!"
챙강! 분홍색 머리가 붉게 물드는가 싶더니, 여자아이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재빠르게 간격을 좁혔다. 셉터를 들어올리는 것이 한순간이라도 늦었다면 가윗날에 목이 베었을 것이다. 평소 기지를 쓰던 감각으로 겨우 첫 일격을 막아냈지만,
"아하하하! 아저씨, 좀 한다? 응? 쓸만하네! 근데 텟샤보다는 별루야! 별루라구! 꺄하하하하!"
챙! 캉! 채챙!! 검날과 가윗날이 부딪힐 때마다 불꽃과 함께 쏟아지는 쇳소리보다, 살을 가르고 뼈를 부수기 위해 벼려진 거대한 가위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내지르는 광소가 더욱 귀를 따갑게 찔렀다. 지독한 광기였다. 바인더에 온 첫날 딱 한 번 듀얼에 나간 뒤로는 언제나 거실 한구석에서 코바늘로 로브 목도리나 짜고 있는 우리집의 스테이시아와는 박력이 달랐다.
"방심하면! 여자를 앞에 두고 딴 생각 하면!"
"허읏!!"
"죽일 거야! 꺄하하하!!!"
찰라간의 일이었다. 마도의 하늘을 교교히 비추던 보름달 대신 너무 크게 벌어진 눈꼬리가 찢어져 붉은 방울이 맺힐 것 같은 정금正金의 눈동자가 시야에 확 퍼치는가 싶더니,
푸슉- 푸슈슉!!
"으...으아아!!"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비명을 참을 수 있었을까? 눈깜짝할 사이에 분해되어 마치 시계탑에서 뜯어낸 시계바늘 같은, 사람 키보다도 크고 예리한 가윗날이 오른쪽 어깨와 왼쪽 허벅지를 관통한 채 바닥에 꽂히는 고통을 겪고도, 오직 자존심과 긍지를 지키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다물 수 있었을까?
"와, 아저씨 진짜 예쁜 소리로 운다?"
"무...스...윽!"
"말캉말캉~"
퍼덕이는 잠자리 날개를 뜯어내고 개구리 배를 산 채로 가르듯, 여자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가윗날이 꽂힌 베른하르트의 허벅지를 지그시 밟았다.
"몰랑몰랑~ 기분 좋아~ 아하하~"
"으...그, 그만...그만해!!!"
어째서 그대로 숨을 끊지 않는 거지? 이미 승패는 결정났을 텐데! 따님? 어째서 말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따님!!
"크게~ 크게~"
박자도 음정도 맞지 않는 노래를 흥알거리며,
"흐어억!!!"
"비명~ 비명~ 죽어~ 죽어~"
베른하르트의 어깨에 꽂힌 가윗날을 수월하게 뽑은 스테이시아는, 문득 고개를 들고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푸르스름한 머리칼의 여자애 인형이 죽은 전사들 사이에 오도카니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재미있어 보이지? 재밌다? 너도 할래? 같이 놀래?"
인형이 잘래잘래 고개를 흔들었다.
"안 놀 거야? 그럼 방해할 거야? 이 남자, 구할 거야?"
다시 한 번 잘래잘래. 뭐니, 쟤. 자기 덱의 전사잖아. 웃겨. 나도 웃기는 인형이지만, 너도 웃기는 인형이셔. 스테이시아는 히죽히죽 웃으며,
"하~나~더~!"
"흐...으아아!!"
아무리 예상하고 각오한 고통이라고 해도, 허벅지에 꽂혀 있던 가윗날이 뽑혀 나가는데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은 무리였다.
"좋은 소리~ 맑은 소리~"
뽑아낸 두 개의 가윗날을 하나로 결합해 거대한 가위를 만든 스테이시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고통에 꿈툴거리는 베른하르트의 명치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신음과 경련에 맞춰, 몸에 난 커다란 구멍에서 울컥울컥 핏물이 솟구치며 진득한 피비린내가 진하게 번졌다.
"따뜻하고~ 폭신하고~ 아이참 재미있다~"
스테이시아가 두 손에 쥔 가위를 높이 들어올렸다. 깔고 앉은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 경악? 공포? 분노? 광기의 인형이 웃었다. 그 무엇이든 좋다. 지금 이 순간, 이 남자가, 내 눈에 내 귀에 내 코에 내 혀에 내 피부에 내 손에 내 몸에 내 마음에 내 영혼에 내 기쁨에 내 욕망에 내 갈망에 내 절규에, 이 남자가, 이 남자의 온기가 촉감이 호흡이 고통이 생명이 박동이,
"---!!!"
강하게 내리친 가윗날이 늑골을 부수며 폐부에 박혔다. 질걱질걱 탐욕스러운 소리를 내며 피에 젖은 쇳덩이가 내장을 뭉개고 흐트러 끊었다. 깔고 앉은 몸의 뒤틀림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남자의 비명이 경련이 출혈이 고통이 단말마가 죽음이 죽음이 죽음이...
"...벌써?"
서서히 식어가는 육신을 꿰찌르고 땅에 박힌 가위에 매달린 스테이시아가 가냘픈 목소리를 바르르 떨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있는 사람은 모두 죽었고,
"벌써 끝난 거야? 응? 벌써?"
애원하듯 던진 금색 시선 끝에는 대답할 수 없는 인형이, 마치 그것밖에 할 수 없는 것처럼 고개를 잘래잘래 내저었다.
"왜 벌써? 텟샤는 나쁘지 않은데...잘못하지 않았는데..."
돌아올 수 없는 대답을 갈구하며, 금색 눈이 흥건히 젖어들었다.
"조금 더...응? 조금만 더 놀아주면 안돼? 응?"
스테이시아는 깔고앉은 남자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졸랐다. 철퍽, 철퍽. 절명한 남자의 부서진 몸이 끔찍한 소리로 거절할 따름이었다. 채 닫기지 않은 눈꺼풀 아래 빛을 잃은 연두색 눈동자가 칭얼대는 여자아이를 비추었다. 듀얼을 끝났다. 베른하르트는 패배했다. 시시한 패배였는가? 지시자는 즐거웠는가?
답을 아는 것은 오직 답을 말할 수 없는 인형뿐이었다.
-END.
2013/05/15
좀 더 일찍 이럴 것을 그랬다. 그랬으면 그토록 고민할 일도, 괴로워할 일도, 너를 미워할 일도 없었을 텐데. 안다, 지금 네가 하려는 말을. 싫다는 거지? 이러지 말라는 거지? 너는 정말 이기적이군. 지금껏 내 기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네 마음대로 했으면서, 내가 마음대로 행동하는 건 안된다는 건 너무 불공평해. 우는 거냐? 우습구나. 네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게 이번이 처음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하지만 안돼. 그런 눈으로 봐도 소용없다. 울든 화내든 난 신경 안 쓸 거다. 지금까지 참을 만큼 참았으니까. 이제부터는 나도 내 마음대로 할 거다. 네가 했던 그대로, 네가 보는 앞에서 그를 사랑할 거다. 그래야 공평하잖니.
우린 쌍둥이니까.
듣고 있는 거 다 알고 있네. 기절한 척 하지 말게. 왜 이러느냐고? 난 자네에게 실망했다네, 아치볼드. 어째서 좀 더 솔직하게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나? 왜, 내가 자네가 날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놀랐나?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자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자네를 사랑했으니까. 항상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자네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 내게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말, 내밀고 싶은데 내밀지 못하는 손, 모두 다 보고 있었으니까. 자네는 그저 내게 고백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물론 나는 아무 것도 몰랐던 것처럼 놀란 척, 수줍은 척, 주저하는 척 할 생각이었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자네는 내게 고백하지 않았네. 그러기는커녕 내 대신 프리츠를 선택하더군. 대체 왜 그랬나? 내가, 나라는 진실한 사랑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는데, 대체 왜 프리츠라는 대용품을 선택한 건가?
거짓말! 거짓말하지 말게. 자네는 프리츠를 사랑하지 않아! 자네가 사랑하는 건 나야!!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더 이상 속이려 들지 말게. 나를 화나게 하지 말게! 나는 이미 충분히 참았어.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더 이상 나를 화나게 하면 용서하지 않겠어!!
두려운가? 자네가 그런 눈으로 나를 보다니 놀랍군. 전장에서 누구보다도 용맹한 전사였던 자네가, 겨우 몇 대 맞았다고 나에게 사죄하는 건가? 나를 두려워하는 건가? 아아, 그렇군. 맞아, 그래. 내가 자네의 사랑을 거절할까봐 두려운 거군? 그래서 내가 아니라 나와 똑같이 생긴 프리츠를 선택한 거군? 맙소사, 자네가 이토록 바보인 줄은 미처 몰랐군. 후후후...아니야, 아치볼드. 울지 말게. 떨지 말게. 나는 자네를 비웃는 게 아니야. 자네의 사랑을 거절하려는 게 아니야. 그저 자네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는 것뿐이네.
하지만 벌은 받아야 해. 내가 자네를 사랑하는 것과 자네가 나를 선택하지 않은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 자네는 나를 선택했어야 했어. 내게 사랑을 고백하고 나를 사랑했어야 했어. 하지만 나 대신 프리츠를 선택했지. 내 앞에서 나와 똑같이 생긴 내 동생을 끌어안고 입맞췄지. 자네들이 짐승처럼 흘레붙던 밤, 나는 잠들 수가 없었네. 자네를 안는 건 나여야 했었는데, 자네의 교성을 엿들으며 자위하는 건 프리츠여야 했었는데, 자네의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모든 게 뒤바뀌었어. 엉망진창이 되었지. 나는 그때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어.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프고 손이 떨려 내 자신조차 만족시킬 수 없었지. 자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진실마저 의심할 뻔했어. 나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니, 자네는 그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뤄야 하네.
손을 내밀게.
남자의 손이군. 싸우는 남자의 손이야. 나는 늘 이 손에 입맞추고 싶었다네. 여기에, 또 여기에...이 흉터는 급하게 총을 쏘다 데인 거지...이 상처는 이형생물의 발톱에 긁힌 거고...이 손가락에 반지의 자국이 남아 있지 않아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아는가? 여기에, 그래...심장과 가장 가까운 이 손가락에 내가 반지를 끼울 걸세. 나와 같은 반지를, 그래서 처음으로 하얗게 자국을 남길 거야...자네 새끼손가락은 참 앙증맞고 귀엽지...오른손잡이라 왼손보다 더 상처가 많군...손목에 하는 키스가 욕정을 의미한다는 걸 알고 있나? 후후, 농담일세...이 상처, 내 가시나무에 긁힌 상처...자네 손을 볼 떄마다 여기에 입맞추고 싶었네. 여기에...여기에...자네가 이토록 다소곳이 손을 내밀어 주다니, 나는 정말로 꿈을 꾸는 것 같군...
난 자네 손이 총을 꺼내는 광경을, 방아쇠를 당겨 목표를 맞추는 모습을 수천 수백 번 넘게 보았네. 이 손이 어떻게 담배를 꺼내 입술로 가져가는지, 어떻게 불을 붙이고 피우는지, 어떻게 꽁초를 비벼끄고 내던지는지 눈을 감고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지. 그리고 이 손이 어떻게 프리츠에게 닿았는데, 어떻게 그의 뺨을 만졌는지, 허리를 감고, 옷을 벗기고, 어루만지고...
이런! 미안하네. 손가락을 꺾을 생각은 아니었어. 많이 아픈가? 정말 미안하네. 그렇게 입술 깨물지 말게. 피가 나지 않는가. 자, 괜찮아. 고개 돌리지 말게. 나를 봐. 나를 보라니까! 아니, 아니야. 때리려는 게 아니야. 피를 닦아주려는 것뿐이야. 착하군. 잘 했네. 이제 입술을 깨물지 말게. 차라리 비명을 지르게. 난 그쪽이 더 좋아.
자, 손을 내밀게. 손목을 자를 거니까.
왜 이러지? 마치 이형생물처럼 발작하는군! 싫다고? 지금 제정신인가? 어떻게 감히 싫다는 말을 할 수가 있나? 자네는 내게 큰 잘못을 저질렀지 않은가! 내 사랑을 무시하고 나를 괴롭힌 대가를 치루도록 해주겠다는데, 왜 반항하는 건가? 나는 미치지 않았어! 미친 건 자네야! 자네와 프리츠야!! 자네를 사랑하는 나를 두고, 내 대용품에 지나지 않는 프리츠를 사랑하다니, 자네가 미친 거야. 자네를 홀린 프리츠가 나쁜 거야!
혹시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 건가? 참괴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어서, 내 손길이 닿는 것도 괴로워하고 있는 건가? 후후후, 자네는 정말 사랑스럽군. 괜찮아, 아치볼드. 나는 관대한 사람이야, 알고 있지 않은가? 자네는 그저 순순히 내게 사과하면 되는 거네. 자네가 잘못을 뉘우치고 속죄한다면, 나는 너그러이 용서하고 안아주겠네. 내 품안에서 자네는 영원히 평화롭게 안식을 취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두 번 다시 자네가 한눈을 팔 수 없도록, 누구에게도 내밀 수 없도록, 누구의 옷도 벗길 수 없도록, 그 손을 잘라버릴 걸세. 괜찮아. 나는 자네가 내게 손을 내밀지 않아도 이해하니까. 내가 자네 몫만큼 손을 내밀고, 어루만지고, 벗기고, 닦이고, 쓰다듬고, 사랑하고, 상처입히고, 보호할 걸세.
반항은 그만 두게, 아치볼드. 보이지 않는가? 프리츠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저 애가 숨을 거두기 전에, 나는 저 애와 자네가 내게 그랬듯 저 애 앞에서 자네와 사랑을 나눌 거야. 그러니 그만 반항하게. 손을 내밀게, 이리. 내가 입맞출 수 있도록, 내가 자네의 죄를 사하여 내 사랑을 받기에 모자람 없이 만들어줄 수 있도록...
괜찮아, 아치볼드. 울지 말게. 손 따위가 없어도, 나는 자네를 사랑하니까. 보게, 내가 자네의 손에 입맞추고 있지 않은가. 내가 얼마나 이러고 싶어했는지, 자네는 모를 거야. 정말로, 절대로, 아무 것도, 모를 거야. 내가 얼마나 자네를 사랑하는지, 얼마나 자네를 사랑하고 싶은지. 내 평생 자네만큼 사랑한 사람은 프리츠밖에 없어. 하지만 난 자네를 그 애와 나눌 수는 없었네. 자네는 온전히 내 것이어야 했어. 그래서 난 프리츠를 사랑하고, 또 증오하고, 자네를 탐했던 그 애의 손과 발을 자르고, 울면서 입맞췄지. 그 애도 울고 있었다네. 우리가 나눈 한 모금 녹색 피가 얼마나 씁쓸했는지, 얼마나 달콤했는지, 자네는 모르겠지.
아...그렇군. 아까 내 혀를 깨물었을 때 자네도 맛보았군. 그렇다면 더더욱 고통은 없을 거야. 그러니 울지 말게, 아치볼드. 왜냐고 묻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눈을 감게. 심호흡을 하고, 그 녹색 핏방울이 심장에 닿기를 기다리게. 내가 한 걸음 먼저 가서 기다리겠네.
...가 버렸나? 맙소사...
이번에도 나를 두고 둘만 가버렸군.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두고 보지 않겠네. 곧 따라갈 거야. 다시는 프리츠를 위해 자네를 포기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게, 아치볼드. 자네가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그래서 프리츠에게 현혹되지 않고 나를 선택했더라면, 내 사랑을 받았더라면, 조금 덜 고통스럽고 덜 고통스럽고 덜 고통스럽고...
이건 무슨 소리지? 발소리? 프리츠? 어째서? 네 다리는 내가 잘라냈는데, 나를 짓밟으려 걸어오고 있는 거지? 이상하군. 내 목에 닿은 건 자네의 손인가, 아치볼드? 숨을 거둔 채 나를 노려보고 있군. 아아, 그렇게 목을 조르지 말게. 그렇게나 내가 보고 싶은 건가? 귀여운 사람...그러지 말게, 아치볼드...그렇게 재촉할 것 없이...난, 어차피 곧...숨이...숨...이...
-END.
2013/05/20
-리즈와 베른하르트의 경우.
"까페? 웬일로?"
"여기 카라멜 마끼아또가 맛있다더라고."
"단 건 별로..."
"에이, 그러지 말고. 자자, 마셔."
"선배는?"
"난 커피 싫어하잖아. 얼른!"
"흠..."
"잠깐만! 왜 후후 불어?"
"거품이 달아서...선배? 왜 좌절하지?"
-아치볼드와 프리드리히의 경우.
"..."
"뭘 보고 있나? 입술에 거품 묻었네."
"안 닦아줘?"
"뭔소리야? 갑자기 안 어울리게 까페 들어오더니, 빨리 마시고 가자고. 여기 금연이란 말일세."
"..."
"프리드리히? 왜 좌절하는 건가?""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