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ian/등장] 곰, 동굴을 떠나다. (수정)
...계세요? 서기관님! 서기관님! 대체 어디 계신 거예요!
"얘, 누가 너 찾는다."
"...잘못 들으셨겠죠..."
서기관님!! 아악, 정말이지 어디 숨으신 거야! 서기관님!!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 상급 서기관니이이이이임!!!
"너 맞는데?"
"...쳇..."
그러나 여전히, 벽쪽을 향해 돌려놓은 소파 등받이 너머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햇빛이 담뿍 쏟아지는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아 레이스를 뜨고 있던 노부인이 포호호 웃었다.
"그만 가 보지 그러니? 저렇게 애타게 찾는데 불쌍하잖아."
"좀 찾다...말겠죠...하루이틀 저러나..."
"오늘은 좀 오래 찾는데? 무슨 일 생긴 거면 어떻게 하려고?"
"...그럼 여기까지...오겠네요...그때까지만 잘래요..."
"너도 참 정의로운 월급도둑이구나."
"무슨...그런 섭섭한...친애하는 올리비아..."
소파 등받이 너머에서 큼직한 은청색 털뭉치가 불쑥 솟아올랐다. 둥글넓적한 털뭉치 끝에는 흑옥을 갈아 만든 것처럼 반짝이는 발톱이 다섯 개 달려 있었다.
"제가 얼마나...목숨 걸고 뼈빠지게 일했는데...월급 넘치게..."
"그래서 한가롭게 소일거리나 하면서 월급 받으라고 환상생물연구소 같은 한직으로 보내진 거잖니."
"소일거리는 무슨...공신 예우란 건 종신연금이랑 휴양지 저택이지...애가 어릴 때부터 짠순이더니, 황제가 되고...그래도 씀씀이가 쪼잔해서...하암...지네 아부지는...배포 두둑해서 좋았는데..."
자꾸 말을 걸어서인지, 아니면 생각만 해도 짜증나는 화제가 수면 위로 떠올라서인지, 떠오른 털뭉치가 불끈 떨리며 들려오는 목소리가 잠기운을 떨치며 빨라졌다. 만약 여기에 세 사람째의 제국 신민이 있었다면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무릎을 꿇고 멀리 제도帝都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황제 폐하의 자비를 구했을 법한 발언이었지만, 올리비아 고오글레 부인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 다정한, 조금은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뜨개바늘을 멈췄다.
"있잖니, 마나."
"...또 뭐 잘못하셨는데요?"
"얘가, 어른한테 말버릇 하고는."
"올리비아가 그 이름으로 절 부르실 때는 곤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거잖아요. 뭐예요? 설마 다음 생일에 깜짝파티 해주기로 했다고 소장님한테 이야기했어요?"
"아니야, 얘. 이젠 그런 실수 안 해."
젊은 시절 '우물가의 올리비아'로 유명했던, 소문을 듣고 남의 비밀을 아는 것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때때로 말해서는 안될 것을 말해 곤란한 입장에 처했고, 그 결과 목숨을 내놓아야 했을 때 메리디아나의 도움을 받아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노부인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요? 드디어 소장님이 청혼하셨어요?"
"아니, 하지만 곧 할 거야. 아마 다음 생일 지나면?"
"미리 축하드려요. 근데 그거 말하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
"으응, 그런 건 아니고...있잖니. 지난 달에 제도로 돌아가신 마들레느 이사관님. 그 분한테 작별선물로 손수건 드리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 어쩌다 보니 네 이야기가 나왔거든."
"제, 무슨 이야기요?"
털뭉치가 지는 보름달처럼 조용히 소파 등받이 아래로 사라졌다. 올리비아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그...왜, 네가 젊을 때, 용의 별에서 온 환수를 부린 적 있잖니."
"부린 게 아니라 잠깐 밥 좀 먹여준 거죠. 그런 이야기는 뭐하러 하셨어요. 어차피 안 믿었을 텐데."
"응, 그때는 안 믿으시더라고. 그런데 그저께 편지가 와서..."
"서기관님!!!"
콰당!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문이 벌컥 열렸다. 홧김에 차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콧김을 씩씩 뿜으며, 제법 옹골차게 생긴 젊은 청년이 발소리도 요란하게 쿵쾅쿵쾅 들어왔다. 그러나 조금도 놀라거나 기죽지 않은 노부인이 침착한 어조로 그를 나무랐다.
"올리비에, 문은 조용히 열라고 했잖니."
"어머니, 서기관님 숨겨 주시지 말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어요!"
"숨겨 준 거 아니야. 자기가 멋대로 들어온 거지."
"제가 찾는 거 들리셨을 거 아니에요!"
"왜 찾았는데?"
노부인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아, 미치겠네. 외모도 성격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닮아 우직하고 성실한 성품의 청년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모친을 외면하고 소파 - 정확히는 소파 등받이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향해 외쳤다.
"서기관님, 거기 계신 거 알아요! 당장 일어나세요. 소장님이 찾으십니다."
"왜?"
"제도에서 황제 폐하의 사자가 오셨습니다."
"소장님도 서기관 자격증 가지고 계시잖아. 회의록 정도는 직접 작성하시라고 해."
여전히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반주 삼아, 황립 환상생물연구소 제2분관 소속 상급 서기관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태연히 내뱉는다. 올리비아 부인이 유쾌하게 웃고, 동 기관 소속 올리비에 고오글레 3등 사무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서기관님을 찾아오셨다고요!!!"
"날? 왜?"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하여간 빨리 일어나세요!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신단 말이에요!!"
"...올리비아."
드디어 소파 등받이 너머에서 일어난 메리디아나가, 그러나 올리비에의 바람과는 달리 조금도 서두르지 않은 채, 올리비아 부인을 향해 흐트러진 진보라색 머리를 돌렸다.
"아까 하던 이야기, 이/거/예요?"
"응, 그러니까 말이지, 내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낡은 양피지처럼 바래고 주름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생기를 잃지 않은 올리비아 고오글레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수 년 전에 비해 조금도 변하지 않은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를 향해 미안하다는 듯 수줍게 웃었다.
"그 왜, 거인의 등뼈 너머에 사막 있잖니. 거기 황제 폐하가 친선사절을 파견하시는데, 환수를 잘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셨대. 그래서 마들레느 이사관님이 네 이야기를 하셨대."
"그래서 그 애...아니, 폐하께서는 옳다구나 신나서 저를 사절로 임명하셨고요."
"아니, 딱히 신나셨다고 하지는 않더라만...뭐, 임명장을 쓰시는 동안 콧노래는 좀 부르셨대."
"망할."
"서기관님!!!"
"사람 젊을 때 개 같이 굴렸으면 말년에 좀 편하게 지내게 냅둘 것이지, 지 바쁘다고 남 노는 꼴을 못 보지? 하여간 심성 글러먹었다니까."
"악악! 안 들려요! 전 아무 것도 못 들었어요!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폐하! 제가 한 말 아닙니다!!"
올리비에는, 비록 무릎을 꿇고 멀리 제도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지는 않았지만,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악을 쓰며 황제 폐하의 자비를 구했다. 댁의 아드님 왜 이래요? 우리 그이 아들이라 그렇단다. 메리디아나와 올리비아는 시선을 주고 받았다.
"쯧, 하는 수 없지."
나른하게 팔을 뻗어 기지개를 펴는가 싶더니, 메리디아나는 어느새 훌쩍 일어나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문관이지만 체력 단련에 열심인 올리비에가 내심 감탄하는, 유연하고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올리비에는 그녀가 몇 살인지 몰랐다. 때로는 자기 또래의 젊은이처럼 활기차고 강건해 보였고, 때로는 모친 또래의 노파처럼 지치고 무력해 보였다. 누구보다도 메리디아나와 오래 알고 지낸 모친은 "보이는 대로 믿지 마라. 그녀는 인간이 아닌 것들과 너무 가깝게 지냈어."라는 말밖에 해주지 않았다. 물론, 올리비에는 그녀를 보이는 그대로 나태하고 무기력한 월급도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메리디아나는 선대 황제 폐하의 승하를 지켰던 '대大 스펠라에우스'의 딸이자 '소小 스펠라에우스'라고 불리는 현 황제 폐하의 즉위 공신인 것이다.
"가 볼게요, 올리비아. 잘 지내요."
"잘 가렴, 마나. 네 하루가 언제나 가장 포근한 꿈으로 끝나기를."
가벼운 걸음걸이로 다가간 메리디아나는, 노부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노부인 역시 주름진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고 축복의 말과 함께 양쪽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치 포옹하듯, 서로의 손을 마주잡은 채 잠시 동안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마치,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을 그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고, 훗날 올리비에 고오글레는 회상했다. 메리디아나 스펠라에우스가 쿠무야무 사막의 유일한 오아시스이자 균형과 조화의 여신 쿠쿠야미르를 섬기는 태고의 신전도시 카두리칸두르에서 어린 카푸슈나 - 그녀가 오래 전 '밥 좀 먹여준' 환수와 놀랍도록 비슷하게 생긴 환수 - 두 마리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