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라이트/텟샤말세텟샤] Le Noir et le Rouge
세상은 두 가지 색깔로 이루어져 있다. 검정과 빨강. 총구를 가득 메운 검정. 심장에서 샘솟는 빨강. 검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고, 빨갛지 않은 것은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서 빨간 머리의 소녀는 검은 옷의 남자를 믿었고, 검은 머리의 남자는 빨간 눈의 소녀를 사랑했다. 유치한 연극이 전부 끝나기 전까지, 그들에게 아무런 사명도 주지 못했던 세계가 스러지기 전까지.
*****
마르...히 포위...저항은...너밖에...세우스...카스토...무의미...시아...마르...마르세...
"깼어요?"
"...마르세우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내려다보는 보라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며 바르작거리는 소녀의 - 자신의 코트로 감싼 - 어깨를 도닥이며,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흑자색 머리칼의 청년은 상냥하게 속삭였다.
"졸리면 더 자도 괜찮아요."
"아니...이제 졸리지 않아. 그보다 밖이..."
"시끄럽죠?"
마르세우스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스테이시아도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창문을 틀어막은 나무판자가 부서진 틈으로 새어 들어온 몇 가닥의 날카로운 빛줄기가 네모난 공간을 가득 채운 새까만 어둠을 제멋대로 난도질하고 있었다. 깨진 샹들리에, 너덜너덜한 커튼, 빛바랜 실크벽지, 부서진 액자, 허물어진 굴뚝, 먼지투성이 마룻바닥에 쓰러진 소파의 쿠션이 찢어져 솜과 스프링이 내장처럼 흘러나온 광경이 지나치게 밝은 빛과 지나치게 짙은 어둠 속에서 신기루의 파편처럼 뒤틀린 채 어른거리는 낯선 공간에서, 그녀는 벽에 기대앉은 마르세우스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지나치게 밝은 빛과 지나치게 짙은 어둠, 그리고,
-마르세우스! 그만 포기하고 투항해라! 마르세우스! 미스 스테이시아를 무사히 돌려보낸다면 선처하겠다! 현명하게 생각해라! 카스토드는 이제 너밖에 남지 않았다! 마르세우스!!
"...결국 쫓아왔네."
"그러게요. 좀 더 멀리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죄송..."
출렁- 선명한 자수정색 머리카락이 피로 얼룩진 검은 옷자락 위에서 물결쳤다. 손가락을 들어올려 청년의 고운 입술을 가로막은 스테이시아가, 자신의 과감한 행동에 내심 두려워하며 나지막히 속삭였다.
"사과하지 마. 당신은 이렇게 될 거라고 경고했잖아. 그래도 괜찮다고 내가 졸랐던 거니까, 미안하다고 하지 마."
"...그렇군요. 정말 그랬습니다만, 그래도 좀 더 신중하게 당신을 설득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후회가 됩니다."
"정말이지, 마르세우스는 너무 진지하다니까."
소녀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애써 삐죽였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않아 창백한 뺨에 긴장과 두려움으로 엷고 성긴 홍조가 떠올라 흩어졌다. 그런 괴물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마르세우스는 다친 상처의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스테이시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깜짝 놀라 커다랗게 떠졌던 금색 눈동자가 이윽고 희미한 미소에 잠겼다.
"있잖아, 마르세우스. 우리, 얼마나 더 여기 있을 수 있어?"
"원하시는 만큼, 마이 레이디."
"그럼...노래해 줘."
"..."
마르세우스는 호흡을 멈추고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언제나 두르고 있던 검은 코트에 감싸진 스테이시아는 참으로 작고, 여리고, 창백하고, 망가진 인형처럼 가냘팠다. 이 아이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문득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의문이 청년의 강인하고 예리한 자의식 위로 떠올랐다. 햇살 가득한 정원에서 처음 마주쳤던 눈동자는, 정말로 금색이었을까? 지나치게 밝은 빛에 신기루를 본 것은 아니었을까?
"응? 노래해 줘, 마르세우스. 언제나 날 재워주던 그 노래를, 한 번 더 듣고 싶어."
"...알겠습니다."
그랬을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지. 그게 이제 와서 어떻단 말인가. 안다 한들,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마르세우스는 자조했다.
You say the road is calling your name
Life at home with me is much too tame
While you roam
I'm here all alone
I hope you find what you're looking for
스테이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엄격한 아버지와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항상 바닥에 쓸리던,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아버지의 오른팔인 남자를 뒤따르던 금색 눈동자가 파들파들 떨리는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I hope you find what you're looking for
And fate is kind to you in your search for more
While you roam
I'm here all alone
I hope you find what you're looking for
마르세우스의 무릎에 얹힌 스테이시아의 몸이, 보이지 않는 손이 잡고 비트는 것처럼 기묘한 방향으로 뒤틀렸다. 만약 스테이시아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면, 마르세우스는 조직을 배반하지 않았을까?
In time you drop me a line
Just a little more time away and you'll be fine
All this time gone
I'm still holding on
I hope you find what you're looking for
마르세우스가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 아래에서, 스테이시아의 자수정색 머리카락이 핏물에 잠긴 듯 선명한 빨강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만약 스테이시아가 괴물이 아니었다면, 마르세우스는 그녀를 외면했을까?
You say you'll come back a better man than before
Don't you know that I loved the man who left a year ago
All this time gone
Are you ever coming home
I hope you find what you're looking for
삐걱- 삐걱- 삐걱- 점점 더 격하게 뒤틀리던 스테이시아의 몸이, 어느 순간 단말마의 경련과 함께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잠잠해졌다. 만약 스테이시아가 그를 원하지 않았다면, 마르세우스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I wish I was what you're looking for
Right here under your nose, how could you want more
All this time gone
And I'm still hanging on
I hope you find what you're looking for
"그만해. 언제 들어도 멍청한 노래라니까."
신음과 비명을 억눌러 참느라 꺼끌꺼끌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녹슨 가위처럼 노랫소리를 끊었다. 마르세우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코트를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는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여어, 텟샤."
"여어 좋아하네. 피 냄새 나니까 닥치고 있어."
짜증스럽게 내뱉은 소녀가 붉은 얼룩이 묻어나는 검은 케이프를 벗었다. 보랏빛 프릴이 달린 검은 실크 블라우스마저 벗자, 흠집 하나 없이 매끄럽고 새하얀 몸이 드러났다. 발목을 덮는 스커트 자락을 찢어 검은 스타킹을 훤히 드러낸 텟샤가,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낭창낭창한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폈다.
"아, 시원하다. 그깟 영감탱이가 죽었다고 상복이라니, 꽉 막힌 기집애 같으니. 좀 더 빨리 불러내지 않고 뭐 했어?"
"언제 들어도 멍청한 노래라면서?"
"하. 그 노래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내 지랄맞은 운명에 불만 있어?"
고양이과 짐승이 기지개를 펴듯 유연하게 팔다리를 뻗어 가볍게 몸을 푼 텟샤는, 벗어던진 블라우스를 집어들어 쭉쭉 찢으며 마르세우스의 엉덩이를 발끝으로 툭툭 찼다. 청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조끼 단추를 풀었고, 셔츠와 조끼 사이에 흥건히 고인 채 굳어가던 핏덩어리가 찢어진 살갗에 달라붙는 바람에 모양좋은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드러난 상처를 본 텟샤의 얼굴이 언뜻 굳었지만,
"혀 깨물지 마."
"으윽!"
느닷없이 씨익 웃으며 한 손을 그 상처에 쑤셔넣었다. 그럴 거라고 예상했고, 처음 겪는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섯 개의 손가락이 상처를 헤집어 심은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상처를 봉합하는 고통이 감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마르세우스는 고통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고 고개를 젖혔다. 기다렸던 것처럼, 한쪽은 피묻고 한쪽은 깨끗한 한 쌍의 손이 그의 얼굴을 감싸고 일그러진 입술에 메마른 제 입술을 부볐다. 덜컥이는 무릎 위에 앉아, 고통에 전율하는 몸을 끌어안고, 자신이 심은 씨앗이 발아하는 약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텟샤는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고장난 시계처럼 불완전한 박자로 째깍거리며, 커다랗게 벌어진 눈꼬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마르세우스의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더럽힐 때까지 웃고 또 웃었다.
*****
"깼어?"
"...텟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소녀는 뒤집어진 채 쓰러진 소파 위에 소롯이 앉아 있었다. 아까와는 각도가 달라진 빛의 칼날이 교묘하게 그녀를 비껴나가, 검은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허리와 길쭉한 팔다리가 밤바다에서 끌어올려진 인어 같았다. 그러나 그 인어는 지느러미 대신 레이피어 만큼이나 길고 날카로운 시계바늘을 두 개 가지고 있었다. 느른하게 시계바늘를 놀려 빛과 어둠을 가르며 텟샤가 중얼거렸다.
"심심해서, 나 혼자라도 죽이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아아...미안하다. 얼마나 지났지?"
"한 시간쯤. 그럼 이제 얼/마/나/ 남/았/어/?"
마르세우스는 피에 젖은 채 말라붙어 뻣뻣한 조끼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아까 총에 맞을 때 뚜껑이 망가졌지만 다행히 태엽은 망가지지 않은 채 움직이고 있었다.
"네 시간...아니, 세 시간...남았군."
"겨우?"
그래, 겨우. 마르세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총에 맞아 죽어가던 순간이 악몽인 것처럼 어디도 아프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이제는 움직이는데 방해가 될 뿐인 조끼를 벗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할버드를 집어드는 손놀림은 가볍고 침착했다. 남은 생명이 겨우 세 시간이라는 사실은 마르세우스에게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했던 것이다.
텟샤의 '씨앗'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시간을 억지로 정지시키는 기술이었다. 상처를 입은 순간부터 씨앗이 심겨지는 순간까지 흘렀던 만큼의 시간이 다시 흐르면 씨앗은 말라죽고, 억지로 봉합했던 상처는 다시 터져 피를 흘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전에는 심은 씨앗이 말라죽기 전 병원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마피아의 배신자로 처형명단 꼭대기에 오른 처지였고, 조직원과 민간인, 경찰을 몇 명이나 죽인 마르세우스를 사살하기 위해 진압을 기다리는 무장경찰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번에 씨앗이 말라죽을 때는 마르세우스도 죽는다. 그것은 이미 마르세우스와 텟샤에게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 '진실'이었다.
"그럼 서둘러야겠네."
텟샤가 훌쩍 뛰어내렸다. 낡아빠진 마룻바닥은 조용했고 먼지 한 톨 흐트러지지 않았다. 춤을 추듯 발랄한 걸음걸이로 마룻바닥을 가로지르는 그녀는 마치 장난감 상자에서 튀어나온 뿔 달린 광대 같았다.
"다 죽이고 나면 어떻게 할지는 네가 생각해. 난 죽이기만 할 거니까...어?"
자신의 목덜미에 디밀어진 할버드의 칼날에도 텟샤는 긴장하지 않았다. 단지 마르세우스를 향해 빙글 돌려진 눈동자가, 핏물을 담은 유리구슬처럼 사납게 반짝이기 시작했을 뿐.
"이거 지금 뭐하자는 거야? 우리끼리 먼저 놀자고? 죽기 전에 꼭 그래보고 싶었어?"
"스테이시아."
"..."
처음으로 텟샤 - 스테이시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데드마스크처럼 딱딱하게 굳은 소녀의 옆얼굴을 향해, 마르세우스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너는 이대로 달아나. 죽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하니까."
"..."
"약속했었지? 너만은 꼭 자유롭게 살게 해주겠다고, 그러니..."
"...풋..."
"스테이시아?"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데드마스크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폭소를 터뜨린 텟샤가 배를 끌어안고 허리를 젖혔다. 핏방울처럼 불그스름한 눈물이 너무 크게 뜬 나머지 찢어질 것 같은 눈꼬리에 걸렸다. 소녀의 작은 몸을 내부에서 잡아 찢을 듯 격렬한 광소에 눈을 홀렸던 마르세우스는 다급히 할버드를 거두며 몸을 뒤로 젖혔다. 두 개의 시계바늘이 빛보다도 날카롭게 어둠을 가르고 출렁인 검은 머리채의 끄트머리를 베어냈다.
"살라고? 너를 죽이고 나는 살라고?"
"텟샤...텟샤!"
"굉장해, 마르세우스! 너한테 어릿광대의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네!"
"텟샤..."
"그렇게 죽고 싶다면! 내가 죽여줄게! 지금! 여기서!!"
챙! 카챵! 챙!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어둠이 찢어지고 빛이 끊어졌다. 진심으로 살의를 품고 공격하는 텟샤에 비해 방어밖에 할 수 없는 마르세우스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하마터면 그의 목을 찢을 뻔한 시곗바늘이 할버드의 날에 부딪혀 벽에 꽂힌 순간, 마르세우스 역시 등이 벽에 부딪혔다.
"그러지 말고, 마르세우스..."
흐트러진 붉은 머리칼에 감싸인 하얀 얼굴이 마르세우스의 턱 아래 바싹 들이밀어졌다.
"같이 죽어보지 않을래?"
"텟샤..."
"네가 죽으면 끝, 끝이야. 전부 끝. 네가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끝까지 말하지 못한 텟샤의 입술은 스테이시아의 것처럼 보드랍고 따스했다. 끌어안은 몸은 참으로 작고도 가늘었다. 아아, 텟샤, 텟샤. 마르세우스는 한숨으로 키스를 끊고 소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텟샤, 죽는 게 무섭지 않아?"
"바보야?"
가볍게 마르세우스를 떠밀어 그의 품에서 벗어난 텟샤가 피식 웃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는 것도 몰랐을 거야.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죽은 채로 살고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야. 무섭냐고? 죽는 게?"
그때, 핏물에 잠긴 금공처럼 오묘하게 빛나는 소녀의 눈빛이 마르세우스의 눈꺼풀 뒤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나 혼자, 산 채로 죽어 있는 게 더 무서워."
이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건 너뿐이니까.
이 세상에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당신뿐이니까.
"...스테이시아."
"유치한 연극이었어. 하지만 재미있었지. 그거면 됐어."
"...그래, 텟샤. 재미있다면, 그걸로 됐지."
마르세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심장에서 피어난 세 갈래의 진홍색 이파리 중 하나가 시들어 떨어지며, 소녀에게 다가가는 청년의 발에 짓밟혀 가루가 되어 날렸다.
"갈까?"
"가자."
두 사람은 서로의 무기를 두 손에 쥐었다. 나란히 설 필요도 손을 맞잡을 필요도 시선을 마주칠 필요도 없었다. 그런 것 따위, 함께 죽이고 같이 죽는 사이에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세상은 두 가지 색깔로 이루어져 있다. 검정과 빨강, 마르세우스와 스테이시아.
-END.
***2013/05/09
BGM : 'What You're Looking For' (song by Stacia Petrie)
트위터에서 @jan*님의 리퀘를 받아 쓴 글입니다. [텟말텟써주세여 /느와르 대사 "무섭지 않아?"] 로 주셨었죠.
느와르...넵, 느와르. 곰이 아는 느와르라면 <첩혈쌍웅>이라든가 <언터쳐블>이 있습니다만, 어쩐지 결과물은 <바카노!> 1권에 가깝게 되었네요. 이게 다 곰이 텟샤와 말세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캐붕이 있었을 겁니다. 분명히...하지만 상냥상냥한 ㅁㅅㅇ님은 받아주실 거에요. 믿습니다! (하지만 달아나는 곰ㅌㅌ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