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라이트] 2013년 4월 조각글 모음
4월 한 달 동안 트위터에 끄적였던 글 모음입니다. 전체적으로 수위가 좀 있네요. 유의하시길.
2013/04/01
두 사람이 사라졌다는 소식은 오래지 않아 레지먼트 - 고대의 언어로 '지키는 자'라는 뜻이다 - 왕국 전역에 퍼졌다. 위로는 수도 판데모니움의 귀족들부터 아래로는 황야의 스톰라이더에 이르기까지, 모이기만 하면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팔초八梢의 우보스'라지요?"
"거참, 라고모르파 레포리즈Lagomorpha Leporids 일족에게서 구출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러게요. 너무 영험해서 곤란하다니까요."
"왕세제王世弟 전하도 참 심려가 크시겠어."
"이번에도 쫓아가셨을라나?"
"그렇겠죠? 그러니까 두 분이 동시에 사라지셨겠죠."
"무사히 돌아오시겠지?"
"그렇겠죠? 언제나 그랬듯이."
"그나저나 미리안 폐하의 심려가 크시겠군."
"-랍니다, 백성들은."
"으음..."
레지먼트 국왕 - 왕성에서 가장 바른 말을 잘 하는 아무개에 따르면, 선왕 스털링 대제 임종시에 왕자라고 낳아 놓은 다섯 중에 넷씩이나 형제간에 눈치 보며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관 받으라 관 받으소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관 되었소이다 싫소이다 이 몸에 어울리지 아니하오 이래저래 떠넘길 적에, 형님들 아우님 의향이 그리하다니 못난 몸이나마 부왕 유지를 받자오리다 삼배 삼배 구배하야 왕좌를 받았더라 얼쑤~ 한 가락 뽑고도 남을 정도로 우직하고 단순하며 또한 정직하고 신실한 - 미리안이 큼직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침음했다. 신하들과 시종을 모두 물린 접견실에는 그와 왕비, 단 둘뿐이었다.
"이야, 전례가 있어 다행이야. 다들 또 그거려니, 전혀 의심을 안하더란 말이지."
"전례라니. 고작해야 네 번이다."
"네 번이 고작이야?"
수수한 녹색 로브 위로 두른 허름한 케이프의 후드를 벗은 왕비가 피식 웃었다. 선명한 붉은 단발이 보였더라면 그 복잡한 월요일 아침의 시장통에서 왕비의 정체가 탄로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옥좌 팔걸이에 걸터앉자, 습관처럼 미리안의 거무스레하고 두툼한 팔이 그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왕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로쏘는 달래는 것인지 위로하는 것인지 재미있어 하는 것인지 알기 어려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왕급 마수에게 납치되었다가 구출되기를 네 번이야. '고작'이라고 말하기 민망하지 않아?"
말꼬리를 떨었다. 웃음을 참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미리안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어찌 이리 제대로 된 놈이 없냐그래.
"실례야."
그의 혼잣말을 들은 로쏘가 삐진 척 입술을 삐죽이며 굵은 목에 팔을 감았다.
"나만큼 제대로 된 사람이 레지먼트 내의 어디에 있다는 거야?"
"...그 말, 베른하르트와 눈을 마주치면서 할 수 있나?"
"못할 건 뭐람."
"진심이냐? 다음 번에 리즈와 베른하르트가 돌아오면 시킨다?"
"그러시든가요, 폐하. 설마 베른하르트가 날 해방검으로 썰어 죽이는 걸 그냥 보고 있지는 않으시겠죠?"
"네 구업口業을 왜 내가 막아줘야 하나."
"대가를 지불하고 있으니까."
마치 '선불이에요'라고 말하듯, 부드럽게 시작하여 농밀하게 끝난 키스 끝에, 로쏘가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당신 동생이 태어나서 30년 동안 한 번도 마수에게 납치되지 않은 채 지낼 수 있었던 게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해?"
"협조에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나와 결혼을...음."
"...뭐, 무녀가 네 번이나 납치된 건 자업자득이고, 알다시피. 왕세제에게 구출되는 휫수가 늘어날 때마다 리즈가 열받아 한 걸 생각하면, 이번에 한 번 실력 발휘를 하게 해주는 것도 좋겠지."
"리즈는 그렇다 치더라도, 베른하르트가..."
"진짜, 내가 앞에 있는데 자꾸 딴 생각 할 거야?"
로쏘가 미리안의 목을 다시 한 번 끌어안았다. 논리나 화술이 아닌 방법으로 대화를 끊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안다면, 미리안은 당장에 떨치고 일어나 팔초의 우보스가 지배하는 흑호반黑湖畔까지 한달음에 달려갈 게 틀림없었으니까. 미안해, 베른하르트 도련님. 미리안의 어깨 너머로, 로쏘가 씨익- 사람나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데이터가 나오지 않는단 말야. 데이터가 나와야 당신 약도 만들지. 어차피 리즈가 늦지 않게 구해줄 거야. 적당히 당하고 돌아와서 새로운 데이터 내놓으면 또 새 약 지어줄게. 그래서 나도 재미있고 당신도 오래 살고 리즈도 행복하고 미리안도 안심하고 너윈나윈우리윈윈하자구, OK?
물론, 그 일방적이고 제멋대로인 제의는 우보스의 둥지에서 깨어난 베른하르트에게도, 지금껏 자신의 몸을 바쳐 지켜온 연인의 정조가 위험에 빠지기 전에 찾으려고 훅호반을 이잡듯이 뒤지고 있는 리즈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쏘가 알 바는 아니었지만.
-....계속?;
2013/04/06
친구가 적은 것에 불만은 없었다. 탐정이라는 직업상 아는 사람은 많지만, 그건 '지인'이었다. 안면을 트고 지내다가 가끔 필요에 의해 대가를 지불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대상. '친구'는 그런 편리한 게 아니었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예정도 없는 시간을 빼앗아 가고, 마치 그럴 권리가 있는 것처럼 남의 일을 시시콜콜 캐묻고, 마치 이쪽이 어린애나 되는 것처럼 판단을 의심하거나 결정을 부정하고, 마치 자기가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식사나 수면, 치료와 휴식을 강요한다. 그 모든 행위에 뭔가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우린 친구잖아."라는 한 마디 말로 치받아 버리는 뻔뻔스러운 종자들이 바로 '친구'라는 것들이었다. 있을 때는 참으로 지긋지긋하여 어서 빨리 황야나 연구소, 가게나 저택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그들이,
"아...죽겠다..."
이렇게 애타게 그리울 때가 오다니, 과연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브라우닝은 족쇄라도 달린 것처럼 무거운 팔을 힘들게 들어올렸다. 절그렁- 정정. 정말 족쇄가 달려 있었다. 그의 오른쪽 손목에 단단히 물린 두툼하고 널찍한 쇠띠에 이어진 쇠사슬은 움직일 때마다 절그렁 절그렁 묵직한 소리를 냈다. 아까 어떻게든 풀어 보려고, 최소한 사슬을 끊고 탈출하려고 시도했을 때, 그 요란한 소리 때문에 문밖에 서 있던 보초에게 들켜 호되게 보디블로를 당했다. 얼굴을 치지 않은 것은, 허락도 없이 손을 댄 것을 언더보스에게 들키면 제놈이 먼저 죽을 줄을 알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침대에 누워 있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 하긴, 이제 다른 걸 할 기력도 없지만.
브라우닝은 한숨을 쉬었다. 이거야 원,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도 유분수지. 이런 짓은 네가 새장에 넣어 기른다는 마녀에게나 하란 말이다. 나는 네 애완동물도 아니고, 부하도, 소유물도, 적도 아니잖나. 친구는 더더구나 아닌, 그저 질긴 악연으로 어쩌다 얼굴이나 마주하는 지인일뿐인데.
브라우닝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고, 협착될 정도로 부어오른 기도가 아파 이맛살을 찌푸리다가, 그렇지 않아도 지끈거리던 편두통이 심해져 그나마 자유로운 왼손을 들어올렸다가, 노련한 암살자의 비수처럼 관절 사이를 찔러드는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가, 협착될 정도로 부어오른 기도가 아파...이하생략.
미치겠군. 가까스로 순환하는 고통에서 벗어난 브라우닝이 조심스럽게 몸을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고작 감기가 아닌가. 물론 흠씬 얻어터진 다음 장대비에 쫄딱 맞아 돌아온 사무실에서 난방을 켜는 것도 잊고 기절하듯 잠이 든 끝에 걸린 감기인 만큼 독감이라도 불러도 좋겠지만, 그래도 감기는 감기다. 죽을병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고통스럽다니, 게다가...
-살아 있나? 허락도 없이 돌아가다니 무례했어.
-...그건 달아났...다고 하는 걸세...
-돌아가든 달아나든 해도 좋다고 허락한 적 없어...그런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내 목소리...가 어때서...쿨럭...
-기침도 하고 있잖아. 설마 어제 그 비를 맞은 거야?
-아, 자네...사무실에 우산...없더라고...
-빌어먹을. 거기 꼼짝 말고 그대로 있어. 또 달아나면 죽여버린다.
-그 말...요즘 참 자주...듣는군...
-듣기 싫으니까 닥치고...
뜨거운 물이나 마시고 있어. 말린 오징어만도 못한 새끼 - 라고 말했던 것 같다. 제정신으로 들었다면 네가 이계의 어류를 부리면 부렸지 왜 사람을 어류 취급하느냐고 항의한 끝에 오징어는 어류가 아니라 두족류다 병시나 소리를 들으며 얻어맞았겠지. 하지만 브라우닝은 통화가 끝나기도 전에 기절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지붕까지 달린 호화로운 침대에, 오른손은 침대 기둥에 묶인 쇠사슬로 연결되어, 탈출을 시도하면 패지는 말고 말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제입으로 지껄이는 어리석)은 보초가 문밖에 버티고 선 방에 갇혀,
"깼다고?"
벌컥! 쾅! 난폭하게 문을 연 코브가, 그보다 더 난폭하게 문을 닫으며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왔다.
"조용히...머리 울려..."
"너나 조용히 해, 멍청아. 목 나을 때까지 닥치고 있어. 끽끽대는 소리 듣기 싫으니까."
"싫으면, 돌아가게...윽!"
"닥치랬지."
코브가 침대 가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체중과 중력의 힘을 빌려 브라우닝의 입을 한 손으로 짓눌렀다. 환자한테 무슨 짓이야! 브라우닝은 그야말로 뭍에 끌려나온 물고기처럼 퍼득거 - 리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아팠다. 온몸이, 안팎으로, 어디 한 군데 빠지지 않고, 아팠다.
"...울긴 왜 우냐."
한손으로 브라우닝의 입을 막은 채 다른 손으로 상의 주머니를 뒤지던 코브가 흠칫 놀라더니,
"씨발, 그렇게 아프면 병원에 갔어야지...아, 인형의사는 출장 갔댔지."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필이면 수틀리면 자신을 불러들여 흠씬 두들겨 패기를 그저께처럼 하는 망나니 앞에서 아프다고 눈물을 보인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제 대체 뭘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럼 다른 병원이라도 가든가, 누구 불러서 약이라도 사오라고 했어야지. 병신 같이 혼자 앓고 있냐. 친구도 없는 모자란 놈."
아마 걱정이 공포로 발전하지 않는 것은, 코브의 난폭하고 천박한 어조에 어린 감정 때문일 것이다. 마치 자신만은 이 강하고도 여린 탐정을 해치지 않을 것처럼, 브라우닝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부드럽게 턱 아래로 쓸어내린 코브가,
"자업자득이야."
"무...슨....읍..."
주머니에서 꺼낸 유리병에 든 액체를 단숨에 마시더니, 그대로 브라우닝에게 입을 맞췄다. 고열로 거끌거끌해진 입술을 가르고 파고든 혀가, 머금고 있던 액체를 그대로 브라우닝의 부어오른 식도로 흘려넣었다.
"먹고 나면 졸릴 거랬어. 자라."
"...딸기...맛이군..."
"쓴 거 못 먹잖아. 커피도 아메리카노 못 마시는 주제에 잘난 척은."
털썩. 코브가 그대로 브라우닝 옆에 누웠다. 절그렁. 매트리스가 흔들리며 쇠사슬이 맑은 소리로 울었다.
"뭐...하는..."
"닥치랬잖아. 듣기 싫다고."
제법 위협적인 목소리로 으르렁거린 코브가 브라우닝의 몸에 팔을 둘렀다.
"그 진통제, 먹고 나면 졸릴 거랬어. 나도 좀 먹었으니까, 한잠 자고 갈 거다. 저번처럼 허락도 없이 돌아갈 생각하지 마."
그건 도망친 거였다니까. 말하지 않은 것은 닥치라는 위협 때문이 아니라 순식간에 퍼지는 졸음 때문이었다. 약효 죽이는군. 브라우닝은 자신쪽으로 기운 코브의 이마에 마주 이마를 댔다. 한잠 자고 나면 정말로 감기가 나아서...달아날 수 있으면...좋겠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브라우닝의 몸을, 코브의 팔이 다시 한 번 고쳐 안았다. 웃기지 마. 돌아가는 것도 달아나는 것도 아니야. 내가 잠깐 풀어주는 거다. 그러니까 아프지 말라고, 내 것인 주제에, 내 허락도 없이.
-END.
2013/04/08
-얘야, 여기서 뭘 하고 있니?
-아저씨는 누구?
-밤이 늦었다. 집에 가야지.
-아저씨는 누구?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집은 어디야?
-아저씨는 누구?
-...하하...
-헤헤...
-옆에 앉아도 될까?
-어른도 그네를 타요?
-음, 가끔은.
-뭐, 맘대로 하세요. 그네가 내 것두 아니고.
-고맙구나. 흠, 좀 작군.
-그거 아저씨 진짜 팔이예요?
-응?
-지금 등 뒤로 숨긴 거.
-이런, 보였니?
-길쭉한 거. 아저씨 진짜 팔이죠?
-아니란다...설명하기는 좀 어렵지만, 무서워하지 말거라. 위험한 건 아니야.
-아저씨 슬랜더맨이죠?
-슬랜더맨? 그게 뭐지?
-자기 이름도 몰라요?
-내 이름은 슬랜더맨이 아닌데.
-진짜?
-그래, 난 베른하르트라고 한단다. 너는?
-난 프리드리히. 엄마아빠는 프리츠라고 불러요. 리리라고 부르면 아저씨라도 때려줄 거에요.
-하하, 알겠다, 조심하마. 그래, 프리프리히. 엄마아빠는 어디 계시니?
-집에요.
-그럼 너는 왜 여기 있니? 이런 늦은 밤에 놀이터에 혼자 있으면 무섭지 않아?
-아저씨 진짜 슬랜더맨 아니에요?
-음...아닌 것 같구나. 슬랜더맨을 기다리고 있었니?
-아저씨 질문 되게 많이 한다. 키 크겠네요.
-하하, 아저씨는 이미 어른이라서 더 크지 않는단다. 질문을 많이하면 키가 큰다고 그러니?
-응, 엄마가. 옛날에는 내가 막 물어보면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는데, 요새는 시끄럽다고 화를 내요.
-저런...그래서 집에 안 가고 여기 있는 거니?
-아니. 나 엄마가 나한테 화내는 건 괜찮아요. 근데 아빠랑 싸우면 엄마가 울어서 싫어.
-...엄마랑 아빠가 자주 싸우니?
-요즘. 아빠가 뭔가 잘못했대요. 근데 엄마한테 숨겼대. 그래서 엄마가 화냈어요. 아빠는 바보야. 엄마는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하면 다 용서해 주는데, 엄마한테 비밀로 하고 거짓말하고 화내고 그래...
-흠...프리드리히, 이거 쓰렴.
-나 안...울어요...
-그래그래, 콧물이라도 닦아. 추운데 오래 있어서 감기 걸린 것 같구나.
-안 추운데...고마워요, 아저씨.
-음...날이 추운데, 집에 안 갈 거니?
-엄마랑 아빠가 아직 싸우고 있을 거에요.
-그렇구나...프리드리히, 이리 오겠니?
-아저씨 무릎 위에 앉으라구요? 나 애기 아닌데.
-춥잖니? 아저씨도 코트를 벗어주면 추울 거 같으니까, 잠깐 안겨 있으렴.
-...코트 벗으면 진짜 팔이 보여서 그래요?
-내 팔은 지금 네가 보는 이건데? 왜 내 진짜 팔이 있다고 생각하니?
-아저씨 얼굴 하나도 안 보여요.
-...그러니?
-슬랜더맨은요, 얼굴이 안 보이고 팔이 엄청 긴 남자에요. 혼자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잡아간댔어.
-그럼 무서운 괴물이잖니? 왜 나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지 않았지?
-내가 잡혀가면, 엄마랑 아빠가 반성하고 안 싸울지도 모르잖아요. 우리가 싸워서 프리츠가 사라졌어, 그러니까 싸우지 말자, 하고.
-...
-어? 이상하다? 아저씨, 얼굴이 보여요.
-그러니...
-응. 근데 이상하다? 아저씨, 나 알아요?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우리 아빠 친구예요?
-아니...그렇지는 않단다.
-근데 왜 어디서 본 거 같지? 꼭...어...아빠? 아니다...어...나? 내 얼굴인가?
-프리츠...
-이상하다...근데 아저씨, 울지 마요. 아저씨가 우니까 꼭 내가 우는 거 같잖아...울지 마요. 내가 안아줄게요.
-...고맙구나...
-...아저씨 지금 등에 붙인 거 문어예요? 그거 팔 아니고 촉수?
-인사하렴. 우보스라고 한단다.
-우와. 눈이 여덟 개나 되네? 짱짱 신기하다. 그럼 아저씨 진짜 슬랜더맨 아니구나?
-글쎄...어쩌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에이, 그게 뭐야...하암...
-졸리니? 잠깐 눈 좀 붙이거라. 깨어날 때까지,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같이 있어 줄게.
-응...깨어날 때까지...있어 줘야 해요...약속...
-그래, 약속...
-어기면 안돼...쫓아가셔....딱콩...해줄 거야...
"...라고 했는데 약속을 어겼단 말이지."
프리드리히는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은 이마를 가볍게 쓸어올렸다. 어린 날의 추억이 서린 놀이터는 얼마 전 폭격으로 움푹 파인 크레이터가 되어 있었다. 공습과 폭격으로 엉망진창이 된 거리에 더없이 어울리는 모습이었고, 이 거리에서만 30년 가까이 살아온 프리드리히는 아주 잠깐,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의 유년기를 위해 묵념했다.
자, 그러면 슬슬 가 보실까. 발치에 놓았던 배낭을 등에 메고, 철컥- 전자라이플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아무리 소강상태라지만, 언제 적의 습격이 있을지 모르니 조심, 또 조심.
방향은, 마지막으로 슬랜더맨의 소문이 들려온 북쪽으로 정했다.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다시 만날 때까지 찾아다니면 그만이다. 이 프리드리히, 한 번 한다고 했으면 하는 상남자라는 걸 보여줄 테니까. 세상 어디 있든지 반드시 찾아내고 말 거야. 이마 씻고 기다려요, 베른하르트!
-END.
2013/04/11
동굴곰은 망원동(望遠洞)에 살았다. 곧장 한강(漢江) 북변에 닿으면, 창가에 오래된 PC가 놓여 있고, PC를 향해 두 개의 키보드와 마우스를 벌렸는데, 키보드들이 밤낮없는 연성과 게임에 성할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동굴곰은 레지조만 좋아하고, 그의 아바타가 근근이 다른 조를 돌려 인벤에 젬칠을 했다.
하루는 그 아바타가 매우 빈곤하여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베른하드, 프리드리히, 리즈로 덱을 짜니, 닼룸은 돌려 무엇합니까?"
동굴곰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그들의 스킬과 이벤트 카드를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그럼 루카라도 데려가지 않으시나요?"
"특카가 나오면 리즈에게 주어 겁화연옥을 써야 하지 않겠소?
"그럼 C.C.라도 데려가지 않으시나요?"
"첫 턴은 베른하드를 세워 기지를 써야 하지 않겠소?"
아바타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밤낮으로 다크룸을 돌리더니 기껏 '하지 않겠소?' 소리만 배웠단 말씀이오? 팔엽도 못 쓴다, 안티셉틱.F도 못 쓴다면, 코브라도 데려가 배거즈 뱅큇이라도 못 여시나요?"
동굴곰은 쓰던 연성을 멈추고 일어나면서,
"아깝다. 내가 당초 베른하드 구첩액자를 기약하기를, 이제 육첩인 걸..."
하고 휙 로그아웃해 버렸다.
-계속 없음.
2013/04/18
모월 모일.
오늘도 바인더의 여자애들은 - 지사자 포함! - 시끄럽다. 한 번만 안아 보자느니 볼이 포동포동하다느니 촉수랑 코뽀를 했다느니 먹을 거 줘도 되냐느니 꺄악 나한테 윙크했어! 너무 귀여워 어쩌면 좋아!! 라느니...흠흠. 도대체 그 조그만 문어가 뭐 그리 예쁘다는 건지 모르겠다. 정작 우보스는 아직 코빼기도 못 봤잖아. 자기네 루드 전용무기 취향 나쁘다는 이웃집 따님 성토에 동의하는 것도 봤는데.
뭐 아무튼, 베른하르트 녀석만 꽃밭의 망아지 마냥 곤란한 얼굴로 우보찡 끌어안고 바인더 거실에 포위되어 있는 것도 눈꼴시니까, 나도 한 마리 데려와야겠다. 같은 문어는 너무 속보이고, 비실체는 다루기 어려울 것 같고, 인간형이나 생물형이 좋겠지? 지시자가 오늘은 어디로 퀘스트를 가려나.
모월 모일.
토끼를 주웠다. 백강도 아니고 버섯도 아니고 처음 보는 까맣고 조그만 토끼다. 지시자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귀여우니 키워도 된다고 했다. 이름은 알토깽이라 부르기로 했다. 바인더의 여자아이들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귀엽다며 서로 안아보자고 난리다. 베른하르트와 우보찡은 겨우 자기네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큭큭큭. 내가 이겼다.
추가.
토끼는 채식동물이다. 종이는 풀이요 연필은 나무로다.
모월 모일.
알토깽이가 크레니히의 책을 죄다 쏠아놓았다. 화가 난 심연이 먹어치우겠다고 쫓아다니는 바람에 서재가 엉망이 됐다. 베른하르트가 우보찡을 심연에 집어던져 배탈이 나게 한 덕분에 살았다. 지시자가 서재를 다 치울 때까지는 저녁밥을 안 주겠다고 했다.
배고프다. 토끼라도 구워먹을까.
모월 모일.
이 자식은 토끼가 아니다. 돼지다. 귀가 길고 털이 북실하고 앞니가 발달한 돼지가 틀림없다.
모월 모일.
야생의 루드가, 한 번만 더 정원에 들어와서 꽃을 먹어치우면 토끼가 아니라 토끼 할아버지라도 뼈가 드러날 때까지 나인캣테일로 후려치겠다고 선언했다가, 따님에게 남의 집 사랑스러운 네발모피동물을 괴롭힐 시간이 있으면 야생의 탐정이라도 잡으러 가지 그러냐는 비아냥을 들었다. 우리집 바인더에 루드가 없어 따님은 야생의 루드에게 자비가 없다.
기왕이면 독당근이나 여우장갑이라도 먹고 배탈이 나면 좋았을 것을. 한 번 혼쭐이 나야 다시는 안 그럴 건데.
모월 모일.
알토깽이가 아프다! 주는 밥도 안 먹고 뛰어다니지도 않고 빈입만 오물오물하고 있다. 우보찡이 옆구리를 찔렀는데 촉수를 물리지 않았다!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없다. 의사한테 보여야겠다!
추가.
돌팔이 워켄놈이 자기는 인형 전문이라고 알토깽이를 인형으로 만들면 봐주겠다고 했다. 한 대 칠랬더니 그집 딸래미들이 하나는 내 다리를 걸고 하나는 내 머리를 치려고 했다. 맥스가 카운터가드를 걸어줘서 살았다. 저놈의 스킬은 아무리 봐도 방어가 아니라 정신공격이다.
아참, 이럴 때가 아니지. 의사! 우리 알토깽이 의사!!!!
모월 모일.
알토깽이가 건강해졌다! 다 나가 있으래서 문틈으로 보느라 잘 안 보였지만, 따님이랑 다른 따님들이 둘러싸고 왼쪽오른쪽왼쪽오른쪽메이저마이너리버스드림데레데레츤데얀데떡떡떡 같이 들리는 주문을 외우더니 곧 알토깽이가 밥달라 떡떡대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따님은 굉장하다. 성녀님의 권능인가?!
추가.
따님이, 토끼한테 자꾸 사약을 주지 말란다. 소화불량 걸린다고.
뭐야, 너무 쳐묵쳐묵해서 소화불량 걸렸던 건가?
사람 걱정하게 하고 있어. 이 잘 때만 사랑스러운 모피동물이...
모월 모일.
알토깽이는 이형생물이다. 케이오시움으로 위장에 블랙홀을 박고 이빨에 장미칼을 장착한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못 먹는 게 없을 리가 없다.
모월 모일.
더는 종이와 연필이 없어 쓸 수가 없다. 옷자락에 피로 적어야 하나?
범인은 알토...
2013/04/20
"베른! 이거 스티커 사진이라는 거래. 신기하지! 신기하지!"
"그 나이 먹도록 애 같은 네가 더 신기하다만."
"에이, 노친네처럼 그러지 말고~"
"..."
"어어, 칼 집어넣으시고. 지시자가 찍는 법 가르쳐 줬어. 우리도 찍자, 응?"
"이런 걸 찍어서 뭐하게."
"뭐하긴, 기념이잖아. 베른 하나, 나 하나. 아니다, 칼집에 붙일 거니까 난 두 개."
"그런 걸 왜 칼집에 붙이나. 보기 숭하게."
"그래야, 또 죽어서 다시 만나도 이번에는 우리가 쌍둥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 수 있잖아."
"..."
"응? 베른, 찍자~"
"...매달리지 마라. 무겁다."
"베에르은~"
"안 귀여우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고...알았다. 어떻게 하면 되나?"
"역시 들어줄 줄 알았어! 자, 그럼 여기 서서, 저쪽 보고, 손, 그 손은 이쪽. 나 노려보지 말고 저쪽 보라니까."
"꼭 이 포즈로 찍어야 하나?"
"응! 거울에 비친 것 같아서 쌍둥이라는 게 확실하잖아!"
"...알았다."
"자, 찍습니다. 웃어, 베른. 웃으라구!"
"무리한 요구 하지 마라."
나는 너처럼 강하지 못하니까, 너를 다시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앞에서 웃을 수 없다. 그러니 프리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하련다. 지금 잡은 이 손을 놓지 않겠다. 두 번 다시, 절대로.
-End.
2013/04/29
-길을 잃었다면 하늘을 올려다보며 7개의 이름을 불러요 너는 혼자가 아니야~
본방은 아니지만 드레스 리허설이라 그런지 무대 위의 소년들은 본방이나 다름없이 진지하게 빛났다. 노래했다, 춤췄다, 공연했다, 상황에 맞는 그 어떤 동사보다도 이 순간의 소년들에게는 '빛났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이야, 다들 반짝반짝하네."
그 느낌은 베른하르트 혼자만 받은 것이 아닌지, 등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른하르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또 늦었냐."
"쏘리쏘리~ 그래도 본방 전에 왔잖아. 우린 오늘 리허설 안한다며."
"그러게, 무슨 생각인지."
베른하르트는 내심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무대 건너편을 보았다. 루카 사장이 나이를 이유로 은퇴를 선언한 뒤, 성유기획의 차기 사장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각자 전담하는 유닛의 이번 시즌 성과를 봐서 세 명의 치프 프로듀서 중 한 명이 될 거라는 추측이 대세였지만, 어쩌면 사장의 양녀인 파르모나 그녀의 약혼자인 아수라, 혹은 최대주주인 볼랜드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들이나 리즈, 마르세우스, CC 등 차기사장으로 손꼽히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개성이 강하다 보니, 다들 누가 사장이 되어 운영방침이 어떻게 바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할 필요 있나? 우린 그냥 열심히 노래하기만 하면 되잖아."
"그건 그렇다만..."
"저놈들도 오늘 1위 확실하다고 하고 하니까 말야."
쌍둥이 동생 프리드리히가 무대 위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소년들을 가리켰다. Regiment Boys는 최근 한창 떠오르는 아이돌 그룹으로, 베른하르트와 프리드리히가 속한 U-boss - 10년 넘게 꾸준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3인 밴드였다 - 와 같이 리즈가 프로듀싱하는 스타 유닛이었다. 이대로 RB의 인기가 유지되면 리즈가 차기 사장이 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라는 게 기획사 안팎의 중론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 리즈는 U-boss의 리허설 예정을 알려주지 않았고, 무대 저편에서 밴드 멤버인 아치볼드와 둘이서 뭔가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그게 딱히 이상한 건 아니지만, 계속 이쪽을 흘끗흘끗 보길래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나? 그쪽으로 갈까?' 손짓으로 물어보았지만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도 자기네들끼리 키득키득 웃는 모양새가 심히 수상하고도 불길한 것이다.
"베른."
"왜, 프리츠."
"쟤네 또 무슨 꿍꿍이야?"
역시 쌍둥이라 그럴까. 똑같은 것을 느낀 듯 프리드리히가 의심스럽게 무대 저편을 노려보았다. 그런 동생의 공감이 고맙기는 하나,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인지라 베른하르트는 그저 한숨을 쉴 따름이었다.
"나도 궁금하다."
"저놈들이, 이 중요한 시기에...어라? 저쪽 오라는데? 가도 괜찮은 건가?"
"그러니까 나도 궁금하다고."
그동안 발상이 어디로 튕지 모르는 재기발랄한 연하의 프로듀서와 행동력의 탁월함과 상식의 박약함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x친구 멤버 사이에서 치이고 갈린 생존본능은 가지 말라고, 차라리 이 자리에서 배를 잡고 쓰러지며 "배가! 아기! 우리 아기가 나올 것 같아요!"라도 외치라고 강요하고 있었지만 - 뭔가 이상하다면, 저 두 사람에게 물든 거다. 틀림없다. 의심하지 마라 - 프리드리히가 벌써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떤 지옥도가 펼쳐지더라도 동생 혼자 보낼 생각은 결코 없는 베른하르트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 무대 뒤쪽을 가로질렀다.
-들리나요? 봐요, 가슴의 소리 두근두근 설렌다구요!
RB의 최근 히트곡 한 소절이 마치 지금 기분 같아서, 베른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저 녀석들, 참. 처음 리즈가 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을 데려왔을 때는 저 놈 저게 드디어 미쳤구나 싶을 정도로 사고뭉치 비행소년들이었다. 그러던 아이들이 진심이 담긴 보살핌과 철저한 훈련을 거쳐 저만큼 빛나는 보석들로 연마된 것이다. 금의환향한 조카를 보는 삼촌의 심정이 이럴까.
"...지금 뭐라고?"
그러니까 그 삼촌에게, 아무리 조카들이 이쁘고 사랑스럽고 기특해도,
"설마 노래 모르는 거 아니지? 맨날 같이 연습했잖아."
리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그 가락을 맞춰 아치볼드가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인가.
"난 제드 파트라면 완벽하게 소화 가능. 프리드리히, 저번에 아이작 파트 할 수 있다고 했었지?"
"미쳤냐? 회식 뒷풀이 가면 한댔지 누가 저 지랄맞게 복잡한 스텝을 무대에서 밟아? 그것도 본방에? 니네 단체로 약빨았어?"
"프리츠. 말 조심해라."
"에이씨, 베른. 지금 꼰대질 할 때야? 이 자식들이 우리더러 RB 춤을 추라잖아!"
"나도 출 건데?"
"닥쳐, 아치볼드. 확 마이크를 후장에..."
"리리."
"아오~ 미치겠네, 진짜."
형이 엄숙한 목소리로 제일 싫어하는 별명을 부를 때는 절대 거역하면 안된다는 가르침이 뼛속까지 스며든 프리드리히가 짧게 깎은 코코아색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을 냈다.
"하여간 난 안 해, 못 해. 베른도 못한다고 해!"
"좀 진정해라, 프리츠."
"진정할 일이 따로 있지! 베른, 설마 에바리스트 파트가 제일 쉽다고 안심하고 있는 거 아니지?"
"아니다. 대체 언제부터 내가 그 파트를 한다고 정한 거냐?"
"지금 프리드리히가 정했네."
리즈가 싱글싱글 웃으며 얄밉게 톡 끼어들었다.
"이야, 과연 우리 기획사 최고참들. 7명 스텝을 셋이서 밟는데 딱 맞게 포지션 나눠주네."
"리즈."
베른하르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연하의, 그리고 그보다 8cm 작은 프로듀서를 노려보았다. 평소 근엄하고 중후한 성품인 만큼 이런 식으로 반감을 표시할 때는 리즈는 물론 CC나 마르세우스, 루카 사장마저도 그에게 한 수 접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 베른."
하지만 리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때 '무대를 불사르는'이라고 묘사되던 환한 웃음을 떠올리며 조금 높은 곳의 마른 어깨를 두드렸다.
"약속했지? 뭐든지 원하는 거 들어준다고."
"..."
"베른? 너도 같이 약빨았어? 이 미친놈한테 뭘 믿고 그런 약속을 해?!"
"진정하라니까, 프리츠. 리즈, 그건..."
"들어줄 거지?"
"..."
베른하르트는 다시 한 번, 자기가 대체 왜 이 제멋대로에 안하무인에 저돌적이고 기분파에다 뒤끝 쩔어주는, 한 마디로 천재적인 락커에다 천재적인 기획력만 아니었다면 애저녁에 연예계에서 매장되고도 남았을 연하의 남자와 사귀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세상에 어떤 프로듀서가, 사장 자리를 거머쥘 신박한 이벤트 기획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영감을 얻게 해줘, 나의 여신, 응? 어려운 거 아니야, 롤플레잉 알지? 그래, 역할극. 신선한 상황이 필요하다고. 일단 내가 의사할께 자기가 환자, 싫어? 그럼 내가 경찰할께 자기가 소매치기, 그것도 싫어? 아, 진짜 협조할 생각 있긴 한 거야? 나 사랑하기는 하냐고! 따위 말도 안되는 강짜를 부린 끝에 '대신 뭐든지 들어준다'는 약속을 얻어내는가 말이다.
"오, RB 끝났다. 다다음이 U-boss 순서니까 빨리 준비해."
"옷부터 갈아입자, 베른하르트, 프리드리히."
"뭐? 의상수배도 끝났단 말야? 야, 이 자식들 완전 고의범이네? 안되겠다, 베른하르트. 우리 확 때려치고..."
"쫄리냐?"
"뭐? 아치볼드 너 지금 뭐랬어?"
"쫄리면 뒈지시든가. 오늘 무대 실황, 방글동에서 페이지뷰 백만, 좋아요 50만 넘는다는데 내 비장의 생떼밀리옹 프로미에 그랑 크뤼 건다. 어때?"
"오호, 해보자고? 좋아, 그 내기 받아들이지!"
포기가 빠른 건지, 분위기를 잘 타는 건지, 프리드리히는 어느새 아치볼드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침퉤퉤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군, 베른하르트는 다시 한 번 결심했다. 헤어지자. 이젠 지쳤다. 이 제멋대로인 어린 놈에게 휘둘리는 건 이제 그만...
"잘해, 베른하르트. 당신만 믿어."
리즈가 해맑게 웃으며, 뻣뻣하게 서 있는 베른하르트의 팔을 끌어당겨 피팅룸쪽으로 밀어냈다. 잘하면 상으로, 어제 해달라던 거 해줄게. 환청 같은 속삭임이 귓가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가 고막으로 녹아내렸다. 베른하르트는 한숨을 쉬며 뭔가 하얗고 반짝반짝하고 무서운 것이 기다리고 있는 피팅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헤어질 테다, 진짜로, 절대로 - 일단 오늘밤 말고 내일.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