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라이트/브라우닝] A Empty Room
해거름에 잠긴 로젠베르크의 거리는 스산했다. 야귀가 출몰하는 밤이 오기 전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인파에 묻혀, 탐정은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고 조용히 걸음을 재촉했다. 차갑게 식은 바람에 흐트러진 겨자색 머플러를 끌어당겨 구부정하게 기운 목에 감았다. 벗겨질 것 같은 중절모를 눌러 쓰는 손에는 아직 피딱지가 마르지 않은 생채기가 드문드문 나 있었다.
상점에 들러 붕대와 약, 무엇보다도 저녁거리를 사야 했다. 하지만 이 시간까지 여는 상점은 루드의 가게뿐이었고, 루드는 틀림없이 비아냥 한 마디를 빼놓지 않을 것이다. 평소라면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받아넘기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브라우닝은 묵묵히 걸었다. 붕대와 약은 그렇더라도 먹을 것은 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을 때였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 와서 걸음을 돌려 나가기에는 귀찮았다. 무의미했다. 브라우닝은 웃었다, 지치고 허기진 육신을, 외로운 마음을 비웃었다.
사흘에 걸쳐 완수한 의뢰였다. 유괴된 아이는 상처 하나 없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고, 탐정은 비록 그 아이 대신 다소의 상처는 입었지만 약속했던 보수 이상의 대가와 솔직한 감사를 받았다. 흐뭇하게 돌아서야 마땅했건만, 그럴 수 없었다. 아이가 돌아온 것으로 마지막 조각이 맞춰진 퍼즐처럼 완벽한 가족의 그림이, 그가 오래 전 마음의 선반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고 잊어버렸던 무언가를 끌어내려 머리 위로 떨어뜨린 것 같았다. 그것은 지독한 허기와도 흡사했지만, 어떤 산해진미로도 채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듣더라도,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지울 수 없을 거라는 확신마저 들었다.
그래서 브라우닝은 어디에도 들리지 않고, 누구도 만나지 않고,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이 넓은 마도에서 오직 한 곳, 그의 보금자리이자 피난처, 둥지이자 무덤인 탐정사무소로 돌아왔다.
"...응?"
부주의했다. 사무실의 문을 닫아 잠그고 돌아선 다음에야, 브라우닝은 자신이 문을 열 때 열쇠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 그가 잠그고 갔던 문을 열어둔 것이다. 블라인드가 내려진 사무실은 낮에도 어두컴컴했고, 해가 진 지금은 완벽하게 어두웠다. 그 네모난 어둠 속에, 누군가 있었다.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자 자신의 것이 아닌 호흡이 들려왔다. 낮고 고른, 깊이 잠든 숨소리.
"읏!"
브라우닝이 조용히 팔을 뻗어 전등을 켰다. 누군가 외마디 신음과 함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건가, 닥터."
"아, 이제야 왔군."
"왔군이 아니라..."
"보면 모르나? 자네를 기다렸다 잠들었어."
워켄이 흐트러진 잉크색 머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투가 사실은 쑥스러워 그런다는 걸, 브라우닝은 알았다.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그는 워켄이라는 의사를 알고 있었다.
"기다리다니, 나를? 왜?"
"의뢰할 게 있어서."
하지만 워켄은 몰랐다. 그는 자신이 브라우닝이라는 탐정을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점한 시간과 공간이 브라우닝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워켄은 알지 못했다.
"의뢰? 아아, 그래. 의뢰..."
"응, 내가 일전에...잠깐만, 브라우닝."
"응? 어...어?!"
워켄이 갑자기 말을 끊고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의사를 바라보던 브라우닝은, 잉크색 장갑을 낀 가느다란 손가락이 자신의 손목을 잡았을 때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탕! 탐정의 등이 문에 부딪혀 가볍게 울렸다.
"왜 그러나?"
"아, 아니...괜찮아. 내가 하겠네. 별로 큰 상처도 아니고, 처음 다치는 것도 아니고, 아, 그러니까..."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어 곤란했다. 너무 잘 알 것 같아 부끄러웠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브라우닝을 눈썹을 찌푸리고 바라보던 워켄이 냅다 팔을 뻗었다. 갑자기 양쪽 어깨를 움켜쥐는 바람에, 탐정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다 혀를 깨물 뻔했다.
"머리도 다쳤군? 아픈가?"
"응? 아, 아니...괜찮아. 그냥 총알이 스친 거..."
"괜찮지 않잖아!"
워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움찔 놀란 브라우닝은, 이맛살을 찌푸린 의사의 얼굴이 다가오는 바람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인상 쓰지 마. 상처가 당겨지잖나. 왜 이렇게 애처럼 구나. 우리 애들도 안 이러겠네."
"...그 아가씨들은 여전히 씩씩한가 보군."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하기 위해서는 짧은 침묵이 필요했다. 다행히 그 침묵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아내지 못한 워켄은 흥, 코웃음을 치며 브라우닝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놓고,
"애들하고 비교 당하는 걸 부끄러워해야지."
"그야...아?!"
탐정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질질 끌려간 브라우닝은 가볍게 떠밀려 소파에 주저앉았다. 조금 전까지 워켄이 누워 있던 소파에는 아직도 희미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언제나 차갑고 어둡게, 그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던 공간이,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구급상자 어딨나?"
워켄의 존재로 브라우닝을 휘둘렀다.
"브라우닝? 브라우닝...자네, 지금 우는 건가?"
"응? 어?"
눈앞이 흐려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액체에 당황한 브라우닝이 황급히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고,
"아얏..."
"손 내려!"
날카로운 워켄의 질타에 화들짝 놀라 상처가 짜디짠 물에 젖어 쓰라린 손을 떨어뜨렸다.
"애도 아니고, 정말이지....구급상자 어딨냐니까?"
"어? 어...거기, 지금 자네가 들고 있는데..."
"..."
아마, '애도 아니고'를 연거푸 말하는 게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때 구급상자였던 빈 상자를 내려놓은 워켄은 잘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작은 필통 같은 상자와 손수건을 꺼내고, 재단하듯 브라우닝을 훑어본 뒤,
"쯧."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머리보다 조금 밝은 청람색의 머플러를 풀었다.
"워켄?"
"자네에게 맞추려니 나까지 원시적이 되잖나."
겨우 들릴락 말락 목소리는, 기묘하게도 소년의 투정 같았다. 워켄은 상자를 열어 약솜과 투명한 액체가 든 앰풀을 꺼냈다. 앰풀을 따자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 내밀게."
"어? 어, 응..."
브라우닝은 어정쩡하게 손을 내밀었다. 명백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태도로, 그의 손목을 낚아챈 워켄이,
"읏, 따거..."
"좀 참게. 애도 아니고."
결국 했던 말을 다시 하며 소독약에 적신 약솜으로 브라우닝의 손에 난 상처를 닦았다. 거즈 대신 손수건으로 손을 감싸고, 머플러를 길게 접어 붕대 대신 감아 묶었다.
"임시방편이네. 꼭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응? 어, 응..."
"나 좀 보게, 브라우닝."
"어, 어?"
"쯧."
줄곧 제대로 된 말보다는 흐리멍덩한 대꾸밖에 하지 않는 브라우닝을 아예 애 취급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워켄은 더 이상 브라우닝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탐정의 모자를 휙 벗겨 던진 다음 턱을 잡고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이제야 학습이 된 브라우닝은, 소독약이 상처에 닿는 동안 입술을 깨물고 신음을 참았다.
"이건 어쩔 도리가 없군. 제대로 치료를 받기 전까지는 손대지 말게."
"...아, 응...고맙네."
"울지 말라니까."
아마 또 '애도 아니고'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라우닝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워켄이 뻗은 손은 잠깐 시야를 가렸을 뿐이지만, 뺨에 닿은 손끝은 마치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술을 꿰맨 것처럼, 모든 감각을 송두리째 그 희미한 감촉에 끌어들였다.
"울 정도로 아팠으면 알아서 병원에 갔어야지."
워켄의 손과 브라우닝의 뺨 사이에 걸린 얇은 천이 무구하게 탐정의 눈물을 빨아들였다. 브라우닝은 눈을 깜빡거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고, 절실했다. 그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을 때,
꼬르륵.
"...저녁 안 먹었나?"
잠시 후, 워켄이 허탈한 어조로 물었다. 브라우닝은 노력했다.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참으로 얼빠진 듯 웃을 수 있었다.
"음, 바빠서."
"물을 필요도 없는 것 같지만, 여기 먹을 건 있나?"
"그거 정말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군."
"하!"
외마디와 함께 워켄이 훌쩍 떠나갔다.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책상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든다. 그가 빠르게 말을 잇는 것을 흘려들으며, 브라우닝은 심호흡을 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체취와 체온으로 데워진 공기가 폐부를 채우고 명치를 치며 목구멍으로 차올랐다.
"비켜 주게."
"어?"
"...나도 앉게 옆으로 좀 비켜 달라고."
다행히 워켄은 브라우닝의 어리석은 반응을 부상과 공복 때문으로 여긴 것 같았다. 놀랍도록 부드러운 그의 어조에, 브라우닝은 황급히 옆으로 옮겨 앉았다. 2인용 소파의 언제나 비어 있던 절반을 워켄이 채웠다.
"애들에게 먹을 걸 좀 가져오라고 했으니 잠깐만 기다리게."
"어...어?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내 딸들이야."
워켄의 짧은 대답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자부심이 드러났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만든 두 개의 오토마타를 딸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순간 브라우닝은 격렬한 감정을 느꼈고, 곧 워켄의 '딸들' 역시 자신에게 그와 유사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불공평하다고, 그건..."
"응? 뭐라고?"
"아니야, 아무...것도..."
말하던 중 묵직한 무게를 잔등에 느낀 브라우닝이 말을 더듬었다.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워켄이 희미한 중얼거림을 더 잘 들으려고 몸을 기울인 것이다.
"구급상자도 가져오라고 했으니 제대로 치료해주지. 그때까지, 잠깐만 기다리게..."
브라우닝의 어깨에 체중을 실은 워켄의 목소리가 느리게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고 했다. 조심스럽게 곁눈질하자, 단아한 얼굴이 창백하고 눈 밑에 거뭇한 그늘이 보였다.
"피곤하면 전화하지 그랬나. 아니면 아가씨들을 보내던가."
"아니야, 내가 직접 이야기하고 싶었어...그 김에 오랜만에 자네도 만나고..."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새 잠이 들다니, 정말 피곤한 것 같았다. 새근새근- 낮고 고른 숨소리가, 마치 처음 사무실에 들려왔을 때처럼, 그러나 놀랍도록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마법은 풀리지 않은 채, 너무나 따스하고 안온하게 그를 감싸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저주였다. 차라리 망각을 갈구할 정도로 잔혹한 저주였다.
브라우닝은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와 워켄의 접촉이, 혹시라도 자신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브라우닝은 무방비하게 기대어 잠든 워켄의 체온이, 무게가, 존재가, 자신의 은밀하고 절실한 소망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되었다.
"하하..."
탐정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헛헛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뺨을 따라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워켄이 이해할 수도 없고, 닦아줄 수도 없는 눈물이었다.
-END.
***2013/02/15
Y님의 "서로 외로워하는데 탐정은 사무쳐서 모른 척 감추려 애쓰고 닥터는 정말 모르고 있었으면 좋겠다. 갈급한데 채울 줄 모르는 사람 둘이 만나서, 채우는 것보다 흘리는 게 더 많았으면 좋겠다. 근데 뭐 다른 관계여도 좋고 남이 연성한 게 보고싶 읍읍" 이라는 트윗을 보고 찰싹이 와서 써보았습니다. 브라우닝은 정말 울리는 기쁨이 있는 남자...읍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