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라이트] The Advent
주의!
-그랑기뇰 성향이 강합니다.
-캐릭터 해석이 자의적입니다.
-자캐 연성(메리수, 드림) 지분이 높습니다.
-본편에서 검증되지 않은 임의의 설정이 다수 사용되었습니다.
"축제?"
따님이 찻잔을 입술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었다. 단단하고 매끄러우며 '인형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작고 아름다운 얼굴이 갸웃거렸다. 티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레드그레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이 열매의 달 30일이잖아요. 축제는 내일부터 시작이지만, 벌써부터 들떠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에요."
"무슨 축제?"
"그거야 페리아름이죠."
"페리아름?"
따님은 마치 처음 듣는 단어라는 듯 되물었다. 내가 발음을 잘못 했나? 레드그레이브는 내심 당황하여 재빨리 말을 이었다.
"네, 페리아름. 한 해의 끝에 닷새 동안 열리는 미덕과 행운, 성실과 평화, 희망의 축제 말이에요."
"한 해의 끝이라니? 아직 가을이잖아?"
"곧 추분이니까요. 한 해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는..."
"아니, 그러니까 왜 가을에 한 해가 끝나는 건데?"
"왜라뇨..."
레드그레이브는 말문이 탁 막혔다. 따님의 진지한 어조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들의 지시자는 농담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 침실 밖에서는. 그러므로 따님이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아 묻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문제는 '왜 가을에 한 해가 끝나느냐'는 질문이 '왜 사람에게는 손가락이 다섯 개 달린 손이 두 개 있느냐'라든가 '왜 닭은 병아리가 아니라 달걀을 낳느냐'와 같은 수위에 있다는 점이었다. 즉, 너무 당연한 나머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설명할 수는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저, 주제넘은 말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레드그레이브는 저도 모르게 안도하며 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살가드가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따님께서 절기節氣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신 게 아닐까요?"
"아! 그럴 수도 있..."
"난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았어."
칼날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반색하는 목소리를 내리쳤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보석처럼 다채로운 경질硬質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살가드가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찔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어머니 성녀님의 딸들은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아. 너희들과는 다르다구."
성녀님의 이름이 레드그레이브와 살가드의 영혼 깊숙이 새겨진 계명誡命을 울렸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인형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소녀는 화염의 성녀께서 친히 성유계에 세우신 당신의 따님이었다. 평행세계의 연옥에서 끌어올려진 전사를 현세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성녀님의 계명으로 묶인 전사들은 결코 따님을 거역할 수 없었다. 게다가 레드그레이브와 살가드가 속한 '덱'이 섬기는 따님은 평소 자상하고 상냥한 만큼 분노는 과격하고 처벌은 혹독했기에, 두 사람은 더 이상 따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난 기억을 잃지 않았어. 한 해는 가을에 끝나지 않는다고. 한 해는..."
고집스럽게 중얼거리면서도, 따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찻잔을 든 가늘고 단단한 손가락이 달달 떨릴 때마다 울리는 소리가 얄궂도록 영롱했다.
"둘 다 나가. 당장."
다행히 따님에게는 걷잡을 수 없이 기분이 나빠지기 전에, 아직 아무런 실수도 저지르지 않은 자신의 전사들을 물러가게 할 분별력이 남아 있었다. 덕분에 레드그레이브와 살가드는 어떤 상처나 고통, 눈물과 수치심 없이 따님의 거처를 나올 수 있었다. 그날의 티타임은 그렇게 끝났다.
그럴 터였다.
"저...잠깐, 시간 괜찮아?"
*****
처음에는 잘못 본 것인가 했다. 해거름에 젖어 어둑어둑한 마도에 인적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봐도 요마가 아닌 사람이었고, 주의깊게 보는 동안 그 실루엣이 낯익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치볼드는 걸음을 멈추고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짐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함께 걷고 있던 동료 역시 걸음을 멈췄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이 정도 일에 일일이 소리내어 의사를 전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갈색 머리칼의 어콜라이트가 경계하며 바라보는 가운데, 방랑자는 황야에서 마수를 추적할 때처럼 소리없이 걸음을 옮겼다. 목표는 거리 저편, 외딴 골목 언저리에서 어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였다.
"브라우닝?"
"흑!"
어깨를 잡힌 탐정이 소스라치게 놀라 목이 메이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런 목소리가 어떨 때 나오는지 알고 있는 아치볼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브라우닝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남자치고 작은 편은 아니지만 자신에 비하면 호리호리하고 아담한 몸이 어이없을 만치 간단히 휘돌렸다.
"브라우닝, 자네 얼굴이..."
"아파, 아치볼드. 놔줘."
"아, 미안하군."
아치볼드는 황급히 잡은 손을 놓았다. 브라우닝은 입술을 깨물고 잡혔던 어깨를 다른쪽 손으로 감싸쥐었다. 평소 바르게 뻗어 있던 등의 선이 굽은 것이 눈에 거슬렸다.
"뭐야, 브라우닝이었어요?"
브라우닝도 익히 알고 있는 밝은 음성이, 벌써 깔리기 시작한 밤안개 너머에서 들려왔다.
"오랜만이네요. 이쪽으로 올래요?"
"아, 메렌, 나는..."
"난 지금 움직일 수 없으니까, 이쪽으로 와요."
카드 매지션의 목소리는 명랑했지만, 주장을 관철시키는데 익숙한 어콜라이트 특유의 고집이 배어 있었다. 아치볼드는 어깨를 으쓱하고, 목소리가 들린 쪽을 가리켰다. 브라우닝은 잠깐 머뭇거린 다음 메렌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걸음이 그리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 것 역시 눈에 거슬려, 아치볼드는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오랜만이네요, 브라우닝."
"오랜만...그건 다 뭐야?"
마침내 서로가 보일 정도로 다가선 브라우닝이 놀란 어조로 물었다. 밤에 다니는 사람이 없는 만큼 형식적으로 밝혀진 가로등 아래 메렌이 서 있었다. 크고 작은 상자를 너댓 개 겹쳐 두 손으로 받쳐들고, 발치에도 비슷한 상자가 든 종이가방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혼자 다 들 수 없는 분량이었으니, 잠시나마 길바닥에 내려놓고 아치볼드를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귀중한 물건일 것이다.
"아, 저희 따님 심부름이에요. 사오라고 하신대로 사다 보니 이렇게 많아졌지 뭐예요."
"심부름..."
희미해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불빛 때문에 얼굴을 완전히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얼굴을 부서져라 응시하는 회갈색 눈동자가 시각이 아니라 촉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 브라우닝은 몇 번 눈을 깜빡인 끝에 제법 그럴듯하게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군."
"뭘요, 이제 다 왔는 걸. 그보다 브라우닝은 이런 시간에 혼자 밖에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밤의 마도는 위험할 텐데."
"응? 아아, 나도 심부름을...흡!"
불쑥 뻗어나온 손이 턱을 잡아채는 바람에 브라우닝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거칠게 젖혀진 머리에서 중절모가 굴러떨어져, 가로등 불빛 아래 탐정의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너무하네요, 아치볼드. 기껏 사람이 모르는 척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건가, 이 얼굴은."
아치볼드는 브라우닝의 허세를 무시했던 것처럼 메렌의 불평 역시 무시했다. 브라우닝의 단정한 얼굴은 보랏빛 멍과 붉은 생채기로 무참하게 얼룩져 있었다. 젖혀진 목에 휘감긴 밧줄무늬가 셔츠 칼라 아래로 기어들어가, 굳이 보지 않아도 그 아래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놔줘...아치볼드."
"어떻게 된 건가."
"아치볼드..."
"어떻게 된 거냐고 묻고 있다."
"뻔한 거 묻지 말고 놔줘요, 아치볼드. 정말 아파 보이니까."
메렌의 뾰족한 목소리에 찔린 다음에야 아치볼드는 손을 놓았다. 브라우닝은 억지로 젖혀졌던 어깨를 감싸쥐고 고개를 숙었다. 들고 있던 상자를 조심해서 내려놓은 메렌이 굴러떨어진 중절모를 집어들었다. 탐정의 머리에 모자를 올려놓으며 해사한 얼굴이 굳어졌던 것도 잠시, 곧 밝게 웃으며 명랑한 목소리를 던졌다.
"그래서, 어떻게 따님에게서 도망쳤어요?"
"메렌!"
놀란 것은 브라우닝만이 아니었다. 깜짝 놀라는 방랑자를 향해, 성녀님의 어콜라이트이자 당신 따님의 '덱'에 속한 청년이 쓴웃음을 보냈다.
"뭘 그렇게 놀라요, 아치볼드."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따님에게서 도망치다니."
"왜요? 코브나 로쏘는 자주 달아나잖아요."
"그리고 항상 '불려' 오지. 따님에게 계약한 전사를 언제 어디서나 불러올 수 있는 권능이 있는 이상, 달아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가혹한 소리를 하는 건가."
"가혹한가요?"
메렌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브라우닝이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어콜라이트의 차분한 목소리는 그가 사용하는 카드처럼 예리하게 탐정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따님께서 그러는 게 재미있으시다면..."
"메렌!"
퍽! 난폭한 소리에 브라우닝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상체를 휘청이며 한 걸음 물러서는 메렌과 뻗은 주먹을 휘둘러 다시 후려치려는 아치볼드. 생각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그만둬, 아치볼드...윽!"
"브라우닝!!"
아치볼드의 팔을 잡고 말리려던 브라우닝이 제풀에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꺾고 비틀거렸다. 깜짝 놀란 아치볼드가 그를 부축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에요, 브라우닝."
그 사이 몸을 바로잡은 메렌이 재빨리 다가와 휘청이는 탐정을 살폈다.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창백한 얼굴, 호흡은 거칠고 짙은 색깔의 수트에서는 희미하게 피냄새가 흘러나온다. 메렌은 쯧, 혀를 차고 아치볼드를 돌아보았다.
"내가 여기서 짐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브라우닝을 데리고 집으로 가세요. 가서 누구든 보내줘요."
"혼자 있어도 괜찮겠나?"
"안 괜찮다고 하면, 피냄새 풀풀 풍기는 브라우닝을 데리고 여기 있어줄 건가요?"
메렌이 피식 웃으면서 품에서 한 뭉치의 카드를 꺼냈다. 밤의 마도는 아무리 숙련된 전사라도 혼자 있기에는 위험한 곳이다. 하지만 메렌은 자신이 브라우닝과 함께 돌아가겠다는 말도, 따님이 요구한 물건들 대신 브라우닝을 포기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브라우닝의 안위를 온전히 아치볼드에게 맡기고 자신이 위험을 자초할 뿐. 그것이 방금 구사한 언어폭력에 대한 사죄라는 것을, 아치볼드는 물론 서서히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브라우닝도 알 수 있었다.
"아수라와 맥스를 보내도록 하지. 잠깐만 기다려라."
그래서 아치볼드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의 품에 안긴 브라우닝이 희미한 신음과 함께 메렌의 이름을 불렀다. 불렀나? 착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라우닝이 정신을 잃으며 마지막으로 불러준 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생각만으로도 메렌은 웃을 수 있었다.
짓궂게 굴어 미안해요, 브라우닝. 당신이 당신의 따님에게 얼마나 사랑받는지 알 때마다, 당신과 다른 따님을 모시게 된 내 '이번 생'을 용서할 수가 없게 되지 뭐에요. 이런 나를, 아마 성녀님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시겠죠?
첫 번째 야귀의 목이, 메렌이 날린 하트의 6에 깔끔하게 베어 체액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날아갔다.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감각은 시각이 아니라 통각이었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처럼 아팠다. 고통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따님의 사랑은 언제나 처음 느끼는 고통으로 그를 물들였다. 이번만큼은 죽는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잃고, 마치 새로 태어난 듯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떠 고통과 수치심에 울며 몸부림 치던 과거의 자신을 배신했다.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복종할 수 없었다. 굴복하지 못해 반항하면 하는 만큼, 견디다 못해 도망치면 도망치는 만큼, 따님은 그를 사랑하셨다. 가장 재미있는 장난감으로 소중히 여겨주셨다. 그래서 브라우닝은 언제나 죽고, 언제나 다시 태어나고, 언제나 울고, 언제나 희망을 품고, 언제나 믿고, 언제나 배신 당하고, 언제나 좌절하고, 언제나 죽었다.
"...으윽..."
"깨어났나?"
두 번쩨 감각은 청각, 그리고 촉각. 눈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눈 위에 얹힌 보드랍고 촉촉한 물수건 때문이었다. 몇 걸음 밖에서 시작된 목소리가 한 마디만에 곁으로 다가오고, 수건이 살그머니 사라졌다. 눈을 깜빡이자, 낯선 천정과 어둑한 방안,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 보는 구릿빛 얼굴이 보였다. 희미하게, 흐릿하게, 흔들리며.
"아치...볼드..."
"아직 아플 거야. 치료하지 못했으니까. 무리해서 말하지 말게. 조금 더 누워 있어도 괜찮아."
"여기는..."
"우리 따님의 집이야. 자네가 정신을 잃는 바람에 이리 데려올 수밖에 없었어."
그 말에, 브라우닝은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던 때를 기억해냈다. 처음으로 따님의 발치가 아닌 곳에서 정신을 잃었다. 따님에게 쫓겨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따님은 '심부름을 보낸다'고 하셨지만, 그 이룰 수 없는 명령은 완곡한 추방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아이자크에게 떠밀려 나온 뒤 정처없이 걷던 중 밤이 되었고, 자신을 발견한 아치볼드와 메렌이,
메렌이,
"메렌! 아치볼드, 메렌은...!"
"아아, 자네가 자기를 걱정하더라고 전해주겠네. 기뻐할 거야."
"무사하...한가?"
"다른 병실에서 마르그리드가 돌보고 있네."
"아...다행..."
브라우닝은 눈을 감았다. 눈꼬리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아치볼드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어 더욱 안타까운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고, 따스한 물방울은 방랑자의 거친 손끝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아치볼드는 조심스럽게, 그렇지 않아도 안팎으로 상처 입은 얼굴에 한 조각의 통증이라도 더할까 주의하며, 브라우닝의 뺨에 손끝을 대었다.
"아치볼드..."
"어째서 자네는, 브라우닝, 자네는 항상 이렇게..."
"브라우닝은 깨어났어?"
문이 열리는 소리, 묵직한 발소리, 낭랑한 목소리. 아치볼드의 목소리와 손끝이 사라졌다. 브라우닝은 힘겹게 고개를 젖혀 소리가 들린 문쪽을 바라보았고, 당황하여 몸을 일으키다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아읏...!"
"아, 무리해서 일어나지 마. 비명도 당신의 따님을 위해서 아껴두고."
노래하듯 리드미컬한 목소리가 높은 곳에서 흘러내렸다. 성녀님의 따님들은 서로 비슷한 듯 하면서도 이목구비와 표정, 머리 모양과 색깔, 옷과 장신구가 모두 다르다. 호두색 머리를 소년처럼 짧게 자르고 눈매가 영롱한 브라우닝의 지시자와 달리, 아치볼드들의 지시자는 바다색 곱슬머리를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졸린 듯 나른한 표정으로 워켄의 품에 마치 인형처럼 - 진짜 인형처럼 - 안겨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다른 '덱'의 전사를 줍다니 재미있네. 덕분에 우리 메렌이 많이 다쳤어."
"죄송...죄송합니다..."
"뭐, 괜찮아. 덕분에 그 아이가 아파하는 걸 오랜만에 봤거든. 재미있었어. 괜찮아."
따님이 느긋하게 웃으며 워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각진 마디를 가진 자그마한 손이 의사의 옷깃 위로 드러난 목덜미를 아프게 움켜쥐었고, 손톱 끝은 금새 붉게 물들었다. 감히 성녀님의 따님 앞에 누워 있다는 황망한 상황과 자신의 것이 아닌 피냄새에 당황한 브라우닝이 몸둘 바를 몰라 하자, 아치볼드는 한숨을 쉬고 탐정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따님, 이대로 돌려보내겠다고 결정하셨다면 너무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
"어머나, 나는 워켄을 괴롭히고 있는 걸. 왜 브라우닝을 걱정하지?"
눈꼬리가 낮게 깔린 따님의 시선이 브라우닝을 휘돌아 아치볼드를 향했다. 자신의 따님이 그러하듯 와이번의 발톱처럼 매섭게 내려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시선은 충분히 서펜트의 사냥에 비견할 만큼 육중하고 위협적이었다. 브라우닝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고, 아치볼드의 손이 떨림을 숨기기라도 하듯 탐정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제가 왜 브라우닝을 걱정하는지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사자에게 자기 입으로 들려주는 걸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브라우닝은 치료가 필요합니다. 다른 '덱'의 전사가 이 집에서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브라우닝이 듣기에 따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벨벳처럼 부드럽고 나른했다. 하지만 그와 맞닿은 아치볼드의 손이 움찔 경련했고, 방랑자는 그대로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머리를 숙였다.
"자비를, 따님, 부디 자비를."
"벌써? 재미없게. 좀 더 버틸 줄 알았다구~"
따님의 실망한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때까지 손톱으로 후벼파고 있던 목덜미를 놓은 손이 의사의 입술을 살짝 건드렸다. 워켄은 고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깨물고 있던 입술을 벌려, 자신의 피로 젖은 손끝을 핥았다. 따님이 간지러운 듯 키득키득 웃었다.
"있잖아, 브라우닝. 워켄은 내 허락도 없이 너를 치료하려다 나한테 벌을 받고 있어. 아치볼드는 너를 너의 따님께 돌려보내 달라고 나한테 간청하고 있고. 내 '덱'에서 제일 자존심이 강한 두 사람이 이렇게 쉽게 굴복하다니, 당신 정말 재미있어. 내 '덱'에 두고 싶을 정도야."
"...원하시는대로...될지도 모릅니다."
"어?"
그 의외의 대답에, 따님이 놀란 듯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브라우닝을 바라보았다. 탐정은 조금도 치료가 되지 않아 여전히 만신창이인 몸을 힘겹게 일으켜, 침대 위에 앉는 것까지 간신히 성공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저의 따님께서는...불가능한 심부름을...이룰 때까지 돌아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추방 당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니..."
"무슨 소리야. 그렇게 시시하게 자기 전사를 포기하는 자매는 없어."
"예?"
"수수께끼라니 재미있네. 얘기해 봐. 무슨 심부름이었어?"
"아..."
"말해 보라니까. 어딘지 모르는 곳에 가서 무엇인지 모르는 거라도 가져오라고 했어?"
"에? 그, 그걸 어떻게?!"
브라우닝은 말 그대로 소스라치게 놀라 따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토록 느긋하고 여유롭던 따님 역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것에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어, 그러네...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을까...어떻게..."
따님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이제는 핏방울 하나 남지 않은 손을 볼에 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들의 지시자를, 아치볼드와 워켄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그들의 태도에서, 이 따님에게는 드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수라. 그거 가져와."
문득 고개를 든 따님이 뜬금없이 말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잠시 후 상자 하나가 브라우닝이 앉은 침대 발치에 나타났다. 옆면에 멋들어진 숙녀용 모자와 작은 새가 그려지고, 거미줄처럼 섬세한 레이스를 겹겹이 접은 하얀 리본으로 포장된 직사각형 상자였다. 두 뼘 폭에 세 뼘 길이, 한 뼘 높이. 시트 위에 놓인 모양새로 보아 가볍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무거운 것도 아니어 보였다.
"아치볼드. 저거랑 브라우닝을 가져가."
"예?"
"아니지. 브라우닝을 데려다 주고, 가는 김에 저것도 갖다 줘."
"알겠습니다."
"저...따님...?"
"브라우닝."
아치볼드들의 지시자가 브라우닝을 바라보았다.
"너의 따님에게 전해줘. 저거하고, 나의 인사..."
그리고 또 따님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그렇지. 평화를 담아, Holy Advent- 라고."
단단하고 매끄러우며 '인형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작고 아름다운 얼굴이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
"내게, 이것을...?"
따님이 중얼거렸다. 두툼한 카펫 위에 방금 쌓은 넝마더미처럼 구깃구깃하게 쓰러진 브라우닝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의 손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아치볼드의 안장 앞에 앉아 안기다시피 기계마를 타고 온 브라우닝은 이번에야말로 따님의 발치에서 정신을 잃었다.
"자매가 내게 이것을, 평화를 담아..."
그것은 레드그레이브나 쉐리, 리즈, 에바리스트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은색 금속을 세공해, 길쭉한 육각형에 끄트머리가 가시처럼 뾰죽한 이파리가 어우러져 월계관처럼 원형 테를 이루었다. 원형의 사방에는 촛대의 받침과 흡사한 가시가 솟은 원형 돌기가 네 개 묻혀 있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네 개의 초를 꽂을 수 있는, 가시면류관 형태의 촛대였다.
"저, 따님. 초가 같이 들어 있습니다."
레드그레이브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언제나 그녀의 등 뒤를 지키던 살가드는 보이지 않았다. 브라우닝이 '심부름'을 간 뒤 따님의 침실로 불려간 그는 밤새도록 비명을 질렀고, '손을 떨지 않고 찻잔에 홍차를 따를 수 있을 때까지'라는 단서와 함께 자신의 거처에서 근신 중이었다.
"초?"
"예. 네 개인데요."
따님의 시선이 촛대에서 브라우닝을 지나 레드그레이브가 손에 든 초에 멈췄다. 피처럼 붉은 색깔의 길고 가느다란 초가 네 개. 따님은 눈을 깜빡였다. 깜빡, 깜빡. 시야 끄트머리에 비친 창 밖으로 낙엽이 흩날려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본디 하얀 파편이 흩날리며, 더 춥고, 더 다망하고, 모든 것을 마감하고 또다시 시작하는, 어제와 오늘이 실은 다르지 아니하나 의미를 부여하여 같지 아니하게 보내는 특별한 한때.
"초를 꽂아...아니, 이리 줘."
"네? 아, 네..."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레드그레이브는 따님에게 초를 건넸다. 따님의 손은 그 초 뭉치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로 작고 가냘팠지만, 그래도 떨어뜨리거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은으로 조각한 호랑가시나무 화환 모양의 촛대에 네 개의 초를 꽂을 수 있었다.
"리즈, 불을."
"네."
레지먼트 제복이 피부처럼 잘 어울리는 청년이 손끝을 튕겨 한 개의 초에 불을 붙였다. 두 번째 초에 불을 붙이기 전에 따님을 바라본 것은 오랜 세월 전장에서 살아남은 에이스의 직감이었다. 과연 따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흔들어 그를 물러나게 했다. 네 개의 초, 한 개의 불꽃, 세 개의 기다림.
"나중에 붙일 거야. 일주일 뒤에 하나. 또 일주일 뒤에 하나 더, 그리고 또 일주일 뒤에 마지막 하나. 그러고 나면..."
한 해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지.
따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와 계약한 전사들의 영혼 깊숙이 새겨진 계명을 울렸다. 높은 탑에 매달린 크고 작은 종들처럼, 영롱하고 조화롭게, 딩-댕-동.
"고마워, 브라우닝."
쓰러진 브라우닝 앞에 자그마한 무릎을 모두어 굽힌 따님이 흐트러진 고동색 더벅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내 바람대로,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가져다 주었어."
함박눈이 내리고, 하얀 입김을 벙어리장갑으로 녹이고, 거리에는 알록달록한 불빛과 노랫소리, 새파란 나무와 빠르게 달리는 사슴, 예쁘게 포장된 상자와 졸리지만 잠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이들. 산산이 부서진 기억의 파편이 이어지고 끊어지고 부서지고 흩어져, 따님의 뺨에 투명한 얼룩을 남겼다.
"고마워, 브라우닝. 사랑해. 이제...편히 쉬어."
브라우닝이 숨을 거두었다. 따님은 언제고 부르기만 하면 그녀 곁으로 돌아올 가장 사랑하는 전사의 육신이 재로 돌아가는 것을, 애처롭고도 정다운 미소를 띄고 지켜보았다.
강림절의 첫 번째 불꽃이 파르르 떨렸다.
-END
***2012/12/18
원래는 때도 때인 만큼 따뜻하고 훈훈한 연말연시 풍경을 써보려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진도가 안 나가더라구요. 하룻밤이면 될 줄 알았던 글을 일주일 동안 잡고 끙끙댄 결과 깨달았습니다. 훈훈은 개뿔=ㅅ= 여기는 피와 살과 눈물과 체액과 배신과 음모가 난무하는 세계였던 거예요! 그래서 이성을 버리고 본능이 흐르는대로 썼습니다. 후후후, 이게 나의 따님이야! 나의 언라이트라고!! 연말이니까 내가 나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다 덤벼, 내가 이 구역의 따님이다!!!
...넵, 정줄 놨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 읽으시게 해드려서 죄송. 에브리바디 메리해피홀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