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X2/RP] 제0화. 천둥의 카덴차 (2010/09/19)
1938년 2월 14일.
어제는 그렇게 화창하더니, 오늘은 언제 폭우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궂은 날씨다. 뭐 이리 변덕스러워. 이놈의 나라는 날씨마저 거지 같다. 선장은 날씨가 영 마뜩잖은지 꼭 배를 띄워야겠냐고 물었다. 평생 바다에서 살았다는 늙숙한 뱃사람의 예감에는 무슨 사달이 날 것처럼 불길한 모양이다. 당연한 거 아냐?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아침에 호텔을 체크아웃하는데 프론트의 접수원이 장미꽃을 한 송이 주었다. 그리스식 속전속결 연애인가 했더니, 오늘이 성 발렌타인의 날이라나 뭐라나. 어쩐지 C가 벨기에 초콜릿 상자를 보냈더라니. 어휴, 정말이지 아저씨가 주책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초콜릿이라니, 하지만 헬렌 선생님께도 똑같은 걸 보냈겠지, 정말이지, 정말이지! 이번 출장에서 돌아가면 선생님이랑 초코 머핀이라도 구워야겠다. C한테 주나 봐라, 흥이다! 거지 같은 그리스, 그 질 좋은 올리브로 술도 담글 줄 모르는 나라에 출장이나 보내고 말이지, 아, 정말이지!!!
***
"저기가 트리토니스 섬이군요?"
작은 어선의 뱃머리에 서서 수평선에 고인 짙은 안개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작은 땅덩어리를 가리키며 안나마리가 물었다. 늙은 그리스인 선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바닷바람을 맞으며 질겨진 얼굴가죽에는 할 수만 있다면 섬 가까이는커녕 섬쪽으로 뱃머리도 돌리고 싶지 않았다는 내심이 송글송글 배어 나왔다.
엄마, 이 할아버지 말 못해? 아님 엄마 말 못 알아들어?
"아니야, 라임. 선장님은 상냥한 분이셔서, 엄마가 외지인을 반기지 않는 섬에 가는 걸 말리고 싶으신 거야. 걱정이 되니까, 하지만 엄마는 공무원이라서 상사가 가라면 어디든 가야 하거든."
응, 라임 알아! 공무원! 라임이 막 물어뜯고 엄마가 막 총 쏘고 몇 번 죽었다 살아나고 그러면 C 아저씨가 라임 간식 살 돈 주는 그거 말이지!
"그래요, 그거. 아유, 우리 라임 잔망스럽기도 하지."
꺄르르 웃으며 뭐라뭐라 아르르 웅얼대는 개를 얼르는 젊은 여자를 보며 선장은 결론을 내렸다. 영국 해적놈들도 프러시아 산적놈들만큼 제정신이 아니구만. 빨리 내려놓고 튀는 게 상책이겄어.
"진짜 내릴 거요?"
하지만 정작 트리토니스 섬의 항구가 보일 때까지 접근했을 때, 선장은 배의 속도를 늦추고 출항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외딴 섬이라도 백여 명의 주민이 사는, 그리고 목재가 풍부한 섬의 하나뿐인 항구라면 어른 남성의 - 때로는 남녀불문하고 어른의, 또는 노소 불문하고 남성의 - 숫자만큼 크고 작은 배가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트리토니스 섬의 작고 오래된 항구에는 한 척의 배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크고 작은 배를 구성하고 있었을 널빤지와 돛대와 돛뿐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배의 잔해들이 수면 아래에서부터 수면 위까지 허물어진 그대로, 그 배의 선원이었던 남자들의 시체를 품거나 혹은 파도에 빼앗긴 채 쌓여 있었다.
"한 발 늦었군."
안나마리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항구의 몇 안되는 건물도 모두 포격으로 부서진 상태였다. 남자와 여자, 아이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허물어진 무더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나 오랜 세월 발로 다져진 단단한 땅 위에 고여 굳어가는 핏자국으로 미루어 습격이 이루어진 것은 서너 시간 전인 듯 했다. 크르릉- 라임이 머리를 낮추고 목을 울렸다. 개의 몇 억분지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후각으로도 바람결에 떠도는 쇳내와 탄내를 맡을 수 있었다.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도 습격과 파괴와 살육이 일어났고, 어쩌면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인간의 귀에 들리는 총성이나 비명은 없었지만, 그건 라임도 마찬가지인 듯, 곧 머리를 들고 뱃전에 매달려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선장님, 배를 선착장에 대주세요."
"내릴 거요?"
"내려야 합니다."
테바이 여자처럼 나긋나긋하게 말하던 영국 여자의 유창한 그리스어에 처음으로, 칼로 베어낼 듯한 날카로움이 서렸다. 그래서 선장은 더 이상 염려의 말을 낭비하지 않고, 선착장 주변에 부비트랩처럼 산재한 배의 잔해를 피해 뱃전을 선착장에 바싹 당겨 댔다.
"라임, 선장님께 인사드리렴."
멍멍! 고개를 돌려 조타륜을 쥔 선장에게 가볍게 짖은 라임이 뱃전을 훌쩍 뛰어넘어 선착장에 내려섰다. 선장은 널을 내리지 않았고 안나마리도 그런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행가방을 호텔 프론트에 맡기고 - "사흘이 지나도 내가 찾으러 오지 않는다면 아테네의 영국 대사관에 연락해 주시겠어요?" - 소박하고 질긴 갈색 트위드 여행복 위에 크로스백을 하나 두른, 당일치기 소풍이라도 나온 듯한 가벼운 차림이었다. 안나마리는 뱃전을 짚고 선착장 위로 몸을 날렸고, 그녀의 단단한 여행용 부츠가 대지를 안정적으로 디딘 것과 동시에 등뒤에서 어선의 기척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안나마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서서, 일부러 활기차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수하세요!!"
본토에 도착하거든 섬의 피습 사실을 알리라든가, 최대한 빨리 돌아가라든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나치스의 잠수함을 조심하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작금의 그리스에서 앞으로는 바다, 뒤로는 독립전쟁과 싸우며 환갑을 넘긴 뱃사람에게는 무의미한 조언이었으니까.
엄마, 저 할아버지 엄마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어! 좋은 사람이야!
"그래, 라임. 세상에는 아직 좋은 사람이 많이 남아 있구나. 그럼 우린 그 좋은 사람들을 위해서 나쁜 사람들을 해치우러 가볼까?"
안나마리는 허리를 쭉 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배 위에서 판단한 바와 같이, 생존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사망자의 숫자는 대략 스무 명 남짓이었다. 여기서만 이 작은 섬의 거주민 중 1/5이 사망한 것이다.
트리토니스 섬은 에게해에 깨알처럼 뿌려진 수많은 섬들 중 하나로, 어떤 제도諸島에도 속하지 않는 낙도였다. 섬 주변에 복잡하게 꼬인 해류의 탓도 있지만, 본래부터 배타적인 일족이 거주하고 있어 외부와의 교류는 거의 없다. 약 백여 명 되는 거주민은 전원 팔라니아스라는, 도시국가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해묵은 가문의 일원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포세이돈의 후예라 칭하며, 팔라스 아테나의 핏줄을 신관으로 받들고 제우스를 섬기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 신앙의 중심에는 '뇌정雷霆'이라 불리는 유물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제우스가 사용하던 벼락의 정수라고 했다. 이 유물을 나치스가 원하고 있는 것이다. '뇌정'이 단순한 고대 유물이라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절대로 나치스의 손에 넘겨줘서는 안된다. 에게해는 대영제국의 피보호자인 이집트의 앞마당인 것이다. 따라서 코드네임 T는 현지에서 '뇌정'의 실체를 조사하고, 만약 그것이 나치스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판단된다면 전력을 다해 아넨에르베를 저지하라. 이상이 며칠 전 C가 안나마리에게 전달한 임무였다.
'만약' 좋아하시네. 안나마리는 크로스백에서 꺼낸 권총의 장전을 확인하며 코웃음 쳤다. 아테네에 도착한 그녀는 제일 먼저, 나치스 1개 중대 규모 병력이 트리토니스 섬으로 은밀히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달 받았다. 게다가 그 가운데 아넨에르베의 연구자 다수와 '오버드(Overed)'가 1인 이상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역십자 콧수염이나 숭배하는 망상병 환자들이 들이닥쳐 개싸움이 될 게 뻔한 난장판에 보내면서, '만약' 좋아하시네, 가서 사달 나면 잘 죽고 오라는 말이잖아. 아무튼 아저씨가, 진짜 너구리도 아니면서, 넉살만 좋아서는, 아, 정말이지!!
엄마?
"응, 라임?"
저쪽에서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있어. 많아!
"저쪽?"
아테네 지부가 제공한 트리토니스 섬의 지도는 폐쇄적인 섬 분위기와 지금껏 주목할 이유가 없었던 점으로 인해 축적을 비롯한 정밀함이 완벽하게 무시된, 참으로 신화의 나라다운 고대 벽화 수준의 손그림이었다. 납작하게 주름진 올리브 열매처럼 생긴 섬의 북부에 솟아오른 산봉우리에서 시작된 비탈은 북쪽 해안에서 절벽으로 떨어지고, 동쪽과 서쪽에서는 바닷물을 끌어안으며, 남쪽에서는 해안선을 몇 발짝 앞두고 숨이 다해 쓰러진다. 섬에 하나뿐인 항구 - 지금 안나마리와 라임이 서 있는 장소 - 는 섬의 남쪽, 산자락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좁다란 평지에 옹송그리고 있다. 항구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지도에 따르면 항구를 둘러싼 산자락 너머로 섬의 동남쪽와 동서쪽에 작은 촌락이 두 개, 항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듯 위치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라임이 바라보는 방향은 섬의 서쪽이었다.
응, 꼬리잡기 놀이 하나봐. 막 뛰어다니고 있어. 라임도 놀아달라 그럴까? 엄마, 라임이랑 놀아줄까?
"물론이지. 우리 라임처럼 귀여운 강아지가 놀아달라 그러는데 안 놀아줄 사람이 어딨겠니?"
그런 사람이 있으면 엄마가 혼내줄께. 철컥- 권총은 언제라도 쏠 수 있는 상태였다, 언제나처럼. 안나마리는 신이 나서 겅중겅중 달려가는 라임을 앞세우고 항구를 가로질렀다. '꼬리잡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
엄마, 저기! 언니야랑 아저씨들이 놀고 있어! 라임 빼놓고 놀고 있어!
"어머나, 그러네?"
안나마리는 항구를 둘러싼 낮은 언덕에 듬성듬성 자라난 숲 가장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 사이의 숲이 끊어지고 드러난 얕은 공터에 두 무리의 사람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 무리를 이루는 두 여자 중 한 사람이, 다른 무리를 이루는 1개 소대 분량의 나치스 병사를 차례로 쓰러뜨리고 있었다.
"이얍!"
힘차게 땅을 디디며 팔을 휘두를 때마다 내뱉는 기합 소리가 호쾌하다. 호리호리하면서도 단단한 몸집의 열대여섯 살 남짓한 소녀로, 고동색 길고 곧은 머리채를 자줏빛 비단띠로 단정히 묶고, 벚꽃잎 같은 분홍빛 겹저고리와 감색 통이 넓은 바지에 왜나막신을 받쳐 신고 있었다. 하카마라고 하던가? 자포니즘의 유행으로 서구에도 낯설지 않은 일본옷이다. 소녀의 윤곽이 또렷한 얼굴 역시 우키요에에서 걸어나온 것처럼 단아하고 아름다웠다.
"이, 이 괴물이!"
"괴물이라니, 요조숙녀에게 그 무슨 실례의 말씀을! 하앗!!"
아름답고 정숙한 여자를 일본에서 일러 야마토 나데시코라고 하던가? 하지만 나긋나긋한 소녀의 희고 섬세한 손에 쥐어진 것은 그녀의 키와 엇비슷할 정도로 길고 날렵한 일본도였다. 잔뜩 찌푸린 에게해의 하늘 아래에서 둔중하게 빛나는 칼날이 흩날릴 때마다, 정련된 병사들이 피와 비명과 생명을 흘리며 쓰러진다. 당황해서 발사하는 총탄마저 튕겨내고 갈라버린다. 등뒤에서 덜덜 떨며 겁에 질린 다른 소녀에게 다가오기는커녕 유탄 하나 맞추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리고 가냘픈 소녀가 저토록 능숙하고 현란하게 검을 사용하다니, 과연 동양의 신비라고 감탄할 법도 했지만,
와, 엄마, 저 언니야도 엄마랑 같아!
라임이 큼직하니 축 늘어진 귀를 쫑긋하며 소녀와 안나마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렇네, 안나마리는 중얼거렸다. 그녀가 속한 조직에서는 평범한 인간이 노력이나 학습을 통해 후천적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선천적으로 이능력을 타고난 자들을 오버드(Overed)라고 칭한다. 안나마리는 정보와 언어에 특화된 오버드였기 저 일본인 소녀가 그녀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치스, 아마도 아넨에르베에 소속되어 기현상과 이능력자에게 어느 정도 적응된 병사들마저 '괴물'이라고 경악할 정도로 비약적인 육체와 전력戰力을 지닌 전투 특화의 오버드.
엄마, 엄마, 저 언니야 나치스 아저씨들이랑 싸우고 있어! 그럼 우리편이야, 그지? 응, 엄마? 우리 편이지?
"글쎄다, 라임. 그러면 좋겠는데..."
안나마리는 말꼬리를 흐렸다. 잠깐 서서 지켜보는 동안, 이미 반토막이었던 소대의 숫자는 신속하게 줄어들어, 어느새 한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 저열한 황인종이! 괴물 같으니! 보르츠만 대령님께서 꼭 이 복수를 해주실 것이다! 두고 보자!!"
마지막 남은 병사가 진부한 대사를 읊더니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역시 어린애라서 마무리가 약하군. 안나마리가 혀를 차며 그녀에게 점점 더 가까워지는 병사를 향해 총을 겨눴다.
탕!
퍼슉!!
"으아악!!"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한 걸음에 - '한달음'이 아니다. 그녀는 정말로 한 걸음만에 병사가 필사적으로 달린 거리를 건너뛰었다 - 쓰러진 병사에게 다가가 등에 꽂힌 장검을 뽑아든 소녀가, 병사의 관자놀이에 난 총구멍과 거기서 솟구치는 선혈을 놀란 듯 바라보았다.
"거기 누구죠?"
소녀의 독일어는 모국어 수준까지는 아니라도 상당히 유창했다. 대답하기 전, 안나마리는 잠깐 망설였다. 전투에 특화된 오버드일뿐 아니라 그녀가 잠깐 오해했던 것과는 달리 생명을 건 싸움 자체에도 익숙해 보인다. 2년 전 독일과 일본이 방공협정防共協定을 맺은 이래, 아넨에르베는 양국의 돈독한 국교國交를 등에 업고 동방의 팔백만 신위神位를 게걸스럽게 탐했다. 이 독일어에 능숙한 일본인 오버드 소녀가, 과연 라임의 추측 - 이라기보다는 바람 - 대로 지금 나치스에 대적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편'이라고 볼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방금 보인 가공할 전투력을 어떻게 대응해야...
이쁜 언니야! 던지기 놀이야? 라임하고도 하자! 다시 던져봐! 이번에는 라임이 물어올게! 라임하고도 놀아줘! 놀아줘!!
"라임!"
작지 않은 크기의 개가 입을 벌려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고 전력으로 달려드는데 경계하지 않을 사람은 드물다. 카기모리 아리스[鍵守アリス]는 저도 모르게 칼을 들어올렸지만, 길다란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빙글빙글 돌리며 아몬드 같은 갈색 눈을 반짝이는 개에게서 딱히 적의가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내리긋는 것을 망설였다. 그사이 개는 그녀의 발치까지 들이닥쳤다. 몸을 한껏 낮추더니 펄쩍 뛰어올라 그녀의 가슴팍까지 앞발을 얹고 겅중겅중 뛰며 얼굴을 핥으려 든다. 금수의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놀아줄 거지? 응? 놀아줄 거지? 보채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 했다.
"라임, 앉아!"
숲그늘 아래 서 있던 여자가 단호하게 외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끼이잉- 개는 부채처럼 팔랑팔랑하던 귀를 축 늘어뜨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코를 울렸다. 어, 이거 좀 귀여운데. 아리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개가 기다렸다는 듯 머리를 들이댔다. 살짝 쓰다듬어 보니 크림색 털로 뒤덮인 이마가 따스하고 보들보들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를 돌려 대며 그녀의 손길을 느끼는 개의 표정이 어찌나 흐뭇해 보이던지, 아리스는 그만 칼을 등뒤에 맨 칼집으로 되돌리고 몸을 굽혀 두 손으로 개의 목덜미와 턱을 긁었다.
"이 녀석,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렇게 들이대는 거 아니랬지?"
아차. 아리스가 고개를 들자, 어느새 여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아까 쏘았던 권총은 홀스터에 집어넣었는지 빈손으로, 엄한 목소리였지만 애정이 담뿍 담긴 손길로 개의 두툼한 엉덩이를 가볍게 때린다. 그녀의 태도에는 방금까지 보였던 날선 경계심도, 어떤 적의나 긴장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개는 아리스의 손을 한 번 핥은 다음, 사과하듯 여자의 종아리에 머리를 부비며 애교를 떨었다. 그런 개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인 여자가, 이번에는 아리스를 향해 예의바른 미소를 건넸다.
"미안해요, 이 애가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놀랐죠?"
"아니요, 괜찮아요."
상대가 영어로 말했기 때문에, 아리스도 서툰 영어로 대답했다. 계부는 독일어만 할 수 있으면 세계 어디서든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확언했지만, 그 말은 절반의 진실이었다. 마치 계부 자신이 보여준 애정과 진심이 모두 절반의 진실이었던 것처럼. 계부를 쫓아 일본에서 미국을 가로질러 여기 에게해에 도착하기까지, 아리스는 필요에 의해 영어를 익혀야만 했다.
"음, 당신이 원한다면 독일어로 말해도 좋지만...아가씨는 어때요? 영어 할 수 있어요?"
"네? 저, 저요?!"
갑자기 자신에게 말이 돌려져 화들짝 놀란 것은 지금껏 아리스 등뒤에 숨어 있던 소녀였다. 아리스 또래의 열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그리스 소녀였다. 밤바다처럼 굵게 물결치는 검은 머리칼과 아침바다처럼 맑고 커다란 청록색 눈동자가 퍽이나 아름다운데, 흰 블라우스와 검은 치마라는 소박한 현대식 옷차림이 어쩐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어설퍼 보이는 것이 아쉬웠다.
"아, 네...조금, 할 수 있어요."
"다행이네요. 나는 메어리 앤 입스위치, 영국인 여행자예요. 당신들은?"
"저는 카기모리 아리스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왔어요."
"저는 메리나, 메리나 아말리아라고 합니다. 이 섬에 살고 있어요."
"메리나 아말리아...팔라니아스가 아니라 아말리아?"
"저를 아시나요?!"
메리나가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만들어낸 공백에, 어깨 위 칼자루에 손을 댄 아리스가 끼어들었다. 안나마리는 갑작스럽게 긴장하는 두 소녀의 반응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섬에는 팔라니아스 일족밖에 살고 있지 않다고 들어서 물어본 것뿐인데요."
"아, 네. 그럼..."
"당신이 이 섬의 비보...'뇌정'과 관련이 있다는 건 지금 알았구요."
챙!
아리스가 칼을 뽑았다. 그나마 그대로 찔러 들어가지 않은 건, 팔짱을 끼고 이쪽을 보는 안나마리의 태도에서 적의나 투지, 욕망, 지금까지 그녀들을 쫓아다니던 나치스가 보였던 그 어떤 구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신 누구예요?"
"나는 나치스의 적. 아넨에르베의 행사를 방해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입니다."
엄마, 그 대사 민망해서 하기 싫대며?
안나마리의 발치에 털푸덕 주저앉아 느긋하게 귀 뒤를 탈탈 털던 라임이 초콜릿 같은 눈으로 빤히 올려다보았다. 안나마리는 피식 웃었다. 보송보송한 크림색 정수리를 어루만져 주려다가, 괜히 아리스를 자극할까봐 그만뒀다. 요녀석아, 어른이 되면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늘어나는 법이야.
"나치스의 적?"
"다시 한 번 자기 소개를 하지요. 내 이름은 안나마리, 코드네임은 T. MI6 소속의 정보부원이예요."
"MI6?"
"영국 정보국 비밀정보부. 국왕 폐하의 공복이라오."
"?!!!!"
"꺄앗!!"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린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메리나가 비명을 지르며 아리스에게 매달렸다. 철컥- 안나마리가 재빨리 권총을 꺼내 겨누는 것만큼이나 아리스의 반응 역시 빨랐지만, 메리나가 매달리는 바람에 휘청거리느라 상대를 겨눈 것은 한 순간 지난 뒤의 일이었다.
"숙녀들을 놀래키다니 실례예요."
"오오, 이런. 무례를 사과하겠소."
차가운 총구와 번뜩이는 칼날이 미간과 목덜미를 겨누고 있는데도, 남자는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여유롭게 웃으며, 한쪽 손끝을 실크햇 챙에 대고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다. 나이는 40대 초반? 희고 빳빳한 드레스 셔츠와 녹색 체크무늬 크러뱃, 검은 모닝코트 위에 풍성한 인버네스를 두르고, 흰 가죽 장갑을 끼고 짧은 단장을 들었다. 잘 닦인 구두에는 흙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았다. 에게 해의 낙도보다는 곧 무도회가 시작될 대저택 로비에 어울릴 법한 영국 신사였고, 누구도 그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지어 라임마저도.
우와, 엄마, 굉장해! 저 아저씨, 쉭! 하더니 슝! 하고 나타났어! 굉장해!! 뭐야, 저거? 마법이야? 마법이다, 그치?!
"누구시죠?"
"아, 숙녀분들께서 조금만 경계를 늦춰주신다면 내 소개를 하고 싶소만."
"누구시죠?"
안나마리는 조금도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남자의 말을 튕겨냈다. 그 시간과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느긋함이 그녀의 신경을 거슬렀다.
"흠, 내 안주머니에 명함이 있소만, 꺼내도 좋겠소?"
"라임."
멍! 라임이 대답처럼 짧게 짖으며 벌떡 일어났다. 상당한 장신인 남자의 가슴께까지 단박에 뛰어올라, 앞발로 가슴을 가볍게 박차며 안주머니에 코를 들이냈다. 그때 남자의 인버네스가 바람도 불지 않는데 펄럭이며 라임의 머리를 슬쩍 휘감았다. 끼잉- 라임이 코를 울리며 뛰어올랐을 때처럼 훌쩍 뛰어내렸다. 두툼한 크림색 주둥이에는 아무 것도 물려 있지 않았다.
우와, 엄마, 진짜 굉장해! 저 할아버지 굉장히 많아! 굉장히 넓어! 라임 어지러워~
라임이 귀를 팔랑팔랑 흔들며 비틀거렸다. 안나마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런 라임에게서 시선을 들어올렸다. 남자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안나마리는 권총을 거두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곁눈질한 아리스 역시 남자의 목덜미를 겨누던 칼을 거두었지만, 칼집으로 되돌리지는 않았다. 안나마리는 권총을 치맛자락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진 홀스터에 집어넣고, 크로스백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초면에 무례를 저질렀군요. 라임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흠, 예의를 아는 숙녀시군. 무례를 용서하겠소."
남자는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고 온화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가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꺼낸 명함을 안나마리의 것과 교환했다. 그가 받은 명함에는 '다이스&선 국제무역회사 해외사업부 메어리 앤 입스위치'라고 적혀 있었고, 안나마리가 받은 명함에는,
"옥스퍼드 대학 역사지리학 교수...DD?"
"직함이나 존칭은 붙이지 않아도 좋소. 편하게 DD라고 부르시구려."
"알겠습니다. 그러면 DD, 이 섬에 무슨 목적으로 오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흠..."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무례함을 포장하고 단호함으로 리본을 두른 듯한 안나마리의 태도에 DD는 화가 나기보다는 웃음이 스며나왔다. 그 태도에서 그를 여기로 보낸 누군가와 런던 근교 그의 자택 연구실에서, 방금 전, 나눈 대화가 생각난 탓이었다.
"DD, 내게 자네에게 나를 도울 기회를 선사하는 자비를 베풀도록 해 주겠나?"
"제대로 된 퀸즈 잉글리쉬로 말할 생각이 아니라면 당장 내 공간에서 나가게."
"나 좀 도와주게, DD. 자네밖에 믿을 사람이 없네."
"또 무슨 사고를 친 건가, 알리스터."
"사고라니 무례하군."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공간을 찢고 멋대로 들어온 자네가 더 무례하다고 생각되네만."
"흠흠...트리토니스 섬을 알고 있나?"
"그리스의 지명 같군."
"에게 해의 작은 섬이네. 거기에 '뇌정'이라는 아티팩트가 있어. 제우스의 벼락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고대의 유물이네."
"그런 것이 지금까지 잘도 숨겨져 있었군."
"딱히 잘 숨겨두었던 것도 아니야. 덕분에 베를린의 콧수염 하사가 알아버렸지."
"그런 일인가."
"그런 일이네. 나는 마도대전을 대비하느라 도저히 몸을 뺄 수 없으니 자네가 가주겠나?"
"싫다고 해봤자 소용 없을 것 같군."
"어설픈 마법사를 보냈다간 '뇌정'에 먹혀버릴 거야. 나나 자네 수준의 천재가 아니면 곤란하네."
"대체 얼마나 위험한 일이길래 그리 치켜세우는 겐가?"
"매우 위험한 일이지. 내가 말 안했던가?" "일언반구도."
"그럼 스바스티카[卍]의 도당徒黨 중 '뇌명雷鳴의 기사騎士'라고 불리는 마술사관魔術士官이 관련되었다는 말도 안했나?"
"금시초문인데."
"저런, 그럼 설마 내가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 지금 당장 자네 발밑에 트리토니다스 섬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틈새를 열어주겠다는 말도 안했다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친애하는 알리스터 크롤리, 내가 지금 바로 그 말을 하려던 참이네."
"허허허, 이 친구 참..."
"허허허...알리스터?"
"왜 그러나, DD?"
"돌아오면 보세."
"자네가 무사히 돌아오면, 말이지?"
"DD?"
악담에도 정도가 있다네, 친구. 무사히 돌아오면, 말이지? 이를 말인가. 내 무사히 돌아가겠네. 이번에야말로 그 뻔뻔한 면상, 실례, 불굴의 마이페이스에 에인션트 드래곤을 끼얹어 줄 테니 목 씻고 기다리라고...
"DD? 듣고 계신가요?"
"...아, 실례.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그답지 않게 적나라한 예언의 말을 늘어놓던 DD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안나마리는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 보았다. 어이가 없다 못해 언짢은 기색이 역력하다.
"이 섬에 무슨 목적으로 오셨는지 물었습니다."
"흠..."
대답하기 전, DD는 시선을 안나마리에게서 돌렸다. DD가 나타난 이래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아리스는 줄곧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 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등뒤에는 팔라니아스의 딸이 숨듯이 기대 있었다. 메리나의 몸에 희미하게 감도는 번개의 아우라. DD는 바로 그 소녀가 그를 여기에 오게 한 '뇌정'에 깊이 관련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순수하게 신뢰하고 있는 아리스의 올곧은 시선을 지나, 다시금 바라본 안나마리는, 뭐, 초면에 터놓기에는 너무 구운 스톤케이크처럼 딱딱해 보이지만, 그래도 국가 공복이다. 저 C가 자랑하는 '바벨의 혀'가 아닌가. 믿을 수밖에 없겠지.
"'뇌정'을 지키기 위해서 왔소."
"아!"
메리나가 낮은 비명을 지르며 아리스의 등뒤에 완전히 몸을 숨겼다. 아리스는 깜짝 놀라 DD를 보았고, 안나마리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안나마리?!"
"그렇다면 저와 DD의 목적은 같다고 할 수 있겠군요. 동행과 협력을 요청드려도 될까요?"
"숙녀분들께서 허락해주신다면, 기꺼이."
"...라고 하시는군요, 아리스, 메리나."
"아..."
낯선 서양인들이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주고 받는 함의에 젖은 대화와 등뒤에 바싹 붙은 연약하고 따스한 소녀가 아리스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내 계부는 독일인이에요. 어머니를 속이고 가문의 비보를 훔쳐 달아났습니다. 당신들이 아넨에르베라고 부르는 조직에 속해 있다더군요. 그를 쫓는 중에 메리나를 만났어요. 나치스에게 쫓기는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빼앗긴 '뇌정'을 되찾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어요."
"'뇌정'을 빼앗겼다고?"
DD와 안나마리가 동시에 말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경악의 비명은 아니었고, 그럴 줄 알았다는 탄식에 가까웠다. 아리스와 메리나는 물론, 당사자들마저 그런 서로의 반응에 놀란 듯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어쩌면 바다와 대륙과 바다를 건너 영국에서 C와 알리스터 크롤리는 동시에 재채기를 하거나 간지러운 귀를 후비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네..."
줄곧 아리스의 등뒤에 숨어 있던 메리나가 이윽고 결심한 듯 앞으로 나섰다. 아리스의 왼손을 쥔 그녀의 오른손은 아직도 달달 떨리고 있었지만, 메리나는 아침바다처럼 선명한 청록색 눈으로 DD와 안나마리, 아리스를 차례로 돌아보며 말했다.
"저는 메리나 아말리아 팔라니아스, 아말리아의 딸은 대대로 팔라스 아테나의 환생으로 여겨지며, '뇌정'을 다스릴 수 있는 펜던트를 물려받습니다.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 펜던트는 제게 계승되었어요. 하지만 그걸 그 남자...그 무서운 나치스의 장교에게 빼앗겼습니다..."
"나치스의 장교라면, 보르츠만 대령을 말하는 것이오?"
"보르츠만!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알고 계신가요, DD?"
"흠...'뇌명의 기사'라고 불리는 곤란한 적이라고 들었소."
"그 남자가...'뇌정'을 조종하기 위해 신전으로 향했어요. 저는 섬 바깥까지 도망쳤다가, 아리스의 도움으로 겨우 되돌아 왔습니다만..."
"우린 지금 당장 신전으로 가야 해요."
메리나의 떨리는 목소리를 받쳐주듯 아리스가 힘주어 말했다. 안나마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줄곧 그녀의 발치에서 뒹굴던 라임이 무슨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방향을 향해 발랄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기다려, 라임! 네가 달리면 우리가 따라갈 수 없어!"
하지만 엄마, 빨리 안 가면 늦어. 벌써 눈 떴단 말야. 라임 놀고 싶어! 같이 놀고 싶어! 나치스 꽉 물어주고 싶어!
"서둘지 마, 이 녀석아."
"안나마리, 라임이 가는 방향은...저 애 지금 신전으로 가는 건가요?"
"그래요. 서둘자고 하네요. 벌써 '눈을 떴다'고."
"아..."
메리나가 입술을 깨물고 아리스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좌중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부탁드립니다! '뇌정'을 되찾게 저를 도와주세요! 제 힘으로는 나치스를 물리칠 수 없어요! 부디 도와주세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숙인 메리나의 머리 위로 안나마리의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지나갔다.
"시간낭비는 좋지 않소, 아가씨."
웃음을 머금은 DD의 목소리도 지나갔다.
"메리나? 시간 없다잖아요. 빨리 와요."
처음 만난 사흘 전부터 지금까지 들은 것 중 가장 발랄한 아리스의 목소리가 메리나의 손목을 잡아 채고 힘차게 끌어당겼다. 메리나는 고개를 들고, 이미 라임이 달려간 방향으로 재게 걸음을 옮기는 안나마리와 DD의 뒷모습을 보았다. 저만치 앞에서 라임이 짖는 소리가 들렸다.
"와, 라임이 뭐라고 말하는지 나도 알 것 같아."
"아리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느라 낭비할 시간 같은 거 우리한테 없다고 그러는 거, 메리나한테는 안 들려요?"
아리스가 방긋 웃었다. 그 이국의 꽃 같은 얼굴이 어찌나 아름답고 따스하던지, 메리나는 그만 왈칵 솟구치는 눈물을 황급히 손등으로 닦았다. 그래, 낭비할 시간 같은 건 없어. 머뭇거릴 시간도, 눈물을 흘릴 시간도. 빼앗긴 것을 되찾고 침략자들에게 천벌을 내리기에도 시간은 모자랄 테니까.
***
-어머나, 그것 참 감동적인 파티의 결성이구나. 그래서?
"그래서요?"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어떻게 되긴요. 열심히 산을 올라가서, 올라가면서 만난 족족 나치스 부대를 박살 내고, 산꼭대기에 난 동굴을 들어가서, 올라간 만큼 내려가서, 박살 낸 만큼 또 박살 내고, 보르츠만 대령을 만나서, '뇌명의 기사'인지 뭔지, 깨끗하게 베고 쏘고 치고 깨물고 할퀴고 해치웠죠."
-어머, 얘!
"'뇌정'이 한 번 폭주하긴 했지만 뭐 메리나가 무녀답게 잘 제어했구요, 앞으로 천년 아니면 백년 아니면 십년 정도는 조용할 거구요, C가 사람을 보냈으니 나치스도 또다시 '뇌정'을 차지하니 어쩌니 앞발을 내밀지 못할 거구요."
-안나마리.
"아리스는 도둑 맞은 가문의 비보를 찾아서 다시 여행을 떠났구요, DD는 나타났을 때처럼 쉭하고 슝하니 사라지려고 했지만 제가, 아니 라임이 잡아서, 일단 보고서 쓰는 건 도와준다고 했구요. 저는 보시다시피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이랑 말린 무화과랑 황금양털이랑 바리바리 싸들고 선생님 문병 왔구요. 다 잘 끝났으니 해피엔딩, 해피엔딩."
요양원의 양지바른 정원. 바퀴의자에 앉은 헬렌의 발치에 앉아 그녀의 무릎을 덮은 양털 무릎덮개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안나마리가 참으로 무성의한 말투로 그녀의 이번 임무를 세 줄 다섯 줄 요약하는 동안, 다른쪽 발치에 엎드려 그새 눈도장을 찍고 귀여움을 받는 간호사가 준 뼈다귀를 아작아작 씹고 있던 라임이 불쑥 끼어들었다.
엄마 부끄러워서 그래, 선생님.
"라임!"
-부끄럽다니, 뭐가?
엄마 이번에 죽었잖아. 그것도 네 번이나. 부끄러워서 그래. 또 죽었다고.
-...안나마리.
"네 번 아니야. 세 번이야. 너는 개가 되어서 셋넷도 못 세니?"
나 셋넷 셀 수 있어, 엄마! 하루에 밥은 세 번, 간식은 네 번. 엄마 이번에 나 간식 먹는 만큼 죽었잖아.
"라임, 너..."
-메어리 앤 입스위치.
"저 안 부끄러워요."
안나마리는 헬렌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자의로 움직일 수 없는 헬렌은 그녀의 얼굴을 들어 표정을 보는 것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안나마리는 거기 있었다. 그녀에게 닿은 채, 체온을 나눈 채, 나즉하게 말을 이으며.
"죽은 거, 안 부끄러워요. 이렇게 다시 살아났잖아요. 다시 살아서 선생님 만나러 왔잖아요. 그러니까 죽은 거 안 부끄러워요."
-안나마리, 얘야...
"부끄러운 건, 선생님이 걱정하시니까 그래요. 저도 이제 스물네 살인데, 언제까지나 갓 요원이 된 열여덞 살 신참처럼, 이번에 죽으면 못 돌아올 것처럼 걱정하시니까, 선생님 걱정하시게 한 제가 부끄러워요. 그러니까 별로 자랑스러운 이야기 아니에요. 자세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안나마리...
라임이 할게! 라임이 할 수 있어!
아직 한참 남은 굵은 뼈다귀를 퉤- 뱉은 라임이 벌떡 일어나더니 헬렌의 무릎 위로 벌떡 뛰어올랐다. 넓적하고 푹신한 앞발로 안나마리의 머리를 토닥토닥하더니 분홍색 혀를 내밀어 헬렌의 뺨을 핥았다.
"라임..."
라임 잘 하지! 라임 토닥토닥 할짝할짝 부비부비 다 할 수 있어! 응, 할 수 있어!
큼직한 스파니엘 잡종개는 헬렌의 품에 가득 차고 넘칠 정도로 기럭지가 쭉쭉했다. 사람보다도 따뜻하고 복실한 개의 온기가 헬렌의 품에 넘치고 안나마리에게로 전해졌다. 헬렌이 말없이 웃고, 안나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려가라, 라임."
하지만 엄마, 엄마는 겁쟁이라서 못한다며? 라임이 대신 해줄 수 있는데?
"엄마 겁쟁이 아냐. 네발짐승이 대신 안 해줘도 엄마가 할 수 있어."
라임이 투덜거리며 내려선 헬렌의 무릎 위로, 안나마리가 몸을 기울였다. 흐트러진 무릎덮개를 바로한 그녀는 다정하게 헬렌의 목을 감싸 안고 뺨을 부볐다.
"죄송해요, 아직 서툴러서, 걱정하시게 해서, 감사해요. 늘, 지켜 보고, 기다려 주셔서."
-...안나마리.
"감사해요, 선생님."
헬렌은 안나마리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틀림없이 그랬다. 안나마리는 확신했다. 라임도 안아줘, 선생님, 라임도! 옆에서 겅중겅중 뛰는 잔망스러운 네발짐승이 없었어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번에도 죽었고, 다시 살아났고, 돌아와야할 곳으로 돌아와, 기다리는 사람의 품에 안겨, 체온과 애정을 나누고, 그리고 다시금 죽을 곳을 향해 가게 되리란 사실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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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거 한 편 쓰는데 왜 두 달이나 걸렸냐면, 0화는 리플레이 기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리플레이 북을 마스터에게서 빌렸지만, 캐릭터도 다르고 플레이 내용도 달라요! (심지어 안나마리는 신드롬조차 달랐 OTL)
덕분에 오프닝 페이즈 쓰는데 한 달 걸리고, 그 뒤로는 완전히 포기했...흑흑, 1화부터는 서기의 메리디아나 혼(...)이 부활해서 적어둔 게 많지만, 과연 그걸로 1화를 쓸 수 있을지 벌써부터 무서...워지면 안되겠죠! 그렇죠!!
뭐, 0화는 여러모로 몸풀기 스테이지였으니까, 기록에 의의를 두고! 오늘은 여기까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