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X2/안나마리] 옛날 이야기, 하나.
1925년 6월 18일.
내 이름은 안네 마리아 폰 블라우하임이다. 나는 오늘 열한 살이 되었다. 나는 지금 엘레느 선생님의 방에서 이 일기를 쓰고 있다. 이 일기장은 엘레느 선생님이 생일을 축하한다면서 주신 것이다. 내 생일을 축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 놀랍다고 말했더니 선생님이 우셨다. 선생님은 지금 주무신다. 방금 아래층에서 시계가 12번 울렸다. 열한 번째 생일이 지났다. 뒷뜰 주목나무에 사는 게으른 올빼미가 배고프다고 울면서 날아갔다. 아래층에서 어머니의 비명 소리가 계속 들린다. 내일밤까지 발작을 계속하실 것이다. 지금까지 내 생일마다 그러셨으니까.
어머니 생각을 하면 우울해지니까 딴 이야기를 써야겠다. 이 일기장은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보는 생일 선물이다. 보들보들한 가죽 장정에 성서처럼 두툼한데 속지는 보헤미아산의 고급 종이다. 크림색이고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아 꼭 실크 같다. 펜촉이 사각사각 긁히는 감촉이 기분 좋다. 아까도 선생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지만 내일 아침에 또 말씀드려야겠다. 선물을 주신 것도 기쁘지만, 이 일기장은 선생님의 소중한 보물이었기 때문에 더 기쁘다.
일기장의 속표지에는 'To My dearest Helene, From Your uncle, Hugh'라고 정갈한 남자 글씨체로 적혀 있다. 선생님이 고향을 떠날 때 삼촌에게 받은 선물이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엘레느 생 브룩이라는 프랑스인으로 행세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영어로 헌사가 적힌 영국산 일기장을 발견했을 때 굉장히 당황하셨다. 다른 사람이 보면 안되는 물건이라면 갖고 오지 않으면 될 텐데, 소중한 사람이 진심을 담아 준 선물이기 때문에 두고 올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사람이 사람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뭔가 주고, 거기에 마음을 담고, 그 담긴 마음을 알아차리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한 마디로 '선물'이라고 하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말했더니 선생님이 우셨다. 어른이 우는 건 자주 봤지만, 선생님처럼 예쁘고 아프게 우는 사람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선생님이 영국인인 건 알지만 아무한테도 말 안하겠다고 말해버렸다. 선생님도 당황하셨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의 프랑스어는 진짜 파리지엔느처럼 완벽하기 때문에, 가지고 오신 핑크색 제라늄이 콘월에서 왔다고 말해주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라는 말까지 해버렸다. 선생님은 진짜 당황하셨다. 만약 선생님이 성호를 긋거나 거짓말 하지 말라고 화를 내거나 아버지를 부르거나 도망치셨다면 난 정말 울어버렸을 거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러는 대신 내 이름 - 세상에서 오직 선생님만 부르는 '안나마리'라는 애칭 - 을 부르며 안아주셨다. 다 큰 어른이 꼭 어린애처럼 울면서, 나더러도 울고 싶을 때는 울어도 된다고 하셨다. 나는 어린애니까 어린애처럼 울어도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난 울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일기장의 속표지 뒷장에는 'To My dearest Anna-Marie, From Your mentor, Helene'이라고 적혀 있다. 선생님은 생일 선물로 새것이 아니라 미안하지만, 선생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나한테 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기쁘게 이 일기장을 받았다. 언젠가 선생님의 생신 때 나도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기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소중한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또 우셨다. 선생님이 우실 때마다 정말 곤란하다.
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선생님이 좋았다. 선생님 이름이 엘레느든 헬렌이든 헬레나든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선생님이 사실은 영국 사람이고, 영국과 독일은 지금 다시 한 번 큰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의 대치 상황이고, 선생님은 아버지가 속한 조직과 적대하는 조직 소속인데 아버지를 감시하기 위해 우리집에 왔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다. 특히 아버지한테는 절대로 알려주지 않을 거다. 지금처럼 계속 선생님을 멍청한 프랑스 여자라고 생각하고, 그러면서도 혹시나 실수를 하지 않을까 프랑스어를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으라지. 사람들은 뱀을 사악하고 교활하다고 하지만, 사실 뱀은 순진하고 멍청한 동물이다. 풀숲의 뱀이 먹이를 먹으려면 뱀보다 더 멍청한 먹이가 눈앞을 지나가야만 한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으면 뱀은 그대로 굶어 죽는다. 그래서 나랑 선생님은 우리 둘만 있을 때는 아랍어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아랍어를 모른다. 자기가 듣지 않을 때에도 자기가 아는 말로 이야기하라고 명령하지는 못할 걸? 자기가 듣지 않을 때 우리가 무슨 말로 이야기하는지 어떻게 아는지 설명할 수 없을 거니까.
그리고 나는 이 일기를 솔로모니쉬(Solomenish)로 적고 있다. 솔로모니쉬는 내가 만든 언어다. 그래서 나만 읽고 쓰고 말할 수 있다. 선생님도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아랍어와 이탈리아어와 라틴어를 할 수 있지만, 솔로모니쉬는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겠다고, 선생님 조직의 요원들에게 해독시켜 보면 재미있겠다고 웃으셨다.
그런데 선생님이 아까 이상한 이야기를 하셨다. 어머니가 던진 접시에 맞아 찢어진 내 이마에 붕대를 감아 주시면서, 또 우시면서, 나는 절대로 저주 받은 것도 악마의 씨앗도 아니라고 하셨다. 사실 세상에는 나처럼 이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가끔 나타나는데, 그 중에는 나랑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그 사람이라면 솔로모니쉬라도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셨다. 이 세상 어딘가에 나처럼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모두 할 줄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아버지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안다면 그 사람을 잡아 와서 나처럼 실험 대상으로 쓸까?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로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면 안된다. 내일 선생님께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꼭 이야기해야겠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랑 친구가 되어 줄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나보다 나이가 많을까, 적을까?
방금 엄청나게 큰 소리가 났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다. 어머니 방쪽인데, 어머니 방에는 이제 부술 물건이 남아 있지 않다. 설마 성모님 제단을 부수신 건 아니겠지. 아, 비명소리. 아버지가 고함치는 소리. 아버지가 자제력을 잃을 정도면 오늘 어머니의 발작은 굉장히 심한가 보다. 나처럼 던지시는 물건에 얻어맞은 건 아닐까? 아버지가 다치는 건 상관없지만 어머니가 다치시면 안된다. 살짝 보러 갔다 올까?
방금 엘레느 선생님이 깨어나셨다. 나 대신 보고 오겠다고 나가셨다. 선생님을 따라 가야 하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일기를 쓰는 건 재미있다. 이렇게 내 이야기를 많이 해본 건 처음이다. 앞으로도 종종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