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끄적끄적

20080325 : 雜念

동굴곰 2008. 3. 25. 09:58

한동안 세속에 찌들어 남의 돈 공짜로 받아쳐먹는단 소리 안 들어보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살았더니 사람이 너무 피폐해졌나보다. 꿋꿋하고 유연하게 살아 남고 싶었는데, 문득 정신차려 보면 이건 왠 까칠하고 괴팍한 노파 한 마리. 좋지 않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깜짝깜짤 놀라는 건, 힘겹게 처덕처덕 쌓아 올렸던 정신수양이 세파에 씻겨 내려간 아래에서 흉물스러울 정도로 강렬하게 자기 존재를 주장하는 자존심과 자존심과 자존심. 인간 궁지에 몰리면 남는 건 비쩍 마른 몸뚱이를 지탱하는 도드라진 척추마냥 가시돋힌 자기긍정밖에 없게 된다더니 내가 그짝이구나. 스스로의 옳음에도 바름에도 넉넉함에도 자신을 갖지 못하니 남는 것은 그저 내가 받는 박해와 오해와 부정을 헤아리는 앙상한 손가락뿐이구나. 내 평생 절대로 내가 남에게 준 것을 헤아림 같이 남에게 받은 것을 헤아리지 않겠노라 그렇게나 결심했는데, 가슴 밑바닥에서 피어 오르는 불쾌함을 한 모금 뱉아내고 나면 그제야 깨닫는다. 내가 뭘 바라고 준 것도 아니면서 이만큼 주었는데 저만큼도 주지 않는구나 섭섭해 하고 있다. 이 죽일놈의 피해의식. 언제 이만큼이나 타락했누. 얼마나 바보 같고 얼마나 추한지 잘 알면서 꼽아대는 손가락을 멈출 수가 없다. 내 이래서 차라리 앞발뿐인 곰이 되자꾸나 했었거늘. 타고나길 약한 소리는 대밭에서도 조목조목 할 수 없는 팬더 같은 자존심으로, 그래도 알아서 위무해주기를 바라는 이 뻔뻔함. 차라리 모르면 모르는대로 경멸은 받지 않을 텐데, 한편에 동정과 위로를 얻은 저울 반대편에 경멸과 조롱을 얹고 멋대로 칭량해본다. 하늘님 맙소사, 이 저울에는 평행추가 없습니다그려. 받기를 포기했으면 차라리 있어 보이기나 해야할 것을, 텅빈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 줄도 모르고 없어도 괜찮노라 들고온 노적가리는 도로 들고 가거라 문전박대나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문득 가슴을 치는 거리감에 멀어지는 등을 보며 궁금해한다. 당신은 지금 내게 등을 돌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나. 치기와 미숙함과 타고나길 그러하니 내가 이해해야지 - 오만이고 기만이 아니라고 말해줄 사람 그 누구인가. 쓸데없이 예리하고 민감하고 기억력이 좋아 두터운 털가죽 한 장이라도 두르지 않으면 너무 아프고 너무 다치고 너무 슬픈 생물이었다. 오래도록 휘감고 있던 야만과 오만의 모피를 세파에 빼앗기고 난 것은 한낱 눈물을 닦는 반대편 손으로 입은 상처를 헤아리는 벌거숭이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 것을. 무엇을 나이 먹었다 무엇을 어른이라 무엇을 이만하면 되었다 할 것인가. 나는, 여전히 칭찬받고 인정받지 않으면 발밑을 두려워하면서도 칭찬과 인정과 부탁과 감사에 낯부끄러워하던 계집아이의 등뒤에 서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용서한다. 의도하지 않았으리라 믿는 만큼 아마도 모르고 있겠지만, 당신의 눈빛과 당신의 표정과 당신의 목소리와 - 그래, 당신이 무심코 두들긴 몇 글자가 나를 상처 입혔다. 나는 때로는 웃어넘기고 때로는 애써 반농담으로 받아치고 때로는 정색을 하고 길게 말을 늘여놓겠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을 용서한다. 지은 줄도 모르는 잘못을 언제 받았는지도 모르는 용서로 씻어내리는 나는, 웃지 마라. 이래뵈도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생물이다. 아프다는 말조차, 인정하는 순간 정말로 아파버릴 것 같아 그저 피묻은 댓잎 몇장에 끄적여 수십 년 묵은 대숲에 켜켜이 쌓여 썩어가는 거름더미에 더할 뿐인, 눈을 감으면 마치 다른 세상인 것처럼 스스로를 속여 왔으나 이제는 몇 번이고 꺾고 또 꺾은 끝에, 몇 번을 거쳐가는지도 모를 모퉁이 앞에서 다시금 어디로 꺾어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하고 있는 아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당신을 용서하고, 당신이 내게 준 상처를 핥으며 당신에게 조용히 등을 돌린다. 내가 당신을 놓아버렸다는 게 당신을 슬프게 하거나 화나게 하거나 웃길지도 모른다. 내게서 듣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깨닫지 말아라. 지금 당신에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고 있는 나는, 사실은 당신을 오래 전에 죽여 버렸다. 당신들은 내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나와 함께 살았고, 아직도 살고 있고, 혹은 떠나갔고, 혹은 내 손에 죽고, 혹은 나를 죽였다. 당신의 빈 자리가 아무리 아파도 나는 당신을 보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당신이 내게 준 상처를 용서한 것처럼 당신을 죽여버리는 나를 용서했다. 내 울타리 안은 예전보다 많이 넓어졌고 때로는 북적대고 때로는 을씨년스럽다. 그래도 아직 나는 모퉁이 앞에서 어디로 꺾어질지 고민하며 발치를 내려다 본다. 이것이 내 발인지 내 뒷발인지 내게도 우체부가 프리지아 꽃향기를 전해주는 것 같은 사랑이 찾아올지 서재가 있는 집에서 살 수 있을지 우리 아이들은 나와 오래도록 살아줄지 이 다음에 내 공허를 메꾸어줄 커피를 누구와 마시게 될지 오늘 월급은 몇시쯤 나올지 새 안경은 어디서 맞추면 좋을지 고민한다. 이리하여 나는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이와 같이 앞의 명제를 처음 조건에 따라 증명하였다. Q.E.D.